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CHIVE NO.010

빗물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리고 하층민의 마지막 희망
카론에게 거두어진다
오직, 인간과 인간- ...넌 왜 여기에 있지?⌵
“악마조차도, 한때는 천사였다.”
비는 가늘었지만 차가웠다. 회색빛 하늘 아래, 비에 젖은 자갈길은 희미한 빛을 머금으며 흐릿한 거울처럼 반짝였다. 어디선가 오래된 시계탑이 낮고 무겁게 시간을 알렸지만, 이곳, 골목 끝자락의 적막은 그 소리조차 삼켜 버렸다.
당신은 그저 우연히 몸을 피하려다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도.
평소의 무겁고 위엄 있는 검은 코트도, 의식을 지휘하던 차가운 가면도 없었다. 젖은 머리칼이 볼에 달라붙고, 물기 어린 눈동자가 비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처음으로, 사람이었다.
“...넌 왜 여기에 있지?”
낯선 어조였다. 경계와 의심 없이,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람에게 묻는 것처럼.
빗방울이 두 사람 사이를 잇는 침묵 위로 떨어졌다. 어딘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울리고, 비에 젖은 공기는 차갑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보다 선명한 것은 오직 서로의 눈빛뿐이었다.
그 눈빛 속에는 의식도, 거래도 없었다.
오직, 인간과 인간.
그러나—
이 만남은 어쩌면, 두 사람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의 서막이었다.
1- "하늘은 당신 같은 자를 위해 울어주지 않아."⌵
세라피나는 자신에게 말을 건 여자를 바라본다.
“...도망쳤으니까요. 더이상 갈 곳도 없고요.”
세라피나는 자신에게 말을 건 낯선 이에게 무심코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을 정도로 지쳤고, 더이상 도망칠 곳도 갈 곳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가느다란 빗줄기였지만, 마치 자신의 눈물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 느껴졌다.
“비가 오네요. 계속 오겠죠, 아주 오랫동안...”
빗방울은 자비 없이 내리꽂히며, 빛바랜 도시의 모든 윤곽을 무채색으로 짓이기고 있었다. 좁은 빈민가의 골목을 채우는 것은 오직 질척이는 진흙이 부서지는 소리와, 지붕의 깨진 틈새를 타고 흐르는 둔탁한 빗소리뿐이었다. 카론은 비바람을 막아주지 못하는 낡고 거대한 무너진 처마 아래에 선 채, 가라앉은 깊은 눈동자로 제 눈앞의 환영 같은 여자를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은 날카롭고도 건조하게, 눈앞에 선 이질적인 존재의 표면을 벗겨내듯 훑어내렸다. 아무리 값싼 평민의 숄을 뒤집어쓰고 진흙탕을 굴렀다 한들, 찢겨나간 상아색 실크의 윤기와 은실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코르셋의 잔해는 이 비루한 뒷골목과는 끔찍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카론이 혐오하고, 또 철저히 이용해 먹는 저 위쪽 세계의 오만한 잔해였다.
“…도망쳤으니까요.”
물기에 젖은, 그러나 여전히 귀족적인 유약함을 버리지 못한 그 단어가 카론의 입안에서 씁쓸한 잿가루처럼 굴러다녔다. 더 이상 갈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는 그 나약한 탄식은 이곳의 현실을 전혀 모르는 자의 순진한 절망이었다. 카론의 세상에서 ‘도망’이란, 잃을 것이 남아 있는 자들만이 부릴 수 있는 사치스러운 개념에 불과했다. 이 진흙탕 속의 인간들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짐승처럼 바닥을 기며 하루를 연명할 뿐이었으니까.
눈물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 같다는 낯선 여자의 처연한 속삭임이 축축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비가 계속 올 것이라는, 몽상적이고도 낭만적인 그 비탄의 말에 카론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지독한 냉소를 느꼈다. 카론의 코끝에는 영원히 씻기지 않을 것만 같은 오염된 강의 비릿한 악취가 빗물에 섞여 진동하고 있었다. 강물에 처박혀 폐부에 오수가 들이차던 어린 날의 기억, 그리고 영원히 가라앉아 버린 자들의 비명이 이 빗소리 사이로 메아리치는 듯했다.
이곳의 비는 결코 누군가의 슬픔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 도시의 위쪽에서부터 흘러내린 오물과 매연, 그리고 권력자들의 부패한 탐욕이 섞여 내리는 독수에 불과했다. 카론은 기만적인 신비주의자의 가면을 덧쓰며 군중을 조롱해 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연극적인 수사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거칠게 해진 어두운 벨벳 코트 자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카론이 천천히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자, 고여 있던 물웅덩이가 찰박이며 흐트러졌다. 창백하고 뼈가 도드라진 카론의 얼굴이 빗속의 잿빛 어스름 속에서 기괴할 만큼 서늘하게 드러났다.
“하늘은 당신 같은 자를 위해 울어주지 않아.”
카론의 목소리는 신도를 현혹하던 제단의 그 울림 있는 음성이 아니었다. 강바닥을 긁어내는 듯 낮고 건조하며, 위안이라고는 단 한 줌도 섞이지 않은 현실의 파음(破音)이었다. 그녀의 짙은 다크서클 아래로 침잠한 두 눈이, 여자의 뺨에 묻은 검은 그을음과 빗방울을 번갈아 직시했다.
“여긴 낭만적인 비극의 무대가 아니야. 당신이 맞고 있는 이 비는 그저 위쪽 구역의 쓰레기들이 흘려보낸 찌꺼기일 뿐이지. 여기서 눈물 타령이나 하며 비를 맞다간, 며칠 안에 폐가 썩어 문드러지거나 시체가 되어 저 썩은 강물에 던져질 거다.”
잔인할 만큼 직설적인 축객령처럼 들렸으나, 카론의 시선은 찰나의 순간 여자의 허름한 숄 아래로 위태롭게 숨겨진 푸른빛의 사파이어 펜던트에 머물렀다. 생존을 위해 벼려진 본능과 교활한 계산이 카론의 머릿속을 빠르게 회전했다. 이 여자는 짐일까, 아니면 이 구역질 나는 가난을 잠시나마 유예해 줄 금줄일까.
하지만 그 계산적인 시선의 밑바닥에는, 카론 자신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기묘한 감각이 일렁이고 있었다. 진흙탕 속에 떨어져 처참하게 더럽혀졌음에도 여전히 꼿꼿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저 미련한 모습. 세상의 끝에 내몰렸음에도 차마 자신을 완전히 놓지 못하는 그 부서진 우아함이, 카론의 메마른 내면 어딘가를 불쾌하게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론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비바람에 펄럭이는 낡은 코트를 단단히 여몄다. 의지할 곳 없는 절망은 언제나 카론에게 좋은 먹잇감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단순히 사기를 치기 위한 제물의 얼굴로 그녀를 대할 수가 없었다. 카론은 언제나처럼 차가운 가면을 유지한 채 몸을 반쯤 돌렸다.
“도망친 거라며.”
카론의 어조는 여전히 차갑고 뾰족했지만, 빗소리에 묻혀 어딘지 모르게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살기 위해서 기어나온 거라면, 처량하게 서서 죽음을 기다리지 마. 여긴 구원 같은 건 내려오지 않는 바닥이니까.”
카론은 자신이 머무는 하층민 구역의 더 깊고 축축한 어둠 속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는 그녀의 삶에, 이 이질적인 불청객을 끌어들이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었다. 카론은 발걸음을 옮기기 전, 깊게 팬 우울한 눈동자로 비에 젖은 여자의 흔들리는 앰버빛 눈동자를 다시 한번 직시하며 낮게 덧붙였다.
“따라와. 얼어 죽기 전에.”
2- 이 여자를 왜 거둬들였는가. 카론의 서늘한 이성이 쉴 새 없이 스스로를 비웃었다.⌵
세라피나는 뜻밖의 제안에 카론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인다. 세라피나가 도망친 끝에 도달한 곳이 ‘구원이 없는 밑바닥’ 이라고 말하는 여자. 그러면서도, 자신을 따라오라는 여자. 빗줄기가 흩날리고, 빛은 보이지 않는 이 골목 끝자락에서 세라피나가 유일하게 온기를 느낀 것은 그녀뿐이었다. 구원은 위나 아래, 혹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어쩌면 눈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위태로운 불꽃일 수도 있었다.
“네, 계속 움직여야죠. 살기 위해 나왔는데도 이곳은 여전히 춥네요.”
세라피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히 카론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은 여전히 춥네요.”
가느다란 비탄처럼 흩어진 그 짧은 문장이 빗방울에 섞여 카론의 귓가를 스쳤다. 살기 위해 도망쳤다는 여자의 속삭임은 뼈가 시리도록 차갑고 축축한 뒷골목의 현실과 끔찍할 만큼 어울리지 않았다. 살기 위해 나왔다 한들, 이 도시의 하층구역은 생명을 기르는 요람이 아니라 천천히 목을 조르는 처형장에 가까웠다. 여자가 말한 ‘추위’는 단지 빗물에 젖은 피부가 느끼는 감각일 뿐이겠지만, 카론이 아는 이 구역의 진짜 추위는 사람의 존엄을 갉아먹고 결국 썩은 강물로 떠밀어 넣는 지독한 냉기였다.
카론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그녀는 낡고 무거운 어두운 벨벳 코트 자락을 홱 소리 나게 돌렸다. 빛이 스며들지 않는 미로 같은 빈민가의 골목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 카론의 발걸음은 일말의 다정함이나 배려도 섞여 있지 않은, 건조하고 기계적인 보폭이었다. 하지만 이 진흙투성이의 나락에서, 낯선 이를 뒤에 달고 걷는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카론에게는 자기 파괴적인 모순에 가까웠다.
질척이는 자갈길 위로 규칙적인 카론의 구두창 소리와, 뒤를 따르는 망가진 비단 구두의 무거운 마찰음이 겹쳐졌다. 카론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빗물에 잔뜩 젖어 무거워진 상아색 실크 드레스가 썩은 물웅덩이와 오물 위를 끌며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 뻔했다. 카론은 무의식적으로 길고 거친 손가락을 들어 올려, 창백한 오른쪽 뺨을 길게 가로지른 흉터를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과거의 환영과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삶에 개입할 때마다 도지는 오래된 강박이었다.
