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되물었다. 당연히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고, 단지 의도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말 그대로야. 밸런스 게임,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지휘관이 그녀의 질문에 친절히 답해주었다. 악의 하나 없다는 듯 은은한 미소가 유독 눈에 띄었다. 대체로 저런 미소를 그릴 땐 수상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물론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비교적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존재, 전부는 아니어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눈썹이 약간 좁혀졌다.
“좋아, 다 좋은데……너무 뜬금없는 거 아니야?”
허나 딱히 어울려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택한 것은 약간의 긍정, 그녀가 지휘관에게 반문했다.
“걱정하지 마, 네가 뭘 결정하든 일절 누설하지 않을 거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을게, 대신 대답 못하면 소원 하나 들어주기.”
“그러면 너무 이쪽이 불리한 거 아니야? 반대로 내가 전부 답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있는 건가?”
“당연히 있지, 전부 대답하는 데 성공하면 반대로 내가 네 소원 하나 들어줄게.”
“호오, 내가 무슨 소원을 제시할 줄 알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쓰게 웃었다. 이전보다 훨씬 고양된 목소리로 보아 적잖게 구미가 당긴 모양이었다. 표정 역시 이를 뒷받침했다.
“대신 질문은 쉽지 않을 거야. 최대한 답변하기 곤란한 것만 고르고 골랐거든.”
“큭큭, 그래, 뭐든 좋아, 대신 정말 뭐든 들어주는 거다. 그렇지?”
지휘관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여러모로 자신 있다는 뜻이었다.
“질문은 총 세 개, 전부 답변하면 네가 이기는 거고, 하나라도 못 하면 내가 이기는 거야.”
“각설하고, 빠르게 시작하지, 준비는 됐어.”
자신만만한 모습에 지휘관이 한 번 더 웃었다.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웃음을 그려 보였다.
곤란한 질문이라 한들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보상, 그러니까 ‘소원 하나 들어주기’라는 달콤한 대가에 눈이 멀어 있었으니까.
“하루 동안 노브라로 다니기, vs 하루 동안 노팬티로 다니기.”
“……뭐?”
때문에 그녀가 당황의 감정을 목소리의 형태로 나타내는 것은 필연이었다.
멀뚱멀뚱,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정확히는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질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지휘관을 바라보기만 지속했다. 딱히 바뀌는 건 없었다.
분명 아까와 같은 웃음이었지만, 다르게 느껴졌다. 조금 전에는 그저 자신의 기분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상대방을 희롱하기 위한 용도처럼, 물론 그녀의 개인적 감상이었다.
“하루 동안 노브라로 다니기, vs 하루 동안 노팬티로 다니기.”
“자, 자, 잠깐!”
당황해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친절한 지휘관이 한 번 더 설명해 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더 큰 당황,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언성이 높아졌다.
“여성에게 못 하는 말이 없어! 지금 이건 명백한 성희롱이야!”
“곤란한 질문이라 말했잖아, 대답하기 싫으면 말아도 돼, 대신 벌칙은 받아야겠지만.”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는 사전에 전부 설명했는 걸, 곤란한 질문이 나올 거라고.”
큭큭, 지휘관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녀로선 온갖 음담패설보다 더한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
그녀가 지휘관의 언질에 미리 각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시작부터 이렇게나 강한 질문을 던질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까닭이다. 특히나 그의 입에서 저런 상스러운 말이 나온 일은 특히 적었으니.
“아무래도 실망이야, 지휘관이 이런 저급한 말을 입에 담을 줄은 몰랐는데.”
“논점 돌리지 말고, 대답부터 해, 매도는 다 끝난 뒤에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까.”
‘뭐, 대답하기 싫으면 말고.’ 짧게 덧붙인 한마디가 그녀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저렇게나 뻔뻔스레 나오니, 되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호승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차라리 이긴 머저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루 동안 브래지어 없이 지내기 vs 팬티 없이 지내기.
우선 브래지어가 없을 때부터 가정한다. 요즘 들어 모항에 유독 가슴이 거대한 인원이 늘어났다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녀 역시 큰 편에 속했다.
때문에 브래지어가 없다면 불편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닐 것은 자명한 사실, 직접 경험해보았기에 알고 있던 사실이다.
