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철폐: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의 관점』
—웨인 프라이스






마르크스는 『고타강령 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코뮌주의 - 역자 주) 사회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전환의 시기가 놓여있다. 또한 이 시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있으니, 이때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 이외의 다른 것일 수가 없다.”

이 언명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국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하지만 이 역시 더 나은 독재가 아니었다는 해석이 도출된다. 어쨋건 이 독재적 국가는 어떻게든 “사멸”할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이 개념에 반대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자본주의 국가를 즉각적으로 계급이 없고, 국가도 없으며, 화폐도 없고, 군대도 없는 코뮌주의 사회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스트적 관점 모두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다. 하지만 둘 모두는 진실 전체를 다루지 않는다. 특히, 마르크스에 대한 자유의지주의적 해석은 사실 다수 아나키스트들의 관점과 유사하기도 하다. 자본주의로부터 온전히 사회주의(코뮌주의)적인 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행기가 있어야 한다는 발상은 거의 “상식적”인 것으로 보인다. 혁명 중에는, 그리고 혁명 이후 상당 기간 동안에는 반혁명세력과 방해공작으로부터 새 사회를 방어해야 할 필요가 발생할 것이다. 어떤 경우건 간에, 자본주의라는 사회가 길러낸 다수의 사이코패스들과 반사회분자들이 다른 이들을 해치는 것을 예방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방어와 안전을 제공할 유사국가기구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듯하다. 나아가 인민대중들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된다. 물론 인민대중들이 새로운 체계가 제시하는 이상에 끌리기도 하겠지만, 여전히 물질적 동인 역시 필요하다. 이러한 사회는 온전한 코뮌주의에 비해서는 약간 부족한 것이다.(마르크스는 하위 단계 코뮌주의와 고등의 완전한 코뮌주의 단계를 구분했다.)

국가의 사멸이라는 개념조차 어느 정도는 말이 되는 바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본가 계급의 규모와 영향력은 줄어들 것이고, 이들은 새로운 사회에 점진적으로 통합될 것이다. 구체제는 사멸하고, 그 잔재는 축출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부르주아지를 억제할 필요는 없어질 것이다. 혁명이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내전들에서 승리한 이후, 군대의 필요성은 사라질 것이다. 풍족하고 건강하며 행복한 사회에서, 반사회적 행동들은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경찰식 통제의 필요성 역시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서도 노동대중의 사회운영 참여는 점점 더 증가할 것이다. 인민들은 더 많은 교육을 받게 될 것이고, 참여를 위한 여가시간 역시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모두가 통치에 참여한다면, (인민과 유리된) 정부는 사라질 것이다. 지난 혁명들 모두에서 인민들은 대중봉기에 참여했다. 결국 그들 중 일부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고, 나머지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기술력을 사회주의적 사회 체제와 결합할 때, 인민들은 더 많은 자유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혁명 이후 대중의 참여는 계속 증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행기 개념, 이행기적 노동자국가, 국가의 사멸 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세워냈던 국가들은 사멸하기는커녕 끔찍한 전체주의국가로 변모했다. 전체주의적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75년이 지난 후, 소비에트 연방은 사멸하지 않고 붕괴했다. 중공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들의 경제는 사적소유에 기반하고 있다.