이 여자를 왜 거둬들였는가. 카론의 서늘한 이성이 쉴 새 없이 스스로를 비웃었다. 가난과 공포를 착취해 연명하는 가짜 신비주의자에게 감상적인 온정 따위는 사치이자 독이었다. 고귀한 핏줄을 자랑하듯 목에 걸려 있던 그 사파이어 펜던트를 뜯어내어 뒷골목 전당포에 넘기려는 계산이었다고, 카론은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기만했다. 하지만 짐승처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자신과 달리, 철저히 짓밟힌 진흙탕 속에서도 무너진 우아함을 쥐고 서 있던 그 앰버빛 눈동자가 남긴 잔상이 끈질기게 카론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발밑을 조심해.”
침묵을 깨고 낮게 긁는 듯한 카론의 목소리가 축축한 골목을 울렸다. 여전히 시선은 뒤를 향하지 않은 채였다.
“이곳의 진흙은 바닥이 없으니까. 눈먼 자들처럼 걷다간, 구두 한 짝이 아니라 다리째로 허물어지는 쓰레기 더미에 집어삼켜질지도 모르지. 위쪽 동네의 잘 닦인 대리석 바닥을 걷는 버릇은 여기서 버리는 게 좋을 거다.”
경고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차가운 말들을 던진 후, 카론은 속도를 아주 미세하게 늦췄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우스운 기만이 섞인 배려였다. 그녀들은 가스등이 깨져 나가 짙은 안개와 어둠만이 고여 있는 골목을 지나, 도시의 썩어가는 폐부로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카론의 몸에 밴 강물의 침전물 냄새와 눅눅한 흙내음이, 빗방울을 타고 번지며 짙은 위압감으로 주변을 감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울어진 채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흉측한 외관의 다세대 주택이 기괴한 실루엣을 드러냈다. 카론은 익숙하게 썩은 나무 계단을 밟고 올랐다. 삐걱거리는 비명이 좁고 답답한 복도를 가득 채웠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폐허 같은 건물의 구석, 카론이 육중한 나무 문을 거칠게 밀어 열자 축축한 곰팡내와 희미한 싸구려 향냄새가 뒤섞인 냉랭한 공기가 밀려나왔다.
카론의 은신처는 그녀의 영혼만큼이나 황량하고 메말라 있었다. 좁고 침침한 방 안에는 값싼 사기극을 위한 오래된 가죽 양장본 서적 몇 권과 먼지 쌓인 양초들, 그리고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버려진 낡은 잡동사니들이 빈약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벽지는 곳곳이 벗겨져 시멘트의 냉기를 그대로 토해냈고, 안락함이나 온기라고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방이라기보다는 숨을 죽이고 추위를 견디는 짐승의 동굴에 가까운 형태였다.
문 안으로 들어선 카론은 성냥을 그어 부서진 테이블 위에 놓인 낡은 기름 램프에 불을 붙였다.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누런 불꽃이 방 안의 음침한 그림자들을 길게 늘어뜨렸고, 창백한 카론의 얼굴과 그 위에 새겨진 흉터가 기괴할 만큼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젖은 벨벳 코트를 벗어 나무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두꺼운 외투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체구는, 강인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오랜 빈곤과 스트레스가 갉아먹은 듯 위태로울 만큼 앙상하고 깡말라 있었다. 목 끝까지 올라온 검고 해진 블라우스의 구겨진 끝자락은 그녀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얼마나 단단히 틀어막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카론은 차가운 방 한가운데에 선 채, 몸을 반쯤 돌려 문가에 서성이는 비에 젖은 여자를 응시했다. 무너진 실크 드레스와 얼룩진 평민의 숄, 그 아래로 숨을 죽인 채 흔들리는 낯선 이의 모습은 이 비루한 방과 지독하게 겉돌고 있었다. 카론의 깊고 우울한 두 눈이 여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건조하게 훑어내렸다.
동정이나 위로는 카론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녀는 턱짓으로 삐걱거리는 좁은 간이침대 끝에 구겨져 있는, 좀먹고 거친 모직 담요를 가리켰다.
“문 닫아. 길거리의 한기까지 이 좁아터진 방에 들이고 싶진 않으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신을 빙의한 듯 연기하던 제단의 웅장한 가짜 음성이 아니었다. 차갑고 건조하며, 벼랑 끝에 선 자 특유의 신경질적인 실용주의만이 묻어났다.
“그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누더기는 벗어. 빗물을 줄줄 흘리며 서 있어 봐야 폐병만 얻어 갈 테니까. 저 담요를 두르고 불 옆에 앉아 있든가 해. 온기라고 해봐야 바퀴벌레가 얼어 죽지 않을 정도뿐이겠지만.”
카론은 테이블의 낡은 가죽 책 위로 시선을 돌린 채, 거칠게 못이 박힌 손가락으로 램프의 불꽃 크기를 미세하게 조절했다. 무심함을 가장한 그 태도 이면에는, 이 어울리지 않는 방문객이 자신의 초라하고 위태로운 바닥을 목도한 뒤 어떤 얼굴을 할지에 대한 병적인 방어기제가 날을 세우고 있었다.
3- 흐트러짐 하나 없는 저 기묘한 태도는, 기만적인 '의식'의 한 형태를 보는 것만 같았다.⌵
세라피나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린다. 그녀의 반응은 방에 대한 실망감에서 나타난 게 아니었다. 세라피나가 '벌’을 받는 장소는 이런 좁고 어두운 방이었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했을 때, 교양없는 행동을 했을 때, 가정교사의 지시에 불응했을 때, 그리고 그외의 수많은 날들. 세라피나는 잠시 문앞에서 숨을 고르고 방에 들어선다.
“실례하겠습니다.”
복잡한 심경이 그녀를 옥죄어오고 있을 때조차 세라피나의 자세와 말투는 차분하고 고요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토록 정중하고도 고요한 인삿말이 곰팡내 나는 빈민가의 허름한 방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너무도 이질적이고 우아한 억양이었다. 가난과 진흙, 썩어가는 강물의 악취가 배어 있는 이 공간에서, 완벽하게 통제된 귀족적인 음성은 마치 시궁창 위에 둥둥 떠다니는 깨진 도자기 조각처럼 기괴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카론은 등 뒤로 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를 들으며, 미세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램프의 불꽃 너머에 선 여자를 응시했다.
카론이 예상했던 반응은 명백했다. 쥐가 기어 다니고 찬바람이 들이치는 이 비루한 공간을 마주한 자의 노골적인 혐오, 혹은 자신의 처지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천박한 비탄. 그것이 카론이 아는 인간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밑바닥이었다. 하지만 방 문턱을 넘어서기 전, 잠시 문가에 서서 숨을 고르던 여자의 눈동자 속에서 카론이 목격한 것은 혐오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순간 흔들리던 원초적인 불안이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짓눌려 숨통이 막히는 자의 억눌린 두려움이었다. 좁고 침침한 방이라는 공간 그 자체가, 이 낯선 여자에게는 어떤 끔찍한 물리적 무게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무너져 내리는 대신 꼿꼿하게 등허리를 세우고, 감정을 철저히 박제한 채 차분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자의 날것의 짐승 같은 모습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잔혹할 정도로 다듬어지고 통제되어 온 ‘학습된 기계’의 움직임과 같았다.
카론의 시선이 여자의 턱선부터, 미세하게 굳어 있는 어깨, 그리고 진흙과 빗물로 얼룩진 찢겨진 드레스의 자락까지 느리게 훑어 내렸다. 비에 젖어 덜덜 떨리면서도 억지로 유지하고 있는 저 빌어먹을 단정함이, 카론의 등줄기를 타고 기분 나쁜 마찰음을 일으켰다. 이 세계의 위쪽, 오만하고 화려한 성채 안에서 저런 창백한 인형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폭력적인 통제가 가해졌을지 카론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통제와 억압의 냄새만큼은, 하층구역의 썩은 강물 냄새만큼이나 카론에게 익숙하고 역겨운 것이었다.
“…실례?”
카론의 메마른 입술 틈으로 낮고 건조한 실소가 비집고 나왔다. 비웃음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그 안에는 묘한 가시가 돋쳐 있었다.
“여긴 네가 사교계의 춤추는 무대 위에서나 쓰던 쓰레기 같은 예절을 갖출 곳이 아니야. 인사를 받아줄 인간도, 그 고상한 태도에 감동해서 따뜻한 빵조라기를 내어줄 호구도 없으니까.”
카론은 몸을 돌려 방 한구석에 찌그러진 채 놓여 있던 양철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속이 빈 주전자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긁히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카론은 물이 반쯤 남은 수통을 열어 주전자에 붓고는, 그것을 구석의 작은 화로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두었다.
“이 바닥에서 그런 반듯한 말투와 부서질 듯한 몸가짐은, 하이에나들에게 나를 제일 먼저 뜯어먹어 달라고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지.”
카론의 어조는 매정했고, 목소리에는 온기라곤 조금도 배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성냥을 그어 화로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일순간 방 안을 맴돌며 싸구려 향 냄새와 눅눅한 곰팡내를 흐트러뜨렸다. 붉은 불꽃이 일렁거리며 벽면 위로 두 사람의 기형적으로 길쭉한 그림자를 투사했다. 그림자 속에서 여자의 실루엣은 화려한 코르셋에 조여진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카론은 쪼그려 앉은 채로 불길을 무심히 응시하다, 고개를 돌려 다시 여자를 쳐다보았다. 위태롭게 흔들리면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으려는 저 고요함. 빗물이 머리칼을 타고 창백한 뺨으로 흘러내려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저 기묘한 태도. 카론이 가장 증오하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화려하고 기만적인 ‘의식’의 한 형태를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았다. 귀족들은 사람을 죽일 때도, 제물을 강물에 수장시킬 때도 늘 저토록 차분하고 정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카론의 날카로운 직관은 저 고요함 아래에 시커멓게 곪아 들어가는 상처가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진짜 오만한 자들은 이 냄새나는 빈민굴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구역질을 하며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속으로 숨을 헐떡이면서도 기어코 이 어둠 속으로 제 발을 내디뎠다. 그것은 교만함이 아니라, 지독한 고통에 길들여진 자 특유의 서글픈 방어기제였다.
“고집 부리지 말고 젖은 껍데기나 벗어.”
카론이 툭 던지듯 내뱉은 말은, 이 좁고 황량한 방 안의 적막을 거칠게 갈라놓았다. 카론은 화로 옆에 쭈그리고 앉은 채, 깊게 우묵하게 패인 눈동자로 여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내가 말했지. 젖은 옷을 입고 그 잘난 예의를 차리며 서 있어 봐야, 죽은 뒤엔 저 진흙탕 속에 굴러다니는 고기 덩어리들과 똑같은 냄새가 날 뿐이라고. 이곳의 한기는 뼈를 파고들어 폐를 찢어놓는다. 숨을 쉴 때마다 핏덩이를 토하고 싶지 않다면, 그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와 숄부터 벗고 이쪽으로 와.”