물론 팬티가 없을 경우도 경험해 보았다. 지난번 연회복, 일부로 팬티를 벗은 채 투명한 의자에 앉아 내심 유혹할 땐 모르는 척하더니 이번엔 왜 또 이런 질문을 던지는가.
갑자기 이어진 무의식적 사고에 그녀가 미미한 분노를 느꼈다. 물론 사고는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
고민, 고뇌, 장고, 반복하고, 거듭한다. 마침내 그나마 더 나은 답을 찾은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하루 동안 팬티 없이 다니기……가 그나마 더 나을 거 같네.”
끝에 나온 결론, 여러 색의 수치심이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감정을 물들이고, 얼굴은 붉게 물든다. 고개도 약간 숙이고 있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노팬티를 선호한다. 메……모.”
“지휘관!”
빼액, 메모하는 시늉을 하던 지휘관에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온다. 하, 하, 웃음으로 무마했다.
“사실 반쯤 예상했는데, 본인 입으로 듣는 건 또 색다르네.”
“…….”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 판단한 그녀는 침묵을 택했다. 물론 경멸하는 눈빛은 잊지 않았다. 지휘관의 기분이 약간 좋아졌다.
“좋아, 그럼 템포를 이어서 다음 질문.”
툭툭,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저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절로 긴장하고 있었다. 꿀꺽, 마른침도 삼켰다.
“평생 홍차 금지, vs 평생 샤워 금지.”
“하아…….”
당연하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한숨, 끔찍히도 난해했다. 홍차와 샤워, 영국 여성인 그녀에게 있어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였으니까.
물론 이전보다 훨씬 나은 질문이라는 건 확실했다. 적어도 성적 수치심을 주진 않았으니까. 때문에 지휘관과의 가벼운 입씨름 없이 빠르게 생각에 들어섰다.
“……평생 홍차 금지.”
“오, 빨리 나왔네.”
그의 말대로 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홍차는 완벽하진 않아도 흉내라도 낼 수 있는 대체품이 있으나, 샤워는 아예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질려버린 나머지 이런 질문에 머리를 쓰는 게 손해라 생각한 탓이다. 눈도 반쯤 풀려있었다.
“……빠르게 가지, 더 들으면 정말 뇌가 녹아버릴 거 같아.”
꾹꾹,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자기 이마를 누르며 말했다. 더는 못 해 먹겠다는 듯 잔뜩 찡그린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지휘관 역시 다시금 고민에 들어섰다. 마지막 질문인 만큼, 화려하게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함이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부담도 커졌다. 이번엔 과연 어떤 질문이 나올까.
그리고 마침내 지휘관의 입술이 움직이고, 그것을 관측한 그녀의 시간이 찰나로 쪼개져 흐른다. 긴장, 경직, 부담, 또 불안, 몇 단어가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고, 눈을 감았다.
“주말에 나랑 같이 어디 여행 가기, vs 아무 일 없이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기.”
“……뭐?”
순식간에 닫은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이는 비단 질문에 대한 놀람이 아니었다. 늘 먼저 다가가도 모르는 척 넘어간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온 건 모항에 온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커진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반복했다.
그 정적의 연쇄를 깨트린 건 하아, 마찬가지로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한숨, 물론 일전에 토해낸 한숨과는 궤를 달리했다.
“그냥 처음부터 그 질문을 던질 생각은 안 해본 거야?”
답답한 듯 그녀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만감이 교차한 행동이었다. 어지간히 어이가 없었는지 입술도 부자연스럽게 휘어 있었다.
“왜, 재밌잖아.”
물론 그에 대한 대답은 참 간편하고도 뻔뻔하기 짝이 없어, 그녀로 하여금 답답함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당장 이번 주 맞지? 잔뜩 놀렸으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기대할게, 여러모로.”
후아, 억눌림에서 해방된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내뱉고, 지휘관은 콧노래를 부른다. 데이트 약속을 받아낸 게 여간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아, 질문에 전부 답했으니 소원 하나 들어줄 게,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비슷한 맥락으로, 경쾌한 목소리,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가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게 물었다.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마주하며,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찰나의 침묵, 미소가 나왔다.
“있었는데……이제 필요 없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