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신문기사를 보면, 서울의 이름에 대한 혼란이 민간은 물론 관청에서도 가속화되었음을 알 수 있음. 


경성부/한성시/서울시라는 이름이 관청과 언론, 민간에서 혼용되었음. 

당시 경성부윤은 경성부의 명칭을 ‘한성시’로 변경하고 군정청 내무국에 신고했으나, 군정청에서는 시기가 적절하지 않고 상위기관인 경기도의 컨펌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반려함. 


원래 경성은 수도를 이르는 명칭으로 큰 문제가 없었으나, 당시에는 이미 일제의 잔재라는 인식이 너무 강했고

한성은 해방 전으로 돌아가는 이름이었으나 구시대적이라는 인식이 강했으며, 서울은 민간에서 가장 많이 불리고 영어명칭과 일맥상통했으나 일반명사에 가깝다는 문제가 있었음. 


시(市)는 일본을 시작으로 동아시아에 새롭게 등장하던 행정구역인데, 영어 city hall의 음역에 가까웠고, 조선에서도 남북 모두 부 대신 이 행정구역을 사용하게 되면서 경성부가 가장 먼저 ‘시’로 변경을 추진했음. 

  

그리고 김형민 경성부윤이 취임하자, 그는 도시이름을 ‘서울’로 확정시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지금의 서울로 이름이 확정되었음. 

당시에도 이승만의 이름을 딴 ‘우남시’라는 이름에 대한 주장이 강했으나, 그는 무조건 서울을 밀어붙혔음.


미군정 입장에서도 당시 경성의 영어명칭인 Seoul과 같은 이름이고, 민간에서도 경성보다 훨씬 흔하게 쓰인 ‘서울’이라는 이름에 긍정적이었음. 


일제강점기 및 해방 후 조선에서는 민간에서는 ‘서울’이라는 단어를 쓰고

행정기관으로서 서울을 말할 때나, 한자로 쓸 때나, 일본어로 대화할 때 ‘경성’이라는 단어를 썼음 



김형민은 서울 내 일제식 행정구역인 정, 통 등을 정리하고 지명도 바꾸어 을지로, 충무로 등 이름을 만든 업적이 있음.    



그는 사실 원래 경성에서 삼일사라는 회사를 운영중이었는데,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이 신문에 ‘김형민’이라는 사람을 찾습니다‘ 라는 공고를 내고 그를 시장으로 취임시켰음.  

하지 중장의 삼촌이 김형민의 웨슬리언 대학교 동창이었기 때문…. 당시 미군정 행정이 굉장히 거시기하게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