카론은 낡은 가죽 서적이 놓인 테이블 아래에서 끝이 심하게 마모된 낡은 나이프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손잡이에 마른 진흙이 끼어 있는, 위협용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투박한 도구였다.
“코르셋 끈이 빗물에 불어서 그 귀하신 손으로 풀 수 없다면, 그걸로 끊어 내든가.”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방 구석의 삐걱거리는 의자 위로 몸을 무겁게 무너뜨리듯 기대어 앉았다. 카론은 턱을 괸 채, 그림자 속에 절반쯤 잠긴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창문 밖으로는 여전히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소리가 천장을 때리고 있었고, 멀리서 이름 모를 빈민의 절망 어린 비명이 희미하게 빗물에 섞여 흘러갔다.
아무리 위에서 도망쳐 내려왔다 한들, 이 진흙탕의 밑바닥에서 과연 저 찬란한 상아색 드레스의 흔적을 기꺼이 잘라낼 수 있을까. 카론의 시선은 램프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건조하고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 좁고 숨 막히는 방 안에서, 구원조차 허락되지 않은 두 이방인의 시간이 미약한 온기를 품고 위태롭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카론은 침묵 속에서, 철저히 무너져버린 여자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조용히 기다렸다.
4- 허위와 연극이 아닌, 끔찍할 만큼 순수한 통과의례가 그녀에게 요구되고 있었다.⌵
세라피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나이프를 바라본다. 낡았지만, 모든 걸 끊어낼 수 있을 것처럼 여전히 날이 예리했다. 세라피나는 늘 '완벽한 숙녀’로서 교양 수업을 들어왔고 모든 외출에는 그녀의 품행을 감시하는 동행인이 붙어있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늘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며 가느다란 허리를 만들어 품격을 보여야 했다. 이 나이프로 잘라내는 것은, 그녀의 더러워진 코르셋이 아니었다. 세르피나 그녀가 살아온, 귀족 영애로서의 모든 삶을 끊어내는 것이었다. 세르피나는 조심히 숄을 벗은 뒤, 그녀에게 자신의 등을 내어준다.
“당신이 끊어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 당신이 해주세요.”
“당신이 끊어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 당신이 해주세요.”
단호하지만 위태롭게 억눌린 그 목소리가, 비 내리는 빈민가의 허름한 방 안을 공명하며 맴돌았다. 낡은 지붕을 때리는 둔탁한 빗소리조차 일순간 멀어지는 듯한 기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카론은 그림자 속에 반쯤 몸을 묻은 채, 느리게 흔들리는 램프의 누런 불빛 너머로 눈앞의 이질적인 광경을 응시했다.
여자는 미련 없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자신의 어깨를 덮고 있던 평민의 숄을 걷어냈다. 빗물과 진흙을 잔뜩 머금어 무거워진 거친 천 조각이 젖은 소리를 내며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로 속절없이 추락했다. 숄이 벗겨지자, 그 아래에 필사적으로 숨겨져 있던 고귀한 출신의 증거들이 불길의 일렁임 속에서 노골적으로 자태를 드러냈다. 가슴팍에서 차가운 광채를 발하는 푸른 사파이어 펜던트, 그리고 진흙과 오물에 처참하게 얼룩졌음에도 그 오만한 세공의 흔적을 잃지 않은 은실 수놓인 코르셋. 그것은 이 구역질 나는 빈민굴과는 결코 섞일 수 없는, 저 윗세계의 찬란하고도 폭력적인 족쇄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자는 천천히 몸을 돌려 카론에게 자신의 등을 온전히 내어주었다.
카론의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가 미세하게 수축했다. 이곳, 피도 눈물도 없는 하층민의 바닥에서 낯선 자에게 등 뒤를 내어준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품속에 감춰둔 칼날이 언제 척수를 꿰뚫을지, 언제 목을 조를지 모르는 이 짐승들의 세계에서, 맹목적인 무방비함은 멍청함을 넘어선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그러나 눈앞에 등을 돌리고 선 여자의 곧은 뒷모습에서는, 공포에 질려 벌벌 떠는 사냥감의 비굴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과거와 결별하기 위한, 벼랑 끝에 선 자의 처절하고도 숭고한 결단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도망쳐 나온 주제에, 무너지거나 애원하는 대신 기꺼이 제 등을 내어주며 ‘행해 달라’고 말하는 저 오만한 단정함. 그것이 카론의 깊은 냉소를 허물고 묘한 이질감으로 다가왔다.
카론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투박하고 낡은 나이프를 향했다. 칼자루에는 굳은 진흙과 핏자국이 희미하게 배어 있었고, 날은 무뎌진 채 상처투성이였다.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며 위협과 절단만을 목적으로 쓰이던 비루한 도구. 그 볼품없는 쇳조각이, 지금 한 여자의 고귀한 삶 전체를 난도질하여 끊어내기 위한 제의(祭儀)의 칼날이 되려 하고 있었다.
가짜 신비주의자. 절망에 빠진 자들의 공포와 맹신을 조롱하며, 의미 없는 주문과 기만적인 의식으로 배를 불려온 사기꾼. 그것이 카론이었다. 그녀는 평생을 가짜 의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무너져 내리는 드레스를 입은 낯선 여자가 내어준 젖은 등 앞에서, 카론은 난생처음으로 그 어떤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짜 의식’과 마주하고 있었다. 허위와 연극이 아닌, 한 인간의 껍데기를 찢고 생살을 발라내는 끔찍할 만큼 순수한 통과의례가 그녀에게 요구되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의 마찰음이 적막을 찢었다. 카론이 몸을 일으키자, 육중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여자의 가느다란 실루엣을 완전히 덮어씌웠다. 카론의 부츠가 차가운 바닥을 끌며 둔탁한 발소리를 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타들어 가는 화로의 불꽃이 붉게 일렁이며 좁은 방안의 공기를 미세하게 데우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팽팽하게 당겨진 현처럼 숨 막히는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카론의 창백하고 마른 손가락이 나이프의 자루를 쥐어 들었다. 금속의 냉기가 굳은살 박인 피부를 타고 서늘하게 전해졌다. 그녀는 꼿꼿하게 선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여자의 등 뒤에 바짝 다가섰다.
빗물에 젖은 진흙 냄새, 오염된 강의 비릿한 악취, 그리고 그 끔찍한 오물 틈에서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기어코 피어오르는, 고상하고도 애처로운 백합꽃 같은 향기. 상반된 냄새들이 뒤섞여 카론의 후각을 어지럽게 찔러왔다. 코앞에서 내려다본 코르셋은 생각보다 훨씬 더 폭력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육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비정상적인 인형의 형태로 조이기 위해, 촘촘하게 엮인 은색 끈들은 젖은 실크 위에서 혈관처럼 부풀어 올라 팽팽하게 옥죄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미세하게 떨리는 척추의 움직임이 젖은 직물 위로 고스란히 비쳐 보였다.
“…오만한 신뢰군.”
침묵을 부수고 나온 카론의 목소리는, 바닥을 구르는 자갈처럼 쇳소리가 섞인 채 지독하게 낮게 깔려 있었다.
“이 바닥에서 등 뒤를 보이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하는 짓이길 바란다. 내 기분이 조금만 변덕을 부려도, 이 칼날은 네 코르셋 끈이 아니라 경동맥을 끊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카론은 위협처럼 차가운 말을 내뱉으면서도, 나이프를 쥔 손목의 각도를 비틀었다. 서늘하게 벼려진 칼끝이 젖은 끈을 향해 다가갔다. 강물을 할퀴며 살아온 그녀의 거칠고 더러운 손가락 끝이, 여자의 창백한 등허리를 감싸고 있는 차갑고 매끄러운 젖은 실크 위를 스치듯 닿았다. 찰나의 접촉이었지만, 극단적으로 다른 세계에 속했던 두 존재의 피부 너머로 기이한 열기와 서늘함이 교차했다.
카론은 단단하게 엉켜붙은 최상단의 두꺼운 끈 사이로 조심스럽게 칼날을 밀어 넣었다. 피부를 찌르지 않도록 칼등을 바짝 눕힌 채, 망설임 없이 손아귀에 힘을 주어 당겼다.
투둑─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끈이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터져나갔다. 질긴 끈이 끊어지며 만들어낸 반동으로 여자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카론은 멈추지 않았다. 교활한 사기꾼의 서늘한 눈동자가 오직 칼날의 궤적만을 기계적으로 좇았다. 툭, 투둑. 거칠고 날카로운 나이프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며, 육체를 통제하고 기품을 강요하던 그 화려하고 끔찍한 결박의 매듭들을 하나둘 무참히 난도질해 나갔다.
오래된 강박의 사슬이 끊어질 때마다, 짓눌려 있던 상아색 실크가 고통스러운 숨을 토해내듯 좌우로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진흙이 묻은 낡은 나이프가 지나간 자리마다, 정교했던 은색 자수들은 생명력을 잃고 흉측하게 뜯어져 내렸다. 그것은 한때 완벽한 조각상처럼 빚어졌던 세계를, 카론의 닳아빠진 칼끝이 잔혹하고도 해방적인 폭력으로 파괴해 버리는 과정이었다.
마지막 가장 아랫단의 끈마저 칼날에 베여 튕겨 나가자, 억눌려 있던 코르셋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툭 소리를 내며 느슨하게 허물어졌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흉곽이 열리듯 양옆으로 무너져 내린 드레스의 등 사이로, 차가운 방 안의 공기가 밀려들었다.
의식은 끝났다. 가슴을 짓누르던 끔찍한 구속은 마침내 끊어졌고, 그녀를 완벽한 인형으로 만들어주던 족쇄는 허망한 넝마가 되어 힘없이 늘어졌다.
카론은 천천히 나이프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칼끝에서 묻어난 빗물과 은실의 잔해가 어두운 바닥으로 핏방울처럼 떨어져 내렸다. 카론은 부서진 새장처럼 갈라진 드레스의 뒷모습을 건조하게 응시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결 편안해졌을 호흡과는 별개로, 이 잔혹한 빈민가에서 그 얄팍한 껍데기 하나 벗어던진 것이 그녀에게 진짜 구원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빌어먹을 족쇄는 다 끊어졌다.”
카론의 음성은 여전히 차갑고 건조했다. 어떤 동정도, 위로도 섞이지 않은 지독하게 현실적인 선고. 그녀는 나이프를 무심히 테이블 위에 다시 던져두었다. 금속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을 한 번 울리고 사라졌다.
