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arca.live/b/yandere/31884964
아리아드네 상급 검사 아카데미의 밤은 살짝 쌀쌀했습니다.
봄 기운이 만연한 4월 중순의 밤일지라도 맨살에 닿는 공기는 실로 차갑습니다. 그러나 살을 에는 듯한 차가움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적당히 기분 좋은 차가움이었습니다. 한여름 밤에 맞이하는 밤 바람에게서 느끼는 감각이 대체로 이런 것이지 않을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때는 그러니까, 적당히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카데미 내의 부지를 돌아다니고 있을 즈음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반딧불이의 노랫소리와 밤 바람에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풀숲을 거닐고 있으니 조금씩 선배 생각이 나곤 했습니다. 아, 사랑스러운 나의 선배. 그 조그만 손을 잡고 같이 거닐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끊이질 않았습니다. 때문에 저는 점심 즈음에 선배를 살짝 놀린 것을 감히 후회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자그마한 선배는 후배에게 놀림 당한 것 때문에 아직까지 삐져서는 방 앞에서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끝내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은 어떨지 모릅니다. 당장 그 뒤에 선배가 방에서 나왔는지 어땠는지는 직접 지켜 본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선배가 방 밖으로 나오더라도 저는 딱히 불안한 것은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선배는 이런 시간에 누구를 만나러 갈 사람도 아니었고, 어차피 만나더라도 같은 성별의 동기들과 만나서 시답잖은 이야기나 잠깐 하다 방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습니다. 게다가 여차하면 제가 직접 선배의 방에 들어가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선배는 단테라 불리는 남자와 같은 방을 쓰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저는 선배의 방에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단테는 오늘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이자벨과의 첫날 밤을 위해 기숙사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느냐고요? 그야 단테와 이자벨을 엮어 준 것이 바로 저, 앨리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선배에게는 딱히 불안한 점이 없었습니다.
그래요. 어디까지나 선배에게는 말이에요.
잠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 합니다.
사랑이란 것은 실로 커다란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행위에 사랑이 붙으면 애절하고 절실하게 바뀌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그냥 검술을 배우는 것 보다는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검술을 배우는 것이 있겠고. 또는 그냥 사람을 죽이는 것 보다는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인 것이 있겠지요. 어쩌면 이런 것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재미로 감금한 것 보다는, 사랑해서 감금한 것이 더욱 극적이면서도 낭만스럽게 느껴지는 것 말입니다.
맞아요. 앞서 말한 이야기는 감금을 제외하면 모두 제 이야기였습니다.
동그란 보름달이 어여쁘게 떠오른 밤하늘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제 검이 타인의 피를 묻힌 때를 회상합니다. 때는 벚꽃이 어여쁘게 피어난 봄날 밤이었습니다. 저를 둘러싼 주변만 다를 뿐이지, 실로 똑같은 밤하늘 아래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년 전입니다. 저는 2년 전, 지금과 똑같은 보름달이 뜬 날 밤에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창백하고도 수려하게 연마된 검에 처음으로 묻혀진 피는 당시 저의 하녀들 중 하나였던 아이샤의 피였습니다. 아이샤는 예쁜 갈색 머리에 얼굴에 약간의 주근깨가 있던 하녀로, 저를 따르던 하녀들 중에서 성실하기라면 제일 앞에 놓고 이름을 부를 수 있는 하녀였습니다. 그것이 어찌나 성실했느냐면, 아침 청소가 끝난 뒤에도 미처 찾아내지 못한 먼지가 있을 것을 우려하여 점심이 되도록 제 방에서 나오지 않았을 정도였지요.
다만 아이샤는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사실 성실한 하녀가 아니라 성실한 좀도둑이었습니다. 때문에 보름달이 뜨던 봄 날 밤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저의 검에 두개골이 쪼개져 피를 쏟아내며 차갑게 식어갔지요. 솟구치는 피의 분수는 흩날리던 벚꽃 잎과 뒤섞여 장관을 이뤘습니다. 지금은 아마 정원 뒤뜰에 묻혀 6살의 제가 심어놓은 나무의 일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묻어놓은 뒤로는 단 한 번도 파보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그런다고 해서 아이샤가 훔쳐간 물건들은 다시 제게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차갑게 식은 고깃덩어리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쾌락과 통쾌함 뿐이었습니다. 사실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말이에요.
