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종교학 뇌피셜 모음

"니쉬르 작전" 과 길가메시 서사시의 대홍수 이야기

비교종교학으로 보는 최종편 스토리 (2장 20화까지)

예언자 떡밥을 대홍수 신화 모티브로 풀이해보자

심연의 신들에게 맞서 싸운 바다의 여신들의 "각오" 

동해보복의 원칙과 쉬루파크 비문의 황금률을 알아보자

"나람신의 옥좌" 에 대해 알아보자

"죽은 신의 시체" 신화에 "말쿠트" 에 대해 알아보자

<비극의 탄생>으로 보는 프레나파테스와 디오니소스 이야기

"다차원 해석" 과 루프에 대한 떡밥을 추측해보자

색채와 자유의지, 운명에 대한 이야기로 본 최종장 결말


*몰루에 대한 내용보단 비교종교학에 대한 내용이지만 이것도 보면 이해하기 좋음왜 지져스는 "완전한 대속" 이 아닌가?




네줄요약 있음

더 간단한 두줄요약도 있다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하다면, 어떠한가? 모든 철학자가 독단주의자(Dogmatist)였을 경우, 그들이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혐의는 근거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사이 나는 이러한 신의 철학에 관해 많은 것을,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배웠으며, 이것은 이미 말했듯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나는 디오니소스의 마지막 제자이자 정통한 자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언젠가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을 넘어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그러기 위해 그대들은 사랑의 쓴 잔을 마셔야 했다.

가장 훌륭한 사랑의 잔에도 쓴맛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초인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켜 창조자인 그대들로 하여금 갈증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세계에는 많은 오물이 있다. 거기까지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계 자체가 오물로 가득 찬 괴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세계의 많은 것들이 악취를 풍긴다는 사실 속에는 지혜가 깃들어 있다. 구역질 자체가 날개를 창조하고 물을 찾아내는 능력을 만들어낸다!

가장 훌륭한 자에서도 구역질 나는 그 무엇이 있다. 그리하여 가장 훌륭한 자들까지도 극복되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오, 형제들이여. 세계 안에 많은 오물이 있다는 사실 속에 깊은 지혜가 숨어 있다!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다. 밑에는 언덕이 있고 냇물도 있고 진흙도 있다. 걷기 평탄한 길만 있는 게 아니다.

먼 곳을 항해(voyage)하는 배가 풍파를 만나지 않고 조용히만 갈 수는 없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 인생의 기쁨이 있다. 풍파없는 항해,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


모든 신념(belief)은 거짓말보다 더 큰 진리의 위험한 적이다.

진리는 추악하다(hideous). 진리에 의해서 멸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예술을 가지는 것이다.

알맞은 정도라면 소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도를 넘어서면 소유가 주인이 되고 소유하는 자가 노예가 된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해하다. 그리고 또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바울은 목적이 있었고 따라서 수단 또한 원했다.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은 바로 권력이었다.

이후 그와 함께 사제가 또 한번 권력을 원했다. 그는 대중을 폭압하고 이들을 무리로 형성시키기 위한 개념과 거짓과 상징들만을 이용할 수 있었다.


복음서의 예수의 모습- 선지자, 구원자, 미래의 심판자, 도덕의 설교자, 기적을 행하는 자.

실제의 모습이 어떠하였건, 그를 어떻게 해석을 하건, 그 모습은 재림과 최후의 심판이라는 필요에 의해 편집된 모습임에 틀림없다.

복음서들은 독보적이다. 성서는 어떠한 비교도 허용하지 않는다. "판단하지 말라" 라고 말하면서도 자기들을 방해하는 것은 전부 지옥으로 보내버린다.

그들은 신에게 판단을 맡김으로써 자신들이 판단을 내리고- 신을 영광스럽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 


노예 도덕은 애당초 "외부적인 것", "다른 것", "자기 자신이 아닌 것" 을 부정한다.

이렇게 시선을 자신에게 되돌리는 대신 반드시 바깥을 향하는 것이 사실 원한에 속한다.

