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리엔을 좋아해 주시는 팬분들과의 오프라인 이벤트가 있는 날이었어요. 인파가 너무 많은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께 폐를 끼칠 수 있으니까, 일부러 지방에 있는 한적한 놀이공원으로 장소를 정했는데도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일리엔, 깜짝 놀랐습니다!

공원에 있는 놀이 기구를 통째로 빌려서 다 함께 롤러코스터도 몇 번씩 타고, 바이킹도 두 번 타고, 범퍼카 대회도 했습니다. 그리고 점심에는 예쁜 호수가 보이는 넓은 공원에서 일리엔이 준비한 도시락을 나눠 먹으면서 피크닉도 했어요. 정말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벌써 저녁이 되었어요. 터미널 앞에 모두 모여서 다음에 또 보자고 인사를 나눴습니다. 일리엔은 저와 헤어지는 걸 무척 아쉬워하는 팬분들께 너무나 감사하고 죄송해서, 한분 한분 꼬옥 포옹을 해주면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고마웠어요.

그렇게 일리엔의 가슴속이 따듯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한점 한점 차오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귓가에 이런 말을 속삭였습니다.

"미안해요."

에? 미안하다뇨-
어라. 몸이 왜 이러죠?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고 땅을 딛고 있을 다리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리고 폭신폭신한 구름 위에 벌러덩 누워서 하늘에 떠있는 것처럼 기분이 몽실몽실해요.

엣, 어라? 어... 라... 라...?


***


깜빡깜빡, 잠이 들었나 봐요. 
으...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요. 몸이 너무 나른해.
여긴 어디죠? 앞이 안 보여. 몸도 움직이지 않아.


절그럭. 쇠사슬 소리? 그리고 주위에 많은 인기척이 느껴져요.

"정신이 좀 들어요?"

부드러운 목소리. 누군가가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요.

"미안해요."

그저 미안하다는 말뿐이에요.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우리는, 당신을 너무 좋아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게 무슨 말-"

그 순간, 핵. 하고 몸이 뒤로 끌어당겨졌어요. 등이 푹신푹신. 침대...인가요? 
이제 알겠어요. 눈은 무언가로 가려져 있고, 팔은 단단하게 뒤로 묶여져 있는 거예요.
일리엔은 이런 상황일수록 당황하지 않고 침착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저기, 진정해요...! 일단 이것부터 좀 풀어주시고... 홋?"

더 이상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어요. 그 대신 온몸에 낯선 손길이 닿아오기 시작했어요.
손이 셋, 넷... 열? 아니, 그 이상...
가슴, 허벅지, 다리, 아랫배, 옆구리, 겨드랑이, 그리고 발... 마치 수많은 손의 파도가 온몸을 덮쳐오는 것 같아요.

누군가가 일리엔의 스타킹을 신은 발에 코를 대고 킁킁 거칠은 숨을 들이쉬어요. 오늘 하루종일 밖을 돌아다녀서 분명히 꿉꿉한 냄새가 날 텐데! 간지러운 것보다 부끄럽고 창피한 게 더 컸어요.

"아흣ᨻ 잠깐만요!"

그들은 일리엔이 말할 틈을 주지 않았어요. 누군가는 일리엔의 가슴에 얼굴을 묻얻고, 누군가는 배에, 겨드랑이에, 그리고 가장 부끄러운 다리 사이에도. 여러개의 얼굴이 일리엔의 온몸을 구석구석 덮쳐오는 오싹한 감각이 똑똑히 느껴져요.

"잠깐잠깐잠깐잠깐잠깐!!"
"아앙ᨻ 아ᨻ 잠까아안...!!"

마치 벌레떼가 동물의 사체를 뒤덮은 듯이, 일리엔은 보이지 않는 얼굴들의 거친 숨결의 늪에 빠진 것만 같았어요. 
그리고, 하나 둘 끈적하고 뜨거운 혀를 내밀어선 일리엔의 온몸을 구석구석 핥기 시작했는데... 일리엔, 평범한 악플쯤은 얼마든 참을 수 있었지만, 이런 치욕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앗, 앙ᨻ 아아♡ 그만, 그만하라고오오옷!!"

일리엔은 거의 울면서, 부끄러운 목소리로 있는 힘껏 소리쳤어요.

뚝.
모두의 호흡이 일순간 잦아들고, 온몸에 달라붙었던 얼굴들도 하나둘 조용히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일리엔은 가장 가까이 있는 누군가에게 마법을 걸어서, 일리엔의 눈을 깜깜하게 덮고 있는 안대를 벗기도록 만들었습니다.

앗, 눈부셔... 일리엔은 갑자기 빛이 밝아져 눈이 시려웠지만, 손을 움직일 수가 없어, 눈을 여러 번 깜빡여서 겨우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일리엔의 눈앞이 맑게 갠 순간, 따듯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가득 채워졌던 가슴속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무너지고 부서지고 깨지고 짓밟혀서, 내장이 뒤틀린 듯 속이 메스꺼워졌습니다.

"......"

당신들. 어떻게, 어떻게 일리엔에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 평소에 방송으로 소통하면서, 오늘 만나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기쁘고 즐겁게 웃고 떠들었는데. 일리엔을 정말 좋아한다고, 우리 앞으로도 이대로 함께하자고 약속했었잖아요.

"어떻게... 어떻게, 저한테 이런 짓을 하실 수가 있어요? ...네?!!"

일리엔이 날카롭게 소리치자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이 싸늘한 공기가 맴돌았어요. 일리엔의 새빨간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새어나서, 뺨을 타고 데구르르 떨어졌습니다.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 날 순수하게 좋아한다고 했던 그 말들은 다 뭐였냐고요!"

변명이라도 해보란 말이에요.
일리엔은 서럽게 울었지만, 모두가 싸늘한 시선으로 일리엔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정말. 정말...."

예쁘게 차려입은 드레스가 엉망으로 벗겨져 있었다는 것도, 온몸이 냄새나는 침으로 범벅이 되었다는 것도 잊고서, 일리엔은 목놓아 엉엉 울었어요. 부끄럽고 창피한 것보다는 우악스러운 배신감만이 일리엔의 가슴을 쿡쿡 파내고 좀먹어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누군가 불쑥 말을 꺼내었어요. 그는 일리엔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우리를 만족시켜주지 않으면, 더 이상 당신을 좋아해 주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엉망이 된 모습,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온몸을 희롱당하며 추하게 앙앙대던 모습도 인터넷에 다 뿌려버릴 거고."

더 이상 일리엔을 좋아해 주지 않는다고? 만약 저 영상이 퍼뜨려지면 일리엔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될 거예요. 그건 죽어도 싫어.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리엔은 새까맣게 멍들어서 썩어버린 마음을 모두 내려놓았어요.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팬들은 단지, 단지 일리엔을 못된 눈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요. 맞아. 응.

"......"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요."

일리엔은 온몸의 세포가 다 타버린 것처럼 제가 몸을 움직이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간신히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공손히 꿇어앉았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서, 가운데가 불뚝 솟은, 바로 옆에 서있는 팬분의 가랑이에 뺨을 가져다 대고 애교스러운 얼굴로 모두를 올려다보았어요.

"저를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모두를 기쁘게 해드릴게요."

일리엔은, 울면서 웃었습니다.
웃으면서 울었습니다.
그동안 좋아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정말 즐거웠어요.
나의 영원하고 순수한 팬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