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레쥐스(Fréjus) 터널 - 1871년 9월 17일 개통 (13.7km)

몽스니(Mont Cenis) 터널이라고도 불리는 1871년 개통된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프레쥐스 고개를 뚫는 복선 터널임. 크게 보면 리옹에서 토리노를 잇는 축선에 놓인 터널로, 알프스를 관통하는 산악터널의 개념을 제시한 터널.


1850년대에 사부아 지역과 피에몬테 지역의 기존 철도를 잇는 제안으로 시작된 이 노선은 사르데냐 왕국의 추진으로 공사가 이루어지게 됨. 1857년 당시의 계획 확정안은 13,657m의 길이에, 4천만 리라(현재의 가치 기준 1억 2천만 유로 정도)의 예산으로 14년동안 진행되는 그야말로 현대 기준으로도 메가프로젝트 정도로 볼 수 있는 대담한 계획이었음.


공학자 제르망 소메이예를 주축으로 해서 공사에 들어갔는데, 길이가 너무 길고 깊었던지라 중간에서의 굴착이 안 되었기에, 양쪽에서만 공사를 진행했음. 문제는 중간에서 굴착을 해야 환기가 되어 공사가 진행 가능했는데, 컴프레셔를 사용하는 방법을 개발해서 새로이 진행할 수 있게 된 뒤로 다시 공사가 재개되었음.


이외에도 정치적인 불안정함 등의 이슈가 있었음. 특히 공사 시작 당시에는 양 지역이 사르데냐 왕국의 하에 있었으나, 1860년에 사부아가 프랑스로 넘어가고, 1861년에는 이탈리아 통일이 일어나며 본래 사르데냐 왕국의 국내 노선이 졸지에 국제 노선이 됨. 그러나 이러한 난관에도 공사가 계속 이루어졌던 덕분에 예정된 14년의 공사 기간의 끝을 앞둔 13년차의 크리스마스, 1870년 12년 25일에 양쪽에서 진행되었던 굴착이 드디어 만나게 되면서 터널이 관통됨. 이후 9개월 가까이의 추가적인 공사를 끝으로 1871년 9월 17~19일에 걸쳐서 철도 터널이 개통되고, 10월부터 상업 운송이 시작되었음.


개통 당시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육상교통 터널. 이 기록은 10년하고 조금 더 뒤에 아래 나오는 고트하르트 터널에 의해 갱신됨.


이후에 1915년에 전철화가 진행됨. 놀랍게도 복선터널로 단면적이 꽤 넓은 터널이었던 덕분에 문제 없이 진행될 수 있었으며, 방식은 이탈리아식의 직류 3000V를 채용함. 그 이후에도 터널은 몇 번의 보수를 거치는데 주요한 보수로는 1881년 균열이 발견된 사건으로 입구를 옮겨야해서 터널 입구쪽을 새로 파서 이어붙인 건, 1944년 독일군이 꼬장을 부려서 입구를 수리했던 건, 2023년 8월 27일에 있던 산사태로 인해서 현재까지 보수공사 중인 건 등이 있음.


2. 고트하르트(Gotthard) 터널 - 1882년 6월 1일 개통 (15.0km)

독일과 이탈리아 간을 잇는 축선의 가장 큰 난관이자 주요 가도였던 스위스의 고트하르트 고개를 넘는 터널. 다만 2016년부터는 세계 최장의 고트하르트 베이스 터널(57.1km)에 자리를 넘겨주고 베이스 터널에 문제가 있거나, 로컬 열차 위주의 서브 역할이 된 터널.


사실은 프레쥐스터널보다도 더 오래 전부터 구상되던 노선으로, 1830년대 말에 이미 얘기가 나오고, 1840년대에 사업이 구체화되었음. 유럽 내에서도 여러 나라가 관심이 있었던 철도였고, 스위스 내에서도 칸톤들끼리 여러 논의가 오고간 끝에 결국은 중부, 동부 칸톤들을 주축으로 예산이 확정되어 1871년 고트하르트 철도회사가 세워져서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됨. 스위스가 2천만 프랑을, 이탈리아가 4천 5백만 프랑을, 독일제국이 2천만 프랑(모두 스위스 프랑 기준)을 분배해서 투자한 것으로, 1871년에 이 프로젝트가 시동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프레쥐스터널의 성공이 다시 본 프로젝트에 대한 확신을 심어줘서 투자가 성립된 것임.


