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를 자극해, 강제로 정신을 붕괴시킨다, 라... 윤리적인 시선으로 보면 잔인하기 그지없지만, 냉정하게 보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죠. 그렇게 절대 무너지지 않을것만 같았던 그녀의 정신은 결국 한낱 유리조각처럼 쉽게 바스라지고, 신비가 반전되었습니다."


자신의 가슴팍에서 흘러나오는 선혈이 별로 고틍스럽지 않다는 듯, 평소처럼 무덤덤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가는 검은 양복.


"멋대로 실험을 진행해, 애꿎은 실험체들과 이 세상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려 그 가치를 훼손시킨다라... 관측자에게도, 관찰되는 자들에게도 모욕적인 그 행동은.. 정말이지 불쾌하기 짝이 없더군요."


"....."


"아, 선생에게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으나, 그녀와 가장 사이가 각별하신 분은 선생이니, 선생도 실험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그녀가 어떻게 변해갔는지에 대해 아실 권리가 있으시겠죠.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 때 나는 분명 말렸어야 했다.


관찰자인 그가 진실을 알려주겠답시고 그 더러운 입을 열 때, 아무말도 하지말고 그냥 닥치고 있으라고 일갈했어야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자면..저는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입장이기에, 학생들을 실험대에 올리는 '그 여자'를 돕지도 않았지만, 그렇다해서 그녀들을 몰래 도망치게 해준다던가, 실험을 막을 수 는 없었습니다. 실험을 중지시키는건 불가능 할 뿐더러... 데카그라마톤을 거느린 그녀의 무력을 막아낼 수 있는 수단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손가락만 빨고 구경만 했다는건가."


"귀중한 실험쥐들이 타인에게 맡겨져 잔혹한 방법으로 실험당하는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애초에 전 게마트리아가 아닌가요. 굳이 제 목숨을 무릎쓰면서까지 그녀들을 구할 필요를 느끼진 못했습니다. 그저 안타까울 뿐."


"..개새끼."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1차적으로는 다른 학생들처럼 구속구로 묶고, 체내에 '공포'를 주입한다 - 이런 방식이였습니다. 보통 이 정도만 해도 왠만한 학생은 반전상태에 빠지게 되니까요, 허나 -"




"시라스 아즈사는 달랐습니다. 게헨나의 선도부장은 선생이라는 존재를 몇번 들먹이더니 한순간에 정신이 약해져 의외로 쉽게 공포에 굴복해버린, 그런 외강내유적인 학생이였으나... 아즈사는 아니였죠. 앞서 말씀 드렸다싶이 그녀는 아무리 선생을 들먹이고 그녀의 친구들에 관해 잔혹한 얘기를 들려줬지만, 이를 갈기만 할 뿐 결코 무너지지 않을정도로 정신마저 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좀 더 폭력적이고, 직접적인 수단으로 그녀를 반전시키기로 한거지요."


왜냐하면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목격담은 내 눈앞을 아득하게 만들고 속의 내장이 뒤틀려 꼬일것만 같이 괴로웠고,


"그 여자는 할 수 있는 방법은 닥치는대로 사용했습니다. 아즈사에게 안대를 묶어 시각을 차단시키거나 뇌에 고통스러운 저주파를 흘려보내는 것 정도는 약과였고, 그녀가 고통에 적응할 수 없도록 1분씩, 어떨때는 30초씩, 또 어떨때는 한 시간... 이렇게 불규칙한 간격으로 날개에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제 의식을 또렷히 유지하지 못하도록 수시로 구속구로 목을 졸라 죽지않을 정도로만 기절시키는건 덤으로요. 허나 이것도 각박한 상황에서 나고 자라온 그녀에게 있어선 그닥 효과가 없는지, 얼굴만 찡그리고 비명하나 안흘리더군요."


"......"


