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오후 한 카페.

따스한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 옆자리에 앉은 우진은 반쯤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읽던 책에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홍색 벚꽃으로 화려했던 거리를 떠올린 그는 푸르른 거리도 나쁘지 않다 생각하며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낯설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뭘 그렇게 헤실헤실 웃고 있어?"

"뭐, 뭐야. 언제 왔어?"

어느새 자신의 옆에 와서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하빈이를 본 우진은 괜스레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으며 책갈피를 끼우고선 책을 탁 덮어버렸다.

"음... 네가 밖에 쳐다볼 때부터?"

"늦은 건 알고 있는 거지?"

"헤헤, 미안. 근데 오다가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

"또 다람쥐를 봤느니, 할머니를 도와드렸다느니 그런 얘기겠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우진이 책을 한 켠으로 치워두는 걸 본 하빈이는 자신도 딸기 프라푸치노를 시키고선 재잘재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일어설까?"

"응. 참, 우진아. 오늘 저녁 내가 예약해둔 데 있는데 거기로 가자. 괜찮지?"

하빈의 말에 눈을 끔뻑거리던 우진은 그녀의 양 뺨을 잡고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 부끄럽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을 슬그머니 감는 하빈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본 우진은 그녀의 새하얀 이마에 약한 꿀밤을 먹여주었다.

"아얏! 왜 때려! 씨잉..."

"네가 평소에 안 하던 걸 하니까 정말 내가 아는 이하빈이 맞나 싶어서."

"흥. 내가 예약도 하고 밥값까지 내려 했는데 그냥 집에 갈래."

"이러는 거 보니까 내가 아는 이하빈 맞네. 근데 웬 일이야? 예약까지 다 하고."

"그냥. 가끔은 좋은 데서 밥 먹고 싶을 때도 있잖아."

카페의 문을 열고 나온 우진은 뒤따라 나오는 하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미 몇십, 아니 몇백 몇천 번이나 잡은 손이지만 여전히 부끄러운 그 행동에 하빈이 자신을 놀리지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그녀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맞다 우빈아. 아까 카페 안에서 혼자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렇게 웃은 거야?"

"여기, 얼마 전까지만해도 벚꽃으로 가득했잖아."

"그랬지. 너랑 같이 간 벚꽃축제보다 난 여기가 더 맘에 들었어. 왜 그럴까?"

"나야 모르지. 어쨌든 벚꽃이 다 지고 잎이 난 걸 보고있으니까 이것도 괜찮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음... 네 말을 들으니까 나도 그런 것 같아."

그 말을 하고서 거리의 가로수들을 바라보던 하빈은 갑자기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어왔다.

"내 생각하고 있다가 들켰던 거 아니야? 나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었어?"

은근한 목소리와 함께 가슴을 들이밀며 은은히 풍겨오는 그녀의 샴푸 냄새인지 체취인지 모를 향기에 잠시 어질어질해졌던 우진은 애써 이성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사실 네 말이 맞아. 네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그만."

"무, 믓."

이상한 말을 내뱉으며 얼굴이 새빨개진 하빈은 그에게서 떨어지며 고개를 푹 숙이고 거리를 바라보며 걸었다.

그 모습에 반대로 장난기가 발동한 우진은 안경을 고쳐쓰며 말했다.

"식당을 예약했다는 건, 그 후의 일도 기대하고 있는 거라 생각해도 되는 거지?"

"그, 그그그 그런 거 아니거든?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야?"

당황해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를 보고 피식 웃은 우진은 뻔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거리 앞에 아이스크림 집이 생겼는데, 거기 가고 싶었던 거지? 다 알고있어."

"어? 마, 맞아! 아이스크림 집. 얼마 전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우, 우진이 너도 알고 있었구나?"

"응. 근데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무슨 말이야. 난 바로 그거 생각했는데."

"씨잉.."

하빈은 억울함과 분함에 말도 못 하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우진을 노려보았다.

더 놀리면 정말 폭발하겠다 싶어 주제를 돌리기로 한 그는 참, 하며 물었다.

"근데 그 식당이라는 건 어디야? 그것부터 물었어야 됐는데 이제야 생각이 나네."

"아, 내가 말을 안 해줬구나. 거의 다 왔어. 왜 그, 역 앞에 있는 레스토랑 있잖아. 거기로 예약해뒀어."

"역 앞... 아, 어딘지 알겠다. 근데 거기 비싼 데 아냐?"

"쓸 때는, 쓸 데는 쓰자! 이럴 때 그런 데에 안 쓰면 어디에 쓰겠어?"

