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전작 부끄럼쟁이 소녀는 사랑을 한다 : https://arca.live/b/bluearchive/44515927


선생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병원 천장이었지만, 팔에는 기계와 링거가 몇개씩 달려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몸에 천천히 통증이 찾아오고 있었다. 선생은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목에 입은 부상 때문에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찢어질듯 아파왔다. 선생은 고개를 돌리는 것을 포기하고 눈만 움직여 병실을 둘러봤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쓰러지기 전과 달라진 것이라고는 날짜와 시간 뿐일까. 선생은 자신의 옆에 간호인용 의자에 앉아있는 학생을 부르려다가 말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도 있지만, 자신의 침대에 엎드려 곤히 자고 있는 학생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기도 하다.

마음 같아서는 팔을 뻗어 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목을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팔을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선생은 목이 마른 것을 참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진통제의 덕분일까, 선생은 별로 몸부림치지 않고 다시 잠에 들었다.

선생의 곁에는 액정이 완전히 깨져버린 싯딤의 상자가 놓여있었다. 아로나의 목소리는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선생으로서의 역할도 끝이 나기 마련이다. 학생은 졸업하여 어른이 되고, 세상의 풍파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선생은 그 뒤에 남겨진 과거의 인물이 된다. 선생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마트리아가 최후의 발악으로 남긴 폭발을 몸으로 막아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공포>와 <신비>, 그리고 여태껏 게마트리아가 모아놓았던 모든 죄악과 뒤틀린 신비.

학생들은 닿는 것만으로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는다. 평범한 인간인 선생은 그 폭발의 속성을 알아채자마자 몸을 내던졌다.

교정에서 웃는 모습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선생은 폭탄을 몸으로 감싸안으며 슬픈 웃음을 흘렸었다.

이윽고 폭발이 키보토스 전역을 울렸다. 폭탄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학생들에게 활짝 미소를 지었던 것이 선생이 기억하는 자신의 마지막이었다.


선생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던 것은 아니다. 매일매일 총탄이 날아다니고 수류탄을 편의점에서 파는 키보토스에서 선생은 죽음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그렇지만 선생은 최선을 다해 죽음을 피해다녔다. 단순히 죽음이 무섭기 때문은 아니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 두렵다. 그렇지만 선생은 자신의 죽음이 가치있기를 바랐다.

모든 학생들을 이끄는 선생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죽음을 바랐다. 물론 죽지 않고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 소중한 청춘을 품고 나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최선이었겠지만.

선생은 그러한 바람이 너무나 희망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아로나가 키보토스의 야경을 창문으로 내다보는 선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평소에도 사색에 잠기곤 하던 선생이지만, 오늘 밤은 무언가 달랐다. 

선생은 키보토스에 부임한 이후 입에 대지도 않던 와인을 글라스에 따라 마시고 있었다. 선생은 싯딤의 상자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로나에게 웃어주곤 답했다.

"아로나. 내 마지막은 어떻게 될까?"

아로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며 선생을 쳐다봤다. 무언가 설명을 원하는걸까.

"모든 학생들이 졸업하고 난 이후에 선생인 나는 필요가 없어지잖아.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게 될까?"

아로나는 그제서야 선생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이야기했다.

"글쎄요. 그런 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나름의 책임에서 해방되시는게 아닐까요?"

이번에는 선생이 아로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름의 책임이란게 무엇일까. 아로나는 선생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모든 학생들의 모범이 되고 학생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청춘을 지키는 것. 그게 선생님의 책임이시지 않나요?"


맞는 말이다. 선생은 아로나에게서 눈을 돌려 창 밖을 내다보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레드와인 특유의 씁쓸함과 포도향이 목 안을 간지럽혔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 그런지 살짝 취하는 느낌이 들었다. 선생은 피식 웃었다. "밖"에 있을 때는 이런 와인 몇 병을 마셔도 멀쩡했는데. 

선생은 글라스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키보토스의 야경에서 시선을 돌려 싯딤의 상자를 바라봤다. 아로나는 그런 선생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답지 않게 서정적인 모습을 보여서일까, 걱정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선생은 아로나에게 질문했다.

"아로나는 내 끝이 어땠으면 좋겠어? 키보토스의 모두가 졸업하고 나서 말이야."