"그렇게 모든 고문이 아무런 효과도 없을 때, 그 여자는 발견해낸겁니다. 시라스 아즈사가 사오리라는 아리우스 분교 소속 학생에게서 선생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요. 그 뒤에 이어진건 일방적인 폭력이였습니다. 뇌의 신경을 건드릴 정도로 기다란 이어폰을 그녀의 귀에 삽입해, 선생을 지키지 못했다며, 너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며 세뇌하고, 겸사겸사 보충수업부원들의 비명소리도 들려주었죠.특히 히후미라고 하던가요..? 유독 그 학생의 비명소리를 들을때만큼은 얼굴을 사납게 구기고는 눈물까지 흘리더군요."


그가 들려주는 실험의 참상은 내 머릿속의 혈관을 하나하나 지져 불태우고 손가락과 손톱사이에 바늘을 찔러넣는 것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게 날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니까.


"..그 쯤부터 그녀의 정신은 쇠약해져 갔습니다. 하지만 무너질정도로 약해지진 않았죠. 그녀의 정신을 결정적으로 파괴시킨 일이라 하면.. 역시 주사기로 공포를 뇌에 직접 주입시켜, 뇌와 감정, 그리고 인지능력을 망가뜨린 것일겁니다. 아마."


"..개소리하지마."


"아니요, 유감스럽게도 전부 사실입니다. 제 눈으로 직접 관찰하고, 목도한것이니까."


"...."




"...결국 그녀는 그렇게 신비가 반전되었습니다. 처음 보았을때의 굳건한 철벽같던 모습은 어디가고, 자신이 무언가로 변해진다는 공포에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마지막으로는 그 충혈된 눈으로 선생의 이름을 연신 부르짖으면서 미안하다고, 그런 말을 남기면서 말이죠."


그의 말을 들으면서 죄책감이 또 한번 밀려왔다.


마지막 남은 학생이 산산히 망가지는 동안에, 나는 아무것도 못해 그녀를 지키지 못한 버러지라는 자기 혐오와 함께.



"허나 이게 어떻게 된일일까요. 다른 학생들이였으면 테러화가 진행된 후 헤일로가 검게 물들여져야 하거늘, 그녀의 헤일로는 핏덩이처럼 샛붉은 색으로 변했습니다. 눈동자와 함께요.  어찌보면 테러화의 일종의 돌연변이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저도, 그 여자도 몰랐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


흥미로운 실험체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광기의 과학자마냥, 그는 들뜬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아무렇지 않게.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그녀는 그 여자의 지시를 무시한 채 구속구를 풀고 탈출했습니다. 보통 신비가 반전된 학생들이 이전보다 힘이 강해지는 편이긴 합니다만.. 그녀의 힘은 이상하게도 측정불가능할 정도의 괴랄한 수치를 띄고 있었고, 그래서 탈출을 막을수도 없었죠. 그리고 지금 이렇게 선생의 옆으로 돌아간게 아닐까합니다. 이런걸 귀소본능이라 하던가요."


"....."


"신기하지 않으십니까? 기본적으로 테러화가 진행된 학생은, 그 여자가 설정해둔대로 '선생을 해한다' 라는 본능을 가지고 움직입니다만, 아즈사는 그러지 않고 지금 이렇게 선생을 지키고, 집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며 선생과 같이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물론 실험의 후유증은 남았는지 선생을 의존하고 집착하는 성향을 보이며 이 세상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정도로 망가졌긴 했지만."



그가 내뱉은 말들과, 이번 사태는 이 조직에서 자신이 속한 조직원들중 한명이 저질렀을 뿐, 자기와는 1도 연관없다는듯 태평한 태도를 드러내는 그를 보고 나는 그만 -


"..쓰레기같은 새끼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입밖으로 고스란히 내뱉었다.


"....."


"..너희 모두 똑같아. 이딴 짓거리를 너희 모두가 아니라 그 망할 여자 한명이 일으켰다해도. 너희 모두 똑같은 버러지새끼들이라고. 실험자니, 관측자니  고상한 태도는 다 취하는 주제에, 하는 짓거리는 그냥 정신병자들이나 다름 없어. 너희는... 관측자같은게 아니야. 평범했던 남의 일상을 멋대로 파괴하고 관음하는걸 즐기는 또라이들일 뿐이라고..."


