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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도지챈러들. 오늘은 영종도의 조선시대에 대해서 알아볼 거야.


 조선시대 영종도에 대한 첫 기록은 1401년에 있어. 내용은 또 다시 왜적한테 털렸다는 거야ㅋㅋ 영종도는 조선 시대에도 수 차례 왜구한테 침략당하는데, 조선 후기에 그 끝판왕 격인 사건이 발생하게 돼. 그 사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다룰게.


 조선 초기, 1428년 무의도를 시작으로 1431년 용유도, 1436년 영종도에 국영 말 목장이 설치돼. 영종역사관 자료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삼목도, 신불도에도 소규모의 국영 목장이 있었다 하고. 목장의 면적은 자그마치 영종도 면적의 50%가 넘었다고 해. 


 이 시기 영종도(1450년 전후)에는 30여 호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해. 일할 수 있는 성인 남성(당시 기준) 3명을 묶어 1호로 치니까, 현대식으로 계산해본다면 어린이, 노인, 아녀자까지 합해 총 200명 전후의 주민들이 거주했다고 볼 수 있어.


 이 시기에 영종도, 신불도에 건설된 목장은 효종 시기인 1653년, 영종진이 이전해오고 1678년(숙종 4년)에 영종진을 위한 군량미 확보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폐쇄돼. 그 자리에는 둔전(고려 ·조선 시대에 군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한 토지)이 설치되었어. 두 목장에서 기르던 말들은 용유도, 무의도의 목장으로 옮겨갔어. 삼목도에 있던 목장은 임진왜란 시기에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고 전해져.


 영종진이 현재의 경기도 화성에서 이전해온 것은 주로 강화도 방어 및 자연도 앞바다가 조운선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중요한 해역이기 때문이었어. 그뿐만 아니라 유사시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힐 경우 제물포->자연도->강화도 루트를 확보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해. 다만, 청나라인들이 자연도를 거쳐 강화도로 들어가는 우회로를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전해져.


 영종진의 세력은 급격히 커졌어. 당시 영종진은 현재의 작약, 월미도를 포함해 영종도+용유도를 행정구역으로 삼고 있었으며 인천, 부평, 안산의 수군업무까지 관할했다고 해.


 1866년, 병인양요 시기에 영종진 역시 프랑스군과 마주치게 돼. 이때 프랑스 함대 7척이 작약도에 정박하고, 영종첨사 심영규가 함대 중 한 척인 데루레드호에 올라타 사정을 물으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해.  이후 유격장 신효철이 관서 포수 300명을 이끌고 영종도에 재침입한 프랑스군을 방어했다고 전해져. 다만 이때는 직접적인 인명피해가 나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


 1년 후인 1867년, 영종도는 방어영으로 승격되고 여러 차례의 군비 강화를 거쳐. 그리고 1868년 그 유명한 오페르트 일행이 영종도에 침입하게 돼. 하지만 큰 사고를 치지는 못하고 쫓겨나.


 이후 신미양요 때도 미국 함대가 작약도에 정박하는 등의 사건이 있었지만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는 않았어.


 그런데 1875년, 사건이 터져. 왜구의 침략이었어. 문제는, 침략해온 왜구가 옛날의 그 왜구가 아니라, 일본군이었다는 거지. 바로 운요호 사건이야. 당시 강화도 초지진 점령에 실패한 일본 함대는 남하해 영종진을 공격했어. 일본군은 보트 2척을 나눠 타고 영종도에 상륙했고, 영종진 측에서는 첨사 이민덕과 600여 명의 군인들이 응전했지.


운요호 사건을 그린 그림


 하지만 그 동안의 군비 강화가 무색하게도 영종진은 점령당하고 말았어. 당시 영종진 측에서 성문을 굳게 걸어잠그자 일본군은 북문, 서문, 동문으로 나뉘어 일제히 돌격해 문을 부수고 영종진을 점령했지. 이 사건으로 35명의 조선군이 죽고 16명이 부상당했어. 처참히 파괴된 영종진은 이후 백운산 자락, 현재의 영종중학교 자리로 이전하게 돼.


 반면 일본군은 단 2명만이 부상당하고, 나가사키로 귀환하던 중 1명이 사망하는 미미한 피해만을 입었을 뿐이었어. 일본군은 영종진의 각종 군기(Flag)를 비롯한 온갖 물품들을 싹 다 털어갔지. 아래쪽에 링크된 인천일보 기사의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 알뜰살뜰하게 다 챙겨간 걸 볼 수 있어.


 조선 정부는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방어사 이민덕을 파면하고, 전몰자에게 위령제를 지내 줬으며, 부상자 치료에 전념했어. 또한 영종진 복구를 위해 내탕금 5천 냥을 내렸지. 계속 명맥을 이어 오던 운요호 사건 전몰자 위령제는 일제강점기 시기 중단되었으나, 지난 2005년부터 다시 시작되었어. 현재는 씨사이드파크 영종진공원에 전몰자를 위한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영종진전몰영령추모제 역시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어. 씨사이드파크에 갈 계획이 있는 사람은 영종진공원에 있는 추모비에 들러보는 걸 추천해.


영종진공원 전몰영령추모비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 기조를 버리고 강화도조약을 맺는 등, 본격적으로 일제강점기를 향해 달려가게 돼. 그 배경에는 이 운요호 사건이 있어. 만약 그때 영종진에서 일본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면 어떨까, 역사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지만,  모두 알다시피 역사에 '만약' 이란 없지. 


 운요호 사건 이후 9년이 흐른 1884년,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용유도와 무의도에서 명맥을 이어 오던 목장이 폐지돼. 

그리고 1895년, 250년 동안 영종도를 지키던 영종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돼. 


 긴 글 읽어줘서 고마워. 다음 번에는 영종도의 근대와 현대에 대해 다루도록 할게^^

자료 출처

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58900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5l1a&articleno=6382454&categoryId=171709®dt=20060120225407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5l1a&articleno=6276289&categoryId=171709®dt=20060115120646

http://www.yeongjo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85

http://enews.incheon.go.kr:9080/publish/php/articleview.php?idx=10900&diaryDate=2015-11-10

영종역사관 전시자료(오프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