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레 그렇듯, 사건이란 대체로 아무런 전조 없이 찾아온다. 일말의 여지없이 찾아오는 사건을 대비하기 위해, 우리는 늘 행동에 신중하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건을 마주하고 난 뒤에는 이미 늦은 경우가 대다수인 까닭이다. 상황에 따른 대응 역시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러한 상황을 일어나지 않게 예방하는 것이다.

“지휘관, 뭐 해? 가만히 있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아.”

지금의 사내가 딱 그러했다.




***



시간을 약간 거슬러, 지휘관과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잠시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나누던 때로 돌아간다. 둘 다 웃고 있었다. 그녀는 사내가 늘어놓는 실없는 소리에, 사내는 그 실없는 소리에 반응해 주는 그녀 덕에.

지극히 평화로운 광경, 허나 앞서 말했듯, 본디 사건이란 대체로 아무런 전조 없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아, 그러고 보니 웨일즈는 신 거 잘 먹어?”

“음… 못 먹는 편은 아니다만, 굳이 찾아서 먹는 편은 아니지.”

“그럼 레몬 누가 더 많이 먹나 내기할래?”


“…?”


전조없이 튀어나오는 소리에 웨일즈가 머릿속에 물음표를 그렸다. 정말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튀어나오는 헛소리, 아주 잠깐이지만 웨일즈는 호흡을 잊었다.

그녀가 눈을 마주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어째 밤하늘을 보는 것만큼 맑았지만, 대체 그러한 눈빛으로 왜 저딴 소리를 내뱉는 걸까. 어이가 없었다.


“...지휘관은 종합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유능하고, 우수해.”

“오, 갑자기 칭찬이야? 고마워.’’

“이런 식으로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헛소리만 제하면 말이야.”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 물론 지휘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하아, 웨일즈의 옅은 한숨이 방을 메웠다.

“자, 생각해 보자 지휘관, 그러한 행동을 해서 얻는 이득이 뭐지?”

“음…상대방이 신 걸 억지로 먹어가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감정? 희열이라던가.”


“…. 지금 그 말 너무 변태 같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응. 없어, 난 언제나 신사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으니까.”

“방금 전 그런 말을 해놓고?”

“당연하지. 재밌잖아?”

괴악하다고 느껴질 답변에 웨일즈의 미간이 크게 좁혀졌다. 언짢음을 나타내는 신호, 물론 지휘관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말 신사다운 자세야. 응, 칭찬해 줄게.”

“오, 칭찬 고마워.”

“비꼬는 거야.”

“무시하는 거야.”


“….”


사내가 당당하게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이미 페이스에 말려들게 된 웨일즈는 잠시 눈을 감고 미간 사이를 주물렀다. 평소에는 멀쩡…아니 평소에도 가끔 이러기는 하는데 하여튼.

종종 이상한 곳에서 발동이 걸리는 게 문제다. 당장 이틀 전에도 무슨 드라이아이스로 폭탄을 만들겠답시고 시도했다가 주방을 개판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그리고 벨파스트한테 걸려서 1시간 동안 무릎 꿇고 앉아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고작 1시간 설교로는 천성을 바꿀 수 없는 걸까. 아니면 그냥 평소에 뇌를 빼고 사는 걸까, 웨일즈가 생각했다.

“지휘관은 그럴지 몰라도, 나는 남이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성정은 아니라서 말이야. 내가 당신과 그런 내기를 한다고 한들 얻는 게 없잖아?”

“아니지, 내기잖아, 네가 이긴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줄게, 정말로.”

“그런다 한들 불합리 한 건 변하지 않아, 당신은 내기를 하는 과정에서도 즐길 수 있지만, 나는 아니야. 반대로 지는 경우도 생각해야하고.”

“읏….”

잠깐의 사고를 거쳐서 정립된 주장은 지극히 합당하고 이치에 걸맞았다. 그녀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움찔, 지휘관 역시 약간이지만 망설였다.

허나 그것도 잠시일 뿐, 지휘관은 이 미련한 내기에 웨일즈를 끌어들일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입가에 드리운 회심의 미소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럼! 그럼 이건 어떤데!”

