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면전야. | 판타지 소설 도입부 느낌 짧은 샘플, 3700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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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개의 화톳불이 어두운 호면에 비춰 흔들리고 있다. 북쪽 산맥 끝자락, 얼어붙지 않은 것이 신기한 호숫가 나무들 사이를 빼곡히 메우고 있는 것은 코끼리의 모피와 뼈로 만든 견고한 천막이었다. 일렁이는 불빛에 드러난 깃발은 청색을 바탕으로 뒤얽힌 가지각색의 세 마리 용. 비류세가沸流世家가 필두에 서는 토벌대의 야영지였다. 

중앙대륙 북쪽 끝, 북부령 수도 외르데메룽에서 숙련된 모험가조차도 꼬박 열흘을 걸어야 초입에 다다를 수 있으며, 전 대륙을 통틀어서 가장 혹독한 환경을 자랑하는 곳을 논한다면 빠지지 않고 언급되고는 하는 마경에 가까운 산─ 눈 감은 자의 봉우리. 토벌대의 결집 이후로 한 달, 비류진시가 이끄는 토벌대는 거의 쉬지 않고 침로상의 아룡종들과 망자들을 짓밟으면서 일직선으로 진군해온 결과... 목표로 설정했던 빙마룡로덜레스 코끝에 칼을 겨누고 있다. 이 거대한 호수 건너에는 빙마룡의 성이 있다. 

때때로 어둠이나 물안개가 걷힐 때마다, 미의 정수라 칭송받던 얼음 성에 서광이 쏟아지고, 그 모습이 호수에 비치는 광경이 이쪽 기슭에서도 육안으로 충분히 볼 수 있으리라.  


“... 길어도 닷새 안에는 쓰러트리고 싶은데.” 


사계의 여름 같은 고즈넉한 미성이 낮게 읊조린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고양이처럼 곤두선 두 눈동자를 깜빡이고 있었다. 좋은 집안 태생 특유의 기품이 여실히 드러나는 몸가짐, 새하얗되 마녀로는 오해받지 않을 정도의 건강한 색감을 띠는 눈처럼 하얗고 고운 얼굴. 새틴처럼 매끄럽게 나부끼는 묘려한 연파랑의 머리카락, 보석을 한땀 한땀 조각한 것 같은 섬세한 눈동자가 긴 속눈썹에 감춰지고서도 여명이 하늘에 걸릴 때까지 둥둥 빛이 고여 있었다. 비단벌레처럼 다각적인 색채를 띠어서, 남들과는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은 동공이 가만히 호수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류세가가 자랑하는 소문난 재녀才女. 토벌대에서도 정찰, 그리고 선두를 담당하는 선발대. 말하자면 엄선된 인력 중에서도 또 한 번 가려 뽑힌 정예 인력─그와 동시에 가장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들을 인솔ㆍ지휘하는 소녀. 그래, 비류소소 호숫가에 우뚝 선 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류소소가 뱅글, 발꿈치를 들어 돌려 썰렁한 야영지를 돌아본다. 중앙대륙 전역에서도 베테랑이라고 손꼽히는 이들만 모았건만, 오늘 밤은 보초만 남기고 모두 천막에 틀어박혀 있었다. 요 며칠, 전군에 숨 막히는 권태감과 두려움이 떠돌고 있다는 것을 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백 단위의 모험가들이 모인 원정이다. 보급선은 길어질 대로 길어진 데다, 대식가라고 할 수 있는 얼음 코끼리까지 동원한 원정이기 때문에 전선은 이미 한참 전부터 피폐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이 지친 이유는 단지 그것 뿐만이 아니리라. 

비류소소는 다시 등 뒤의 어둠을 돌아본다. 포개진 천막의 그림자도, 짙은 심해도 지나쳐 아마도 성이 있을 자리. 저 머나먼 쪽의 안개에 가려진 희미한 음영을 응시하며, 허리에 찬 검의 칼자루를 꼭 쥔다. 


“아가씨!”  


그러나, 사색은 화톳불 사이의 어둠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오래 가지 못했다. 암흑 속에서 나타난 자는 가벼운 경갑을 입은 노련한 소대장이다. 이 어둠 속에서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에, 썩 좋은 소식이 아니리라는 것을 비류소소는 직감적으로 눈치챈다. 


“보, 본진에서 연락병이... 돌아왔습니다.” 

“... 살아 있었는가?” 

“... … 어찌저찌... 밤에는 활동을 잘 않는 것 같습니다.” 


읊조리듯 낮게 한숨을 내쉰다. 


“오라버니께서는?” 

