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일섭 대책위원회 3장(최신 스토리)의 스포일러가 대거 포함되어 있음.
※ 장문임
※ 주관적 의견임
https://youtu.be/uaAPg0YqK1s?list=PLEDB555CDEF377465

"오랜 시간 베일에 싸여있던 여인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는 그녀를 감싼 것이 수의임을 깨달았다."
대책위원회 3장은 뜨거운 화두(話頭)다. 블루 아카이브에서 화두라는 것이 메인 스토리에서 자주 거론되는 것처럼, 수많은 갑론을박과 토론 또는 싸움 속에서 이번 이야기는 계속 조명받고 관심받는다. 하지만 어딘지 내 관심사는 끓는 물 속에 들어간 대홍단 감자와도 같은 문제들이 아니라, 햇빛이 비추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기울인 꽃처럼 단 하나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쿠치나시 유메. 이제는 입이 없는 것처럼 말할 수 없게 되어버린 학생이 내 마음 속에 아직도 자리잡고 있다. 감동과 함께 흉터도 함께 남긴 이야기를 감탄하기 위해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내게 있어서는 쿠치나시 유메가 바로 그 증거였다. 일섭에서 대책위원회 3장의 마지막 파트가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엔 유메가 겪은 죽음의 방식에 대한 충격과 공허감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 받았던 충격은 잔불처럼 사그라들었지만 아직도 심상은 내게 무엇인가 호소하고 싶은 듯 했다.
작중에서 호시노는 자신의 선배가 죽은 뒤로 닥치는대로 유품들을 모았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사라진 고인이 남긴 것들을 모으며 과거를 기억하려 애쓰는 것은 상실을 겪은 이들의 흔한 모습들 중 하나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언젠가 정리해야만 하는 것들이 생기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호시노가 그녀를 잃고 얻은 슬픔만큼이나 기뻤던 기억들 역시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미화되는 것들이라 할지어도 호시노에게 있어 유메는 매력적인 인간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에게서 매력을 느꼈고.
저번에는 '왜 그녀의 죽음이 이토록 괴로운지'에 대해서 논했다면, 이번에는 '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블루 아카이브는 온갖 개성들을 갖춘 다양한 학생들로 가득한 낙원일진데, 나는 어찌하여 이미 죽어버린 이에게 애정을 품는 가혹한 저주를 받고야 말았는가? 단순히 죽어 사라졌다는 사실만 가지고서 매일을 애절하게 숙고할 수는 없는 법이다.

"처음에는 자연스러웠던 모든 것들이 진중한 암시였음을 알았을 때, 나는 호시노로부터 유메라는 이름의 무게를 통감했다."
우리는 일찍이 옛 사진 속 표독한 얼굴을 한 어린 호시노 옆에 있는 의문의 여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사연있는 여자. 처음에는 그저 하나의 떡밥이었고, 이어서 그녀의 죽음이 거론되었을 때에도 아비도스의 사막을 배회하는 거대한 기계의 뱀과 결부지었을 뿐 사람들은 대부분 이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
블루 아카이브는 수많은 비밀들로 가득 차 있고, 그것을 임모탄 조가 하층민들에게 아쿠아 콜라(물)를 잠시 틀어주는 것처럼 아주 조금씩만 풀었기에, 우리들의 관심은 항상 더 자극적인 것에 몰려있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기에 에덴 조약에서 잠옷을 입은 히나가 호시노가 유메의 시신을 발견했음을 말했을 때에도, 그것이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 정도로는.
이러한 인식의 저변에는 블루 아카이브에서 죽음이란 게 당시까지는 크게 통감되지 않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암시는 꾸준히 되어왔고, 에덴 조약에서 그러한 암시가 좀 저 제대로 된 묘사들로서 제시되었지만(세이아의 죽음이나 헤일로 파괴 폭탄 등)휘몰아치는 스토리 안에서 우리는 보다 더 중요한 서사에 매달렸던 것 같다. 결국 세이아의 죽음은 거짓이었고 폭탄은 어느 누구 하나 해치지 못했으니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후 시간이 흘러 최종편의 PV가 눈에 들어왔을 때부터, 우리들은 진정한 '피폐함'에 대해서 논할 수 있게 되었다. 학생에 대한 실존적인 위험. 영구적인 상실. 총을 맞고 대포와 미사일을 맞고도 다칠지언정 죽지는 않았던 이 귀엽고도 강인한 초인들의 죽음과 절규를 보며 우리들은 블루 아카이브의 스토리가 한 차례 '반전'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프랜시스의 말처럼 최종편에서 보여주는 것들 중 일부는 학원과 청춘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었으니까.