말하며, 지휘관은 지휘관실 한쪽에 마련된 주방으로 가 이리저리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영문 모를 행동에 잠시 의문을 표한 웨일즈였으나, 곧 그의 손에서 나타난 물건을 보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건…….”

“맞아. 찻잎이지, 그것도 아주 품질이 뛰어난.”

일전에 구매한 뒤 잠시 존재를 잊어버린 물건이었다. 서늘한 공간에 보관한다는 방식을 지켜 지금까지도 품질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핵심, 로열 네이비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상등품이었다.

“어때, 지금 당장 나와 이 미련한 내기를 참여해 준다면, 이 물건을 대가 없이 넘길게.”


“…….”

마찬가지로 잠깐의 침묵, 웨일즈는 또 다시 생각의 틈새로 몸을 던졌다.

당연하지만, 몹시 탐나는 물건이었다. 보관하는 통만 봐도 고급스러운 물건, 기본적으로 차에 대한 욕망이 강한 로열 네이비로서는 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허나 반대로 저런 물건까지 사용해서 이 멍청한 내기에 휘말리게 하려는 이유는 뭘까. 그것이 웨일즈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되려 망설이게 만든 것이다.

툭, 툭, 그녀가 눈을 감은 채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린다. 생각이 깊어졌다는 뜻이었다. 지휘관은 인내심 있게 기다릴 수 있었다.

“정말로……참여하기만 하면 아무런 대가 없이 그걸 넘긴다는 건가?”

“내가 없이 산 적은 있어도 하늘에 우러러 부끄럽게 산 적은 없다. 약속하지.”

결연한 눈빛, 대개 전장에 설 때의 눈빛이었다. 지금 웨일즈 앞의 그가 지극히 멍청한 소리를 하는 건 맞았지만, 적어도 거짓을 고하는 자의 자세는 아니었다.

그렇게 하나, 둘, 셋, 또 한 번 침묵이 흐르면.

“그래. 할 게, 하면 되잖아…….”

“야호~”

결국 욕망에 패배한 그녀였다. 스스로도 약간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질 좋은 찻잎을 얻었다는 것으로 합리화하면 그다지 큰일은 아니었다.

이어 고개를 들고, 웨일즈는 마주한다. 레몬은 총 7개, 넉넉하다 못해 많았다.

“간단해. 이 레몬을 더 많이 먹는 쪽이 이기는 거야.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이 원하는 거 하나 들어주기.”

“정확히 어떤 식으로 먹는 건데?”

“동시에 먹으면 괜한 경쟁심 때문에 탈 날 수도 있으니까. 한쪽이 먼저 먹은 다음 반대쪽이 먹는 거로 하자.”

보다 진중한 눈빛,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헛소리가 맞았으나, 표정과 몸짓은 더없이 진지했다. 지금의 그가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인지 한눈에 알 수 있는 좋은 표본이었다.

“그래… 그래도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누가 먼저 할 건데.”

“레이디 퍼스트?”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좀 색다르네.”

“어허, 내가 비록 종종 멍청하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내뱉긴 하지만, 너희들을 위해 사시사철 불철주야 여러모로 노력한다는 것을 잊지 말렴.”

답지 않은 정론, 웨일즈가 애꿎은 찻잔을 매만졌다. 그녀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빨리 끝내는 게 낫겠네, 그래. 먼저 할게.”

약간이지만 기분이 나아진 웨일즈가 결국 먼저 레몬을 집어 들었다. 빛깔부터가 썩 괜찮은 것이 양도받은 찻잎처럼 상등품으로 보였다. 


그럼 요리에나 쓰지 왜 이딴 걸 생으로.

의문이 따라오는 건 필연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한두 개만 먹고 그만두면 될 일이었다. 그동안 노력해 준 지휘관을 위해 적당히 어울려준다고 생각하면 또 괜찮았다.

그렇게 접시에 담겨온 껍질-미리 깐 레몬을 한 조각 떼어내어 입 안에 넣는다. 우선 시고, 셨다. 움찔, 웨일즈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우히히… 어때? 어때?”