논리도, 이성도 담겨져 있지않는 그저 막무가내로 내뱉는 말들.


비록 눈앞에 있는 게마트리아의 일원이 이 모든 사단을 일으킨 주도자는 아니라지만, 어찌됐든 게마트리아의 조직원이니, 게마트리아 라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증오스러워.. 무심코 그런말들이 나와버린 거였다.


평소같았으면 이런 내 말에 정성스럽게 논파를 했을 그도,


"..정말 유감입니다. 선생. 뭐라 할말이 없군요."


그 순간만큼은 그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조용히 내게 사죄를 표하기만 할뿐이였다.


그런 그의 태도에 나는 더 이상 분노할 힘마저 잃어버려 바닥에 털썩 주저않고는..


"...그래. 내 잘못이지 뭐. 내가 약아빠졌으니까, 그 애들보다 나이만 좀 더 먹었을 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라서, 이런 나라서... 그 애들을 지키지 못한거지."


고장난 기계처럼 자조만을 내뱉었었다.


그래, 완전히 체념해버린거다.


이제와서 누군가에게 분노한다고 해봤자 바뀌는건 1도 없는 법이고, 이런 망가진 세상에서 이미 죽은 모두가 돌아온다던가 하는 그런 낙관적이고 현실성없는 방법따위도 없으니, 모든게 허망하게 느껴질 뿐이였으니까.



"부디 자책하지 말아주시죠. 이 일은 선생이 저지할 수 있는 수준의 사태가 아니였을뿐더러, 그녀를 막지못한 저희에게 책임이 있으니까요."


"...너같은 인간에게 그런 위로의 말따위 듣고싶지않아. 지금 내 눈앞에서 그렇게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미는것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고."


"허어...그런가요. 뭐,확실히 게마트리아 소속인 제가 선생에게 이런식으로 사죄의 말을 전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긴 합니다만."


그는 살짝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소나기가 내려 우중충한 먹구름의 색을 띄고있는 창문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난 그가 내 옆에 계속 머물러 있다는게 슬슬 얼굴이 구겨질정도로 신경쓰이기 시작했고 말이다.


마음같아선 지금 당장 그에게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두번다시 내 앞에서 그 얼굴을 보일 생각하지 말라고 쏘아붙여주고 싶은 심정이 한가득이였지만,


"...한가지 질문정도는 해도 되겠지?"


그 전에 한가지가 궁금해졌다.


별로 신경쓰고 싶지는 않고, 그 이유도 딱히 궁금하진 않았지만...


내 시야에 자꾸만 들어와 신경쓰일 수 밖에 없는 그것이.



"얼마든지요. 선생이 이런 미약한 존재인 저에게서 얻고 싶은 지식이 있으시다면 영광이니, 뭐든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사죄하는 겸."


검은 양복은 내 말에 흥이 생겼다는 듯, 창문을 보다말고 다시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꺼림칙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슴팍에 나있는 그 상처는 뭣 때문에 생긴거지? 총이라도 맞았나?"


그가 총에 맞아 죽든 말든,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긴 하지만... 대체 누구에게 습격을 당한걸까. 개인적인 호기심이 생긴거였다.


상처에서 검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걸보면, 분명 최근에 일어난 일일것으로, 몇시간전이나 몇십분 전에 발생했었다는 얘기니까.


학생에게 총격이라도 받은걸까 싶었지만, 이 세상에 아직까지 살아있는 학생은 아즈사 한명 뿐이니까 이건 말도 안되는 추측이리라.



"흠...그 쪽 얘기인가요."


그는 내가 한 질문이 자기가 원했던게 아니기라도 했다는 듯, 살짝 흥이 식었다는 듯 입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선생, 사실 저는 지금 떠도는 나그네 신세입니다. 그 여자의 욕망은 이 세상을 마구잡이로 파헤쳐 더럽히는거에 그치지 않아, 게마트리아 소속원들인 저희까지도 자신의 일을 방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통제하려했기에... 저는 이렇게 도망쳐 나와, 우연찮게 선생을 발견한거죠. 이 상처는 도망치다 생긴 영광의 상처 - 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고작 그런거였나."