스위스 공학자 알프레드 에셔의 지휘 하에 시작된 프로젝트는 10년간으로 계획된 또 다른 메가프로젝트였음. 고트하르트 터널의 가장 큰 특징은 1867년 특허출원된 다이너마이트의 본격적인 대량사용과, 스위스 공학자 루이 파브르의 강력한 주장으로 도입된 기계화, 즉 원시적인 TBM의 사용에 있음.


이 터널 역시 수많은 기술적 난관이 있었고, 폭파된 암석들을 나르기 위한 압축공기 궤도차량의 사고로 인한 대규모 작업자 사망, 대수층을 건드려 새어나온 물에 의한 익사 사고, 잘못된 폭약 사용에 의한 오폭 사고, 낙석에 의한 사망 사고는 물론, 심지어 전염된 기생충(십이지장충)으로 인한 지장까지 있었음. 이 터널을 뚫다 나온 십이지장충 사태로 인해서 관련 연구가 한 층 진보할 수 있었다는 평도 있을 수준이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희생과 상관 없이 인력을 끝없이 밀어넣을 수 있었던 근대의 시대상 덕분에 1880년에 터널이 드디어 관통되었고, 2년여간의 추가적인 설비 공사를 진행하여 본 터널은 1882년 1월 1일부로 상업운행을 포함하여 공식 개통되었음. 15km의 길이에도 불구하고 증기기관차의 운행을 강행했는데 다행히 환기 문제는 이전에 프레쥐스터널 등의 사례로 해결되었고, 1920년에 전철화 첫 사업(단, 증기기관차의 높은 차고로 인한 절연파괴를 방지하고자 목표한 교류 15kV가 아닌 반으로 강압된 7.5kV를 초기에 사용해야 했음)을 진행하였고, 1921년에 전 열차 전동화와 무연화에 성공함.


그렇게 개통된 고트하르트 터널은 25여년간 세계 최장 길이의 육상교통 터널의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음. 아, 참고로 프레쥐스 터널과 똑같은 복선 터널로 개통되었음.


3. 심플론(Simplon) 터널 - 1906년 4월 19일 개통 (19.8km)

무려 70년이 넘는 기간동안 세계 최장의 육상교통 터널 자리를 유지했던 심플론 터널은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잇는 또 다른 축선을 구성하는 주요 경로에 놓여있는 터널임. 이 역시 알프스를 관통하는 터널이지만, 위의 프레쥐스, 고트하르트와는 달리 이 터널은 단선 쌍굴 터널이라는 게 주요한 특징임. 심플론터널은 70여년간 세계 최장 터널이었던만큼, 공학적 난관이 위 두 터널보다도 더 까다로운 터널이기도 함.


위에 고트하르트 터널 부분을 잘 읽어보면, "중부와 동부 칸톤들"이라는 언급이 있음. 이는 서부 칸톤들은 이탈리아로 통하는 방면을 다른 축으로 잡았기 때문임. 그 축에 놓여있는 두 터널이 바로 뢰치베르크터널과 심플론터널임. 뢰치베르크터널도 상당히 긴 터널(14.6km, 1913년 개통)이지만 이 터널이나 고트하르트터널보다는 짧으니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사실 뢰치베르크는 터널보다도 등판 구간이 백미인 노선임), 이 심플론 터널은 첫 추진부터 대놓고 국제 터널이었음. 다만 그랬던만큼 추진 자체도 예산 문제로 난항을 많이 겪었음. 일단 1856년에 스위스 서부 지역의 칸톤들이 이탈리아선 철도회사란 첫 회사를 세웠지만 안 됐고, 1874년 다시 심플론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가 1881년 스위스서부철도랑 병합되었고, 1886년에 가서야 프랑스의 투자자들의 승인을 얻어내어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됨. 스위스는 이를 토대로 이탈리아와의 협의를 1889년 진행했고, 1895년 조약을 체결하여 사업의 밑바탕을 마련함. 하지만 이게 사업의 시작이고 설계를 끝낸 터널의 착공은 1898년부터라는 것.... 아무튼 착공된 이 메가프로젝트의 책임자는 독일의 브란트 브란다우사였으며, 카를 브란다우와 알프레트 브란트가 설립했던 회사임.