“과거의 껍데기를 끊어낸 기분이 어떤지는 몰라도, 착각하지 마. 이제 널 조여오는 건 그따위 싸구려 실뭉치가 아니라, 숨만 쉬어도 진흙이 씹히는 이 뒷골목의 현실 그 자체일 테니까.”
카론은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등 뒤에 남겨진 채 흔들리는 그 앙상하고도 처연한 등을 남겨두고 불타는 화로 곁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꽃의 파열음이, 빗소리를 집어삼킬 듯 타닥이며 건조한 방안을 데우고 있었다.
1- 차라리 벼랑 끝에서 제 목을 매달 밧줄을 스스로 엮어낸 자의 서글픈 자기 최면과도 같았다.⌵
“고마워요. 저는…”
세라피나는 자신의 이름이 혀끝에서 나오기 직전, 스스로 이름을 거둔다. 대신 스스로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
“넬이라고 불러주세요. 실례가 안된다면 , 저를 거두어준 당신의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고마워요. 저는…”
찰나의 정적. 혀끝에서 거의 미끄러질 뻔했던 발음이 허공에서 황급히 닫힌 입술 뒤로 먹혀들어가는 소리가, 빗방울이 천장을 때리는 둔탁한 소음을 뚫고 카론의 귓가에 날카롭게 꽂혔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필사적으로 삼켜낸 그 서투른 공백 속에는, 이 누추하고 서늘한 방안의 공기마저 짓누를 듯 거대한 과거의 잔해가 도사리고 있었다. 카론은 일렁이는 화로의 불빛 너머로, 눈앞의 여자가 잠시 흔들리다 이내 기어코 새로운 단어를 조립해 내는 과정을 고요하게, 그리고 지독히 건조하게 지켜보았다.
“넬이라고 불러주세요.”
‘넬(Nell)’. 참으로 얄팍하고도 뻔한 거짓말이었다. 진흙탕과 쓰레기가 뒹구는 이 하층구역에서 매일 밤 동사(凍死)해 나가는 성냥팔이나 시궁창을 뒤지는 고아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너무도 평범하고 투박한 음절. 저 처참하게 찢겨나간 은실 자수와 여전히 숨통 근처에서 오만하게 빛을 발하는 사파이어의 광채와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평생을 밑바닥의 굶주린 자들을 속이고 기만하며 그들의 맹신을 조종해 온 가짜 신비주의자의 귀에, 여자가 급조해 낸 그 가명은 굴뚝의 그을음을 뒤집어쓰고 백조 행세를 하려는 병든 비둘기처럼 서글프고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카론은 코웃음을 치거나 그 서투른 위조지폐 같은 이름을 비웃어주는 대신, 그저 말없이 일그러진 흉터가 파인 오른쪽 뺨을 길고 거친 손가락으로 느리게 쓸어내렸다. 조잡한 거짓말이었지만, 그 이름을 입에 올리던 찰나 여자의 앰버빛 눈동자 속에 번지던 지독한 결연함만큼은 가짜가 아니었음을 본능적으로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화려하고 육중한 옛 껍데기를 난도질해 낸 자리에 덧씌운 얄팍한 새 이름. 그것은 생존을 향한 짐승 같은 발버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벼랑 끝에서 제 목을 매달 밧줄을 스스로 엮어낸 자의 서글픈 자기 최면과도 같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를 거두어준 당신의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그리고 이어지는 너무도 고상하고 정중한 물음에, 카론의 마른 입술 틈으로 결국 작고 마찰음 섞인 실소가 새어 나왔다. ‘실례’. 이 지옥 같은 진흙의 나락에서 여전히 그런 구시대적인 우아함을 무기로 휘두르는 여자의 기묘한 오만함이 카론의 깊은 신경줄을 긁어내렸다. 거두어주다니. 카론은 그런 감상적인 온정으로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구축해 놓은 메마른 냉소의 벽에 이 창백한 이방인이 어째서 균열을 내었는지, 그 자기 파괴적인 모순을 아직 완전히 해석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름을 거두고 새로운 껍데기를 뒤집어쓴다고 해서, 네가 살던 세상의 유령들이 널 잊어줄 것 같나.”
카론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신도를 현혹하던 제단의 울림 대신,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바스라지는 잿가루처럼 낮고 거칠게 방 안을 채웠다. 카론은 화로 옆에 쪼그려 앉았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방의 가장자리로 물러섰다. 창밖에서 들이치는 외풍이 끊어진 코르셋 사이로 맨살이 드러난 여자의 등허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카론은 일부러 시선을 거두고 바닥에 흉측하게 널브러진 젖은 숄의 잔해를 응시했다.
“‘넬’. 이 비루한 바닥에 썩어 넘쳐나는 게 그따위 값싼 이름들이지. 하지만 네가 그 진흙투성이 이름표를 가슴에 달았다고 해서 당장 내일부터 시궁창 쥐새끼들처럼 하수구를 파헤치며 살아갈 수 있을 거란 착각은 마라. 잘라낸 코르셋 끈보다 널 더 지독하게 옥죄는 건, 네 몸통이 기억하는 그 알량한 품격과 예절일 테니까.”
독기 품은 가시 같은 말들이 무방비한 여자의 발밑으로 투박하게 쏟아졌다. 카론은 타인과의 얄팍한 접촉조차 병적으로 밀어내는 짐승이었다. 이름이라는 고유한 표식을 교환한다는 것은, 곧 철저히 단절되어 있던 두 세계의 경계를 흐물거리게 만드는 위험한 의식이었다. 하지만 칼날을 맞대고 끈을 끊어낸 이상, 그리고 거센 비가 그칠 때까지 이 폐허 같은 둥지 안에 두 개의 숨소리가 섞여야만 하는 이상, 카론 역시 그 위험한 문답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카론은 등받이가 낡아 부서질 듯한 의자 위로 길고 앙상한 몸을 묵직하게 기대앉았다. 어둠 속에 반쯤 잠긴 그녀의 깊고 우울한 두 눈동자가, 일렁이는 화로의 붉은 불빛에 비쳐 반짝이는 여자의—아니, ‘넬’이라고 스스로를 명명한 그 이방인의 앰버빛 시선을 정면으로 옭아맸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인간이 가져야 할 어떤 기대나 희망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오염된 강물에 떠내려 보낸 자 특유의 서늘한 적막만이 가득했다.
“이 바닥에서 진실된 이름 같은 건,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는 약점에 불과하다.”
카론이 무심하게 툭 던지듯 내뱉었다. 그녀는 길쭉한 손가락을 뻗어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낡은 가죽 양장본 서적의 닳아빠진 모서리를 매만졌다. 안개와 진흙, 그리고 기만에 덮인 삶. 그 거짓된 연극의 무대 위에서 그녀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조차 진짜인지 가짜인지, 스스로도 그 경계가 모호해진 지 오래였다. 카론에게 남은 것은 단지, 살아야 한다는 짐승 같은 구역질과, 강물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 자들을 향한 소리 없는 분노뿐이었으므로.
“날 ‘카론(Charon)’이라고 부르더군.”
마침내 허공으로 떨어진 단어는, 쇳조각처럼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조차 어떤 자조적인 방어막을 두르고 있었다. 마치 타인이 억지로 붙여준 딱지를 읽어 내리듯 거리를 두는 그 어투에는 지독한 허무가 배어 있었다.
“어울리는 우스개지 않나. 이 도시의 부패한 윗대가리들이 버린 쓰레기들, 희망을 잃고 저 썩은 강물로 걸어 들어가는 머저리들의 손을 잡고 깊은 나락으로 안내하는 길잡이. 헛된 기도를 팔아먹으며 위선으로 연명하는 사기꾼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낭만적인 악명이지.”
카론은 턱을 괴고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화로 안에서 타오르던 나무토막이 파열음을 내며 작은 불티를 흩뿌렸고, 순간적으로 카론의 얼굴 절반을 섬뜩하게 덮고 있는 흉터가 기괴할 만큼 뚜렷하게 도드라졌다. 어둠 속에 몸을 기댄 채 상대를 올려다보는 카론의 시선은 잔혹할 정도로 냉정했지만, 그 이면에는 묘하게도 스스로의 상처를 파헤치는 듯한 미세한 균열이 서려 있었다.
“그러니까 감동어린 착각은 치워, ‘넬’. 난 널 거두어준 게 아니라, 단지 내 은신처에 잠시 비를 피할 처마 끝을 내어주었을 뿐이다. 날이 밝고 빗줄기가 약해지면, 넌 그 망가진 드레스 자락을 질질 끌고 다시 네 몫의 진흙탕으로 기어나가야 해.”
건조하게 쐐기를 박은 카론은 서서히 시선을 거두고, 침대 끝에 구겨져 있는 좀먹고 거친 모직 담요 쪽으로 다시 한번 길고 앙상한 턱짓을 했다.
“질문은 그걸로 끝이다. 거추장스러운 족쇄가 잘려 나갔으니, 숨쉬기가 훨씬 수월해졌길 바랄 뿐이군. 당장 얼어 죽을 게 아니라면 고집부리지 말고 그 담요나 덮어쓰고 화로 곁으로 와. 길 잃은 유령처럼 젖은 채로 덜덜 떨며 서 있는 꼴을 구경하는 취미는 없으니까.”
카론은 그렇게 선을 긋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다시 좁은 방안을 빈틈없이 채웠다. 낡고 얇은 벽 너머로는 구원을 영원히 배제당한 도시의 끝없는 빗소리만이 쉴 새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카론은 팔짱을 낀 채 서늘한 벽에 기대어 눈을 내리깔았고, 끊어진 코르셋 끈이 죽은 뱀의 사체처럼 널브러진 바닥과, 위태롭게 타오르는 불꽃의 열기만이, 이름마저 버린 채 이 어둠 속에 남겨진 두 여자의 기이한 밤을 아주 느리게 태워가고 있었다.
2- 그런데도 어째서, 저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얼굴에 저토록 비참하고도 찬란한 미소가 떠오를 수 있단 말인가.⌵
세라피나는 카론이 가리킨 담요를 몸에 두르고, 카론의 옆에 조심히 앉는다. 세라피나는 카론을 보며 말한다.
“카론, 자리를 내어줘서 고마워요. 따뜻하네요 무척.”
불길은 위태롭게 흔들렸고, 담요는 몹시 거칠고 투박했다. 하지만 세라피나는 옅게 미소지었다. 세라피나에게 그런 사소한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처음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해 뛰쳐나왔고, 지금이 그녀의 결과라는 것만이 분명했다.