생각보다 어이없고 싱거운 이유였다.


그나저나 영광의 상처는 무슨, 그냥 거기서 콱 죽어버렸으면 좋았을텐데.


많이 아쉬운 일이다.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흉악한 생각을 하고 계시는 듯 하군요. 허나 아쉽게도 이 상처는 선생이 바라는 것처럼 목숨을 잃을 정도의 치명상은 아닌지라.. 유감입니다."


궁금한 점도 풀렸다.


매우 거지같은 기분이 들긴하지만, 의도한건 아니였으나 아즈사가 어떻게 이런 꼴이 된건지도 알아낼 수 있었고.


그렇기에 이제 그와 더 하고 싶은 얘기는 없었다.


"..이제 볼 일 다본 것 같으니 가줬으면 좋겠는데. 날 죽이러 찾아온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 보는사람 기분더러워지는 시꺼먼 면상을 거두고, 지금 당장 내 앞에서 사라지길 바랄 뿐.


"선생은 여전히 제가 아끼는 사람입니다. 그런 경박한 행동을 저지른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네가 나를 좋아하고 말고는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넌.. 앞으로 어떡할거지? 그 총상도 치명상이 아니라지만, 이대로 가면 넝마짝처럼 살이 썩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비꼬는 투로 그에게 한마디를 툭 던져본다.


가기전에 욕 한마디 정도는 작별인사 치레로 해도 되잖아.



"하하..게마트리아의 일원인 저를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선생의 그런 올곧기만한 인품은 이해가 안가면서도 기쁘군요."


"지랄."


허나 돌아오는건 기쁨의 반응.


능글맞고 기분나쁜 새끼다. 정말로.


"허나 저는 신경써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지금 선생의 관심이 가장 필요한 자는 그녀가 아닌지요."


"...그것도 그런가."


그는 그리 말하며, 소파에 곤히 누워 잠들어있는 아즈사쪽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


"그럼 작별입니다, 선생. 그리고 저는.. 앞으로 '방법'을 찾아봐야 겠군요."


"뭐?"


"불가능한 일을 꿰뚫어내며,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유의미한 성과를 낸다... 그게 예로부터 과학자나 지식인의 길이였으며, 세기의 발전이 되는 가치인 법이니까요."


덜컥 -


"저는 언제나 그랬듯 진리를 찾아내겠습니다. 선생도 모쪼록 평안하시길."


그런 이해하기 힘든 말들을 남기며 순백색의 우산을 펼치곤, 검은색으로 칠해져있는 얼굴에 균열처럼 그려져있는 그 하얀 입으로 기분나쁜 미소를 띄우며 그렇게 문을 열고 사라졌다.


그래, 그게 나와 그의 마지막 만남이였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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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괜찮아? 몸이 아픈거야, 아니면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는거야? 표정이 너무 심각해보이는데..."


소금에 데인 상처처럼 고통스럽고 쓰라린 과거를 회상해서 그런걸까.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던 그때,


그녀는 소중한 아들이 몸에 상처를 입은걸 걱정하는 부모마냥 내 오른손을 제 양손으로 꼬옥 붙잡고는, 애수에 빠진 눈동자를 하곤 걱정스레 내 얼굴을 살피며 그런말을 던졌다.


고민거리..라.


고민거리라면 분명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말이다.


아주 산더미처럼 많다.


예를 들어...검은양복은 절대 불가능하다 말했지만, 너가 원래대로 되돌아올 수 있는 방법?


..아니, 생각해보면 굳이 원래대로 돌아올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숨통이 조일듯한 이런 비정한 현실에서 사는 것 보다, 꿈과 따뜻함이 남아있는 환상속에서 살아가는게 훨 나을지 모르니깐.



그렇다면 죽은 모두가 갑자기 '짜잔~ 몰래카메라 였습니다!" 라면서 살아돌아올지 모른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희망?