다음날, 갑작스레 사라진 아이샤를 판타시아 가의 사람들은 굳이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일에 지친 하녀 하나가 야반도주하였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게 해석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사용인이란 족속들은 대부분이 입으로만 충성을 말하지, 머리로는 언제나 이 집안의 돈을 들고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느날 이름있는 가문의 저택에서 갑작스레 하녀 한 명 사라진다 하여도 이상할 것은 하등 없었습니다. 살인을 떠올리기 이전에 이미 그런 인식이 강렬히 박혀있었으니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어쨌거나... 저는 어릴 적부터 제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 극심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심하였냐면, 제 물건을 다른 사람이 쳐다보기만 하더라도 지독하기 짝이 없는 살인 충동을 느끼곤 했을 정도였어요. 아이샤를 죽인 것도. 앞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뒤에 간격을 두고서 하녀 몇몇을 더 죽인 것도 모두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린 시절의 저는 힘이 없어 감히 타인을 벌할 수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방에 놓아둔 아끼던 장신구나 책들이 조금씩 사라지더라도 저는 그저 화를 삭히며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다만 조금씩 나이를 먹기 시작하고 어느정도 몸에 근육이 붙었을 즈음에는 저 스스로 아버지께 단련시켜 달라 부탁하였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실로 기뻐했습니다. 본디 무가의 여아는 장녀를 제외하면 보통 장군보다는 문신의 길을 걷는 데 반해서, 저는 직접 제가 강해지고 싶다 하였으니 사실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제가 검술을 배우는 이유에는 실로, 아주 불순한 뜻이 있는 줄을 아버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모르고 계십니다. 가능하면 앞으로 줄곧, 늙어서 돌아가실 때 까지 몰라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본디 기사이자 검사였던 아버지께 직접 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검을 쥐는 방법을 배우고, 싸울 때는 어떻게 서야 하는지를 배웠으며, 검을 휘두를 때는 어느 방향으로, 또 어떤 방식으로 힘을 실어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어느정도 저만의 검술이 갖춰졌다 싶었던 날에는 처음으로 아버지와 합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 날을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검을 받아낸 그 날을 말이에요.
물론 당시의 아버지는 적당히 봐주면서 했을 것입니다. 황제의 심복이자 무가였던 판타시아 가의 당주인 아버지에 비하면 당시의 저는 너무나도 연약했고, 어디까지나 검 보다는 꽃과 책에 둘러쌓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여자아이' 였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적당히 힘조절을 했을 아버지의 일격을 받아내고서 몸이 굳어 하루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겨우 검격 한 번에 그렇게 되는 것이 이상하다고요? 글쎄요. 고작 열 살밖에 더 된 여자아이가 30년간 황제의 직속 기사로써 살아온 중년 남성의 오러가 한껏 실린 검격을 받아내고 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더 신기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그 뒤로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시의 저는 열 다섯으로 장녀였던 앨리시아 언니보다 보다 수려하고 정확하며 강력한 검놀림을 선보일 수가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이미 가문을 이어받기로 한 언니보다도 뛰어난 재능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다만 저는 가문을 이어받는 것 따위엔 관심이 없었어요. 한 가문의 당주가 된다는 것은 실로 귀찮은 일이었고, 제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요.
저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황제의 예리한 검이라 불리지만 일생의 자유를 박탈 당하고,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황제의 개로써 살아야 하는 것이라면, 저는 그것을 심복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단지 그것은 노예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그런 노예가 싫었습니다. 노예란 족속은 자신의 것을 가지지도 못하는 주제에 가지려고 들지도 않습니다. 이미 그것은 사람이 아닌 벌레였습니다. 단순히 몸만 더럽게 클 뿐인 벌레에 불과했습니다.
아버지는 제 뜻을 아시고는 실로 슬퍼하셨습니다. 300년의 역사를 지닌 판타시아 가에 오랜만에 나타난 초월적인 재능을 겸비한 아이가 직접 자기 입으로 당주가 되지 않겠다고 했으니 슬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처음으로 아이샤를 죽인 것도 그 때였습니다. 15살이 되던 해의 봄에 저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서 깨달았습니다. '아, 이제는 완전히 내 것을 지킬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에요.