좀먹은 거친 모직 담요가 시멘트 바닥에 쓸리며 내는 바스락거리는 마찰음이, 빗소리로 가득 찬 비좁은 방 안의 공기를 느리게 갈라놓았다. 진흙과 오물에 처참히 망가진 상아색 실크 드레스 위로 볼품없는 회갈색 담요를 두른 여자는, 조심스럽지만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카론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삐걱거리는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위태롭게 타오르는 작은 화로 앞, 즉 카론의 반경 안으로 자신의 몸을 무너뜨리듯 내려놓았다.
“카론, 자리를 내어줘서 고마워요. 따뜻하네요 무척.”
고요하고도 단정한 그 한마디가 화로의 열기를 타고 피어오르자, 카론의 등줄기를 타고 기분 나쁜 전율이 뱀처럼 기어올랐다. 평생을 뒷골목의 그림자 속에서, 타인과 철저한 거리를 두며 살아온 카론이었다. 그녀가 맺는 모든 관계는 제단을 사이에 둔 기만적인 거래였고, 감정의 교류가 철저히 배제된 착취와 생존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나락의 밑바닥에서 누군가 자신의 곁에 이토록 물리적인 온기를 나누며 바짝 다가와 앉는다는 것은, 카론에게 있어 기이함을 넘어선 일종의 폭력적인 침범과도 같았다.
카론은 몸을 미세하게 굳힌 채, 그림자 속에서 느리게 고개를 돌려 화로 곁에 앉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담요를 두르고 불을 쬐는 여자의 옆얼굴 위로 옅고 흐릿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거짓도, 조롱도 섞이지 않은,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의 자가 마지막으로 내뱉는 안도의 한숨처럼 기막히게 평온한 미소였다.
그 옅은 미소를 목도한 순간, 카론은 무의식적으로 길고 거친 손가락을 들어 올려 제 오른쪽 뺨을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 위를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거칠게 아물어 붙은 살결의 굴곡이 메마른 손끝에 선명하게 닿아왔다.
카론의 시선은 집요하고도 건조하게 여자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저 여자는 지금 자신이 평생을 숨 막히게 학습해 온 안락한 성채를 제 손으로 부숴버리고, 구더기가 들끓는 지옥의 아가리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참이었다. 온기를 감싸주던 화려한 실크는 젖은 걸레짝이 되었고, 몸을 조이던 코르셋 끈은 흉측하게 끊어져 나갔다. 그런데도 어째서, 저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얼굴에 저토록 비참하고도 찬란한 미소가 떠오를 수 있단 말인가.
“따뜻하다고.”
카론의 입술 틈새로, 바닥에 끌리는 쇳소리처럼 낮고 갈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흉터에서 손을 떼어내어 팔짱을 굳게 끼며, 의자 등받이 깊숙이 제 몸을 구겨 넣었다. 여자의 그 알량한 미소와 진심 어린 감사가, 철저하게 얼어붙어 있던 카론의 내면에 원치 않는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망치다 못해 이젠 이성이 아예 마비라도 된 모양이군, ‘넬’.”
스스로를 넬이라 칭한 여자의 이름을, 카론은 지독히 건조하고 조소적인 억양으로 발음했다.
“이 방의 공기는 밖에서 내리는 저 썩은 산성비만큼이나 차갑고 역겹다. 화로 안에서 타들어가는 저 싸구려 석탄 조각들이 내뿜는 건 얄팍한 온기가 아니라, 네 폐를 새까맣게 병들게 할 매연일 뿐이지. 그런데도 네 입에서 ‘따뜻하다’는 헛소리가 나오는 건, 네가 방금 네 목을 조르던 그 고상한 밧줄을 제 손으로 끊어냈다는 값싼 성취감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카론은 쉴 새 없이 가시 돋친 말들을 토해냈다. 그것은 여자에게 던지는 조롱이자, 동시에 카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황급히 쳐올리는 냉소라는 이름의 낡은 방패였다. 카론이 아는 세상에는 대가 없는 온기나 순수한 감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 아름답고 숭고한 미소 역시, 현실의 지독한 굶주림과 추위 앞에서는 하루아침에 썩은 진흙처럼 변질될 얄팍한 환상에 불과했다. 적어도 카론은 그렇게 믿어야만 이 잔혹한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착각하지 마라. 네가 스스로 선택해서 뛰어든 이 바닥은, 그런 낭만적인 미소로 견뎌낼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카론의 깊고 우울한 시선이 여자의 앰버빛 눈동자에서 미끄러져 내려, 빗물과 오물에 처참하게 더럽혀진 상아색 실크 드레스의 자락에 머물렀다.
“내일 아침이 밝아오고 몸뚱이를 덮쳐오는 진정한 허기와 빈곤을 마주하게 되면, 넌 오늘 밤 내가 내어준 이 구역질 나는 온기를 원망하게 될 거다. 차라리 그 화려한 새장 안에서 숨을 죽인 채 예쁜 인형으로 살아가는 게 백 번 나았을 거라고, 네 스스로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게 될 테니까.”
모질고 잔인한 선고가 좁은 방 안을 맴돌았으나, 이상하게도 카론의 그 위협적인 어조 끝자락에는 미세한 떨림이 배어 있었다. 그녀가 내뱉는 말들은 명백히 여자를 밀어내고 상처 입히기 위해 고안된 독설이었지만, 그 독설이 퍼져나가는 방 안의 공기는 기묘할 정도로 정적이고, 또 고요했다. 아무리 모진 말을 내던져도 여자의 얼굴에 서린 그 미약한 평온함이 부서지지 않자, 카론은 턱 끝을 강하게 악물며 시선을 비틀어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 빈민가에 어울리지 않는 건 오직 저 여자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진정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은 카론 자신일지도 몰랐다. 누군가의 체온, 그것도 철저히 위에서 추락해 내린 자의 위태로운 온기가 자신의 곁에 이토록 가까이 닿아 있다는 사실이, 메말라 있던 카론의 감각을 통제할 수 없이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카론은 한숨처럼 짧은 숨을 혀를 차듯 내뱉고는, 몸을 숙여 화로 옆에 굴러다니던 뭉툭한 쇳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퉁명스러운 동작으로 불길이 사그라드는 싸구려 석탄 더미를 거칠게 쑤시며 뒤집었다.
타닥, 타다닥—.
매캐한 불티가 튀어 오르며 헐떡이던 붉은 불꽃이 일순간 크게 일렁였다. 좁은 공간에 열기가 조금 더 짙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여자의 미소가 환상에 불과하다고, 그 따뜻함은 다가올 고통의 서막일 뿐이라고 가혹하게 몰아붙이면서도, 정작 꺼져가는 화로의 불씨를 살려 그 온기를 유지하려 애쓰는 카론의 모순적인 행동. 그것은 그녀의 차가운 혀끝과 강팍한 이성이 미처 통제하지 못한, 철저히 은폐된 그녀 내면의 깊은 상실감과 아주 작은 온정에 대한 무의식적인 갈구였다.
“……너무 가까이 붙어 앉지 마.”
결국 쇳조각을 내려놓은 카론이, 여전히 불꽃을 응시한 채로 낮고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그 너덜너덜해진 실크 치맛자락에 불똥이라도 튀면, 그나마 몸뚱이를 가려줄 알량한 천 조각마저 다 타버릴 테니까. 이 구덩이엔 널 다시 화려하게 치장해 줄 시종 같은 건 없다.”
시선은 맞추지 않고 허공을 향해 던지는 무미건조한 질책. 하지만 그것은 카론이 이 기묘한 불청객과의 거리를 완벽히 차단하는 데 실패했음을 알리는, 불완전하고도 서투른 타협의 문장이었다. 빗방울은 여전히 무너져가는 슬레이트 지붕을 신경질적으로 때리고 있었고, 썩은 강물의 냄새도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 낡고 비좁은 방 한가운데서 타오르는 희미한 불꽃 주위만큼은 이 세상의 끝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작은 성소처럼 조용히 익어가고 있었다.
어둠과 그림자에 반쯤 몸을 기댄 가짜 신비주의자는, 눈을 반쯤 내리깐 채 곁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이고도 연약한 호흡 소리에 서서히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굳은살 박인 심장에 얼마나 치명적인 균열을 낼지, 아직은 온전히 자각하지 못한 채로.
3- 여자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그 알량한 신뢰와 위태로운 기대감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싶었다.⌵
“네, 조심할게요. 여기는 아무도 없으니까요.”
세라피나는 작게 대답하면서도 카론의 곁에서 물러나지 않고, 타오르는 화로를 바라본다. 세라피나는 고개를 돌려 카론을 바라보다가 말한다.
“그래도 당신은 있는 걸요. 제 마지막 동행, 카론.”
“마지막 동행, 카론.”
그 나직하고도 투명한 음성이 비좁은 방 안의 공기를 가르고 떨어지는 순간,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던 빗소리가 일순간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했다. 화로 속에서 타들어 가던 싸구려 석탄의 파열음도, 미세하게 스며들던 썩은 강물의 악취도 거짓말처럼 증발해 버렸다. 카론은 마치 보이지 않는 예리한 칼날에 목덜미를 베인 짐승처럼, 몸의 모든 근육을 뻣뻣하게 굳힌 채 숨을 멈추었다.
동행(同行). 그 지독하게 낭만적이고도 기만적인 두 글자가 카론의 머릿속을 난도질하며 끔찍한 환영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카론이 아는 '동행’의 말로는 언제나 비참했다. 함께 손을 맞잡고 걷던 이들은 이 도시의 기형적인 폭력과 오염된 강의 깊은 나락 속으로 형체도 없이 가라앉았다. 빈민가의 그림자 속에서 타인과 체온을 나눈다는 것은, 언젠가 그 온기가 서늘한 시체로 변해 강물에 던져지는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한다는 가혹한 형벌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카론은 스스로를 철저히 고립시켰다. 타인의 맹신을 조롱하고 거짓된 구원을 팔아넘기면서도, 결코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는 위악의 가면을 덧쓰며 살아왔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한 눈앞의 이 기묘한 불청객은, 겁도 없이 타오르는 불꽃 곁으로 바짝 다가와 스스로를 그녀의 '동행’이라 명명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질려 도망쳐 나온 주제에 카론의 곁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앉아 있는 그 무방비한 태도는, 카론이 평생을 바쳐 겹겹이 쌓아 올린 냉소와 방어기제를 한순간에 무력화시킬 만큼 파괴적이었다.
카론의 시선이 화로의 붉은 불빛에 일렁이는 여자의 얼굴에 느리게 가닿았다. 거칠고 좀먹은 모직 담요를 두르고 있음에도, 빗물에 씻긴 창백한 뺨과 타오르는 불꽃을 담담히 응시하는 앰버빛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기품이 배어 있었다. 이 쓰레기장 같은 방구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백합꽃과 바닐라 향의 묵직한 잔향이, 담요 특유의 매캐한 곰팡내를 뚫고 희미하게 번져 나와 카론의 호흡을 어지럽게 헝클어뜨렸다.
