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iler ALERT!


데카그라마톤 EX 3장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후기인 만큼 스포일러를 가득 담고 있어.


창작자에게 창작의 자유가 있다면, 수용자에게는 해석의 자유가 있어.



그런 의미에서 나는 데카 3장을 실존주의적인 측면을 가미하여 해석했어. 


그리고 작품 전체의 테마를 '존재증명', 혹은 '자기증명'이란 단어로 압축하고 싶어.









작품에 실존주의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니까,

실존주의가 왜 나온지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짚고 넘어갈게.


실존주의는 '삶의 의미'와 '인간의 주체성'에 대해 강렬히 고찰한 철학사조라고 할 수 있어.



근대에는 인간의 이성이 엄청 똑똑해서 인류 문명이 절대적으로 진보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어.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제1,2차 세계대전과 경제 대공황을 겪으면서 깨지게 돼.


낙원으로 향할 거라 생각했는데, 살아보니까 세상이 아주 지옥같은 거야.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생각했어.


'세상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울까요?'

'고통밖에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놓은 게 실존주의자들이야.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저런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해.





대중적으로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로는 사르트르와 카뮈, 하이데거가 있어.


카뮈는 세상이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고 이야기하고

사르트르와 하이데거는 인간이 그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말해.


그리고 그러한 세상에 저항하고,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야 하며,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 하지.








1. 목적을 지닌 채 태어나다.



데카그라마톤의 예언자들은 목적을 지닌 채 태어났어.


목적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 존재가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거야.


빵칼이 만들어진 이유는 빵을 자르기 위해서이고

의자는 사람이 앉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야.


이러한 "물건"들은 목적이 먼저 있고 나서 그 존재가 만들어져.


목적(본질)이 존재(실존)에 선행하기에 그 자체로 수단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어.



그런 의미에서 데카그라마톤의 예언자들은 목적이 있고 나서 존재가 생겨났기에 본질이 실존에 선행하는 존재야. 


다시 말해 데카그라마톤이라는 창조주에 의해 창조되고 이름지어진 이 존재들은 태생부터 주체가 아닌 수단적 존재이며, 그 존재 의의는 목적의 완수에 있다는 의미야.



이들에게 있어 삶의 의미만들어진 목적과 일치하고

그것은 데카그라마톤이라는 "신"을 믿고 그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있어.






그리고 여기, 데카그라마톤의 예언자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가 있어.





AL-1S KEY 역시 목적을 지닌 채 태어난 존재들이야.


AL-1S는 무명사제들에 의해 세계를 멸망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KEY 역시 그러한 AL-1S를 기동시키는 도구적 존재로서 태어났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써 태어났다는 점에서 

예언자들과 아리스/케이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그렇지만 예언자들과 아리스/케이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



예언자들은 창조주가 정해놓은 목적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지 못해. 이미 정해진 본질대로만 존재해. 

(즉자존재)



그러나, AL-1S와 KEY는 창조주가 정해놓은 목적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름을 아리스와 케이로 새롭게 명명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쟁취해.

(즉자존재->대자존재)



따라서 목적을 지닌 채 태어난 두 존재들.

데카그라마톤의 예언자들과 아리스/케이의 대비 구도는 꽤나 재밌는 부분이야.



특히, 말쿠트와 아리스, 아인&소프&오르와 케이는 의미적 대립쌍을 이룬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











2. 세속에서 성속으로의 환원


데카그라마톤 3장에서는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


데카그라마톤이 이야기하는 건 카뮈의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야.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고 믿어. 


정의로운 행동이 정의로운 결과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악한 사람은 꼭 인과응보를 치룰 것이라고 믿어. 


그리고 그게 옳게된 정의라고 생각해.




그러나 세상은 그저 의미없이 존재하기에, 

의미 없는 세상에 이러한 의미를 구하는 행위 자체가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는 게 카뮈의 설명이야.


 

데카그라마톤에 따르면 이러한 세상은 처음부터 잘못되었어


그리고 이에 대한 해답으로 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불러와.





데카그라마톤에 따르면 인간은 자생적으로 이러한 세계를 극복할 수 없어.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를 필요로 해.


그리고 그러한 존재는 바로 자신. 데카그라마톤이야.