이행기국가와 이행기 경제 이론은 국가 공산주의의 선동가들과 마르크스주의적 비평가들이 75년의 전제왕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소련이 노동자의 사회주의 지상락원이라고 바라보지 않았던 이들이라도, 최소한 소련이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고, 후기자본주의 사회라고, 사회주의로의 도상에 있는 사회라고 바라보았다. 이 이론가들은 실제로는 자본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국가였던 소비에트 연방이 어쨌든 자본주의적 서방과는 다르고, 더 낫다고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이들은 서방에 대항하여 소련을 지지하였고, 냉전 기간 중 소련의 편에 섰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옹호했다. 이 어구가 의미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한 이후, 노동계급이 전체 계급으로써 자본가들과 그 주변부 지배할 시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노동계급의 민주적 자기조직과 대치하는 개념인 것은 아니다.(생각해보라. 부르주아들의 독재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호환이 되는 개념이 아닌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의 의미는 드레이퍼가 논의한 바 있다.(드레이퍼, 1987) 드레이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의미한 것은 노동자가 계급으로써 집행하는 민주적 지배라고 말한다. 드레이퍼는 단 한 명의 예외를 제외하면, 레닌과 트로츠키의 시기를 살아가던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지배를 소수에 의한 억압적 지배라 해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해석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반대하였던 개량주의자들과 이에 찬성하였던 레닌주의자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해석이었다. 앞서 말한 단 한 명의 예외는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노동자의 민주적 계급 통치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룩셈부르크의 해석은 자유의지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의 전통적 개념에 따르면, 소위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라 하는 것은 이전의 계급 독재와 특정한 방식에서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소수 계급이 다수 대중에 대하여 행하는 지배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이 독재는 다수 대중, 즉 노동자들과, 노동자들의 지도에 따를 농민과 같은 다른 피억압계급들이 소수 계급(자본가)에 대하여 행하는 지배가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지배계급의 권력을 유지하려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모든 계급을 계급없고 국가없는 사회주의로 해소해내려 할 것이다. 이러한 차이들이 있기에 나는 노옹자의 지배를 독재라 표현하는 것이 그다지 유용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독재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시대에 따라 바뀌었고, 이 단어가 더 이상 계급적 지배라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과는 별개이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독재가 민주주의와 호응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산당 정부들이 지난 세월 동안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공산당의 독재적 지배를 표현해오기도 했고 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고대 노예제 국가도, 현대 자본주의 국가도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다. 이들은 민주주의적일 수도 있고, 폭압적일 수도 있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것이 노동계급의 지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해왔다. 즉, 노동자들이 가장 민주적이고 코뮌적인 노동자 평의회 체계를 통하여 지배할 수 있는 것처럼, 소수 혁명 정당의 지배나(레닌이 그러했던 것처럼) 1인의 전체주의적 지배(스탈린이 그러했던 것처럼)을 통하여 지배하는 것 역시도 가능했던 것이다. 레온 트로츠키나 아이작 도이처처럼 소비에트 러시아가 민주적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사회주의 국가였고 노동자국가였다고 주장하던 이들이 이러한 주장을 사용한다.

하지만, 노동계급은 노예주나 자본가들과는 다르다. 노동계급은 산업 내에 어떠한 자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노동계급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지도, 주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기에 정부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방식은 집단적이고, 협력적이며, 민주적인 방식 뿐이다. 현대 기술 사회는 점점 더 집단화되어간다. 산업에 있어 집단화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역시 그 거대하고 준독점적인 기업 안에서 집단화된다. 결국 문제는, 누가 이 집단화된 경제를 통제하는 가에 있다. 전통적 자본가들이 경제를 통제해야 하는가? 아니면 국가 관료가? 혹은 노동계급 전체가? 만약 누군가가 경제를, 노동자들을 “위해” 운영한다면, 결국 노동대중은 언제나 있던 그 자리, 사회의 바닥에서 사장들의 지시를 받아가며 착취당하는 그 자리에 남아있게 될 것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사회를 국가와 계급과 모든 형태의 지배를 철폐하는 도상으로 전환하려 한다면, 사회를 운영하는 것은 노동자들 스스로여야 한다. 노동계급은 민주적이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계급은 자유로울 수 없다.(물론, 노동계급의 자주경영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혁명 이후(이행기 단계)에 하여야 할 일에 대한 마르크스의 상은 1971년 봄 파리 코뮌의 노동대중으로부터 구성되었다. 파리 코뮌에 대한 글은 매우 많기에, 나는 단지 짧게 요약만 하고자 한다. 1870년, 루이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제국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프러시아의 군대는 프랑스군을 박살냈고, 나폴레옹을 생포했다. 프랑스의 보수정치인들은 공화국을 선포했고, 프랑스 상당부분을 점령하고 있던 독일인들과 항복협상을 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반동적이고 근왕주의적인 지방정치인들로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열었다. 하지만 파리의 노동대중들은 게르만 침략자들에게 항복하려하지 않았다. 파리 노동자들은 국민위병을 통해 무장했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무장하고, 스스로 조직한 파리의 노동자들을 그래도 여전히 자본계급을 대변하고 있던 독일 점령군보다 더 두려워했다. 자본주의 국가와 파리 노동대중 사이의 내전이 발발했다. 파리의 대중들은 권력을 쟁취했고, 대혁명기의 파리 코뮌을 본따 파리를 “코뮌”이라 선포했다. 하지만 결국 자본가들의 정부는 독일의 협력을 얻어 파리 노동자들을 진압했다. 수만의 노동자들이 살해당하고 수천이 수감당하는 유혈진압이 열렸다.

