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알람소리가 귀를 울렸다.
'또 늦게 일어났네.'
'형, 일어나세요. 저희 늦었어요.'
나는 우리를 재촉하는 카카오톡 문자들을 보며 선배를 깨웠다.
'아직도 안 일어났니?'
'거기까지 몇시간이 걸리는데 뭐라도 좀 먹어야지.' 나는 한숨을 내쉬고 세면대로 향했다. 부스스한 머리는 어제 머리를 잘못 말렸는지 하늘로 솟아 있었다. 머리를 적시다시피 물을 뭍히고 짐을 챙겨 형과 함께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에는 이미 선생님을 비롯해 거의 모든 인원이 있었다.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너희 지금 일어났니? 카드키는?'
'어... 그게...'
'내가 챙겼어. 여기있어요.'
그렇게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호텔에서 떠났다. 석식을 먹지 못한채로. 석식이 어땠냐고 물어도 모두 '그저 그랬다' 라고 했지만 어찌 그게 남의 생각이지 내 생각이던가. 나는 가방에서 에너지 바 몇 개를 꺼내 까 먹었다.
그날 우리는 항저우를 떠나 난징으로 떠났다.
난징. 이제향 위안소 유적 진열관과 난징대학살 역사관이 있는 곳. 참혹한 역사가 일어났던 그곳을 가 비극의 순간들을 몸소 보게 될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졌다.
항저우에서 난징까지는 약 4시간이 걸렸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모두들 힘들어했다. 피곤에 못이겨 나도 모르게 새우잠을 잤다.
긴 시간이 걸렸기에 우리는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다. 나는 복숭아 맛이 나는 홍차 음료를 하나 사고 105위안 짜리 선물용 녹차를 하나 샀다. 티백형으로 담긴 줄 알았는데 그냥 말린 녹차가 팩에 담긴 것이었다.
우리가 난징에 도착해 처음으로 간 곳은 리제향 구지 유적진열단. 이제향 위안소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짐을 검사받고, 신분 확인등의 까라로운 절차를 거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일행 중 한 선배는 슬리퍼를 착용하고 있어 출입이 제한되었다. 아픈 역사를 알려주는 곳이니 만큼 보다 엄숙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제향 위안소의 내부로 들어서자 마자 뜨거운 난징의 햇빛이 벽의 아크릴 눈물을 선명히 비추고 있었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를 찍은 것으로 자주 사용되는 사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상을 전시해놓고 있었다.
(아크릴 눈물이 벽을 타고 흐르는 모습.)
(이제향 위안소에는사진의 오른쪽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상이 전시되있다.)
(위 사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형상화한 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사진을 전시해놓은 이른바 '통곡의 벽', 위 사진에 나오는 70명의 피해자 분들중 30명이 한국국적이다.)
이제향 위안소 유적진열관은 평안도 출신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에 의해 건립되었다. 당시 위안소로 8개 건물이 쓰였는데 이중 6개 건물을 복원해 그 안에 일제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저질렀던 만행과 영상 자료들을 구비해놓고, 당시 쓰였던 잡기들을 복원해놓았다. 박영심 할머니가 생활했었던 19번 방까지도. 위안소 진열관의 내부는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복도가 넓은 감옥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위안소 내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성병을 검사하기 위해 쓰인 성병검사기, 위에 올라가 다리를 벌리고...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보기만 해도 성적 수치감과 모욕감이 드는 성병 검사기를 보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를 일제가 운용한 규모를 알려주는 사료와 그 입증 자료들을 보고 나는 역겨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특히 내부에 전시되어 있던 '돌격 1호' 콘돔이 정말 뇌리에 박혔다. '돌격 1호' 콘돔의 제조사 오카모토 사는 이 제품을 일본 육군 위안소에 공급하며 성장했다.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은 전범기업이다.
(아무리 닦아드려도,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흘리는 조각상을 가만히 응시하며, 전시실을 나왔다.
현재 남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수는 25명이다.
이들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기억해주겠는가? 그리고 보호해주겠는가? 그리고 흐르는 눈물은 누가 닦아주겠는가?
여러모로 마음이 착잡해진채로 우리는 다음 장소로 향했다.
다음 장소는 주화대표단. 정확한 명칭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본부이다. 이곳에서는 광복 이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내 한인교포들의 생명 및 재산 보호, 귀국문제들을 해결했었다. 사실 이곳 난징에 있는 주화대표단은 국민당 정부가 난징으로 수도를 이전할 때 옮겨온 곳으로 최초의 주화대표단 건물은 충칭에 위치한다.
주화대표단 본부는 외관상으로 보존이 매우 잘되있었고 해설집에 있던 사진과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도. 표지판이 있어 기뻤다.
(해설집에 있던 주화대표단 본부 사진.)
중식을 먹으러 한식당(이름은 무궁화.)에 갔다. 김치전, 김치찌개, 김치가 나왔지만 맛은 그닥... 김치는 이세상 김치가 아니었고 김치찌개는 그냥 맛이 없었다. 1일차에 먹은 한식과는 확실히 대비됬다.
(제육볶음은 맛있었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난징총통부이다.
(난징총통부의 모습)
난징총통부는 다들 익히 알고 있듯이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사용한 총통부이다.
이곳은 중공이 점령 후 장쑤성 정부청사로 쓰다 현재는 근현대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난징총통부 내부는 매우 넓었고 뒷편에는 연못이 있는 큰 정원도 있었다. 내부 건물에는 관련 집무실등을 공개해놓았지만 너무 덥고 사람이 붐벼 많이 둘러보지는 않았다. 우리는 더 둘러볼 것이 없어 집합장소로 먼저 가 대기하려 했지만 너무 넓어서인지 길을 잃었다 약도를 찾아 보고 겨우 겨우 집합장소로 올 수 있었다.
약속한 시간까지 시간이 꽤 남아 있어 집합장소 좌측에 위치한 기념품 점에 들렀다.
나는 물건 몇 개를 둘러보다 부채 하나를 샀다. 튼튼하고 예쁜 매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라 가격이 20위안 치고는 썩 괜찮았다.
(난징총통부에서 구매한 매화가 그려진 부채.)
더운 날씨에서 이 부채는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우리는 난징총통부를 나와 부자묘로 향했다.
(회청교의 모습.)
회청교에 큰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이 일대에 김구 선생이 주애보와 같이 살던 피난처가 있었고, 이곳에서 주애보와 김구 선생은 갑작스럽게 이별하게 되었다. 김구 선생은 훗날 회고록에서 주애보에게 챙겨준 것 없이 그저 떠나보낸 것을 매우 안타까워 했다. 주애보의 후손과 그녀의 신원은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피난처의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기에 간단히 주애보와 김구 선생의 일화를 간단히 소개하는 것에서 그쳤다.
얼마 후에 부자묘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