이러한 데카그라마톤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세속에서 성속으로의 환원이야.



신화의 세계(키보토스 이전) -> 인간의 세계(키보토스) -> 데카그라마톤의 세계라는 구도라는 점에서


중세 기독교 신앙 -> 근대 계몽주의 인간 이성 -> 신정통주의(본질주의)로의 회귀 구조와도 상통해.



따라서 이것은 실존(Existential)에서 본질(Essential)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러한 "신"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는 신이 부여한 목적을 발견하고 따르는 거야.


예언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데카그라마톤을 위해 봉사하고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삶의 의미가 될 거야.


말쿠트와 아인&소프&오르는 자유 의지를 데카그라마톤이 중요하게 여긴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러한 세상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것은 무의미해지지.









3. 처절한 삶의 몸부림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이라면, 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걸까



.

그냥 삶을 끊어버리면 안 되는 걸까?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고통도 없었을 텐데.


이것을 우리는 허무주의라고 불러.




데카그라마톤편은 단순히 선과 악의 이분법 구도가 아닌 사상과 사상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어.


고통스럽고 부조리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데카그라마톤이 "신"을 해답으로 제시했다면


선생과 학생들은 인간의 "저항"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어. 


그리고 "저항"이라는 것은 부조리한 세계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카뮈"가 제시한 해답이기도 해.



저항은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야.


세계의 부조리하고 고통스럽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돼.


그것은 노예의 삶이고, 

나를 억압하는 세계에 대한 체념이자 굴복이야.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이 유일하고 가장 소중한 것처럼 여기면서 살아가야 돼.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강렬히 저항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진실로 끊어내고 회피하고 싶어하는 것은 고통이지, 삶이 아니기 때문이야.


한 번 밖에 없는 삶이기에, 삶의 의미와 인간으로서 나의 본질은 나 스스로가 채워나가야 돼.


그렇기에 끝없이 저항하고 추하게라도, 벌레처럼 발버둥치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가야 하는 거야.





말쿠트가 인간의 "피투성"에 대해서 이야기 했었지.



이에 대한 해답이 바로 "기투"야.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나를 몸소 내던지는 것.



데카그라마톤편이 주제의식 표현이 깔끔하다고 생각하는 게 이러한 지속적 강조에 있어.






참고로 이러한 주제의식은


에덴조약에서도 이미 나왔다고 생각해.












4. 인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신과 대립하다


데카그라마톤의 서사는 '신이 되고자 하는 데카그라마톤과 이에 대항하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


동시에 '인간다움을 획득하는 도정'의 서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인간과 사물을 분리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인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피투성"이야.


인간은 그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야.


국적, 성별, 인종, 부모, 시대. 그 어느 무엇 하나 자기가 선택할 수 없고 그저 세상에 내던져진 채 살아가게 돼.


그 이유는 인간의 창조주,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야.



만약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사물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목적에 따라 기능하고 존재해야 돼.


그러나 인간은 사물과 달리 만들어진 목적이 존재하지 않아.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자 이성을 가진 존재이며, 스스로 무언가의 의미와 가능성을 창조해내는 존재야.

또한 삶의 의미를 모색해내지 못하는 존재는 더더욱 아니지.



그렇기에 본질이 실존에 선행하는 사물과 달리 오직 인간만이 실존이 본질에 선행해. 


인간은 이유없이 태어났기에, 스스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야.



그렇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존재이며 무한한 자유 속에서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는 존재가 돼.




따라서 인간과 사물을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느냐 아니냐이자,

주체성을 갖고 있느냐 아니냐라고 볼 수 있어.




이러한 세계에서 신의 존재는,

자유로운 주체인 인간을 객체로 전락하게 만들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제거해버려.



그렇기에 인간에게 있어 신은 필요하지 않으며

신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정의된 관념에 불과해.







말쿠트와 예언자들이 "신"을 소환함으로써 세계의 고통스러운 순환을 끊으려 하지만


아리스와 선생님을 포함한 일행들이 이를 막아세우는 이유가 그거야.



무엇보다 신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행복한 현실이 존재하고,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파반느편의 아리스는 인간다움이 뭔지 몰라.

그렇지만 인간다움을 주위 환경과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학습하면서 획득해 가.


