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메르 팔레트

이집트를 통일한 나르메르 왕의 업적이 담긴 기원전 31세기경에 만들어진 팔레트



앞면

1. 숭배하는 신

팔레트의 가장 상단에는 한 쌍의 암소 머리가 장식되어 있다. 이 암소들은 고대 이집트 문명 초기에 널리 숭배되던 '바트'라는 여신이다. 


2. 나르메르 왕의 처형 집행

팔레트 앞면의 중심부에는 상이집트의 왕관을 쓰고 있는 나르메르가 철퇴로 적을 처형하려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나르메르는 황소 꼬리가 달린 킬트를 입고 있는데, 이것도 고대 이집트 문명기 내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전형적인 파라오의 모습이다. 나르메르의 오른쪽에는 파라오에게 머리카락을 잡힌 채 무릎을 꿇고 있는 한 남자가 그려져 있다. 이 사람은 나르메르에게 패배한 적이나 정복당한 도시를 상징하는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이 남자의 머리 오른쪽에는 두 개의 그림 문자가 쓰여 있는데, 아직까지 합의된 해독은 없는 상태이지만, 이 남자 개인의 이름이거나 혹은 정복당한 지역의 지명일 것으로 추정된다.


3. 나르메르 왕이 전투에서 6000명의 적들을 진압하고 하이집트를 제압하다.

남자의 머리 위에는 사람의 손을 갖고 있는 매 한 마리가 사람의 머리가 달려있는 파피루스 묶음 위에 앉아서 이 사람의 코에 묶인 밧줄을 당기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매는 호루스, 즉 파라오를 나타내는 동물이고, 파피루스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용되는 하이집트의 상징이며 파피루스의 꽃은 숫자 1000을 의미하므로 적 등에 피어난 여섯 개의 파피루스는 6000명의 적을 의미한다. 그래서 장면은 파라오가 전투로 6000명의 적들을 진압하고 하이집트를 제압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집트 최초의 통일이 상이집트가 하이집트를 정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4. 파라오의 신발 운반자
중앙에 새겨진 파라오의 좌측에는 머리위에 로제트 상징으로 이름을 나타낸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진 한 인물이 파라오의 등 뒤에서 신발을 들고 서 있다. ‘파라오의 신발 운반자’라는 호칭이 이후 이집트 문명기 내내 파라오의 최측근에게 주어지던 칭호였음을 참작하면, 이 신발 운반자는 단순한 시종이 아니라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유력자였을 것이 분명하다. 


5. 패배한 도시들

파라오의 발밑, 그러니깐 팔레트 앞면의 가장 아랫단에는 수염을 기른 나체의 남성 2명이 어디론가 도망을 치고 있는데, 좌측 상단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상징하는 듯한 기호가 덧붙여져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파라오에게 패배하여 쫓겨가는 이들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뒷면

1. 상이집트 중심의 통일을 이룬 나르메르 왕의 행진

첫 번째 단에는 하이집트의 파라오로 분한 나르메르가 앞뒤로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행진을 하고 있다. 상이집트의 파라오와 하이집트의 파라오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왕관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단에 묘사된 인물들은 모두 크기가 제각각인데, 이것은 이 인물들의 사회적 지위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당연히 파라오는 가장 크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곳에 그려진 하이집트의 파라오는 팔레트 앞면의 상이집트 파라오보다는 훨씬 더 작게 그려져 있다. 이 현저한 크기 차이는 어쩌면 나르메르는 상이집트 출신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집트의 통일은 상이집트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2. 파라오의 신발 운반자

나르메르는 철퇴와 도리깨를 들고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전통적으로 이집트 파라오의 왕권을 상징하는 도구들이다. 역시 나르메르의 바로 앞에는 ‘성난 메기’라는 뜻의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바로 뒤에는 팔레트 앞면에서와 같이 ‘신발 운반자’가 뒤따르고 있다. 이 인물의 우측 상단에 새겨진 꽃은 ‘신발 운반자’의 이름이고 그의 머리 위에 그려진 직사각형과 그 안의 상징은 마을이나 성채로 추정된다.


3. 파라오의 수행원들

나르메르의 바로 앞에는 긴 머리를 하고 있는 남성이 걸어가고 있는데, 이 사람의 우측 상단에는 ‘티티’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이 남자의 이름일 수도 있지만, 학자들은 음성학적인 이유를 근거로 이 남자를 총리대신이나 나르메르의 제1왕자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앞에는 각각 동물 가죽과, 개, 그리고 매의 상징을 달고 제례용 깃발을 든 네 명의 사제가 그들 머리 앞에 한쌍의 상형문자로 이름을 나타낸 채 그려져 있다. 이들의 정면에는 목이 잘린 열 구의 시신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들은 살해당한 파라오의 적들로 추정된다.


4. 군사 행위를 통한 상-하이집트의 통일 

두 번째 단에는 뱀과 사자 혹은 표범이 합쳐진 것처럼 보이는 한 쌍의 괴물의 목에 묶은 끈을 두 남자가 잡아 붙들고 있다. 긴 목을 갖고 있는 이 한 쌍의 괴물은 서로 목이 감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는 움푹하게 패인 원형이 공간이 있다. 만약 팔레트가 실제로 안료를 가는 데 사용되었다면 이 부분에 안료를 넣고 갈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 단에 그려진 이 장면은 여전히 그 의미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사자는 이집트 전역에서 전쟁과 관련된 여신의 상징으로 자주 여겨졌었던 만큼 아마도 이 장면은 군사 행위를 통한 상-하이집트의 통일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된다.


5. 공성전

맨 하단부는 황소로 분한 파라오가 한 도시의 외벽을 무너뜨리고 적들을 공격하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강력한 힘을 의미하는 황소는 이후로도 오래도록 파라오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많은 후대의 파라오들이 ‘힘센 황소’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예컨대, 신왕국 시대 18왕조의 파라오 투트모스 3세의 호루스 이름은 ‘카나크트 카엠와세트’, 즉 ‘테베에 나타나는 힘센 황소’였다.


이 5000여년전 기록을 통해 이집트 통일을 이루어낸 나르메르 왕의 업적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