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인류에게 어울리는 밤. | 포스트 아포칼립스 느낌 짧은 샘플, 3400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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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짝 마른 나무들 사이를 지나쳐 버석버석한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비탈길을 올라가자, 드디어 시야가 탁 트였다. 높은 절벽 위에서 저녁노을에 물든 호수와 그 주위의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악으로 지은 성곽과 아름다운 곡선의 첨탑이 호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멀리 성읍의 그림자를 비추고 하늘을 빛내는 투명한 진청색에, 하얀 첨탑과 성채에 핀 꽃의 진홍색이 비치는 광대한 호수. 불어 오는 바람이 무너져가는 돌담을 훑으며 지나가면서 소리를 내고, 살짝 붉어진 하늘을 배경으로 맹금류의 검은 그림자가 날았다. 멀리서 봐도 지친 모습, 그래도 땅 끝을 목표로 하는 새가 저 높은 하늘의 맑은 바람을 타고 날았다. 호수에서 뻗어 나온 강을 따라 펼쳐진 마을. 한 때는 어느 지방의 초입, 외곽 마을이었을 곳. 새하얀 회반죽과 붉은 벽돌로 된 선명한 색깔의 건물이 많아서, 노을빛을 더 붉게 반사하고 있었다. 

큰일이야, 이래선 해가 저물 때까지 산을 내려갈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절벽 아래를 바라보고, 언네임드는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가을이 깊어져서 밤에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가 찾아오고, 보존식도 어느덧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얄궂기도 하지. 하지만 별 수 없이, 절벽을 따라 내려가는 길을 찾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2. 

 

뒤늦게 동쪽 지평선에서 솟아, 남쪽 하늘을 가르고 서쪽으로 저무는 해를 좇아 언네임드는 정처 없이 걸었다. 이따금씩 조우하는 잎들 사이로 빛기둥처럼 비치는 햇살에 녹색 떡잎과 하늘색의 꽃잎이 흐드러지게 핀 숲 속의 작은 군생지를 지나,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조금씩 깊게 들어갈 때마다 아무렇게나 자란 풀과 몇 겹으로 휘감긴 넝쿨의 빈도와 밀도가 조금씩 늘어갔다.  

그러다가 이윽고, 해는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는다. 마지막 햇살이 구름 하나 없는 저녁하늘을 불태우고 광대한 평원에 길고 긴 그림자를 새겼다. 아득히 먼 산맥이 남쪽 하늘 가장자리를 검게 잘라내고, 대기 그 자체가 붉게 물든 듯한 세계 속에서 길고 검은 그림자가 점차 길어지더니... 결국 세상은 새까맣게 어둠에 잠긴다. 하늘을 바라보며, 언네임드는 생각한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가기는 글렀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털썩 주저앉듯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다. 

───그건 그렇고, 어두운 숲과는 다르게 대조적으로 의외일 만큼 밝은 별하늘이다. 공기가 맑은 겨울 하늘의 날카로운 별빛과 달리, 가을 하늘은 조용하게 속삭이듯 빛난다. 하늘을 가득 메우는 수많은, 머나먼 곳에서부터 찾아온 항성드르이 광채. 낮에 느껴지던 풀들의 엷은 훈김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숲의 곳곳에서 군생하는 푸른 꽃들이 내뿜는 달큰하고 짙은 향기가 별빛과 어둠 사이에 녹아들었다. 


별이 쏟아지는 밤, 꽃향기 퍼지는 어두운 숲. 


언네임드가 발걸음을 멈추어 쉬어 가기로 결정한 장소는 숲 속의 꽤나 넓은 편에 속하는 벌목장이었다. 그래도 찬 바람은 가능하담 맞고 싶지 않아서, 벽에 기댈 수 있는 면이 있는 장소를 택해 노면에 가만가만 숨쉬듯 앉아 있었다. 타닥타닥, 눈 앞에서는 꺾어 온 잔가지들이 고체 연료에 의해 점화된 채로 석쇠 위의 통조림을 데우고 있었다. 통조림을 직접 가열하면 바스페놀인가 뭔가 하는 게 유출된다고들 했던가? 