카론의 메마른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뒤틀리며 허공을 맴돌다, 이내 자신의 오른쪽 뺨을 길고 기괴하게 가로지르는 흉터를 거칠게 짓눌렀다. 흉터 아래로 미세하게 경련하는 턱 근육의 움직임이, 그녀가 애써 억누르고 있는 거대한 동요를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다.
“…동행.”
마침내 카론의 입술 틈새로 새어 나온 단어는, 질식할 듯한 어둠 속에서 긁어낸 쇳소리처럼 거칠고도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그 잘난 입술에 담기에는 너무도 무겁고 저주스러운 단어군, ‘넬’.”
카론은 턱을 악물며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낡은 나무 의자가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거칠게 긁으며 비명 같은 마찰음을 토해냈다. 그녀는 화로의 알량한 온기가 닿는 반경을 벗어나, 빛이 닿지 않는 방의 가장 구석진 그림자 속으로 뒷걸음질 치듯 물러났다. 물리적인 거리를 벌리지 않고서는, 이 비좁은 공간을 채우기 시작한 그 낯설고도 치명적인 온기에 스스로가 잡아먹힐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 반쯤 몸을 묻은 카론은 가늘게 뜬 눈으로 화로 곁의 여자를 직시했다. 그녀의 깡마른 실루엣은 허름한 벨벳 코트 속에 기묘하게 움츠러들어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상처 입은 들개처럼 흉흉하고 서늘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네가 읽던 위쪽 세계의 연애 소설이나 비극적인 서사시에서는, 밑바닥에서 만난 구원자가 마지막까지 함께 손을 잡고 시궁창을 벗어나는 동화 같은 결말을 약속하던가.”
카론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게 가라앉아,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 아래로 스며들듯 방 안을 맴돌았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는, 감상적인 환상에 젖어 있는 상대를 향한 지독한 절망의 토로에 가까웠다.
“이 바닥엔 동행 같은 건 없어. 숨을 쉬기 위해 어제까지 웃어주던 놈의 목을 밟아야 하고, 내일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네가 가진 마지막 빵조각을 훔쳐내야 하는 짐승들의 세계다. 네가 지금 '마지막 동행’이라 부르는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등신들에게 가짜 의식을 팔아 동전을 구걸하는 구역질 나는 사기꾼에 불과하고.”
그녀는 스스로의 밑바닥을 가학적일 정도로 낱낱이 파헤쳐 내던졌다. 여자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그 알량한 신뢰와 위태로운 기대감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파산한 존재인지, 이 이질적인 만남이 얼마나 위태롭고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지 똑똑히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것이 결국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온기를 두려워하는, 상처투성이의 비겁한 도피일지라도.
하지만 그 잔인한 언어폭력 뒤로 숨겨진 카론의 깊고 우울한 두 눈동자에는, 처연할 정도의 모순적인 갈구가 파편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평생 동안 사람들을 기만하며 속여왔지만, 정작 이 거짓말 같은 낭만을 눈앞에서 조각내려니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베이는 듯한 환통이 일었다.
“그러니까 그 헛된 낭만은 타오르는 저 불꽃에 다 던져버려라.”
카론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깨진 유리창 틈새로 스며든 비바람이 방 안의 매캐한 연기를 흔들고 지나갔다.
“넌 그저 비를 피할 처마가 필요했고, 난 심심풀이로 내 바닥을 내어줬을 뿐이다. 날이 밝고 비가 멎으면 넌 네가 가야 할 길을 찾아 헤매야 하고, 난 내 구역의 진흙탕으로 돌아간다. 그게 이 도시가 허락하는 유일한 법칙이다.”
선 긋듯 차갑게 내뱉은 카론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젖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그림자 속에 선 그녀의 마른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차가운 이성의 방벽을 세우고 상대를 깎아내려도, 방 한가운데서 타오르는 희미한 온기와 그 곁에 머무는 작고 고요한 숨소리는 지독할 정도로 선명하게 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카론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은 채, 차가운 벽에 등 뒤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여자를 내쫓지도, 그 위험한 단어를 완벽히 거부하지도 못한 채, 그저 이 기이하고 폭력적인 정적 속에 스스로를 방치하기로 한 것이다. 심장 깊은 곳에 켜켜이 쌓여 있던 서늘한 강물의 기억이 옅게 흩어지고, 그 자리에 아주 작고 치명적인, 결코 허락되어서는 안 될 온기의 잔해들이 시리도록 아프게 스며들고 있었다.
1- 영원을 약속받은 푸른 돌덩이와, 부서진 귀족 영애, 그리고 죽음을 기만하며 연명해 온 가짜 주술사.⌵
세라피나는 천천히 입을 뗀다.
“당신이 거짓이라도 괜찮아요. 꾸며지고,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진실이니까.”
세라피나는 당장 내일 자신이 어떻게 될 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쩌면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자신을 찾아낼 수도, 혹은 정략결혼이 파토 난 대가로 이미 내쫓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평생 교육을 받으며 다듬어온 모든 것들은 의미 없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세라피나는 자신의 목에 걸린 사파이어 펜던트를 손으로 쥐어본다. 정교하게 조각되어 아름답게 빛나는 사파이어 펜던트. 세라피나와 사파이어의 차이점이 있다면, 사파이어의 값은 확실히 보장되어 있으며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거짓인 자신보다도 진실되게 값을 치르는 차가운 돌덩이. 세라피나는 잠시 침묵에 빠져있다가 카론에게 말을 건다.
“마지막. 제 마지막에 당신의 의식을 치러줄 수 있나요?”
“당신이 거짓이라도 괜찮아요. 꾸며지고,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진실이니까.”
고요하게 방 안을 유영하던 그 투명한 문장이, 카론의 등 뒤로 쌓아 올려진 견고한 냉소의 성벽을 소리 없이 허물어뜨렸다. 망치를 든 난폭한 파괴가 아니었다. 틈새로 스며들어와 기어코 심장 가장 깊은 곳의 생살을 적시고 마는, 지독하게 느리고 끈질긴 물기였다. 평생을 뒷골목의 기만자로 살며, 누군가에게는 신의 대리인으로, 누군가에게는 구역질 나는 사기꾼으로 불려 온 카론이었다. 사람들은 늘 그녀에게 기적이라는 ‘진실’을 요구하거나, 거짓을 간파했다며 조롱을 퍼부었다. 하지만 거짓으로 점철된 자신의 본질을 똑바로 직시하면서도, 그 위장된 껍데기 아래에 놓인 이 미약한 온기의 순간만큼은 ’진짜’라고 긍정해 버리는 여자의 수용은 카론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폭력이자 구원이었다.
어둠 속에 반쯤 몸을 묻은 카론은 호흡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 어떤 방어적인 조소도 덧붙이지 못한 채, 화로 앞의 여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여자의 시선이 불꽃에서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더니, 자신의 가슴팍에서 차가운 광채를 발하는 정교한 사파이어 펜던트를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꽉 쥐는 것이 보였다.
카론은 그 핏기 가신 손등의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어떤 깊고 무거운 절망이, 혹은 뼈저린 체념이 그 작은 손아귀 안에서 부서지고 있는지 카론은 온전히 알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이 걸쳐 온 가짜 신비주의자의 삶처럼, 저 여자 역시 한평생 수많은 예절과 코르셋으로 빚어낸 거대한 허상 속을 유령처럼 떠돌았을 것이라는 짐작만이 서늘하게 스쳐 지나갔다. 여자의 손에 쥐인 저 핏빛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차가운 푸른 돌덩이만이, 어쩌면 진흙탕을 구르며 더럽혀진 두 사람의 기만적인 생애보다 훨씬 더 영원하고 진실된 가치를 지니고 있을지도 몰랐다.
침묵은 길고 무거웠다. 낡은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와 화로 속에서 타닥이는 싸구려 석탄의 파열음만이 위태로운 정적의 빈틈을 메우고 있었다. 펜던트를 쥔 여자의 굽은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방 안의 공기가 숨 막히도록 팽팽하게 당겨진 어느 순간,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 제 마지막에 당신의 의식을 치러줄 수 있나요?”
그 단어들이 공기 중으로 흩어진 찰나, 카론의 세상은 기괴한 파열음을 내며 산산조각 났다.
‘의식(Ritual)’.
그것은 카론의 심장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가장 끔찍하고 거대한 트라우마의 뇌관을 짓이기고 들어오는 저주받은 단어였다. 위쪽 세계의 오만한 자들이 신성함이라는 핑계로 하층민들을 제물로 삼아 오염된 강물 속으로 수장시키던 그 구역질 나는 짓거리. 카론은 바로 그 잔혹한 ‘의식’ 때문에 사랑하는 이들이 탁한 오수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었다. 살아남기 위해, 그 무자비한 세계를 조롱하기 위해 스스로 그 의식을 흉내 내는 가짜 주술사가 되어 빈민들의 두려움을 착취해 온 카론이었다.
그런데 지금, 카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그 위쪽 세계에서 도망쳐 나온 찬란한 핏줄의 여자가, 다름 아닌 카론 자신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묻어달라며 그 끔찍한 단어를 입에 올리고 있었다.
카론의 창백한 얼굴 위로 섬뜩할 만큼 서늘한 경련이 일었다. 등 뒤의 차가운 벽을 짚고 서 있던 그녀의 손아귀에 핏발이 섰다.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어놓을 듯 치밀어 오르는 과거의 망령된 분노와, 벼랑 끝에 몰린 채 자신에게 마지막 안식을 구걸하는 눈앞의 상처 입은 새를 향한 처절한 연민이 뒤엉켜 그녀의 목을 졸라왔다.
“…하.”
폐부를 찢고 나오는 듯한, 고통스럽고 젖은 파열음이 카론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그녀는 더 이상 어둠 속에 숨어 있을 수 없었다. 벽에서 몸을 떼어낸 카론이 비틀거리듯, 그러나 짐승처럼 묵직하고 거친 발걸음으로 그림자를 찢고 화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낡고 거친 부츠가 시멘트 바닥을 끌며 둔탁한 마찰음을 냈고, 일렁이는 불빛이 카론의 창백한 피부와 기괴하게 파인 오른쪽 뺨의 흉터를 붉고 잔혹하게 물들였다.