아니, 그럴리가 없다. 총알에 몸이 도넛처럼 뚫리고 머리가 터진 시체까지 남긴 죽은 사람들이 돌아온다니, 그딴 우주로 간 개연성은 B급 영화에서도 안쓰이겠지.



..그래, 이딴 고민거리들을 생각해봐야 전부 의미가 없는거다.


무슨 생각을 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해봤자 소용없으리라.


이미 이 세상은 완전히 뒤틀려서 망가져 폐허만을 남겨서, 희망 한톨조차 안남아있으니.


그저 머리를 비우고, 강물에 흘러가는 나무잎처럼 아무 생각없이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게 최선이겠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햇빛이 따갑고 더워서."


아무튼 그녀에게 유치한 변명으로 넘어갈려 해봤지만,


"덥다니? 비록 지금이 여름이라지만 해는 지고있고, 밤바람이 시원하게 불고있는걸."


정신은 무너졌지만 눈치는 여전히 빠른 그녀에겐 소용없었나 보다.


"그.. 그건.."


그녀에게 허를 찔려 뭐라 더 말해야할지 고민에 빠졌지만,


"..그래, 바다의 냄새가 섞인 여름의 바람이 기분좋을 정도로 시원하게 불고 있어. 정말로."


그녀는 갑자기 뜬금없이 제멋대로 다른 화젯거리에 빠지더니, 그런말을 내뱉었다.


왜 그렇게 감성적으로 변한거니.


"..응. 그런 것 같기도."


아무튼 화젯거리를 돌린건 나에게 있어 나쁜일은 아니기에, 이대로 그녀의 감성젖은 대화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나는 이런 여름이 좋아. 선생님. 왜냐면.. 모두와 함께한 여름은, 내게 있어 햇살의 뜨거움보다는 따뜻함을 알게 해줬으니까."


"......"


그런 말을 들은적이 있다.


총알에 뇌에 절반이 날아가버리거나, 뇌에 기억장애가 생긴 사람이라도,


강렬한 추억 하나 둘 만큼은 영원히 잊지않고 비디오 테이프마냥 머릿속에 각인시킨다고.





"...단체 행동은 좋아하지 않았어. 작전은 홀로 잠입하고, 홀로 행동하는 편이 위험부담이 적을 뿐더러 편하다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선생님과 모두를 만난 후로는 자연스레 좋아지기 시작했어. 매일 함께 나누는 시시따분한 잡담은 평범하기 그지없을지도 모르지만, 분명 내 목마름을 달래주고 있었고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외로움을 잊게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으니까."


"아즈사.."


"탁 트이는 장소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숨을 곳도 없고.. 주변 경계도 힘들고 말이야. 하지만 선생님 덕분에 알게됐어. 숨을 곳이 없으니깐, 가릴 곳이 없으니깐 비로소 아름다운거고. 옆에 소중한 사람이 같이 있다면 결코 불안한 마음따위 들지 않는다는걸."





아즈사도 그런걸까.


그녀가 지금 이렇게 얘기해주지 않았다면 잊을 뻔 했다.


예전의 세상에는 분명 아름다운 만남들이 잔뜩 있있고, 즐거운 무지갯빛 추억들도 한바가지였다는 사실을.


그 당연한 사실들을...


나는 냉혹한 현실에 파묻힌채로 살아가는 바람에 언제부턴가 잊어가고 있었는데,


너는 아직도 그런걸 세세하게 기억해주는 거구나.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있었다는 증거를 간직해줬던거야. 지금도 계속.



"....."



"...그 한여름에 건네준 초콜릿. 고이 간직하지않고 내가 보는 앞에서 한번에 먹어줘서 기뻤어. 선생님은 언제까지나 내 옆에 있어준다는 얘기니까.."


언제까지나 함께. 


그녀의 바람대로였으면 좋겠다.


나는 당장 죽어도 아무래도 좋지만, 그렇다해서 너를 홀로 남기긴 싫으니깐.


"하지만.. 이 계절은 얼마 안가 지나가 버리고 말겠지."