하지만 파리 코뮌은 72일간 지속되었다. 마르크스는 파리의 코뮈날레들이 한 일과 할 수 있던 일들에 크게 감명받았다. 즉, 파리 코뮌에서 그가 관측한 경향성과 파리 코뮌이 제시한 다른 미래가 그것이었다. 『프랑스 내전』에서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의 급진적 민주주의의 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관료들을 지역구획에 따라 선출된 공무원들로 대체한다. 이 선출 공무원들은 유권자들에 의하여 언제라도 소환될 수 있어야 하고, 노동자 다수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 싱비군은 인민 자경대(국민위병)으로 대체될 것이다. 경찰은 임명직이 아니라, 지역의 인민들이 직접 통제하게 될 것이다. 입법부로부터 독립된 행정부는 없어질 것이다. 모든 지역 마을, 촌락, 도시가 이러한 초민주주의적 체제로 운영되고, 각 지역의 대표단을 중앙도시로 보내고, 각 도시의 대표단을 파리로 보내어 전국적 협력체를 구성하였다.

경제적으로는 파리의 노동자와 빈민을 구휼하기 위한 규제안들이 통과되었다. 제빵노동자들의 야간노동이 금지되었고, 부채가 탕감되었다. 자본가들이 버리고 도망간 공장과 작업장은 노동자들이 운영하도록 되었다. 노동자 자주경영기업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것을 조직할 시간이 없었다.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의 반국가적 방법론에 대하여 『프랑스 내전』 초안에 다음과 같이 명확히 요약했다. “이는 국가 그 자체에 대항한 혁명이었다... 인민을 위하여 인민이 사회적 삶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파리 코뮌은 지배계급의 일부 세력의 권력을 다른 세력으로 넘겨주는 혁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파리 코뮌은 계급적 지배라는 끔찍한 장치를 파괴하는 혁명이었다.”(프내전)

아나키스트들은 1871년의 파리 코뮌에 대한 분석에 있어 마르크스에 동의했고, (아마도 아니겠지만)마르크스가 아나키스트들의 반국가적 해석을 도용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바쿠닌은 파리 코뮌이 “용감하고, 명확하게 표현된 국가에 대한 부정”이었다고 찬미한다.(바쿠닌, 1980)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파리 코뮌에 대하여 쓴 것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의 모순되는 언급을 남긴다. 1891년, 엥겔스는 “사회민주주의적 속물”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은가? 파리 코뮌을 보라.”고 일갈했다. 엥겔스는 독일사민당 내에서 성장하고 있던 우익 세력에게 노동계급의 지배의 혁명적 관점을 마주하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코뮌의 급진적 민주주의가 지배(“독재”)였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1875년, 엥겔스는 파리 코뮌의 경험에 기반하여 당의 강령을 바꿀 것을 제안하는 편지를 쓴 바가 있다. “국가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며, 특히 더 이상 본래의 의미에서의 국가가 결코 아닌 코뮌 이래로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국가를 게마인베센으로 대체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이것은 프랑스어인 “코뮌”을 대체할 수 있는 오래된 독일어가 될 것입니다.” 이를 인용한 이후, 레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약 강령에 대한 수정이 가능해진다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주도 세력들이 얼마나 ‘아나키즘’에 대하여 울부짖을 것인가”(국가와 혁명)

그렇기에 엥겔스에게 있어 파리 코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혹은, 노동계급의 지배)임과 동시에 “더 이상 본래의 의미에서의 국가가 결코 아니”기도 한 것이다. 파리 코뮌은 노동자들과 유리된, 노동자들 위에 존재하는 사회적 조직이 아니기에 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 파리 코뮌은 소수가 착취당하는 다수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이전까지 착취하던 소수를 통제하는 것이었기에, 국가가 아니다.