즉, 노예 도덕이 생기기 위해서는 언제나 반대 세계, 외부 세계가 필요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든가 '나는 의지한다' 와 같은 미신이 있다. 나는 백 번이라도 말할 수 있다.

직접적인 확실성이나 절대적 인식, 물자체는 형용하는 순간부터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언어의 유혹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노골적으로 근본을 따져서 말하면 선험적 종합 판단 따위는 가능한 것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그러한 판단에 대해 말할 권리가 없으며, 그 믿음이 인생에 대한 주관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면 가능한 것이 허용될 수도 있다.

사람은 잠자코 있어서는 안될 경우에만 말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극복해 온 일들만을 말해야 한다. 다른 것은 모두 쓸데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을 기독교도들은 '신앙' 이라 불렀고, 나는 '가축의 무리' 라고 부르고 있다. 데카르트는 이성에게만 권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성은 한 가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을 신앙으로 삼고 도덕을 도덕 그 자체와 동일시하고 마치 도덕을 인간이 도달한 절정인 듯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 집단이야말로 구원이라 믿으며, 다시 말해 무리와 함께 자신을 믿고 있다.


그대들은 나를 숭배한다. 그러나 언젠가 그대들의 존경이 무너지게 되면 그때는 어찌하려는가? 쓰러지는 입상에 깔려죽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대들은 이 차라투스트라를 믿는다고 말하는가? 그렇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무슨 소용 있는가? 그대들은 나를 믿는 자들이다. 그렇지만 믿는 자가 무슨 소용인가?

그대들이 나를 발견했을 때 그대들은 아직 그대들 자신을 찾지 못했다. 모든 신자들이 그렇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은 매우 하찮은 것이다.




하늘 나라는 아이들의 것이다. 이 신앙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노하지도 않고, 탓하지도 않는다.

신앙하는 삶의 모든 순간이 기적이고, 신앙에 대한 보상이며, 증거이고, 신의 나라이다.


예수를 자유정신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게 고정된 것은 없고, 고정된 것은 모두 죽이는 것이다. 언어조차 그에게는 비유를 다루기 위한 도구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는 세상을 부정하지도, 부정할 이유를 가져보지도 않는다. 하나의 진리가 그 근거에 의해 입증될 수 있다는 생각도 없다.


그의 빛은 적인 빛, 자기 긍정이며 빛을 추구하는 힘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 빛을 보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복(福)은 약속되지도 않고, 어떤 조건들에 묶여 있지도 않다. 나머지는 이 사실을 전해주기 위한 기호일뿐이다.

신에게 향하는 길은 회개도 아니고 용서의 기도도 아닌, 복음의 실천만이 신에게 인도되며, 복음의 실천이 바로 신이다.

자기자신이 천국에 있다고 "느끼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심층적 본능, 이것이 구원이라는 심리적 사실이다.


사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처럼 사는 것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교다운 삶이다.


필연적인 것은 단지 참고 견디는 것(persevere)이 아니다. 그저 감싸주는 것(shield)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love)이다.

사랑하고 있을 때 인간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훨씬 잘 견뎌낸다. 즉,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사랑이 흐를 때 인간은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며, 복종이나 덕이 따를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을 해낸다.



자유란 자기 책임에 대한 의지를 갖는 것이다.

자기 책임을 방치하려 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려 하지 않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위대함은 과연 어디서 오는가. 어떤 사람이 위대한가. 사람들이 어째서 그를 위대하다고 하는가. 무엇이 그를 위대하게 보이게 하는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함(integrity)을 그가 일생 동안 변함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으며, 위대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진실로 나는 그대들에게 충고한다. 내게서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차라투스트라를 수치로 여기라! 그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다. 그는 그대들을 기만했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나 제자로만 머무러 있는 것은 스승에 대한 올바른 보답이 아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의 월계관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가?



선악의 저편. 그곳은 선악의 판단이나 도덕을 완전히 초월한 곳이다.

사랑으로 행하는 모든 행동은 그곳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사랑의 행동에는 가치판단과 해석이 전혀 미치지 않는다.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숭고한 것은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과 앞으로 태어날 미래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길 원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을 향해 던지고, 성실하고 확고하게 대답하라.