"우리는 드디어 이 세계에서 죽음을 관측했다. 그리고 늘 죽음은 아비도스에서부터 시작하는 듯 했다."
우리들은 학생이라는 존재가 진정으로 죽을 수 있음을 알았고, 그러한 가능성의 세계가 존재했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영원한 고통과 거둬지지 않을 상실의 편린을 맛보며 모두가 전율했기에 최종편은 더더욱 그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죽음이 잠재되어 있지 않았던가. 아비도스는 가히 죽음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장소이다.
키보토스에서 죽음이 이토록 대두되는 장소가 있을까. PV의 모든 가능성들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어두운 종착지들을 가리키고 있을 때, 나는 유일하게 이미 일어나버린 사건을 보았다. 어떤 일들은 이미 과거의 사건이며, 늦은 뒤라는 것을 옛 호시노의 초췌한 얼굴로부터 알아차리고야 말았다. 단순한 문장이 아닌 그림 한 장으로 나는 이 일의 참혹함을 맛보았던 것이다.
유메의 하(육신)에서 카(영혼)가 떠나며 그녀는 결국 구해내지 못할 과거 속의 조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만날 수 없고 만질 수 없으며 교감할 수조차 없기에 더욱 간절하게 변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이야기가 더욱 진행되고, 호시노의 과거사가 더욱 조명되면서 나는 죽은 자의 행적을 보는 것이 얼마나 무기력하게만 느껴지는 일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유메와 호시노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도 같다. 첫 만남은 탄생과도 같고, 죽음은 필연적인 한 세대의 끝이라도 되는 것만 같다."
대책위원회 3장에서 보여주는 유메의 모습. 단순히 천치이자 덤벙거리는 바보 선배의 모습만이 아닌, 그러한 일면 속에 하해와도 같은 사랑과 상냥함을 갖춘 선한 인간임을 나는 볼 수 있었다. 유메는 사람의 선함을 믿는 학생이었다. 폭력, 의심, 불신, 거짓이 당연한 세상에서 타인을 믿고 그 안의 정직함을 믿고자 하던 그런 학생. 선행과 노력으로서 작은 기적이 모여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말하던 그런 학생. 세상의 차가움에 적응했던 1학년의 호시노는 그런 유메의 성정에 감화되어갔고, 그걸 보는 나 역시 한 켠의 고통과 함께 유메의 올바름을 긍정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그녀를 아둔하고 어리석다 말할지 모른다. 어쩌면 사실일지도. 하지만 그것이 정녕 이 아이의 잘못일까? 우리는 최종편에서 쿠로코가 어떠한 일들 당했는지 이미 목도한 바가 있다. 악의로 가득 찬 세상에서 백지인 것만으로도 잘못이라 말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선생의 관점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그토록 악의와 기만, 그리고 차가운 무관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이 어찌 아이의 탓일까.
그리고, 유메는 참으로 특이한 개성을 가진 학생이라 말할 수 있다. 학생이기도 하고, 어머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모티브적인 의미가 아니라, 호시노와의 관계가 노골적으로 그리 맺어져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의 작고 강한 후배에게 가지는 감정과 애정은 부모가 가지는 마르지 않을 사랑처럼 보인다. 진정으로 자식이 행복하길 바라고, 더 나아지길 바라는 그러한 마음. 선배와 후배의 관계임에도, 서로가 너무 달라 이해하기 힘들었음에도 나는 그 둘에게서 가족의 인연을 보았다.
비록 둘의 관계는 비극으로 끝났음에도 이러한 빛남이 있었기에 나는 쿠치나시 유메를 호시노를 바꾸고, 나아가 그 이어진 유지로 하여금 아비도스를 바꾼 인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호시노는 앞으로 나아가고, 나는 잠시 더 머물러 후배의 등을 밀고 떠나버린 호인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성과 감성이 이토록 유리되어 날뛰던 적은 대체 얼마만일까.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나는 무대를 벗어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쿠치나시 유메는 이렇게 소모되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운 학생이었다.

"사랑은, 나를 만들고 또 잃어버리게 한다. - 리쌍 '발레리노' 中"
어머니의 모성과 그 내면의 선함을 갖춘 학생이 과연 앞으로 내 눈 앞에 나타날 수 있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유메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2년전의 키보토스는, 그리고 아비도스는 그녀라는 빛나는 태양을 품기엔 너무나도 가혹하고도 무심한 장소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죽었다. 과거를 바꿀 수 없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다 조롱했기에 나는 오히려 그 자리에 멈추어 서게 되었다. 슬픔이라는 늪 안의 늪으로 나를 밀어넣는 거라면 나는 그 심연을 향할 것이고 저항하지 않으리라.
내가 그녀를 계속해서 기억하리라 다짐했던 것처럼 다른 누군가도 그녀의 선함과 그 믿음, 그리고 끝없는 사랑을 기억해준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내 덧없는 바람이나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 얼굴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기뻐할 것이다. 그것이 그저 또 다른 과거의 한 조각 기억일지라도 나는 진심으로 행복할 것이다. 그 티없는 웃음이 나오는 장면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보상이자 포상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인지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선인지 모를 장소에서, 테러화된 호시노의 공격에 당해버린 선생은 과거 속의 유메를 만났다.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만난 익숙한 구면의 인연인 것처럼, 유메는 미소와 함께 절망에 빠진 선생을 위로해 주었다. 주객이 전도되어버린 이 상냥한 위로의 장면에서 나는 끝없는 슬픔과 함께 그녀의 마음을 다시금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 수 없는 학생이더라도 내 두 팔이 떨어져 나갈때까지 손을 뻗을 가치가 있을 그런 학생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미래를 고대하며 살아갈 것이다. 타인이 얼마나 그것이 헛된다 말할지라도, 이 고약한 애정을 품어버린 이상 이것이 끝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놓아주지 않을 것이며,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쿠치나시 유메의 선함과 이상을 동경하고 존경하며 그녀와 함께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학생에게 무한한 기회가 있다 말했으면서 그녀를 외면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선한 사람은 다시금 기회를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호시노를 위해 쓰여진 이야기에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희생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을 사랑하게 되었으나, 전도된 애정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이야기였음에도 내 공허함이 사라지지 않을 만큼이나. 그 어떤 감명깊은 결말이나 숭고한 주제의식으로 눈을 돌릴지어도, 결국 나는 그녀의 죽음을 직시했고 이를 잊지 못하니까.
내 사랑은 애탄과 함께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