"..응. 그게 계절이란 거니까."


"선생님, 나는 항상 모든게 허무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갔어. 뭐든지 말이야. 그게 삶의 의미든, 과거든, 미래든, 사람과 사람사이에 관계던..."


"..."


두 사람만이 걸어가는 황폐화된 폐허속에서도 붉은 빛의 노을은, 여전히 제 빛을 띄고 있었고 바람또한 한결같이 계속 불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알 것 같아. 나는 모든게 허무하다 생각하며 살아가는게 아니였어. 내가 정말 찾고 있던건..'살아간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찾고 싶었던거야.


"...지금은 그 의미를 찾았니?"


"아니, 여전히 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조금은 알 것 같아. 희망이 없어도 도망치지 않고 맞서거나,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망설임없이 달려가는 것일지도 몰라. 그게 허무에 맞선다는 거고, 삶의 증명이 되는 거니까."



"하지만.. 그렇게 아무리 발버둥치고, 맞서도 막아낼 수 없는 일은 언젠가 생기기 마련이야."


"...."


"그래. 어떤거에도 결국 끝이란건 찾아온다는 거지. 지금까지의 관계든, 생명이든..."


아무런 일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시시한 세상 한가운데서, 그녀는 한명의 가희가 되어 계속 노래를 불렀다.


나 말고는 더 이상 들을 이가 없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란 노래를.


"..언젠가는 모두 사라질지도 몰라."


이미 사라졌다. 너와 나만을 제외한 모두가.


"그래서 그 날 선생님이 총격을 당했을 때... 솔직히 속으로 엄청 두려웠어. 선생님도 내 옆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그 사실이."


"...."


"그리고 분했지. 나 스스로가 아직 약해서, 부족해서 지키지 못한거라고."


그렇지 않아.


너는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난 최선을 다해도 너희를 지켜내지 못했는걸.


"그렇게 속으로 분해하고, 슬퍼할때 깨닫게 됐어. 모두를 지키고싶다는 생각은, 더 이상 내게 있어 속죄도, 의무도 아니라... 어느샌가 온전히 나 스스로의 바램으로 변했다는 걸. 그 당연한 사실을 그제서야 알아챈거야.."


그리고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곤, 그 석양을 등진채로 내 앞에 서더니..


"선생님, 그래서 나 말이야, 결심했어."


처음으로 크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모모프렌즈 카페에 놀러갔을때도, 바닷가에서 추억을 남길때도 볼 수 없었던,


단 한끝의 부끄러운 감정도, 어색함도 묻어나오지 않는 자연스러운 미소.


"나.. 앞으로도 선생님을 계속 지키고 싶어. 그게 당장 내일이든, 모래든, 몇달이나 몇년이던 간에, 항상."


"아즈사.."


"이런건 분명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상관없어. 항상 선생님의 옆에 나란히 설 수만 있다면 -"





"나는 분명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테니까."


한없이 순수하고 새하얀 미소를.



"너.."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녀의 미소를 보고 기분이 좋다기보단, 오히려 우울해졌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는 솔직히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그녀가 제정신이였으면 몰라도, 이미 고장나버린 상태에서 그런 감동적인 말을 해봤자... 괴리감만 느껴져서 그런걸까.


아니면 나를 지킨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살아가는 그녀가, 내가 없어지면 어떻게될지 무심코 상상해버려서 그런걸까.


뭐가 됐든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러니까 부탁할게. 선생님도 항상 내 옆에 있어주겠다고 약속해줘. 물론 이런 말을 안해도 선생님은 착한 사람이니, 분명 옆에 있어주겠지만...역시 조금은 불안해서 직접 약속받고 싶달까..?"


하지만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연모하는 이에게 사랑고백을 하는 소녀처럼 부끄러워하며 내게 계속 그런 말만 지껄일 뿐.


그래서 -



"...그렇게나 내가 소중해? 내가 언제까지나 네 옆에 있어줘야 하는거냐고."


