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의 사료는 이글루스 까마구둥지님의 블로그 에서 참조하였음



<표해록(漂海錄)>은 조선 성종때 추쇄경사관(도망한 노비를 잡아들이는 관직)으로 제주에 간 최부(崔溥, 1454~1504)가 

부친 상을 당해 배를 타고 가던 중 풍랑을 겪어 명나라 땅을 밟고 절강성 영파(寧波, 닝보)에서 북경을 거쳐 귀국하기까지 6개월의 여정을 쓴 기행기임.



무신년(1488, 성종 19)  

3월 15 

 

아침엔 큰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더니 오후엔 흐렸습니다. 요동(遼東) 사람 진이(陣圯)ㆍ왕찬(王鑽)ㆍ장경(張景)ㆍ장승(張昇)ㆍ왕용(王用)ㆍ하옥(何玉)ㆍ유걸(劉傑) 등이 장사하는[商販] 일로 먼저 이곳에 도착하였다가 신 등이 이른 것을 듣고, 청주(淸酒) 3병ㆍ엿[糖餳] 1쟁반ㆍ두부 1쟁반ㆍ떡 1쟁반을 가지고 와서 신과 종자들을 접대하고는, 또 말하기를, “우리 요동성(遼東城)은 귀국(貴國)과 이웃했으므로 정의(情誼)가 한집안과 같은데, 오늘 다행히 객지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므로 감히 약소한 물품을 가져와서 사례합니다.”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귀지(貴地)는 곧 옛날 고구려의 옛 도읍지였는데, 고구려가 지금은 우리 조선의 땅이 되었으니, 땅의 연혁은 비록 시대에 따라 다른 점이 있지마는, 그 실상은 한 나라와 같습니다. 지금 내가 거의 죽을 뻔하다가 만 리 밖에서 표박(漂泊)하여 사방을 돌아보아도 서로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족하(足下)를 만나게 되고 또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한집안 골육의 친족을 본 것과 같습니다.” 


이 대화는 15세기 조선과 명나라 양국의 고구려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료임. 

한편 요양역(遼陽驛)에서의 기록도 당시 명나라 요동의 정황에 대한 구절이 있음.


무신년(1488, 성종 19)  

5월 24일 맑았음.  

 

계면(戒勉)이란 중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말이 능히 통했습니다. 그는 신에게 이르기를, 

 

소승은 세계(世系)가 본디 조선(朝鮮)인데, 소승의 조부가 도망해 이곳에 온 지 지금 벌써 3세(世)가 되었습니다이 지방은 지역이 본국(本國 조선)의 경계에 가까운 까닭으로 본국 사람이 와서 거주하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중국 사람은 가장 겁이 많고 용맹이 없으므로, 만약 도적을 만난다면 모두 창을 던지고 도망해 숨어 버리며, 또 활을 잘 쏘는 사람도 없으므로, 반드시 본국 사람으로서 귀화(歸化)한 사람을 뽑아서 정병(精兵)으로 인정하여 선봉(先鋒)을 삼게 되니, 우리 본국의 한 사람이 중국 사람 10명, 100명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 지방은 곧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인데 중국에게 빼앗겨 소속된 지가 100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우리 고구려의 끼친 풍속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아서, 고려사(高麗祠 고구려사(高句麗祠))를 세워 근본으로 삼고, 공경하여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새는 날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여우는 죽을 때 살던 굴로 머리를 돌린다.[鳥飛返故鄕 狐死必首丘]’고 하였으니, 우리들도 본국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으나, 다만 본국에서 도리어 우리들을 중국 사람으로 인정하여 중국으로 돌려보낸다면, 우리들은 반드시 외국으로 도망한 죄를 받아서 몸뚱이와 머리가 따로 있게 될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가고 싶지만, 발은 머뭇거릴 뿐입니다.”


조선 출신의 계면이라는 승려와 나눈 대화인데, 요동 지방에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해 살고 있고 고구려의 풍속을 계승한다는 내용임. 그리고 계면이 조선을 본국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근대 이전에 민족 정체성이 조선에서 이미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음.



표해록보다 약 100년 뒤의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남긴 <조천록(朝天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음.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 백성들 중 난리를 피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 사람이 상당히 많다. 계사년과 갑오년에 계속 흉년이 들었는데, 이때 총병(摠兵) 유정(劉綎)이 오래도록 양남(兩南) 지방에 주둔하였기 때문에, 양남 지방을 유랑하던 조선의 백성들은 모두 방자(幇子)라는 명목으로 총병의 군중(軍中)에 들어가 품팔이를 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런 조선의 백성이 거의 만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유 총병의 군대가 철수하여 돌아갈 적에 그들을 따라 강을 건너갔다. 그래서 이때부터 요양(遼陽)과 광녕(廣寧) 일대에 우리나라 백성과 가축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내가 요양에 도착했을 때, 젊은이 한 사람이 자주 내 숙소에 와서 하인들과 서로 친숙해졌다. 그가 말했다. 

“나는 공덕리(孔德里)에 살던 사람인데, 요양에 들어와서 수(修) 씨 집안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또 말했다. 

“요양성(遼陽城) 안에 들어와서 사는 조선인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름을 잊어버린 한 무사(武士)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름난 가문 출신으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습니다. 명나라 사람들이 나를 교사(敎師)로 부르며 데려갔습니다. 여기서 60〜70리쯤 떨어진 곳에 특별히 군사훈련장을 만들고는 요양 사람 가운데 영리한 사람을 직접 선발해서, 나에게 매일 무예를 가르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봉급도 두둑하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 중에 무예를 성취한 사람이 매우 많아졌습니다.” 

 

또 동관보(東關堡)의 길 옆에서 중국옷을 입고 조선 사람의 관(冠)을 쓴 한 여인이 우리 일행을 보고 울면서 말했다. 

“저는 옛날에 사직동(社稷洞)에서 살았고, 천한 신분도 귀한 신분도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살게 된 지 벌써 6년이 되었습니다.”  

 

또 산해관(山海關) 밖의 여관에 머물 때에는 어떤 사람이 밤중에 몰래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본래 조선 사람입니다. 고향이 그리워서 항상 탈출해서 돌아가려고 하지만, 주인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어 빈틈을 탈 수가 없습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조선인이 모두 30여 명이나 됩니다. 만일 한 사람이 나서서 일을 주도하면 모두 탈출하여 고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 한 사람은 이곳에 와서 바로 장사를 시작해서 재산을 많이 불렸고, 큰 집을 사고 아름다운 계집을 끼고 살면서 부귀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사람만 조선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마음을 움직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따금 만난 조선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니 이 밖에 알지 못하는 조선 사람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왜란 이후에도 많은 조선인들이 요동에 이주했다는 자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