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경성전차는 1구역(요금 5전)과 2구역(요금 8전)으로 구분되어 있었음.   


1936년 이전 용산 및 경성부 영역, 즉 사대문안과 그 근처는 1구역으로 5전만 받았고 2구역은 시외지역으로 할증이 붙은 8전을 받음. 


그런데 같은 경기도였던 용산은 1구역으로 통합되었으나 왕십리, 마포, 신촌, 청량리 등 타 위성도시는 2구역으로 남아 있어 불만이 많았음. 

이미 당시 경성 근교는 경성부 소속이 아니었을 뿐 연담화된 주거지로 개발되어 있었으며 전차도 다녔음. 


하지만 1936년에 이들이 경성부에 편입되었음에도 시외요금은 폐지되지 않았는데, 이때문에 용산을 제외한 신 편입 지역에서는 시위가 일어나고 언론에는 주민들의 반발 기사가 대서특필됨. 


당시 기사를 보면 한 청량리 사람은 ‘청량리에는 제대로된 학교가 없어 사대문안으로 학교를 보내야 하고, 어른들도 출근을 모두 사대문안 회사로 하는데 요금 부담이 너무 크다’ 고 지적하고


영등포 사람은 ’우리가 가장 많은 인구와 산업을 경성부에 내어 주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대우할 수 있냐‘고 불만에 가득했으며


왕십리 사람은 ‘사대문안에서 거리가 용산이나 왕십리나 비슷한데 용산만 특혜를 받는 것은 용산이 일본인이 많이 사는 동네라서 그런 거 아니냐’고 의문을 품음. 




실제로 이는 신촌, 마포, 청량리 등이 조선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이라서 지역파워가 용산에 밀리기 때문이라는 목소리가 커졌고 당시 조선인 임금차별과 더불어 조선인 사회에서 불만이 커지게 됨. 


결국 이들은 민영이었던 전차의 경성 부영화 운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경성부와 조선총독부는 일단 지지하는 스탠스로 말하긴 했음.  

또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는, 이러한 사태를 해결하기에 가장 적합한 제도가 지방자치제라는 논설을 실었지. 당시 조선은 지방자치가 열강 중에서도 느린 일본제국에서도 매우 느렸으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