속에서 왠지 모를 분노와 반항심리가 살짝 솓구쳤다.


아무리 실험의 후유증 때문에 그렇다지만, 눈 앞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내게 아양떠는 그녀의 모습이...도저히 더이상 눈뜨고 보기 힘들었으니까,



"응. 소중해. 세상 그 무엇보다. 그래서 항상 곁에 있어주고 싶어. 그게 내 역할이자 행복이니까."


"...."


목소리를 내리깔아 약간 쪼잔하게 분노를 표출해봤지만, 그녀는 개의치않고 상쾌한 목소리로 답할 뿐이였다.


항상 곁에 있어주고 싶다니,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안되는건 아니지만... 오만한 말이 아닌가.


너와 나, 당장 내일 둘중 누구에게 무슨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런 말을 쉽게 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어쩌면 나보다도 더 빨리."


결국 나는 또 애처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딴 망언을 내뱉고야 말았다.


내가 아니라, 반대로 그녀가 먼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증거없는 두려움때문에.


"....."


"......"


서로의 시간을 멈추는 어색한 정적.



"..아니, 아즈사. 미안해, 지금 한말은 잊어줘. 내가 너무 막나간 것 같으니까 -"


그래도 막상 입밖으로 내뱉고나니, 이건 좀 심한게 아닌가 싶어 그녀에게 용서를 구해봤지만 -



"나는 사라지지 않아."


돌아오는건 의외의 답이였다.


그것도 비애에 젖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선생님을 절대로 홀로 두지 않을거니까."



...노을빛에 그을려 보이는 그녀의 새하얀 날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윤기가 흐르지 않고 깃털이 잔뜩 엉망진창으로 빠져있어서 - 내 마음을 괴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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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도 울적하겠다, 왠지 취기에 몸을 기대고 싶어져서..


난 저녁을 먹은 후 찬장에 있는 이름도 모를 와인 한병을 꺼내, 야외 테라스에 앉은채로 안주도 없이 잔에 따라 홀짝이는 중이였다.


평소 담배도, 술도 찾아마시지 않는 성격이였는데, 역시 사람의 마음이나 성격따위는 주어진 환경에 따라 언제든지 변한다는 걸까.


"...물배만 잔뜩 차는 것 같네."


역시 안주없이 마시는건 좀 심했을까? 두병 정도 마시니 어느새 내 정신은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취하면 분명 이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꺼라 생각했는데, 아니였나보다.


와인이 달게 느껴지기는 커녕 우울한 기분때문에 쓴 맹물맛만 나는 것 같고,


기분이 좋아지긴 커녕 새벽감성에 젖은 사람마냥 우울감만 더 심해졌을 뿐이며, 물배만 잔뜩 채워져 속만 메스꺼워 졌으니까.


따분함이라도 달래면서 마시기 위해 휴대폰을 켜봤으나,


모모톡이나 메세지가 온 흔적따위는 없었다.


뭐, 당연하겠지.


그래서 하다못해 경관이라도 즐기기위해 도시쪽을 바라봤으나, 사람없는 도시에는 빛 한줄기 조차 켜져있지 않아, 한밤중의 산처럼 어두컴컴하기만 해서... 소용없는 짓이였다.


최악이다, 정말로.


그렇게 내 기구하고 B급영화같은 인생에 속으로 한탄하던 도중,




끼이익 -


"늦은 밤인데 여기서 뭐 해? 선생님? 불러도 아무데도 없길래 계속 걱정했다고."


"..아즈사구나."



그녀가 문을 열고 찾아왔다.


"그냥.. 좀 마시고 싶었어. 미안해."


"아니, 딱히 미안해할 이유는 없는데.."




철푸덕 -


"서, 선생님? 역시 잔뜩 취했잖아..!"


몸을 완전히 잠식해버린 알코올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내 옆에 있다는 안도감때문일까,



그 순간 핑 돌아버린 정신때문에, 내 몸은 마침내 꼬꾸라졌다.


아마 지금 내 모습은... 수업시간에 책상에 엎드린채로 코를 고며 자는 학생같은 모습이겠지.