주말마다 시간을 내 아르바이트를 하는 하빈의 지갑사정을 그녀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좋아보이는 그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던 우진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이네.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내가 만든 말이야! 멋있지?"

"어쩐지 이상하더라."

"뭐 어쩌고 저째?"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에 들어와 앉은 우진은 아까 얻어맞아 욱신거리는 정강이를 주물렀다.

"우진아, 많이 아파...?"

귀가 달려있었다면 축 늘어져있었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 우진은 메뉴표를 펼치며 말했다.

"어. 아픈 만큼 많이 먹을 거야."

"응응. 많이 먹어. 내가 다 사줄게."

메뉴표에는 생소한 이름의 음식들이 잔뜩 실려있었다.

이름들보다는 숫자에 먼저 눈이 간 우진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제일 싼 샐러드가 2만원...'

코스 요리로 눈을 돌리니 두 자리까지 올라가는 가격에 속으로 한숨을 내쉰 우진은 샐러드보다 조금 더 비싼 파스타를 가리켰다.

"응? 우진이 너 파스타 안 좋아하잖아. 고기 먹어. 여기 맛있는 거 엄청 많아 보여."

"누가 안 좋아한다고 그래? 아까 찾아보니까 여기 파스타가 맛있다고 해서 먹어보려는 거야."

"그랬구나. 그럼 나도 같은 걸로! 어, 그리고... 우리 와인도 마셔볼까?"

"와인은 무슨. 물이나 마셔."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래. 나 마셔볼래."

"나는 됐어."

"혼자 마시면 심심할 것 같은데... 알겠어. 여기 주문할게요!"


주문을 한 뒤 서빙되어 온 딱딱한 빵에 크림을 발라먹으며 학교의 얘기를 하던 둘은 잠시 후에 나오는 파스타 접시를 받아들었다.

"우와! 엄청 맛있겠다. 우리 사진부터 찍자!"

우진의 옆자리로 와 사진과 함께 셀카를 찍은 하빈은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고선 숟가락 위에 포크로 파스타를 둘둘 말았다.

"우진아! 아~"

"야...우리 똑같은 거 시켰거든?"

"아앙~ 앙~~~"

주위를 둘러보던 우진은 어쩔 수 없이 하빈이 건네는 파스타를 받아먹었다.

"어때? 맛있어?"

"뭐... 그럭저럭. 너도 한 번 먹어봐."

"우진이가 먹여주면 좋을 것 같은데."

생글생글거리며 고개를 쭉 내미는 하빈을 본 우진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와 같이 파스타를 말아 건네주었다.

빨개진 얼굴로 그걸 받아먹은 하빈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우와! 엄청 맛있어!"

"그래?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하빈은 심드렁한 우진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포크를 열심히 움직였다.

"이러고 와인을 마시면..."

파스타를 먹고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하빈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 행동의 의미를 아는 우진은 끙 하는 신음을 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맛있으십니까, 이하빈씨?"

"너무 맛있어!!!"





파스타를 먹고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하빈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식당에서 나온 하빈의 뺨은 술기운 때문인지 약간 발그레해져있었다.

"하아... 밤공기 시원하다. 그치 우진아?"

"응. 아직도 저녁엔 좀 쌀쌀하네."

그 말을 한 우진은 가디건을 벗어 하빈의 몸에 둘러주었다.

"헤헤. 고마워."

"감기 옮기지 말라고 이러는 거야."

"솔직하지 못 하긴."

정곡을 찔린 머쓱함에 볼을 긁던 우진은 자신의 가디건을 여미는 하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하빈아.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별 일 없었어."

"내가 너랑 안 지 몇 년짼데. 못 한 말 있으면 해 봐. 이상하게 생각 안 할 테니까."

추위에 조금 떨리면서도 다정한 우진의 목소리에 하빈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빈 강의실에서 잠깐 잠들어 있었는데, 네가 멀리 멀리 사라지는 꿈을 꿨어. 내가 가지 말라고 해도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려서... 깨고나서 꿈이란 걸 알았는데도 슬퍼서..."

"...그건 알겠는데, 그거랑 밥 먹는거랑은 무슨 상관이야?"

"내,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이런 맛있는 거 많이 사줄 테니까 어디 가지 말라는 거야."

다소 유치한 발상이었지만 진지한 하빈의 목소리에 우진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내가 너를 두고 가긴 어딜 가. 네가 가려고 해도... 아니, 네가 가려고 하면 놓아주기야 하겠지만 내가 가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우진의 품에 안겨 그를 올려다본 하빈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내가 가려고 해도 안 놔줄 거라고 해줘..."

"...네가 가려고 해도 안 놔줄 거야. 평생."

이게 순애지ㅋㅋ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