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선생. 애초에 발렌타인 데이란 무엇이었을까?


"과거형으로 묻는 건가... 의미심장하네..."


기본적으로 그날이 축일이었던 것은 맞았던 것 같아.

적어도 세 명의 종교 성인의 전승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날이었지.

2월 14일은 모든 새들이 자신의 짝을 찾으러 날아오는 날이라는, 고전 서정시도 전해지고 있지.

하지만 오늘에 와서는, 결국 제과 회사의 상술로 그 의미가 변질된 날이야.

심지어 초콜릿류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뿐만 아니라 주위의 가족 이웃, 친구, 동료들에게 모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었다고  해.

그렇게 하면, 한 명이 사야 하는 초콜릿 양의 몇 배로 늘어날 테니까.

결국 그 의미와 규모가 어느 정도 정리되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지만.


"그렇, 구나?"


어쨌든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나는 지금까지 그런 의도적으로 기획된 축일을 기념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 왔어.

그건 말 그대로 비합리적이었으니까.

응. 비합리적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왜 굳이 선생을 은신처까지 불러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냐고?

...

최근, 내가 비합리적이라고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들에게서.

내가... 어떤 감추어진 합리성을 놓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모든 존재는 성립된 순간... 나름의 이유를 품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일단, 내가 놓쳐 왔던 것을 하나씩 시도해 보기로 한 거야.

그리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에, 어떻게 보면 선생의 책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래서 나에게 처음 시험해 보는건가..."


맞아. 이건 선생의 자업자득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아.

이야기를 계속할게. 그래서 다른 살마들의 발렌타인 데이 사례를 연구해 봤는데

...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야. 비합리성 그 자체였어.

일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고, 통계적으로 유의마한 수치 자체가 나오지 않았어.

초콜릿을 직접 만들어서 건네줘야 한다는 사람들.

개인이 초콜릿을 만들어 봤자, 식품공학의 정수를 이길 수 없을 게 뻔하니, 차라리 고급 기성품을 사 줘야 한다는 사람들.

오히려 일상적인 초콜릿을 건네줌으로써 역설적인 특별함을 전하고 싶다는 사람들.

초콜릿을 몸에 바른 다음 스스로를 리본으로 묶은 다음 다가가야 한다는 사람들, 그리고 또...


"마지막은 안 되니까?"


그, 그래? 그렇구나...

아무튼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이 기념일은 지금 이 시점에서도 엉망진창인 무언가로 폭주하고 있다는 것이었어.

그래서 나 나름대로, 합리적이면서도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려 보았어.

우선, 고급 기성품을 사는 방안은 고려하지 않기로 했어. 기성품은 결국 기성품이고, 어느 정도는 타협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개인이 기업화된 식품공학의 결과물을 따라가기 어렵다는 부분은 인정해.

그래서, 이런 식으로 접근하기로 했지.

초콜릿은 결국 카카오매스와 카카오버터, 유제품과 설탕, 그리고 각 기업에서 비밀로 유지한다는 향신료를 혼합해 만드는 음식.

그리고 초콜릿의 품질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카카오 그 자체지.

그 부분에 착안해서, 전체 생산량의 5% 정도를 차지하는, 크리오요Criollo 품종의 카카오 빈을 우선 준비했어.

발효, 로스팅, 분쇄, 압축, 혼합, 응고 과정은... 시중에 판매되는 대부분의 고급 초콜릿을 역분석해서 레시피를 알아낸 다음.

내가 직접 설계, 제작한 <초콜릿 아방가르드 군>을 사용해 전체 과정을 일괄적으로 통합하여 완성시켰지.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내가 보기에는 초콜릿의 모양인데...

...

거기에는, 지금의 나 자신에 대한 표현을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지금의 나를 이 모습으로 있게 해 준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어떤 의미로 나를 표현하고 상징하는 것을, 선생에게 건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고.

그래서 만들어 본 게... 이거야.


"이건 밀레니엄 교표...?"


맞아.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이 없었다면, 분명 지금의 나는 이 모습으로 있지 못했을 거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어. 내가 다른 학원에 진학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고.

게헨나와 트리니티, 백귀야행과 붉은겨울, 산해경, 하이랜더, 와일드헌트, 오딧세이아,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학원들...

모두 그 나름대로, 각자의 학원에서 학생이 되어 있는 내가 있었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츠카츠키 리오는,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이 아니었으면, 이런 시긍로 살아갈 수 없었을 거야.

그래서 이건... 어떤 의미로, 지금의 나야.

그래서 내가 선생에게 초콜릿을 준다면, 이 형상 말고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야말로 합리적으로 모든 변수와 가능성을 도출한 끝에 내린, 이성적인 결정이었던 거지.

...

이상, 하네...?


"뭐가?"


분명 나는 이성적인 결정으로, 합리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초콜릿의 제조 공정도, 내가 제작한 것이기는 하지만, <초콜릿 아방가르드 군>에게 일임했고...


"그런데?"


선생. 모든 과정이 합리적이고 이성적... 그러니까, 감정을 배제한 채 이루어졌다면.

거기에는, 감정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


응. 그렇겠지. 그런데.

...

나는 지금 이 순간... 뭔가.

...엄청나게, 부끄러워졌어.

이상하지 않아, 선생?

어떻게 검토해도 그 요소가 들어갈 자리를 없앤 채 공정을 완성했는데, 그런데도 끝끝내 그 요소가 결과물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니.

그야말로.... 무에서 유가 나와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이것이 가령 입자 가속기의 충돌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나마 납득은 해 볼 수 있겠어. 하지만....

초콜릿을 만드는 것은... 어떻게 봐도 거시 세계의 사건이잖아?

내가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를 놓치고 만 걸까...?


"그렇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도 지금은, 나도 리오의 마음이 고마워."


...!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선생?!'

선생의 말을 들으니까, 지금까지에 비해 두 배... 아니, 열 배는 부끄러워진 것 같은데...?

당신은 도대체 내게 있어 어떤 사람인 거지??!!


"자, 자. 진정하고..."

"다시 한번 고마워, 리오. 초콜릿 잘 먹을게."


으, 읏....!

...

아, 알았어.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

나도 고마워, 선생.



세줄요악

그런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