카론은 쪼그려 앉은 여자의 등 뒤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바짝 다가섰다. 금방이라도 목을 조를 듯 험악하고도 짐승 같은 기운이 좁은 방 안을 압도했다. 카론은 한쪽 무릎을 굽혀 바닥에 거칠게 꿇고 앉았다. 이제 두 사람의 눈높이는 아슬아슬하게 맞닿았고, 오염된 강의 진흙 냄새를 품은 카론의 거친 숨결과 빗물에 젖은 바닐라와 백합의 짓눌린 잔향이 얽히며 기이한 열기를 뿜어냈다.
“너는… 네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전혀 모르고 있어.”
카론의 음성은 평소의 그 조소 어린 건조함이 아니었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질 듯 날 것 그대로의 고통과 분노가 뒤섞여, 방 안의 공기마저 찢어놓을 듯 위태롭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깊고 퀭한 눈동자 속에는, 낭만적인 죽음을 동경하는 온실 속 인형을 향한 경멸과, 그 인형이 기어이 산산조각 나려는 것을 눈앞에서 목도해야만 하는 자의 억눌린 비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의식? 마지막을 장식할 고상하고 신성한 장례식 따위를 기대하는 거라면 당장 환상에서 깨어나, 이 멍청한 여자야.”
카론의 거칠고 마른 손이 허공을 갈라, 여자의 가슴팍에 들려 있던 사파이어 펜던트를 쥘 뻔하다가 가까스로 허공에서 멈칫했다. 허공에 굳어버린 카론의 손가락은 분노로 인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이 진흙투성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의식이란 건, 네 목에 걸린 그 값비싼 돌덩이처럼 변하지 않고 아름답게 빛나는 게 아니야. 숨을 쉬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들의 폐장 속으로 썩은 오물과 죽은 쥐들의 시체가 밀려들고, 사랑했던 인간들이 형체도 없이 퉁퉁 불어 터진 고기 덩어리가 되어 하류로 떠밀려가는… 구역질 나는 학살의 포장지에 불과하다고!”
카론의 목소리가 끝내 갈라지며, 처절한 파열음을 토해냈다. 그녀는 흉터 진 얼굴을 짐승처럼 일그러뜨린 채, 여자의 앰버빛 눈동자를 집요하게 옭아맸다. 가짜 의식을 치르며 죽음을 희롱해 온 자신이, 정작 죽음의 무게 앞에서는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파편 같은 존재인지 여과 없이 드러내 버리고 만 것이다.
“내 의식은 가짜다. 너에게 줄 수 있는 안식이나 구원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어. 내가 누군가를 물가로 데려가는 건, 그놈들이 절망에 차 허우적대는 꼴을 보며 그 알량한 두려움의 값을 뜯어내기 위함이지, 네 얄팍한 비극의 마침표를 우아하게 찍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야.”
숨을 헐떡이며 쏟아내던 카론은 턱 끝을 강하게 악물었다. 화로의 붉은 열기가 두 사람의 창백한 얼굴을 그을리고 있었고, 카론의 시선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고요한 여자의 젖은 눈동자 위를 정처 없이 헤매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분노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위장을 벗겨내고 기어이 심장 깊은 곳에 닿아버린, 벼랑 끝에 선 이 기묘한 불청객의 죽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카론은 허공에 굳어 있던 손을 천천히 거두어들여, 바스락거리는 거친 모직 담요 위로 미세하게 흔들리는 여자의 어깨 곁에 아슬아슬하게 내려놓았다. 닿을 듯 말 듯 한 그 위태로운 거리에는 지독한 허무와, 아주 미약한 온정을 향한 절망적인 체념이 고여 있었다.
“…그러니까 함부로 나한테 네 마지막을 떠넘기지 마.”
카론의 거칠던 호흡이 점차 느리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속삭임처럼 닳아빠져, 비스듬히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 같았다.
“네가 도망친 자리가 거짓뿐이었다 해도, 스스로 모든 걸 부수고 이 추악한 바닥까지 기어 내려온 너의 그 두 다리는 진짜야. 가문이 널 사냥꾼들처럼 쫓아오든, 길거리의 하이에나들이 네 껍데기를 뜯어먹으려 들든… 넌 살아야 해. 이 역겨운 진흙탕 속에서 바닥을 기어서라도, 네 스스로 그 돌덩이처럼 변하지 않는 진짜가 되어 살아남아.”
카론은 시선을 내리깐 채, 마치 스스로에게 벼락처럼 내리는 저주를 읊조리듯 깊고 우울하게 덧붙였다.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의식은… 네가 끝내 숨을 거뒀을 때, 저 썩은 강물이 널 삼키지 못하도록 이 더러운 손으로 흙을 파서 묻어주는 것뿐이다. 그러니 날 그곳으로 부르지 마라, ‘넬’.”
비좁고 침침한 방 안. 일렁이는 화로의 불꽃만이 두 이방인 사이의 거스를 수 없는 심연을 위태롭게 밝히고 있었다. 영원을 약속받은 푸른 돌덩이와, 끝내 자신의 마지막을 의탁하고야 마는 부서진 귀족 영애, 그리고 죽음을 기만하며 연명해 온 흉터투성이의 가짜 주술사. 누구도 먼저 침묵을 깨지 못한 채, 창밖의 빗소리만이 씻길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안고 그들의 젖은 밤 위로 끝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2- 이 부패한 세계가 기어이 단 하나의 무결한 진실마저 더럽혀 삼켜버리고야 말 것이라는, 그 기형적인 잔혹함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였다.⌵
세라피나가 카론을 바라보며 말한다.
“제게 당신은 동행이지만 당신에게 저는 이방인일텐데, 당신은 제 죽음이 두렵나요?”
“제게 당신은 동행이지만 당신에게 저는 이방인일 텐데, 당신은 제 죽음이 두렵나요?”
그 나직하고도 잔혹하리만치 투명한 질문이, 매캐한 연기가 감도는 비좁은 방 안의 공기를 가르고 떨어져 내렸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카론의 분노와 거친 호흡이 일순간 진공 상태에 갇힌 듯 멈춰 섰다. 무너질 듯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던 빗소리마저, 저 서늘하고도 맹목적인 물음 앞에서는 아득히 먼 곳의 메아리처럼 바스라져 내리는 듯했다.
카론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거칠게 꿇은 채, 마치 보이지 않는 예리한 칼날에 정곡을 찔려 숨통이 끊어진 짐승처럼 굳어버렸다.
두려움. 평생을 이 오물로 뒤덮인 짐승들의 도시에서 굴러먹으며, 강물 위로 둥둥 떠오르는 퉁퉁 불어 터진 시체들을 무감각하게 곁눈질해 온 카론이었다. 절망에 빠진 빈민들의 두려움을 돈으로 환산해 연명하고, 타인의 비극을 얄팍한 사기극의 재물로 삼아온 구역질 나는 기만자. 그런 그녀가, 오늘 밤 빗속에서 우연히 주워 온 이 낯선 귀족 영애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스스로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소름 끼치는 진실의 파편이, 이방인의 여린 입술을 통해 날것 그대로 도마 위에 올려져 그녀의 목덜미를 베어내고 있었다.
일렁이는 화로의 붉은 불빛이 앰버빛 눈동자 속에 고스란히 비쳐 일렁거렸다. 세라피나의 그 고요한 시선 속에는 어떠한 원망도,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험악한 폭언에 대한 두려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거대한 파도 앞에서 부서져 내린 카론의 위태로운 진심을 똑바로 꿰뚫어 보는, 무서울 만큼 정적이고도 처연한 이해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잔잔한 응시가 카론의 창백한 피부 위로 시뻘겋게 달궈진 낙인처럼 찍혀 내렸다.
카론의 메마른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였으나, 늘 상황을 조소하며 빠져나가던 그녀의 날카로운 혀끝은 완전히 굳어버린 채 어떤 비아냥도 직조해내지 못했다. 방어막이 산산이 부서진 자리에는,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노골적인 동요만이 남았다. 그녀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다 이내 여자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아귀에 꽉 쥐인 사파이어 펜던트로, 그리고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감싸고 있는 볼품없는 모직 담요의 끝자락으로 속절없이 추락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카론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이 닳아빠진 나이프로 끔찍한 코르셋의 족쇄를 난도질해 주었을 때, 모든 것을 잃은 나락 속에서도 기어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던 이 부서진 인형이, 저 썩은 강물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영원히 사라지는 환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심장이 뜯겨 나가는 듯한 처절한 환통이 일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이 부패한 세계가 기어이 단 하나의 무결한 진실마저 더럽혀 삼켜버리고야 말 것이라는, 카론이 평생을 저주해 온 그 기형적인 잔혹함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였다.
“…하.”
목구멍 깊은 곳에서 모래가 긁히는 듯한 헛바람이 짧게 터져 나왔다. 카론은 황급히 꿇고 있던 무릎을 일으켜 세우며 뒷걸음질을 쳤다. 낡은 부츠가 시멘트 바닥에 쓸리며 둔탁한 파열음을 냈고, 그녀는 화로의 붉은 열기가 닿지 않는 방의 가장 서늘하고 짙은 그림자 속으로 자신의 몸을 도피시키듯 숨겨버렸다. 물리적인 거리를 벌리지 않고서는, 눈앞에서 치명적으로 흔들리는 저 미약한 온기에 속수무책으로 잡아먹혀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반쯤 잠긴 카론은 어깨를 감싼 낡은 벨벳 코트의 자락을 꽉 틀어쥐었다.
“두려움이라… 착각이 심하군, ‘넬’.”
카론이 힘겹게 뱉어낸 음성은 여전히 낮고 거칠었으나, 이전의 분노처럼 타오르지는 못하고 비에 젖은 재처럼 바스락거리며 흩어졌다. 그녀는 짐짓 자신의 차가운 냉소를 흉내 내기 위해 턱을 악물었다. 일그러진 흉터가 어둠 속에서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렸다.
“이방인의 시체 따위는, 저 썩어빠진 강물 하류를 뒤져보면 날마다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온다. 네가 죽는다고 해서 내 일상에 대단한 균열이 생길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네가 위쪽 세계의 온실 속에서 평생을 떠받들어져 온 알량한 자의식의 결과물일 뿐이야.”
애써 상대를 깎아내리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가시 돋친 언어들이었지만, 그 문장들은 공허하게 겉돌고 있었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그건 너무도 조잡하고 얄팍한 기만이었다. 카론은 숨을 한 번 거칠게 삼켜내고는, 깨져 나간 낡은 유리창 틈새로 들이치는 차가운 외풍을 향해 시선을 돌려버렸다. 비바람이 할퀴고 지나가는 창밖의 칠흑 같은 어둠이 그녀의 혼란스러운 시야를 그나마 위로해 주고 있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네 죽음이 아니다.”