 

“알 게 뭐야.” 

 

하고, 짧게 읊조린다. 어차피 그것도 멸망 이전의 이야기다. 침낭을 바닥에 깔고, 모포를 살짝 두른 채로 틈입하는 온기를 느낀다. 빈말로도 편안한 환경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언네임드는 이미 조악한 환경에는 익숙해져 있다. 무엇보다 노면이나 콘크리트 위에서 체온을 빼앗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불편하기까지 해야 하는 것보다는 몇 배나 나은 일이리라. 충분하게 휴식하지 않으면 다음 날의 행동에도 문제가 생긴다,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은 그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타인은 없으니, 절대적으로 자신이 겪은 경험에 의존해서. 

인공의 빛이 전혀 없는 미지의 어둠으로 가득한 세계 속, 다닥다닥 타오르는 불꽃이 만드는 고립된 빛의 공간 안에서 느리게 숨쉬는 소녀의 실루엣. 머그컵에 담긴 인스턴트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는다. 그녀에게 남아 있는 고체 연료의 대부분은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 남겨야 했던지라, 최소한으로 끓인 물은 미지근하고, 수 많은 사선을 건너기 위해 소비한 막대한 양의 칼로리를 보충하기 위해 설탕이 대량으로 넣어져 있어 특유의 인공적인 단맛이 지나치게 강하다. 

그러나 내키지 않는다고 하기엔 이만한 것도 없나. 


다음엔 또 어딜 가야 하지. 


막연하게 생각한다. 우선은 산 밑의 저 마을이나, 혹은 도시이리라. 무엇이든 먼저 보이는 곳에 도달해야 한다. 우선은 식량이 떨어져 가고 있고, 헤드셋은 집음부가 손상된 건지 조금씩 지직이고 있어 보수가 필요하다. 아마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렇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지, 또 아마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겨야 할 것이다. 그렇담 그 다음에는? 또, 그 다음에는?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장소라던지도언네임드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위해 발걸음을 멈추어도 그 모든 자연의 절경과 주목할 만한 장소가 오롯이 그녀의 것이다.  

그 누구도 그녀의 선택에 반문하거나 제지하려 들 사람은 없다. 꽈악, 살짝 왼쪽 주먹을 쥔다. 오른쪽 뇌반구의 운동 영역에 자극이 가해져, 손가락이 오므라져 모인다. 자기 자극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자각은 없다, 자신의 의사로 움직이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손. 요컨대 그런 것. 원한다면 언네임드는 무엇이던 할 수 있고 무엇이던 될 수 있다. 그것은 세계에게 영향을 받은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고, 세계의 영향을 받아들였다는 형태의 자기결정이라고도 할 수 없다. 꾸역꾸역, 마수와 빈곤을 피해 하루를 더 살아가고, 그러면서 전 세계를 유랑하는 것 또한 그런 영향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것이 못내 슬프다거나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일견 다 데워진 것처럼 살짝 부풀은 통조림을 뜨겁지도 않은지 손수건 두어 겹에 의존해서 감싸쥐고, 알루미늄 포일 뚜껑을 벗겨낸 다음 한 숟갈 떠서 호호 불다가 입에 물었다. 보존 고기 특유의 인공적인 방부제 향과 그것을 어떻게든 덮기 위해 훨씬 더 인공적인 첨부제 향이 불쾌하게 구강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혔다. 거부감은 없다. 한 숟갈, 한 숟갈. 조금씩 입에 떠넣어 가며, 칼로리를 보충한다. 더 이상 언네임드에게 식사라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식사하면서 누군가와 웃고 떠든다거나 하는 일은 사치에 불과한 일로 전락한지 한참이고, 맛을 품평하기엔 어느 지역의 어느 식료품점에 가도 유통기한이 넘지 않은 것은 통조림 밖엔 없다. 그마저도 위험한 것을 먹어야 할 때가 언젠가는 오리라. 그야말로 마지막 인류에게 어울리는 식사. 


마지막 인류에게 어울리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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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lai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