지금까지 자신이 진실로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자신의 영혼이 더 높은 차원을 향하도록 이끌어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기쁨을 안겨 주었는가? 지금가지 자신은 어떠한 것에 몰입하였는가?

이들 질문에 대답하였을 때, 자신의 본질이 뚜렷해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다.


누군가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행위는 자신까지도 기쁨으로 충만케 만든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양손에, 가슴에 기쁨이 가득할 것이다.

가능한 한 행복하게 살아라. 그러기 위해서 현재를 즐겨라. 마음껏 웃고, 이 순간을 온몸으로 즐겨라.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하다. 그러나 무엇을 막론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그를 사랑하라.

사랑을 "이용하여" 두 사람의 차이를 배우거나 어느 한쪽을 움츠려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있는 그대로"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다.


처음 듣는 음악의 경우, 우리는 그 익숙하지 않은 것을 꺼리지 않고 일단 마지막까지 듣는 인내와 노력, 관용을 가져야만 한다.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친밀함이 생기고 이윽고 그 음악의 매력을 조금씩 발견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음악이 가진 깊은 아름다움을 발굴해 내고 그것을 사랑하게 되며 그 음악이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어 간다.

이것은 비단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도 처음의 낯설음에서 출발하여 사랑을 배우는 길을 걸어왔다.

일을 사랑하는 경우에도, 자신을 사랑하는 경우에도,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언제까지고 이처럼 배움의 길을 거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존경이라는 것에는 어느 정도 상대와의 거리가 존재한다. 그것에는 외경이라는 것이 드리워져 있다. 서로 간에 상하관계가 만들어지고 힘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에는 그런 관점이 없다. 위아래도, 차이도, 힘의 우위와도 무관하게 감싸 안는 것이 사랑이다.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나를 버리고 자신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인했을 때, 비로소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진실로 형제들이여, 그때 나는 다른 눈으로 나의 잃어버린 형제들을 찾으리라, 그때 나는 다른 사랑으로 그대들을 사랑하리라.

그리하여 그대들은 다시 나의 친구가 될 것이며, 똑같은 희망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때 나는 세 번째로 그대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대들과 함께 위대한 정오를 축하할 것이다.

위대한 정오란 인간이 동물과 초인의 중간행로에 서서 저녁으로 향하는 자신의 여행을 최고의 희망으로 축복할 때이다. 그것은 새로운 아침으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때 몰락해가는 자는 자기 자신을 축복할 것이다. 그는 저편으로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인식의 태양은 정오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모든 신들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살기를 원하나 ㅡ 이것이 어느 날 위대한 정오에 우리의 마지막 의지가 되기를.



이 정신은 언제나 다시 나타나는 바로 디오니소스 신이며, 그대들이 알다시피 내가 일찍이 은밀히 경외심을 가지고 내 처녀작을 바쳤던 저 위대한 양의(兩義)적인 신, 유혹자인 신이다.

나는 디오니소스 신의 마지막 제자이자 정통한 자이다 : 나는 기어이 한 번쯤 내 친구인 그대들에게, 나에게 허락하는 한, 이 철학을 조금은 맛보게 하는 일을 시작해도 좋을 것이 아닌가?

당연히 반쯤 낮은 목소리로 말이다 : 왜냐하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은밀한 것, 새로운 것, 낯선 것, 기이한 것, 섬뜩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풍습에 따라 그 신에게 아름답고 장엄한 장식의 명칭과 덕성의 명칭을 붙이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그의 탐구자로서의 용기나 발견자로서의 용기를, 그의 대담한 성실성과 진실성, 지혜에 대한 사랑을 대단히 칭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은 이러한 모든 귀한 잡동사니나 장식품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다.

"너와 너의 동료들이나, 그 밖에 그것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이러한 것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그는 말하고 싶어할 것이다.

나는 ㅡ 내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감출 이유가 없다!" ㅡ 사람들은 이러한 종류의 신이나 철학자에게는 아마 수치심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언젠가 그 신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 "상황에 따라 나는 인간들을 사랑한다 ㅡ 이때 그 신은 그 자리에 있었던 아리아드네를 넌지시 암시했다:

나에게 인간이란 지상에서 그와 비견될 만한 것이 없는 유쾌하고 용기 있고 창의적인 동물이다. 이 동물은 어떤 미궁에 있어도 여전히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찾아낸다. 