꼴사나운 모습이다. 진짜.



"..두병이라니, 너무 많이 마셨잖아, 선생님. 하다 못해 안주라도 같이 먹지, 그런것도 없이...."


"어..어라?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아..? 술은 안주랑 함께먹어야 한다는걸, 학생인 네가 어떻게에 알어어.."


취했다.


나 진짜 완전히 취한 것 같다.


혀가 배배 꼬여서 등신같은 목소리가 나오는걸 보면... 견적이 딱 나오지 않는가.




"..그거야 선생님이 예전에 나한테 얘기해 준 적이 있으니까 그렇지."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에이, 잘 모르겠다.



"아..아즈사는 기억력이 차아암 좋네에...정말 똑똑해에.."


"....."


사람끼리 대화할때는 서로 눈을 마주쳐야 하는 법이거늘,


현재 탁자에 고개를 쳐박은 채로 있는 나는, 그녀의 얼굴도 보지 않은채 건성건성 대답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술기운에 정신줄을 놔버린 내 비루한 모습을 보고, 지금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학생도 지키지 못하고, 술에 취한 모습따위나 보여주고 있다니....선생 실격이다, 나란 인간은.


아니, 인간실격 일지도.



"..일단은 돌아가자, 선생님. 여기서 자면 분명 감기걸릴꺼야. "


그녀는 그리 말하며 내 등을 조용히 토닥여줬다.


그녀의 착한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에도, 내 입은 감사인사를 하긴 커녕 -



"아즈사느은... 아가야...지켜줘야.. 해에에..."



여전히 저능아같은 소리가 나왔다.


미치겠네 진짜..


"..난 아기가 아니야, 선생님."


그녀의 목소리에는 당황도, 분노도, 짜증도 섞여져있지 않았다.


마치..길거리에 자빠져있는 불쌍한 유기견을 보고있는 듯한, 동정심이 섞인 목소리.


이제서야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있을지 짐작이 갔다.


"...."


"..상태를 보니 많이 취한 것 같네. 이제 정말로 돌아가자, 선생님. 내가 어깨동무를 해줄테니까 -"


"아안..취해써..이씨.."


난 다가오는 그녀의 손길을 조심스레 밀어내듯이 쳐냈다.



"..데려갈 필요 없어. 취하지도 않았고..그냥, 그냥 다른거는 다 필요없으니 내 옆에 있어줘. 아즈사."


술에 취했다는거에 가려져서 그렇지, 사실 이미 나도 실험을 당한 그녀처럼 미쳐있는 상태거나, 그녀보다 더 심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어른이자 선생이란 작자가 학생에게 애처럼 꼬장이나 부리고 있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한심하고 우습지 않은가.


"...그렇다면 옆에 있어줄게. 선생님이 내게 늘 그래줬던 것처럼."


"......"


"그래도 선생님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까, 자."


눈과 고개를 살짝 떠보니, 그녀는 자신의 하얀 가디건을 내 등에 조심스레 덮어주고 있었다.


"이러면 안심이네, 응. 선생님은 아무래도 남자다보니 나보다 덩치가 커서 직접 입혀줄 수 는 없지만."


"아즈사..."



하얀 가디건은 내 등에 덮어줘서인지,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모습이 된 그녀는..


만물을 태울 것 같은 붉은 눈에 보는 사람을 식겁하게 할 만한 헤일로를 띄우고 있었지만,


분명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였다.



"너어..그러다아.. 너가 감기 걸린다아아..."


"괜찮아, 나는 스컬맨보다 강하니까."




"....."


"..선생님이 부르지 않아도, 나는 항상 선생님의 옆에 있을거야."



취기로 몰려오는 피로감.


더 이상 눈도 뜨기 힘들 정도로, 힘이 빠져나가 노곤노곤해지는 내 몸.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와중에도 선선하게 불어오는 여름밤의 바람은 더 이상 차디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가 적혀있지만 끝은 아님


내용에 대한 질문이나 가독성 구린다는 등의 피드백은 달게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