“이 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다만... 그 뒤를 따르던 호위대는 전멸, 모시는 이 없이 비류가주님께서만 살아남아...” 


비류소소가 눈썹을 찌푸리자, 소대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결과적으로는 침묵이 도움이 되었으니 좋은 선택일테지만, 사정 쯤은 이해하고 있다. 단순한 연락원의 정보를 정리하기만 하는 그가 어떻게 된 일인지 상소히 알 턱은 없다. 그래도 오라버니는 무사하신 건가. 그렇다면 일단 목전의 임무에 집중하는 것이 맞을 터다. 짧게 케케묵은 한숨을 토해내듯이 뱉으면서, 비류소소가 말을 이었다. 


“날이 밝기 전에 회의를 열겠다고 각 조장에게는 전달했나?” 

“예.” 

“... 한 가지 더, 빙마룡은?” 

“... 습격 장소에서 그 앞은 발자취조차 잡을 수 없었습니다. 수색대에도 그렇게 많은 인원을 보낼 수 없거니와, 날아다니는 용종의 특성상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비류소소는 숨을 고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용종이란 본디 앞다리는 날개, 사지가 두 쌍이며 독수리의 것과 같으나 훨씬 큰 발톱을 지니고 있으며, 뱀과 같이 촘촘하게 딱딱한 비늘이 전신에 박혀 있다. 그것으로 모자라서 마치 악어와도 같이 벌어지는 큰 입을 가졌고, 그 입에서 일대를 모두 불태우거나 얼릴 정도의 업화를 뱉어내고, 그 날갯짓 한 번에 잔잔하던 곳에도 칼바람을 일게끔 하는 존재. 피와 심장은 범인이라 하더라도 영생을 살게끔 만들 수 있으니 그야말로 실존하는 신비 그 자체라 한들 부족함이 없으리라.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기적과 권능, 영령만 하더라도 말할 필요가 없다. 뭇 수천의 군세가 마땅히 하나에 반역해 투석기에서 쏘아내는 불 붙은 돌덩어리고 눈을 때리고, 수 많은 특제 화살과 창살을 온 몸으로 찔러야 마침내 지쳐 쓰러지는 것이 용종. 막연한 신화 속의 존재가 아닌 실제로 피해를 입혔기에 토벌대가 조직될 정도의 대상이니, 그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테지.

무엇보다 이 호수의 남쪽 연안에 전개하고 있던 아룡종들과의 전투 뒤에 시급히 진을 치는 일에 비류소소를 비롯한 선발대는 전력을 기울였다. 그 흔적을 쫓을 여력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곳은 이미 빙마룡의 영토 안, 말할 필요도 없이 우위는 그것에게 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오라버니가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사실이다. 


“어쨌건 우리는, 빙마룡의 유무와는 상관 없이 성을 함락한다. 지금 가진 식량으론 앞으로 열 날조차 버티지 못하지 않겠느냐. 그 이후에는...”  


... 앙천축수라는 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얘기일까. 비류소소는 그 후의 일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빙마룡의 척살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더 큰 무언가의 끝을 향해 수백의 모험가가 발을 멈추지도 못하고 계속 걸어가고 있다는, 그런 상념에 사로잡힌다. 오한과도 닮은 공포가 호수의 검은 호면에 파문을 만든다. 섬뜩한 한기가 모피 아래까지 스며들어 와, 비류소소는 몸을 떨며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애썼다. 왜 이렇게 유난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 다시 어깨 너머, 심해의 어둠으로 눈을 돌렸다. 그것은 아마, 비류소소가 그것을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히, 끝의 앞에 펼쳐진 광경이였다.

… 오라버니는 차치하더라도, 아르살로스는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무사하기는 한 걸까? 바람이 불 때마다 굳었던 얼음들이 부수어져 호수에서부터 또 다른 몸짓으로 떨어질 공간을 찾는다. 아르살로스, 당신은 왜 그 누구도 당신의 영혼에 색을 덧씌워주지 않던 고요한 밤, 이렇게나 사나운 공기에 무슨 미련이 남아 아직도 그 곳에 남아있는 거야? 비류소소는 가볍게 제 하순을 앙 깨물면서, 호수로부터 등을 돌려 천막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비로소 비류소소는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내일 동이 튼다면 알 수 있게 되리라. 오라버니에 대해서도, 아르살로스에 대해서도. 칼바람 외엔 사방으로 정적, 호수의 연약한 윤곽을 조금의 달빛이 억지로 뭉쳐 두고 있었다. 숨 막힐 정도로 고요한─ 호면湖面의 전야前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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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소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