이러한 이중성은 평의회 공산주의자인 폴 매틱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 승리한 노동계급은 새로운 국가를 구성하지도 않을 것이며, 기존 국가의 통제력을 확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그 독재를 집행할 것이다 ... 이전의 국가와 유사한 기능을 하더라도, 이 (노동계급의) 독재는 새로운 국가가 되지 않을 것이다 ... 사회주의는 국가를 통해 실현되지 않는다. 국가는 노동계급의 자기 결정이라는 사회주의의 본질을 배제하기 때문”(매틱, 1983)이라고 쓰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중요한 지적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통해 바라보더라도, 노동자 국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레닌의 책 『국가와 혁명』은, 레닌의 저작 중 가장 자유의지주의적인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가에 대하여 쓴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 레닌은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혁명의 심화에 영향을 받았다. 러시아 혁명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소비에트(평의회)들은 파리 코뮌의 경험을 더 큰 규모로 다시 시도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레닌이 권력을 잡고, 혁명이 권위주의적으로 변모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책에서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주도세력들이 아나키스트들을 (레닌이 일컫는 바) 잘못된 이유(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국가없는 사회라는 목표에 대한)로 비판하고 있다는 비난을 가한다.

레닌은 “혁명 이후에 사멸할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거나 준국가”라고 썼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사멸할 국가만을, 그러기 위해 구성되어 건설과 동시에 사멸하기 시작할 국가만을 필요로 한다.” “온전하고 공고하게 도입된 민주주의는 ...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억압자의 민주주의에서 피억압계급의 민주주의로, 특정한 계급을 억누르기 위한 ‘특수한 권력’으로서의 국가에서 다수의 인민, 즉 노동자와 농민의 일반적 권력에 의한 억압자의 억압으로의 전환”하는 것이고, “코뮌은 국가가 되기를 포기할 것”이며 “이행기 동안 ... ‘국가’는 여전히 필요할 것이나, 그것은 이행기적 국가일 것이다. 이 국가는 문자 그대로의 국가가 아닐 것이다.”

레닌은 완전하게 국가가 없는 사회를 이루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 이행과정은 혁명 직후 시작할 것이라 보았다. 다수 노동인민은 혁명 이후 즉각적으로 사회를 운영하는 데에 참여하고, 이전의 지배계급을 제압할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혁명 이전 레닌의 볼셰비키 당의 강령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로 요약할 수 있었다. 노동자의 산업통제, 소비재를 분배하는 여성위원회, 토지를 분배하는 농민위원회 등 말이다. 그리고 이 강령은 반국가적 관점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은 일반적으로 볼셰비키의 강령이 최소한 아나키스트적 가치에 친화적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이들은 혁명 과정에서 레닌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이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이행기 국가에 대한 관점은 자유의지주의적이고 반국가적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이나 레닌 역시 이와 같은 해석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자유의지주의적 해석은 역설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건설해낸 전체주의적 국가와 모순된다. 스탈린주의적 독재의 지지자들 역시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읽었다. 이 책들을 읽고 어떻게 국가 자본주의를 옹호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이 언명한 바들은 모순적이다. 반권위주의적 해석이 얼마나 실제로 정확한지는 명확하지 않다. 상술한 것처럼,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노동자 국가는 즉각적으로 사멸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이 노동자 국가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 말한 바 없다. 그렇기에, 레닌은 그의 가장 자유의지주의적인 저작에서조차, 국가는 영구히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엥겔스는 『프랑스 내전』에 대한 1891년의 서문에서 파리코뮌이 국가를 즉각적으로 끝내었다는 입장을 수정한다. “국가는 최선의 경우라도 계급 투쟁에서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물려받을 악덕일 뿐이다.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들은, 파리 코뮌에서와 같이, 새롭고 자유롭고 사회적인 환경에서 자란 세대가 국가의 잔재를 쓰레기 더미 위에 던져버릴 수 있을 때까지 그 최악의 부분을 잘라내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개념에서,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라 불리게 된다. 혁명은 단지 “최악의 부분”을 “잘라낼” 수 있을 뿐이고, 국가 그 자체는 한 세대 이상을 존속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국가의 사멸”이라는 개념 그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이 개념은 역사가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자동적으로 진보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성에 호응한다. 이 관점에서, 노동계급 안에서의 계급의식은 자동적으로 생길 것이며,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귀결하게 될 것이다. 이 경향의 근원은 마르크스로 돌아가고, 아마도 마르크스가 헤겔로부터 도출한 사적유물론에 따라 역사가 필연적 귀결로 나아간다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헤겔 철학과 프러시아 전제주의를 보라.)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경향성은 선택과 자유의지를, 사회주의 혁명에 반드시 필요한 도덕적 시각을 부정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에 내재된 유일한 경향성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적유물론은 그 주된 경향성이고,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 양측 모두에게 지배적인 관점이기도 하다.)