이 터널의 문제점은 크게 볼 때 일단 너무 깊다는 점이었음. 터널면으로부터 지상까지의 깊이가 최고 2150m에 달할 정도로 깊은 터널이었는데, 알프스 조산대에 있는 특성상 지열이 문제가 되었음. 초고열까진 아니더라도 42도까지 치솟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기법들이 고안되었어야 했음. 일단 단선터널 두 개를 뚫는 계획으로 확정되면서, 환기나 관리용으로 쓸 수 있는 터널을 추가로 뚫어서 열을 빼내는 보완책을 실시한 것이 가장 큰 특징으로, 이는 훗날의 유럽의 장대터널의 안전관리에서 중요하게 참고한 설계법이 됨. 터널의 단면을 줄인만큼 예상 공기를 5.5년으로 확 줄여놨었는데, 여러 공학적인 해결책에도 불구하고 2년 정도 지체되어 7년 이 지난 1906년에서야 본 터널이 관통되었음.


관통과 함께 심플론 터널의 단선 개통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여기서 가장 큰 특징은 직후에 바로 전철화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임. 즉 처음부터 무연터널로 계획된 것이었음. 다만 1904년 첫 고안된 방식은 이탈리아가 제안한 3상 3400V 15.8Hz 같은 정신 나간 방법이었는데, 여하튼 이 구간은 국제 철도다보니 특별하게 처리할 수 있어서 어찌저찌 넘어갔으나 1930년에 비효율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결국 스위스에서 표준적으로 사용하게 된 단상교류 15kV 16.7Hz로 전환하게 되었음.


아, 두번째 터널은 1912년부터 착공되었음. 다만 이번에는 사람을 막부려먹던 10여년 전보다는 조금 더 환경을 맞춰야 햇기 때문에 9년이 걸려 1922년에 완공되었음.


같은 축선상에 있는 뢰치베르크 터널이 여러 문제로 개량된 베이스 터널을 새로 뚫었으나, 이 심플론 터널은 1900년대 뚫린 원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 이는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국제철도라 스위스가 예산을 강요할 수가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이미 이 터널 자체가 비교적 낮은 고도(해발 633m~705m~688m)로 이어져있고, 스위스쪽 기점인 브리크(Brig)가 좁아터진 지역으로 장대터널을 뚫어도 효과/경제성이 적을 수 밖에 없어서 그런 측면이 큼.


세계 최장의 터널 자리는 1906년부터 1982년까지 유지했으며, 1982년에 일본 죠에츠 신칸센의 다이시미즈터널(22.2km)가 뚫리면서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고, 이 자리는 재차금 1988년 개통된 세이칸터널(53.9km)의 것이 되었다가, 2016년에야 스위스가 다시 고트하르트 베이스 터널로 그 자리를 되찾아오게 됨.


4. 세번(Severn) 터널 - 1886년 12월 1일 개통 (7.0km/하저터널)

세번강의 하구에 있는 터널로 사실상 하저인지 해저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의 터널임. 장대터널이 되기에 길이가 짧음에도 이 터널의 의미는 큰데, 장대 하저/해저 관통의 개념을 제시한 터널이기 때문.


웨일스 지역으로 이어지는 철도는 그레이트웨스턴철도(GWR)의 것이었음. 하지만 보면 알 수 있듯 세번강의 하구는 폭이 너무 넓었고, 철교로 넘기에는 부담이 되는 길이였기에 한참 북쪽의 글로스터(Gloucester)로 우회해야 했음. 그러나 이 그레이트웨스턴철도하면 또 공학자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의 작품이었던 만큼, 공학적 신기술에는 일가견이 있는 회사였음. 이 회사가 제시한 것은 바로 "세번강 하구에 장대 하저터널을 뚫자"는 것이었음. 그리하여 존 호크셔의 지휘하에 본 터널은 1873년 착공을 맞이하게 됨.


하저터널인만큼 산악터널과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됨. 바로 물과의 씨름. 다만 영국은 그 당시 초강대국의 지위였고, 영국의 공학기술은 세계 최첨단이었기 때문에 강물이 넘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음. 수압 문제도 어떻게 우회적으로 해결해서 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9년부터 물이 차오르는 사고가 있었는데 강물이 아니라 웨일즈 쪽에 있던 지하수원이 문제가 되었음. 이에 물을 퍼내 전용의 펌프 스테이션을 갖추었으나, 이 수원은 강물이 아니었고 계속 끊임없이 물을 내뿜은 끝에 1883년에서야 경사로를 따로 파내서 배수로를 신규로 만들면서 일단락됨.