“셔.…”

고작 한 글자였지만, 그녀의 모든 감상을 표현할 수 있는 깔끔한 대답이었다. 지휘관이 가져온 레몬은 품질도 좋았고, 맛도 좋았다. 레몬이라는 특성상 신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솔직히 말해 더 먹고 싶지는 않았으나, 철없는 장난에 한 번 어울려 주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래도 제대로 하자는 마음에 웨일즈는 다시금 한 조각 떼어내어 입에 넣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표정이 어그러졌다.

“우윽….”

절로 나오는 소리, 지휘관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것을 지켜봤다. 눈빛이 참 불순했다.

그렇게 반복, 웨일즈는 초인과도 같은 정신력으로 레몬 한 개를 전부 먹는 데 성공했다. 짝짝짝, 전혀 반갑지 않은 박수가 울렸다.

“이야, 솔직히 놀랐어. 하나를 다 먹을 줄은 몰랐는데.”


“…이제 한계야.”

말하며, 웨일즈가 접시를 지휘관 쪽으로 밀었다. 의미는 뻔했다. 지휘관이 싱긋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짧은 정적, 웨일즈가 정신을 가다듬어 지휘관을 바라봤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녀로서도 지휘관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약간의 기대가 솟아올랐다.

표정을 찡그릴까. 아니면 의외로 멀쩡하게 잘 먹을까. 솔직히 말하면 전자이길 빌었다. 이 굴욕을 본인만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생각하는 사이, 지휘관은 어느새 레몬을 주워들었다. 꿀꺽, 시간은 찰나로 쪼개지고, 그의 입이 열리는 그 순간.

“내가 졌어.”


“...?”


“네가 이겼어, 하나를 통으로 다 먹다니, 대단해.”

느닷없이 선언한 항복에 웨일즈가 지휘관과 레몬을 번갈아 봤다. 바뀌는 건 없었다. 그게 전부였다.

“사실 나는 신 거 못 먹거든, 그래서 물어본 거야, 겸사겸사 망가지는 네 얼굴도 보고 싶었고.”


“….”


마침내 밝혀진 진실에 그녀가 굳고, 지휘관은 웃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지휘관의 손에서 놀아난 꼴이 된 것이다.

“아~ 재밌었다. 그치?”

하고, 눈치 없는 한 마디, 웨일즈의 마음에 불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겉으로 보이지 않았고, 덕분에 지휘관은 웃을 수 있었다.

아니, 잘 보니 웨일즈 역시 웃기 시작했다. 본디 무슨 감정이든 끝장에 이르면 결국 웃는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의 그녀가 그러했다.

“후후후…아하하…! 그래. 그런 거였구나.”

“다음엔 누구한테 할까? 히히, 재밌다.”

가볍게 웃으며 일어나려는 순간, 어느새 그의 지척에 서있던 웨일즈가 그의 어깨를 살포시 눌렀다. 저항할 수 없었다. 그는 인간이었으니까.


이질감에 고개를 들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때는 이미 늦었다. 


“무슨 소리야 지휘관, 이건 내기잖아? 난 아직 내 소원을 말하지 않았어.”


“...응?”

“당장 말할 게, 내 소원은 말이야….”

그리고 덜컥, 레몬이 담긴 접시를 주워 들며.

“이 레몬을 당신이 혼자 다 먹는 거야.”


“...네?”

그녀가 웃는다. 환하게, 아주 환하게, 그것도 아주 아름답게.

물론 저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극한에 치달은 분노를 웃음의 형태로 치환한 것에 불과했다. 지휘관도 느끼고 있었다.

멀뚱멀뚱, 오늘 처음으로 당황한 그가 레몬과 웨일즈를 번갈아 본다. 바뀌는 건 없었다. 이게 현실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레몬 통으로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도 지휘관의 입을 향해.

“자, 그럼….”

“아니, 아니, 잠깐만, 잠깐만!!!”

“먹어야겠지?”

처절한 비명, 그리고 그것을 틀어막는 레몬.

그날 이후, 지휘관은 레몬 공포증이 생겼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쓴 거 모음





마지막 장면은 이런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