노동자국가(혹은 준국가)가 정말로 자동적으로 사멸할 것인가? 국가적 요소들이 자기들끼리 뭉치려는 경향은 없을까? 관료층이 국가적 기구를 만들어내고, 결국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지는 않을까? 구지배계급에 저항할 필요성에 따라 건설한 군사적 · 경찰적 요소가 권위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으로 변모하게 되지는 않을까?

마르크스주의적 공식에 따르면, 혁명적 활동가들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새로운 국가를 철폐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국가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가 얻게 될 것은, 아마도, 음, 국가일 것이다. 우리는 국가를 철폐하기 위해서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 새로운 준국가(이건 무엇이건)은 철폐되어야 한다. 일부 국가적 기능들(이를테면, 반혁명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군대)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해도, 이것이 새로운 국가로 공고해지는 것에 맞서 싸울 의식적 계획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국가주의적 경향에 대응하고, 이 경향성을 필요최소로 억제하고, 사회를 국가가 없는 방향으로 추동하기 위한 일관되고 즉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준국가에서의 규칙은, 최대한 자발적인 자주경영을 촉진하고, 이를 위해 일시적으로 필요한 최소만큼의 강제와 중앙화를 동원하는 것이다.

국가주의적 경향성을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롭게 만들어질 평의회가 다당제적이고, 다양한 경향성을 포함하며, 민주적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 결사의 자유를, 정치적 다원주의를 허용하는 것이다. 혁명 중에는, 그리고 혁명 이후에는 혁명적 노동자들 내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관점들이 난립할 것이다. 혁명적 아나키스트 조직을 구성하여야 하는 주된 이유는 이 과정에서 권위주의적 정당들(사민주의자들부터 레닌주의자들까지)과 투쟁하기 위해서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조직되어야 한다. 이 조직을 통해 노동자들이 새로운 주인님이 아니라 아나키스트들을 선택하도록 설득하여야 한다. 하지만, 아나키스트 조직은 다른 조직(권력을 추구하는 정당)들과 맞서기 위해서만 존재해서도 안된다. 아나키스트 조직은 다른 정치적 경향성과 협력하기도 하여야 한다. 이를테면, 북미는 거대하고 복잡한 사회다. 하나의 정치조직이 모든 정답을 갖추고, 모든 투사들을 끌어들이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 조직은 노동자 민주주의를 향해 전진하는 모든 조직들과 동맹을 맺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치 조직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우선, 상대적으로 협소한, 강령에 따르는, “정당”과 같은 조직이 있을 것이다. 이 조직은 강령에 따라 자발적으로 연합한 조직이다. 그렇기에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강령에 대한 상대적으로 높은 동의수준을 가지고 있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광대한 대중조직이 있다. 노동조합, 지역연합, 노동자 평의회 같은 것 말이다. 대중조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포괄되며, 가입에는 최소한의 요건만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에서 일하거나, 그 산업에서 일하면 된다. 이 요건을 제외하면, 대중조직의 구성원들은 정치나 종교와 같은 것들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최소한 경영진은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노동조합이 최소한 계급적 기구일 수는 있도록 한다.) 이 두 종류의 조직을 혼동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를테면, 스탈린주의자들은 그들의 협소한 정치조직이 다면적 성격을 가진 노동계급을 대변하고 있는 양 이야기한다.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대중조직에 동화되는 과정에 집중하느라 대중을 혁명으로 설득하기 위한 내부투쟁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아나키스트들이 조직의 형태에 대한 논쟁을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는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조직에 반대한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에서 다원적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하여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물론, 마르크스가 이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당은 오직 하나의 당 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상만이 노동자들 대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방향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레닌은 그의 당이 진정한 노동계급의식을 가진 유일한 당이라고 확신했다. 실제 노동자들의 의식이 무엇이건 간에 말이다. 『국가와 혁명』이 당이나 당들의 역할에 대하여 어떠한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레닌이 평생을 당 건설에 바쳤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생략이라 하겠다. 레닌은 당이 무대 뒤에 있어야 한다고 상정했을 수도 있고, 당 그 자체도 사멸할 것이라 여겼을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를 상정하더라도, 레닌은 다당제 민주주의를 생각하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야당들은 여러 가지 이유들로 하나하나 불법화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은 탄압당했다. 논의상의 편의를 위해 이러한 탄압이 혁명 중에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상정하더라도, 레닌주의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 필연을 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공산당의 지도부 한 명은, 공산주의에는 충분히 여러 당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나의 당은 권력을 잡고, 다른 당들은 감옥에 있을 수 있다고 빈정대기도 했다.(아나키스트들이 노골적으로 다원적 민주주의를 옹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율적 연합을 조직할 자유를 요구했다.)