이런 주제의식은 <파우스트>에서 신에 의한 구원을 부정하는 핵심이고,

그래서 괴테와 니체는 둘 다 고전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이교 여신들" 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왜냐면 괴테부터 이런 관점에서 "저울" 을 바라보았고, "오직 인간만이" 구원을 이룬다고 봤기 때문이며

그래서 갈망하고 욕망하여 행동에 옮기는 실천적 삶이 "사랑" 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신화" 를 썼던거임



그래서 괴테가 <파우스트>에 썼던 또다른 문장은,


https://arca.live/b/bluearchive/57225076

정확하게 치나츠 메모리얼의 배경에 박아두고 있으며,

그게 치나츠의 캐릭터성을 이루는 대사들까지 반영되어 있다



https://arca.live/b/bluearchive/57524700

한편 모에는 아예 니체가 그토록 강조한 "나는 파멸하는 자를 사랑한다" 그 자체를 의인화해서 존나꼴리는거임

왜냐면 니체부터 그런 파멸하는 인간상을 수많은 신화의 신들과 영웅들의 모티브를 연구해서 발견했던 것이고,

실제로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극 <오이디푸스 왕>를 연구한 걸 다시 연구해서 보완한다거나,

같은 맥락에서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숭고(the Sublime)에 대해서도 어떤 해방, 탈속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덧붙인거다


https://arca.live/b/bluearchive/60218205

그리고 이사쿠상이 벤야민의 아우라를 언급하는 건, 니체의 문화비판을 이어받아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

독일의 철학자 벤야민이고 + 그 아우라를 "다시 고찰하는 것과 이어지는 것" 에서 허무주의와 삶의 의의, 그리고 "선악의 저편" 를

언급하는 것이 실제로 벤야민의 신화와 종교에 대한 예술사 연구가 니체의 그리스 비극과 바그너에 대한 연구에서 이어진거라서 그럼




그리고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솔로몬의 어머니가 <잠언>에서 그랬던 것처럼

니체 또한 아포리즘;잠언의 형식을 이어받아 강조했던 것이 "책 너무 많이 읽지 마라, 지금까지 한 내용 몰라도 상관없다"

= 니체가 "제자는 스승을 넘어서야 한다" 라고 했던 이유는 무언가를 어떤 의미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더욱 직관적으로,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폴론적인 것보다 디오니소스적인, 그리고 지져스적인 "이야기" 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

그것이 실제냐 아니냐, 논리적이냐 합리적이냐를 떠나서 인간의 마음에 와닿으니 그게 바로 "사랑" 이라서다

서로 다른 인간들이 무지, 오해, 불신, 갈등을 넘어서 하나되어 이루는 게 가장 보편적인 기적이라면 그 이름은 "사랑" 아닐까?

= 당연히 이건 인간들이 이룬 기적이므로 이건 "인간의 구원은 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해야만 가능하다"





네줄요약

1. 최종장에서 나온 것들은 3일 후에 재회한다는 것까지 니체의 저작들에서 "디오니소스적이고, 지져스적인 것" 의 오마쥬다

2. 그게 지져스랑 겹쳐 보이는 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인간의 삶을 종교로 만든") 사제들, 특히 바울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보면 된다

3. 그렇다고 100% 니체만 인용한 건 아니고, 니체가 제시한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인간" 에 대해서 다양한 문학 작품을 직접 인용한다

4. <파우스트>, <데미안>처럼 (아직까지는) 주로 니체와 같은 맥락에서 허무주의 극복 = 죽음-극복을 다루는 독일의 문학들이 인용된다


더 간단한 두줄요약

니체가 사제들과 다를 것 없어진 철학자들 까면서 차라리 나는 시인이 되겠다며 플라톤 까기를 했던 것처럼

-> 종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문학적인 이야기로 고대 서사시부터 고전 그리스 비극까지 다룬 "시나리오" 다


딱 한줄로 요약하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신이 아닌 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