1885년 관통된 터널은 1886년 개통되면서 역사를 쓰게 됨. 이 터널이 공학적으로 얼마나 잘 설계되었냐면, 강바닥으로부터 불과 15m 정도 밑에 터널 지붕이 시작되지만, 지어진지 150년 가까이된 지금도 큰 문제 없이 잘 사용되고 있을 정도임. 다만 물이 새거나 하는 문제는 있어서 전철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적이 있었고, 이 때문에 전철화 과정에서 잠시간의 터널 폐쇄를 요구하는 원인이 되었음. 그래도 여러 대책과 보강을 통해서 지금까지도 가공선 전철화까지 되어서 잘 다니고 있는 터널임.


개통 당시부터 수저터널로는 어떤 용도든간에 최장 터널이었음. 아니 애초에 길이를 불문하고 수저(해저/하저)터널로 본격적인 육상교통에 사용될 수 있는 규모로는 정말 극초기에 개통된 터널이었는데 그게 무려 7km짜리였으니 이딴 정신나간 프로젝트를 쉽게 계획한 것이 바로 당시 영국의 국력을 드러내는 대목. 참고로 최장 수저터널 기록은 100년이 조금 더 지난 1988년 개통된 세이칸 터널에 의해서야 갈아치워지게 되었음.


5.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철도 - 1863년 1월 10일

여태까지의 터널이 산악터널, 하저터널 같은 자연지물을 돌파하기 위한 터널이었다면, 이 터널은 "지하철"의 개념을 창시한 터널임. 즉, 개착식으로 도심지를 돌파하는 개념을 제대로 선보인 중요한 터널이라는 것. 물론 이 메트로폴리탄철도는 최초는 아닌데 -- 최초의 철도 발상지인 리버풀에 있던 1830년 개통 2.0km짜리 와핑(Wapping) 또는 에지힐(Edge Hill) 터널도 사실 이 개념에 가깝고, 현용하고 있는 윌리암슨 터널군도 같은 역할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적을 더 크게 보는 것은 이 프로젝트가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고, 도시철도라는 개념으로 연결되는 "지하철"과 간선철도의 지하화 개념으로 연결되는 "철도지하화"의 개념 양쪽 모두를 만족하며 둘에 대한 실용적인 실적을 제시했기 때문임.


런던의 핵심지가 어디냐 물어본다면 지금이야 여러 곳이 있지만, 결국 역사적으로 보면 핵심은 "시티오브런던"임. 그런데, 기존 철도 종착역들은 외곽에 많이 있었고 이 시티랑 연결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 바로 또 런던 도심철도의 개발사의 가장 큰 줄기임.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것으로, 6km간에 걸쳐 패딩턴(Paddington)으로부터 패링던(Farringdon)까지에 이어지는 구간에 철도를 건설하여 개통한 것이 1863년의 일임.


이 아이디어 자체는 공학자도 아니고 1830년대 시티오브런던의 사무변호사였던 찰스 피어슨이 냈던 것인데, 독일에서 실현했던 "철도 터미널의 통합화"에 대한 여러 실현방식 중의 하나였음. 이 방식에 대해서 1846년에 왕립위원회가 거부하면서 엿을 먹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찰스 피어슨은 시티오브런던의 힘을 믿고 사업을 추진했음. 다만 철도회사들은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시티오브런던이 베이스가 되어서 이 사업이 추진됨. 크림 전쟁 등으로 예산 문제가 있던 당시였으나 철도공학의 선구자였던 이점바드의 모토를 물려받은 GWR이 받아들여 17만 5천 파운드를 출자하며 메트로폴리탄철도는 시동이 되게 됨. 마침 또 GWR의 터미널인 패딩턴은 서쪽에 치우쳐져있었고, 시티와의 거리도 멀었던만큼 가장 유력한 출자자였기도 했고.


다만 개착식의 과정은 험난했음. 부지매수부터 인근 건물의 진동피해 등 여러 문제가 있었고, 심지어 폭발사고와 붕괴사고도 몇 번 있었으나 1862년 말에 공사가 완료되었고, 1863년 6km 남짓의 구간이지만 처음으로 세계에 "지하철"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음. 물론 현대적인 도시철도까지 이르는 과정은 좀 더 나중의 일이지만, 이 이후로 도시철도는 물론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간선철도의 도심 구간 지하화를 적극적으로 채용하는 양상이 확대되게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