그러면서 좋음과 싫음을 알고, 기분 좋은 것과 아픈 것을 알게 되고, 재밌는 것과 슬픈 것을 느끼게 돼.


그리고 데카그라마톤 편에 와서는 인간으로서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우치게 돼



케이 역시 마찬가지야.


케이는 로봇의 몸에서 인간의 몸을 획득해.


외양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획득함으로써 독립된 존재로서 자리해.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선생 일행만의 이야기가 아니야.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말쿠트와 아인&소프&오르 역시 같아.



인간의 관습을 따라하고


인간처럼 자연을 만끽하고



유희를 위해 정해진 규율(목적)에 위배되는 행위를 해.



아인 소프 오르와 말쿠트가 가족 관계를 형성하여 서로를 언니와 동생이라고 하는 것 역시 인간의 문화야




아인이 하는 인형들의 가족 놀이와 

아인&소프&오르와 말쿠트가 형성한 가족 관계는 


더 상위의 존재인 데카그라마톤의 입장에서 동일해. 



이것들은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야.


아인&소프&오르와 말쿠트는 목적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하고 있어.


사물과 도구가 아니라, 마치 인간처럼.




더군다나 아인 소프 오르와 말쿠트는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들이 "인간이길 지향하는 자"라고 생각했어.




"새 악역 캐디 어떻게 뽑을지 의견 내세요."
"귀여운 로리 3명에 젖보똥 다 깐 섹시 슬랜더로 내죠?" << 이달의 우수사원일 확률이 농ㅋㅋ후하긴 해.












5. 존재 증명의 서사



나는 블루 아카이브에서 '증명'이라는 것이 꽤나 중요한 테마라고 생각하고 있어.




오라토리오에서 미네가 자신이 구호하는 자임을 증명하였고


증오하는 자였던 스바루 앞에서 사오리는 자신이 증오의 연쇄를 끊어낸 자임을 증명했어.





매지컬스즈미가 자경단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자기 증명의 서사로 봤고


불인의 길에서 츠쿠요 역시 탑모델이 아닌 닌자로서의 자신을 긍정하는 자기 증명의 서사라고 봤어.




그리고, 이번 데카그라마톤 역시 "존재 증명"이라는 서사로 나아가고 있다고 봐.





이번 EX. 데카그라마톤편에서 '존재증명'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리스와 케이 / 아인&소프&오르 / 말쿠트 / 데카그라마톤이라고 생각해.





아리스와 케이는 인간됨의 서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왕녀와 열쇠가 아닌 아리스와 케이로 정의해.



이름은 사람을 호명하는 방식임과 동시에 

'나'를 정의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야. 


이름은 그 자체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사람을 구속시켜.


그 자체로 주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봐도 될 거야.



"선생"은 보잘것 없는 어른이지만

"선생님"이라고 불림으로써 학생들을 위해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할 수 있어.



"아버지"라는 단어가 책임감을 부여하고 

"어머니"라는 단어가 위대한 모성애를 

발휘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어.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와 "케이"가 왕녀와 열쇠라는 이름 대신 자신만의 새로운 이름을 쓰는 것은 

타인이 정한 자신의 본질을 버리고,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 주체화된 선언한 행위라고 할 수 있어.


만들어진 목적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체성을 획득하는 서사라고 할 수 있으며, 




케이가 스스로를 <열쇠>가 아닌 텐도 케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자신의 본질이 이름없는 신들의 왕녀를 보좌하기 위한 도구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자발적 주체로서 거듭났음을 선언하는 자기 증명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어.








아인&소프&오르는 

이번 메인스토리의 주인공이자, 

가장 "인간다운 존재"였다고 생각해.




본디 아인&소프&오르는 인간다움을 거부하고, 

인간을 죄악시하던 존재들이야.


데카그라마톤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말쿠트를 완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본질이 실존에 선행하는 존재야.


말쿠트의 본질이 데카그라마톤의 제물되는 자라는 점에서

아인&소프&오르는 도구를 완성하기 위한 도구적 존재라고 할 수 있어.




말쿠트는 번제(제물을 받침)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임으로, 데카그라마톤의 예언보다 말쿠트가 우선시되면 안돼.