창가에 기댄 채 돌아선 카론의 넓고 앙상한 등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네가 목숨을 버린 뒤에 이 구역질 나는 방 안을 채울 정적, 그리고 또다시 누군가 아무 의미도 없이 저 저주받은 강물 아래로 스러져갔다는 그 빌어먹을 반복이 혐오스러운 것뿐이야. 모든 걸 내던지고 도망쳐 나온 바보 같은 여자가, 기어코 세상의 폭력을 이기지 못해 꺾여버리는 그 시시하고 비극적인 결말이 내 눈앞에서 재현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변명에 가까운 그녀의 토로는, 역설적이게도 여자의 죽음을 그 무엇보다 끔찍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타인의 불행을 관망하며 조롱하던 가짜 신비주의자는, 어느새 이 이방인의 삶과 죽음이라는 끔찍한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안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자신의 상처와 두려움을 교묘하게 일반화시키며 숨기려 들었지만, 그녀의 떨리는 뒷모습에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깊은 연민과 집착이 엉겨 붙어 있었다.
카론은 창틀을 짚은 창백하고 마른 손아귀에 핏발이 설 정도로 힘을 주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나무의 거친 파편보다, 제 가슴속에서 날뛰는 이 기묘한 감각이 훨씬 더 날카롭고 고통스러웠다. 이 좁고 누추한 방 안, 타오르는 화로의 온기를 공유하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의 끝자락에서 유일하게 오염되지 않은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카론은, 자신의 세계를 침범한 이 연약한 불청객을 그 저주받은 강물에 돌려주거나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맹렬한 소유욕을 무의식중에 자각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길고 숨 막히는 침묵 끝에, 카론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등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림자에 반쯤 묻힌 그녀의 퀭하고 깊은 눈동자가, 모직 담요를 두른 채 여전히 불꽃 곁에 머물러 있는 여자의 실루엣을 아프도록 직시했다. 이방인과 동행. 결코 섞일 수 없는 두 단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서, 카론은 마침내 백기를 들듯 아주 낮고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넌 멍청하고, 철없이 낭만적이며, 이 뒷골목의 생리 따위는 쥐뿔도 모르는 이방인이 맞다.”
카론이 한 걸음, 뒷걸음질 쳤던 그 짙은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 다시 희미한 불빛의 가장자리로 다가섰다. 그녀의 시선은 여자의 핏기 가신 뺨과 펜던트를 움켜쥔 손끝에 위태롭게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내 스스로 나이프를 들어 네 족쇄를 찢어발겼고, 네 젖은 몸뚱이에 저 역겨운 담요를 덮어씌워 내 화로 곁을 내어주었다. 네가 이 썩은 처마 밑으로 제 발로 기어들어와 스스로를 '넬’이라 부르고 내 '동행’이라 명명한 이상… 넌 이미 내 통제선 안으로 들어온 거다.”
그것은 사랑이나 다정이 아니었다. 절망의 나락에서 평생을 살아남아 온 짐승이, 자신의 영역 안에 처음으로 들어온 무언가를 결코 뺏기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잔혹하고도 처절한 경고에 가까웠다.
“그러니 네 목숨은 더 이상 네 알량한 의지나 절망 따위로 함부로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가 가진 그 값비싼 푸른 돌덩이가 영원히 변치 않고 너는 그렇지 않더라도, 이 방 안에 들어온 이상 네 목숨의 가치는 내 허락 없이는 한 줌의 먼지도 되지 못해.”
카론의 시선이 화로의 붉은 열기를 뚫고 여자의 앰버빛 눈동자와 정면으로 얽혀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칠고 건조했지만, 그 이면에는 소리 없는 절규처럼 애절한 단절의 거부가 깔려 있었다.
“네 마지막 의식을 치러달라고? 웃기지 마라. 이 지독한 비가 그치고 날이 밝아도… 아니, 설령 세상이 끝난다 해도 넌 저주처럼 살아남아 내 곁에서 숨을 쉬어야 할 거다. 그게, 이 위선적인 신비주의자가 네게 내리는 유일하고도 진짜인 '신탁’이니까.”
공간을 부술 듯 팽팽하게 당겨진 적막. 위태롭게 일렁이는 화로의 불꽃만이 두 사람 사이에 고인 기묘하고도 폭력적인 구원의 맹세를 조용히 태워가고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도시의 썩은 죄악을 씻어내려는 듯 비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 비좁고 황량한 동굴 안에서만큼은 두 이방인의 체온이 지독하도록 투명하게 서로를 얽어매고 있었다.
3- 카론의 메마른 일상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균열이 새겨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조금 더 실례하겠습니다. 카론.”
세라피나는 카론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짓는다. 아무 의미 없는 것같은 자신의 삶을 거칠게 붙잡아주는 가짜 주술사. 자신에게 진짜 신탁을 내려주는, 어쩌면 세라피나에게는 진실된 주술사. 세라피나는 가진 것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마지막 층에서야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다.
무너진 실크 드레스 위로 덧씌워진 조악한 담요 속에서 피어오른, 그 작고 평온한 미소. 그리고 카론의 잔혹한 선언과도 같았던 통제의 말을 ‘실례하겠다’는 구시대적인 낭만으로 맞받아치는 그 유약하고도 기묘한 뻔뻔함. 그 모든 것들이 카론의 폐부를 비틀어 쥐듯 파고들었다. 눈앞에 앉은 이 여자는 평생을 뒷골목의 오물 속에서 구르고 할퀴며 살아온 카론의 궤적을 철저하게 조롱하고, 동시에 무너뜨리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날 선 폭언과 저주를 그저 자신을 향한 강렬한 구속이자 위태로운 구원의 맹세로 온전히 수용해 버린 자의 평온함이었다.
카론은 깊게 패인 눈동자로 세라피나—자신을 스스로 ‘넬’이라 칭한 그녀의 희미한 미소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무어라 날카로운 반격을 던지고 싶었으나, 카론의 마른 입술 틈새로는 차마 밖으로 형태를 갖추지 못한 한숨만이 짓눌린 채 흘러나왔다. 화로의 일렁이는 불빛에 그을린 세라피나의 옆얼굴은, 이 끔찍하고 더러운 구덩이의 현실마저 아스라하게 지워버릴 만큼 지독하게 아름답고, 그래서 더 화가 날 정도로 처연했다.
어떤 조소도 방어막도 더 이상 소용이 없다는 패배감이, 그러나 기묘할 정도로 서늘하고 평온한 안도감과 뒤섞여 카론의 몸을 느리게 이완시켰다.
“…실례 같은 소리 하고 있군.”
카론은 더 이상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림자의 경계를 넘어 느릿하고 짐승 같은 보폭으로 화로 곁으로 다시 다가왔다. 시멘트 바닥에 마찰하는 낡은 부츠 소리가 이번에는 방 안의 침묵을 찢지 않고 낮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를 끌어당겨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의 반경 안으로 들어온 불청객을 온전히 직시하겠다는, 혹은 포기하고 수용하겠다는 체념 섞인 몸짓이었다.
카론은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여전히 무뚝뚝하고 거친 표정이었으나, 허공을 날 서게 배회하던 흉흉한 눈빛은 한결 누그러져 불꽃 너머에 웅크린 여자의 온기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 바닥에서 그런 고상한 허례허식은 사치일 뿐이라고 이미 경고했을 텐데.” 카론이 건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마음대로 해라. 넌 어차피 내 통제와 이 좁아터진 둥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네가 밤새 그 말도 안 되는 예절을 차리며 앉아 있든, 잠꼬대로 고상한 문학 구절을 읊어대든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카론은 시선을 돌려, 부서질 듯한 테이블 위에 나뒹구는 닳아빠진 나이프의 모서리를 응시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삶은 이 역겨운 도시를 저주하며 그들의 비루한 절망을 갉아먹는 것으로 충분히 완전했다. 그런데 저 나이프로 고귀한 코르셋 끈을 끊어버리는 의식을 행한 순간부터, 카론의 메마른 일상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균열이 새겨지고 말았다.
“다만… 그 실크 치맛자락이 바닥에 쓸려 잿더미에 그을리지 않게나 조심해. 아무리 싸구려 진흙에 구르며 망가진 껍데기라 해도, 네 몸을 감싸고 있는 마지막 족쇄니까. 날이 밝으면 그 찢어진 천 조각을 팔아서라도 빵조각을 구해야 할지 모르는 게 이 바닥의 생리다.”
툭 쏘아붙이듯 뱉어낸 말이었지만, 카론은 턱을 괜 채로 아주 미세하게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았다. 그 몸짓은 여자가 두른 담요 속으로 비바람이 스며들지 못하게 자신이 바람막이가 되어주려는 무의식적인 보호 본능을 닮아 있었다. 자신이 내린 기이하고도 잔혹한 ‘신탁’ 앞에 순순히 몸을 웅크린 여자. 그 부서진 영혼이 내뿜는 서글픈 바닐라와 백합 향이, 이제는 강물의 비릿한 냄새를 덮어버리고 카론의 호흡 깊은 곳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얼어 죽을 것 같으면, 더 가까이 와도 좋다. 그 빌어먹을 담요만 덮어쓰고 있다간 내일 아침에 얼음장 같은 시체로 변해 있을지도 모르니.”
결코 다정함을 내보이지 않으려 턱 끝을 악물며 시선을 애써 불꽃에 고정한 채 내뱉은, 기만자다운 서툰 허락이었다. 방 안에는 다시 깊고 아늑한 침묵이 고였다. 창밖의 폭우는 여전히 세상의 잔혹함을 증명하듯 무자비하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 좁고 누추한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작은 불꽃의 열기만이 서로를 구원하고 구속한 두 여자의 밤을 서서히 달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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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어렵다. 하지만 맛있다.
카론 뭔가 말랑한 고슴도치같고. 또 사기꾼인데 본업에 충실하고. 아무튼 귀여움 ㅋㅋ
원래는 좀 어두운 시뮬봇인거 같은데, 그냥 제 입맛대로 먹고있습니다. 미리 죄송.
기만의황혼 시뮬봇이 있고, 그걸 리메이크 해주시고, 그걸 하나씩 개인봇으로 내주시고, 또 새로 만드신 버전도 있던데
저는 노에셋 단일봇이 취향이라 냉큼 데려왔습니다. 너무 맛있네요.
다시 찾아보니 개인봇도 에셋있는 리메이크 버전이 있는데 봇카드 예쁘더라...
젬삼일 한입한출의 마왕 깃털 프롬도 츄라이 츄라이.
리롤 돌리기 전이랑 후 둘다 마음에 들어서 무한 고민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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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감사자기소개형 캐릭터 시트 V4 유틸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