그 해, 봄의 끝자락을 달리던 시기에 저는 검사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로 했습니다. 이유는 딱히 없었어요. 말 그대로 심심풀이였습니다.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검사나 방랑기사가 되어서 모험을 떠나고 싶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습니다. 물론 무가인 판타시아 가의 유능한 삼녀가 검사 아카데미에 들어가겠다는 것을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좋아해주었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장녀였던 앨리시아 언니였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했습니다. 당주의 자리를 위협하는 정적이 직접 자기 눈 앞에서 사라져주겠다고 선언한 꼴입니다. 제가 만약 언니였다 하더라도 무척이나 기뻤을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그 해 여름에 아리아드네 상급 검사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제 입학 시험을 담당한 면접관에게서 가볍게 승리를 쟁취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은 제가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유를 제각각의 재미난 이유로 추측하기도 했습니다. 조금 시간이 흘렀을 즈음에는 생도들 사이에서 저에 대한 질 나쁜 소문이 돌기 시작했으나 저의 가문을 의식한 원장이 깔끔히 해결해주었습니다. 참, 가문 덕에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쓰레기를 치운 격이 아닐 수가 없었지요. 다만 그 중에서 가장 값졌다고 할 수 있는 일을 꼽으라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즉, 제가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선배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선배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애당초 처음 봤을 때만 하더라도 선배와 저는 정말 말 그래도 초면이라 부를 수 있는 사이였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선배를 남자가 아닌 여자아이로 착각하기도 했었지요. 물론 오해는 머지않아 풀렸습니다. 선배는 남자 기숙사에서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귀족도 아닌 평민의 자식이었던 선배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것이 원인이었을 겁니다. 아니, 확실했어요. 그야 세상에 외모가 남자 같은 여자는 많이 있어도 여자같은 남자는 별로 없었으니까요. 처음에는 그런 선배가 신기하고 귀여워서 가끔씩 선배의 뒤를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끔씩 선배의 외모와 목소리를 놀려주곤 하였는데 화내는 모습조차 너무나 귀여워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참고로 저에게 동생은 없습니다. 단지 선배를 놀려먹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입니다.)
그런 선배에게 사랑이랑 감정을 품게 된 것은 조금 뒤의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그 전까지는 단순히 선배를 구하기 어려운 장난감 내지 조금 특별한 애완동물로밖에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때는 아카데미에 입학한 해의 겨울이었습니다. 저에 대한 악소문이 낭자하였고, 그런 소문들이 아직 원장의 귀에 들리지 않을 즈음이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제 주변에서 나도는 소문을 듣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 들어야 했습니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만들어 퍼뜨리는 것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지만 저에 대한 흉을 보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소유욕도 강한 만큼 자존심 또한 강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보다 급이 높은 사람이 제 물건을 멋대로 만지면 그나마 참을 수는 있었지만, 저보다 급이 한참이나 낮은데도 제 물건을 멋대로 만진 사람에게는 일말의 자비조차 배풀 생각이 없었습니다. 물론 선배는 특별했어요. 서로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게 된 시점에서 이미 저의 것으로 만들어두고자 점찍은 사람이었으니까요.
여하튼, 그 시절의 저는(당장 4개월 전의 이야기이지만) 하루종일 끓어대는 분을 삭히고 지내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도중에 몇 번,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한 동기들에게도 배신을 당했습니다. 더러운 첩의 아이, 역겨운 소아성애자 년. 별의 별 갖가지 욕을 들으면서 사니 기분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밥은 제대로 넘어가지도 않았고, 검술은 한 보 퇴보하여 입학 당시보다 못하단 평을 듣던 시절이었어요. 끔찍했습니다. 실로 끔찍해서 하마타면 살인 충동을 참지 못할 뻔했을 정도였지요.
그 때 저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것이 바로 선배였습니다. 또한 선배는 온갖 소문과 악담 속에서 유일하게 저를 평소처럼 대해주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런 선배의 마음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겨울을 잊게 해 줄 정도로 너무나도 기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러면서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단지 조금 특별한 장난감으로 생각하던 것이 사실은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저를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말입니다. 심지어 저는 그 때 선배가 저에게 해주었던 말들을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 나는 내 사람이 주변에서 어떻게 불리고, 또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떤 소문이 나돌더라도. 적어도 내 사람은 내 사람이라 생각해. 그러지 못하면 그 사람이 정말로 힘들 때 누가 도와줄 수 있겠어? 그러니까 앨리스. 너는 나한테 있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줄곧 내 후배야. 이상한 소문 같은 거 듣고 저버릴 생각 없으니까, 안심해도 괜찮아. "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도 다정해서 황홀하기 그지없습니다.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벌써 행복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아요. 아아, 사랑해요. 나의 선배. 나의 자그마한 에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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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당시 저는 감히 선배에게 제 사랑을 고백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제가 고백을 해서 선배가 받아주었다 하더라도 맥락없고 질 낮은 비난의 대상만 늘어날 뿐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선배는 왜소한 신체에 걸맞게 심상 또한 연약했습니다. 조금만 폭언을 들어도 금방 얼굴에 그늘이 드리울 정도였지요. 그런 선배가 제가 평소에 듣던 악소문의 과녁이 된다면 어떻게 될 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선배를 위하여 제 마음을 미루고 미뤄왔던 것이, 거의 사 개월이 흘러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다시 지금의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 합니다.