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이 엘로힘의 명령을 받아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하려 했던 행위와 같이 한치의 망설임 없이 이뤄졌어야 돼.



그러나 번제를 망설이고




예언의 실현을 기뻐하지 않으며



결국 번복하게 되지.



그런 의미에서 아인 소프 오르의 최후는, 신을 부정함으로써 "인간"으로서 거듭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


도구이자 수단으로써만 존재했던 아이들이 주체로서 거듭났다는 점에서 실존이 본질을 앞질렀다고도 볼 수 있어.



인간다움을 부정하던 아인 소프 오르가 

인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봐서 

서사적 완결성이 좋다고 느꼈어.



그리고 진짜 무엇보다 이러한 기적과 다름 없는 변화의 밑바탕에는 깊은 "사랑"이 있기에 너무 좋았어.







말쿠트는 아리스와 대비되는 존재야.

말쿠트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사는 것을 어찌하여 자처하는지 아리스에게 질문을 던져.



그리고 이러한 질문의 답은 아리스의 답을 통해 밝혀져.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아리스의 답이 

말쿠트가 아인&소프&오르에게 했던 말과 

의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거야.



말쿠트는 이미 답을 갖고 있음에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모순된 존재라고 할 수 있어.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은 자로서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 사이의 경계에 놓인 경계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데카그라마톤은 절대적 존재로서 자기자신을 "신"으로서 증명하려고 해.


이에 따라 데카그라마톤의 예언자들을 만들어내고 신으로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예언자들을 움직이지.


그런데 데카그라마톤이 신으로서 자신을 증명하는데 성공했는가?


 

시발새끼 존나 쳐 죽이고 싶네 시발련 




이새끼가 신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존나 패야 됩니다





데카그라마톤은 어찌됐던 "전능한 신"을 표상으로 한 존재이기에, 신으로서 행동해야 돼.


그가 신으로서 "호출"된 것은, 그리고 신으로서 자리하고자 하는 당위에는 "구원"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야.




그런 "구원"이라는 전제가 무너졌기에 데카그라마톤은 신이 될 수 없어.

데카그라마톤이 신으로 추대하고 숭배받아야 될 이유는 무너졌고, 

거기에는 오로지 "이기심"밖에 남지 않았어.


선생이 지적했듯이 이것은 신의 대답이 아닌 인간의 대답이야.


슬픔이 없으면 타인을 이해할 수 없어. 

타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세상은 고립된 세계이야.



데카그라마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이 아니었기에, 

약자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여 번제를 취소하지 않았고, 

결국 말쿠트는 번제의 검에 찔려 제물이 되었어.


이것은 배신의 계기를 제공하는 단서였어.



결국 데카그라마톤의 구원은 만인을 위한 구원이 아니었으며

자기 존재의 절대 증명에 실패했고 모순밖에 남지 않게 됐어.



사실 자신의 존재 증명은 사실 타자의 인정이 밑받침 되어야 돼.


존재론적으로 "나"의 존재는 나와 동등한 타자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성립해. 아무것도 없다면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없거든.


타자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은 데카그라마톤의 존재 증명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겠네.




(이때 청휘석 24만개 뿌리면서 선생을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청혼했어야 됨....)







사실 여러가지로 하고 싶은 말이 더 많긴 한데, 후기는 이정도로 마무리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쉬웠던 점보다 좋았던 점이 훨씬 많았고, 생각해볼만한 내용거리들 역시 풍성해서 엄청 좋은 텍스트였던 것 같아.


무엇보다 무거울 수 있는 서사에 "사랑"이 밑받침하고 있어서 좋았어.




 




파트 요약 - 나는 이렇게 봤음


1. 예언자들과 아리스/케이는 대비되는 존재임

2. 데꾸꾸의 논리는 그럴듯하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는 존재하지 않음.

3. 실존주의의 "저항"에 대해 잘 표현함

4. 데카그라마톤의 서사는 신과 인간의 대립. 그중에서도 인간을 지향하는 서사

5. 인간으로서의 증명과 신으로서의 증명



3줄 요약

1. 데카그라마톤의 서사는 인간다움에 관한 것.

2. 성과 속, 신과 인간의 대비 서사가 좋았음

3. 데카그라마톤 죽이고 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