아로나는 선생에게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키보토스의 모두와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학생들과 가족을 이뤄서, 행복하게요."

선생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아로나에게 농담을 던졌다.

"하렘이라도 차리라는거야? 아로나도 밝히는구나."

아로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째서 지금 그 때의 기억이 나는 걸까.

폭탄을 감싼 선생은 어딘가에 누워있었다. 딱딱한 바닥 위에 물이 발에 잠길 정도로 차있는 장소. 푸르른 하늘이 보이는 곳.

선생은 이 장소가 어딘지 대충 감을 잡았다. 이윽고 찰박- 찰박- 소리를 내며 한 소녀가 다가왔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선생에게 소녀는 무릎을 굽혀 선생과 눈을 맞췄다.

아로나는 빙긋 웃었다. 어딘가 쓸쓸한 눈빛, 어딘가 안도하는 눈빛. 복잡한 감정이 섞인 눈이었다.

"..선생님. 결국 여기까지 오셨네요."

아로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선생을 원망하거나 어째서 폭탄을 감쌌냐고 질문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부러워하는 목소리였다.

"저는 이 이상 나아가지 못했어요. 이런저런 우연 덕분에, 선생님께서 여기까지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네요."

아로나는 살짝 미소지었다. 

"선생님, 기억나세요? 끝에 대해 이야기했던 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끝에 대해서 질문하셨죠."


선생은 아로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그래서는 안된다. 선생은 손을 뻗어 아로나를 붙잡으려했다. 그러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제가 말씀드렸었나요? 선생님의 끝에 대해서."

아로나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더 굽혀 선생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선생님께서는 학생들과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선생의 이마에서 입술을 뗀 아로나가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선생은 울부짖듯이 아로나를 부르려했다. 그러나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게 아로나의 책임이랍니다. 선생님이 행복한 끝을 맞이하실 수 있게 길을 여는 것."

그것은 선생의 역할이다. 학생들을 위해 미래로의 길을 여는 것. 선생은 아로나를 붙잡으려 했다. 발버둥을 치려 했다. 그렇지만 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 아로나는..."

아로나는 입술을 깨물며 몸을 빙글 돌렸다. 그녀의 얼굴을 타고 내린 물방울이 톡- 토옥-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눈물은 물에 빠져들어 사라졌다.

"지금까지 선생님과 함께해서, 행복했습니다.."

아로나는 끝의 순간에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애써 무시하며 마지막 순간에 미소로 선생님을 배웅했다.

자신은 한 번 실패했었다. 모두를 지키지 못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성공했다. 스스로를 바쳐 모두의 청춘을, 모두의 빛나는 미래를 지켜냈다.

그렇다면 그런 선생님의 행복한 미래를 지키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었다.

아로나는 찰박- 찰박- 물소리를 내며 수평선을 향해 걸어나갔다.

"안녕, 선생님..."


삐이- 삐이- 삐이-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이 다음은.."

선생은 천천히 눈을 떴다.

하얗디 하얀 천장, 빛나는 조명.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소독약 냄새. 분주하게 움직이는 학생들. 팔에 주렁주렁 달린 온갖 기계와 링거.

그렇게 선생은 미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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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그새 아침이 온 것일까. 선생의 옆에서 잠들어있던 학생도 깨어난 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선생은 겨우 목소리를 내어 학생을 불렀다.

"세리나.."

세리나는 고개를 홱 돌려 선생을 바라봤다. 

"선생님!"

세리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내팽겨치고 선생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링거줄이 흔들렸지만 다행히 바늘이 빠지지는 않았다.

선생은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들어 세리나를 마주 안아주었다. 세리나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선생은 삐걱거리는 팔로 세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거야?"

세리나는 눈물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항상 건강이 중요하다며 선생을 챙겨주던 그녀는 평소와 달리 수척해보였다. 몸은 물론이고 마음고생도 어지간한 것이 아니었나보다.

"3일 정도요. 심박이나 다른 수치들은 전부 정상인데, 그 때 깨어나신 이후로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으셔서.."

밤에 깨어났다가 다시 잠든 것은 말하면 안되겠다. 선생은 세리나에게 얼굴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미소를 지어주었다. 세리나는 선생의 미소에 마음이 놓이는지 다시 선생을 안았다.