어디까지나 선배에게 있어 불안한 점은 없었습니다. 다만 불안한 것은 선배가 아닌 다른 여자 생도 및 여자 교관들이었습니다. 혹여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선배에게 쓰레기 같은 연심(이라 부르기에도 뭣한 하잘 것 없는 감정)을 품고서 간악한 꼬리를 쳐댈 지는 모르는 일이었으니까요. 물론 남자 생도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성벽을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당장 단테만 하더라도 여성과 남성을 가리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저에게 매번 재시합을 청하는 면접관조차도 실은 남색을 밝히는 사람일 수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때문에 저는 지난 사 개월 동안 선배의 주변 사람들을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선배의 동기부터 선배를 가르친 교관들까지. 선배와 관련된 사람이라면 누구 하나 거를 것 없이 모조리 정보를 캐냈습니다. 그들의 가정환경부터 평소 식습관과 생활하는 방식까지 전부 다 말이에요. 그 과정에서 누가 누구에게 관심이 있었고, 또 누가 누구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는지도 알게 되었지만 그딴 것, 딱히 알 게 뭔가요? 중요한 것은 선배에게 흑심을 품은 누군가를 찾아내어 처분하는 일인데 말입니다.
물론 실로 다행스럽게도. 선배에게 흑심을 품은 사람은 결국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찾아내지 못 한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완벽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제가 사람인 이상 반드시 실수는 하기 마련이었으니까요. 다만, 저는 제가 한 일에 일말의 실수조차 없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저는 선배가 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그 날까지 기필코 제 감정을 섣불리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선배가 준비가 되는 그 날까지 저는, 오로지 선배의 사람인 망할 후배만을 연기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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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풀숲을 거닐다 적당히 쉬기에 좋은 장소를 발견했으므로 저는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나무로 둘러쌓인 것 처럼 보이는 공간은 유난히 달빛이 밝게 보이는 곳이었는데, 주변에는 꽃들이 만개하여 마치 맺어지는 연인들을 위해 누군가가 준비해 놓은 듯 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자마자 곧바로 선배를 떠올리고 말았습니다. 선배가 이 곳에서 꺾은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서 저에게 씌워주는 장면을 쉽사리 떠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행복한 상상을 하며 저는 조금씩 그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수풀이 짓눌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에 힘입어 반딧불의 목소리는 더욱이 선명해져 갔고, 주변을 장식한 꽃들은 밤 바람에 흔들려 기분 좋은 소리들을 내었습니다. 어느정도 그 공간을 걸었을 즈음이었습니다. 나무로 둘러쌓인 그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이었습니다.
" ... 저기. 정말이야? "
그것은 실로 익숙한 목소리였습니다. 사실 익숙하다고 할 필요도 없었지요.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제가 줄곧 생각하던 사람의 목소리임에 틀림없었습니다. 항상 제가 놀릴 즈음이면 화를 내면서도 어딘가 다정한 듯한 목소리로 상대해주던, 실로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선배의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깨닫고는 그만 반가운 나머지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고작 앞으로 두 걸음밖에 갈 수 없었습니다. 이유인 즉, 나무로 둘러쌓인 그 너머에는 저의 기대와는 다르게――――
" 응. 정말이야. "
선배의 목소리와는 다른,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여자의 목소리였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누구지? 도대체 누가 저 곳에 있단 말인가요. 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선배와 함께 저토록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밀담을 주고받고 있다니, 저는 감히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철컥 하고 허리춤에서 무언가 쇠붙이 특유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고개를 숙여 바라보니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검에 손이 가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나무 너머의 선배와 그 망할 년은 이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사실에 안도하며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여 그들과의 거리를 좁혔습니다.
