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에는 '''달나산(達拏山)[* 속고승전(續高僧傳) (645년)], 월나군(月奈郡)[* 삼국사기 지리지 (1145년)], 월악(月岳)[* 해동고승전 (1215년)]'''이라 불렸으며 통일신라 경덕왕 시기에 영암군(靈巖郡)으로 고쳤으며 (다만 경덕왕 이전에도 영암군이란 명칭이 확인된다) 백제의 월악(달나산)을 월나산(月奈山), 월출산(月出山)이라 불렀으며 고려 초에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렸다.
당나라 남선율종의 시조인 도선道宣(596-667)이 쓴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정전에 오른 144년간 고승 500명 가운데 오직 한 분인 백제의 고승 혜현(慧顯, 570~627년)이 수덕사에서 ‘달나산(達拏山)’으로 옮겨 지내다 58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 ‘달나산’이 월출산인 것이다. 7세기 백제 사람들이 지금의 '월출산' 을‘달나산’이라 부르고 있기 때문에 당나라 승려 도선이 그대로 ‘달나산’이라 쓴 것이다. 즉, 달나산(達拏山)은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백제어가 반영된 지명어휘인 것이다.
한국어 달(月), 나다(生, 出)가 백제어, 신라어 공통 어원임을 알 수 있다. [* 신라의 서라벌(금성)에 있던 나정(奈井) = 나을(奈乙)에서 발견된 기와에서 생(生)이란 한자가 적히 신라시대 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신라 나정(나을)의 '나' 는 한국어 나다(生, 出)에 대응되는 신라어이다.]
백제시대에는 '''달나산(達拏山)[* 속고승전(續高僧傳) (645년)], 월나군(月奈郡)[* 삼국사기 지리지 (1145년)], 월악(月岳)[* 해동고승전 (1215년)]'''이라 불렸으며 통일신라 경덕왕 시기에 영암군(靈巖郡)으로 고쳤으며 (다만 경덕왕 이전에도 영암군이란 명칭이 확인된다) 백제의 월악(달나산)을 월나산(月奈山), 월출산(月出山)이라 불렀으며 고려 초에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렸다.
당나라 남선율종의 시조인 도선道宣(596-667)이 쓴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정전에 오른 144년간 고승 500명 가운데 오직 한 분인 백제의 고승 혜현(慧顯, 570~627년)이 수덕사에서 ‘달나산(達拏山)’으로 옮겨 지내다 58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 ‘달나산’이 월출산인 것이다. 7세기 백제 사람들이 지금의 '월출산' 을‘달나산’이라 부르고 있기 때문에 당나라 승려 도선이 그대로 ‘달나산’이라 쓴 것이다.
한국어 달(月), 나다(生, 出)가 백제어, 신라어 공통 어원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서라벌(금성)에 있던 나정(奈井) = 나을(奈乙)에서 발견된 기와에서 생(生)이란 한자가 적히 신라시대 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신라 나정(나을)의 '나' 는 한국어 나다(生, 出)에 대응되는 신라어이다.]
백제시대에는 '''달나산(達拏山)[* 속고승전(續高僧傳) (645년)], 월나군(月奈郡)[* 삼국사기 지리지 (1145년)], 월악(月岳)[* 해동고승전 (1215년)]'''이라 불렸으며 통일신라 경덕왕 시기에 영암군(靈巖郡)으로 고쳤으며 (다만 경덕왕 이전에도 영암군이란 명칭이 확인된다) 백제의 월악(달나산)을 월나산(月奈山), 월출산(月出山)이라 불렀으며 고려 초에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렸다.
당나라 남선율종의 시조인 도선道宣(596-667)이 쓴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정전에 오른 144년간 고승 500명 가운데 오직 한 분인 백제의 고승 혜현(慧顯, 570~627년)이 수덕사[* 우리가 아는 그 수덕사가 맞다.]에서 ‘달나산(達拏山)’으로 옮겨 지내다 58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 ‘달나산’이 월출산인 것이다. 7세기 백제 사람들이 지금의 '월출산' 을‘달나산’이라 부르고 있기 때문에 당나라 승려 도선이 그대로 ‘달나산’이라 쓴 것이다.
한국어 달(月), 나다(生, 出)가 백제어, 신라어 공통 어원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서라벌(금성)에 있던 나정(奈井) = 나을(奈乙)에서 발견된 기와에서 생(生)이란 한자가 적히 신라시대 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신라 나정(나을)의 '나' 는 한국어 나다(生, 出)에 대응되는 신라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