선생도 세리나를 안아주었다. 


세리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선생은 자신의 침대 옆의 책상 위에 놓인 싯딤의 상자를 바라보았다. 상자는 다시는 켜지지 않을 것처럼 액정이 완전히 깨져있었다.

세리나는 그런 선생의 시선을 눈치채고 쓰라린 미소를 지었다. 

"싯딤의 상자가 폭탄의 파편 대부분을 막아주었어요. 아로나양을 다시는 볼 수 없겠지만요.."

선생은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싯딤의 상자를 붙잡았다. 손에 힘이 없어 떨어뜨릴 뻔했지만 세리나가 눈치채고 받아내 선생에게 넘겨주었다.

선생은 천천히 싯딤의 상자의 깨진 액정을 쓰다듬었다. 어딘가 그리운 손길, 어딘가 후회되는 손길. 세리나는 선생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이 일어났으니 모두에게 알려야한다. 병실을 나서려던 세리나를 붙잡은 것은 선생의 한마디였다.

"내가 죽는게 낫지 않았을까."

후회와 한탄이 가득한 한마디는 세리나를 멈춰세우기에 충분했다. 세리나는 병실 밖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돌려 선생에게 걸어갔다.


짝-

그리고 선생의 뺨을 때렸다. 제법 힘을 담은 듯 선생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선생은 얼얼거리는 볼을 붙잡지도 않은 채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세리나는 울먹거리며 선생에게 애원하듯이, 혹은 경고하듯이, 그마저도 아니라면 저주하듯이 말했다.

"다시는,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선생은 입술을 깨물었다. 해서는 안되는 말을 해버렸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언젠가 학생들이 마주할 미래에 자신은 필요가 없다.

선생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은 끝난 것이었다. 학생의 목숨을 대가로 살아날 의미는 남지 않았었다. 폭탄을 막아내 모두를 구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끝이어야 했다.


세리나는 그런 선생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렇게 무너져버린 것일까. 항상 어떤 궁지에서도 꿋꿋하게 일어나던 선생님이, 이렇게 무너져버렸다.

세리나는 지금까지 억지로 눌러놓았던 눈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세리나는 다시 선생을 꼬옥 안았다.

"그렇게 목숨을, 흐윽, 내다버리고, 픽 죽어버리면, 흑, 저희가 행복할 것 같아요?"

선생은 그런 세리나를 온몸으로 안아주려 했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억지로 세리나를 안았다. 몸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 자신은 아직도 어리구나. 선생은 통감했다.

아로나는 분명히 자신에게 말했다. "학생들과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아로나에게 받은 짐을, 아로나가 자신에게 건 기대를, 아로나가 스스로를 바쳐 구해낸 선생 자신의 미래를 이렇게 폄하해버렸다. 선생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턱에 힘이 잘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정신을 차리기에는 충분했다.

아로나가 얼마만큼의 각오로 자신을 내던진 것인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인지조차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의 순간에서 그녀가 자신에게 한 인사에 얼마나 깊은 슬픔이 담겨있는지 자신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행복하기를 바란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행복과 슬픔을 헤아리지 않았다. 선생은 죄악감에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였다.

한순간의 우울감에 빠져 자신의 어깨 위에 얹혀있는 짐을 내던지려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아로나가 주고 간 자신의 미래에서 선생은 헤엄쳐나가는 수밖에 없다.

아로나와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남긴 부탁을 이어나가는 것, 그것만이 선생의 남겨진 목표였다. 

선생은 세리나를 다시 꼬옥 안아주었다.

세상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그렇지만 선생의 끝은 지금이 아닌 것 같았다. 선생은 세리나의 울음소리를 듣고 뛰어들어오는 학생들에게 힘겨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렇게 선생은 다시 키보토스의 선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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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끝에 있을법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서 대충 써봤음 장편이 더 취향에 맞는듯 단편은 싸다 끊은듯함 

뭔가 개운한 맛은 없는?듯 

약속한 아리스 납치감금은 진짜 너무 매워서 나도 고개를 저을 정도라 메모장에 봉인시켜놓기로 함

소재 아무거나 추천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