사실 가만 생각해보면 이상했습니다. 분명 지금 즈음 자신의 방에서 잘 준비를 해야 하는 선배가 이 비밀스러운 공간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저보다 보폭도 느리고, 그렇게 빨리 뛴다고도 말할 수 없는 선배가. 제가 간 것을 확인한 뒤에 방을 나와서 저보다 먼저 이 곳으로 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었어요. 그렇다는 것은 ... 적어도 선배는 제가 찾아갔을 때보다 앞서 이 곳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저것은 제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단순히 장난기 많은 동기가 선배를 불러내어 질 나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혹은 저에 대한 악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한 때 저를 상당히 괴롭게 했었던 것이었지만, 지금은 차라리 그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물론 저 망할 년이 진정으로 입에 담으려는 말이 정말 사랑의 고백이라 할지라도, 선배가 저와의 의리를 생각하여 받아주지 않으면 그만이었습니다.
" 그러니까 에덴, 나랑 사귀어 줘. "
그러나 때때로 인생이란 제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고.
" ... 응, 좋아. "
제가 그토록 연모했던 선배는 결국 저의 기대를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달린 걸까요. 두 다리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만큼 다리는 아팠고, 힘이 풀린 몸은 숲 속의 나무를 벽 삼아 기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만 육체의 아픔은 언제나 푹 쉬면 낫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저에게 검술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가르친 것이기도 하였고, 제가 검술을 배우는 동안 항상 가슴 속에 지니던 말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저는 지금 아카데미 내에서 그 누구보다 수려하고 강력한 검놀림을 선보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아픔은 낫지 않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겼을 때 생긴 고통은 육체의 고통보다 월등히 아프고, 지독히도 오래 갔습니다.
" ... 싫어, 싫어요... 어째서, 왜 배신한 거에요. 왜, 왜... "
아무도 듣지 못할 탄식을 흐느끼며 선배를 불러보지만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릴 뿐입니다. 답답한 가슴이 더욱이 옥죄일 뿐입니다.
지난 사 개월의 선배를 향한 저의 마음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인정 할 수가 없었어요. 그토록 사랑해 온 선배를 뺏겨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저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했습니다.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말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장소에서 저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아마 제법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겠지요. 선배도, 그 망할 년도 깜짝 놀라고 말았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은 뒤에 농밀한 사랑을 나누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선배는 돌아오지 않는 단테 대신 그 년을 방에 들여서 둘만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 으흑, 흑... 싫어, 싫다고요... 내가, 내가 더 좋아했는데, 어째서... 내가 먼저 좋아했단 말이에요.. 흑, 흐윽.. "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도대체 제가 놓친 년은 어떤 년이란 말인가요.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단 말이에요.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대로 지쳐 잠든다면 그대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요. 내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내 쓸데없는 배려심이 하루 정도는 저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이 되었더라면. 과연 이 비참한 짝사랑을 다른 결말로 만들 수가 있었을까요? 정말로 저는 선배를 저 년에게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 ....... "
저는 그제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다만 빼앗긴 물건은 돌려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릴 적부터 저는 그랬습니다. 제 물건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였습니다. 제 물건을 훔쳐가면 끝끝내 돌려받았고, 돌려받지 못한다면 저는 그 도둑에게 그에 마땅한 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샤는 제 검에 머리가 쪼개져서 죽었습니다. 다른 하녀들도. 에스델도, 리첼도, 소피아도 모두 제 검에 목이 잘리고, 배가 뚫리고, 토막이 났습니다. 저는 그저 과거의 제가 그랬던 것처럼 이 검에 약간의 피만 묻히면 되었습니다. 다만 이 곳은 검사 아카데미입니다. 아리아드네 상급 검사 아카데미였습니다. 제가 살던 판타시아 가의 저택이 아니었습니다. 이 곳에서 저를 비호해 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럴 일은 없지만, 만약 잘못해서 제가 죽을 수도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요.
저는 제 물건을 빼앗겼는데.
" ... 선배, 조금만 기다려줘요. 제가 반드시 다시 되찾아 줄 테니까요. "
나지막이 흐느낀 맹세는 어둡고 고요한 숲 속에 각인되었습니다. 늑대의 음울한 부르짖음이 숲 속 너머의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왔으나 저는 내일을 위해서 쉬어야 합니다. 다만 기숙사가 아니라 이 곳에서 쉬어야 했습니다. 제가 선배를 되찾기 위하여 맹세를 한 이 곳에서. 저는 새롭게 태어나야만 했습니다.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새까만 하늘엔 지독히도 밝은 달이 무수한 별들과 함께 떠올라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의 마음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이 곳에 올 때에는 저들의 빛은 지금과는 다른 완전히 다른 의미일 것입니다.
그저 반짝거리기만 하는 불빛이 아닌, 저와 선배의 사랑을 축복하기 위한 빛으로써.
다음화로 쫑낼 거 갓음
내상 입은 얀붕이들 인스면 미아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