이후에 논의하겠지만, 러시아 혁명은 볼셰비키가 홀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다. 러시아 혁명은 레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를 포함한 다른 세력들의 동맹이 이루어낸 것이다. 이 통일전선의 해소와 일당독재로의 전환은 혁명의 타락을 알리는 중대한 이정표가 되었다.

언젠가, 새로운 과제들과 조직방법론이 등장함에 따라 당들이 사멸할 수도 있다. 일부 지역 공동체는 합의에 기반한 의사결정 방법론을 사용할 수도 있다. 혁명적 조직들의 통일전선이 그 도상으로 향하는 한 걸음이 될 수도 있다. 다양한 지역들은 각자의 조건에 따라 각자의 정치를 조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결코 완전히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해관계와 고민지점들을 두고, 다양한 사상을 두고, 서로 다른 열망들을 두고 다툴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언제나 한데에 모여 각자의 의견을 표현하고, 타인을 설득하고자 노력할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아마도, 마르크스주의가 전체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게 된 요체는 그 중앙집중주의에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부터 레닌까지,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중앙집중적 경제 · 정치 기구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이는, 권력이 중앙에 집중되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이 중앙집중성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마르크스는, 독일의 주요 혁명적 민주주의자로서, 독일을 분열시키고 있던 소형 영방국가들의 혼란에 반대했다. 마르크스는 선출된 의회가 단일하게 운영하는 통일 독일의 필요성을 부르짖었다. 이러한 통일 독일에서는 지방 귀족들을 몰아내고, 전국적 내수시장을 만들어 자본주의가 자유롭게 경제를 진보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자코뱅주의로 대표될 수 있는 급진적인 중앙집중적 민주주의의 전통을 따랐다.(이는 급진적 민주주의자들이 제퍼슨주의를 따라 탈중앙화된 연방을 주장하고, 보수주의자들이 헤밀턴주의를 따라 중앙화된 유사왕정을 주장하던 미국의 상황과는 달랐다. 물론, 제퍼슨의 급진적 민주주의는 백인만을 위한 것이었다.)

1848년 유럽혁명의 실패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에의 성명』을 썼다. 이 성명서에서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옹호하는 바 “연방적 공화국”을 비난하면서, “노동자들은 단일하고 불가분한 공화국을 위해 투쟁할 뿐 아니라, 가장 단호하게 집중된 권력을 국가 권력의 손에 쥐어주기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중앙집권을 위하여 투쟁했던 프랑스 혁명가들의 예시를 들었다.

하지만 1885년, 그러니까 파리 코뮌 이후, 엥겔스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 이 문장은 오해에 기반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1791년의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모든 부처와 지구, 지자체의 행정부는 해당 지역의 인민들이 선출한 이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선출직들은 전국적 법령의 제약 아래에서 온전히 자유롭게 행동하였다는 것을 인지한다. 이러한 지역적인 자치는 미국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것은 혁명의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 이는 정치적 · 민족적 중앙집권과 모순적이지 않다...” 엥겔스는 이러한 지방자치를 파괴하고, 하향식 임명직 지방관료 체계로 대체한 것이 나폴레옹이었음을 적시한다. 내가 보기에 엥겔스는 이 문장을 애매모호하게 끝맺었다. 엥겔스가 말한 것이, 연방주의가 민족대단결과 반드시 모순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인가? 아니면 엥겔스는 중앙집중화가 어쨋건 지역적 자치와 호환가능하다고 말한 것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엥겔스는 이 질문을 거의 재론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영향을 끼친 바는 없다.

이 주제에 관하여 논할 때, 파리 코뮌에 관한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자주 인용된다. “개량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인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은 파리 코뮌에 관한 마르크스의 입장이 아나키스트/탈중앙주의자인 프루동의 입장과 유사하다고 말하면서 마르크스를 공격한다. 레닌은 이를 분연히 부정하면서 마르크스가 언제나 중앙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사실, 마르크스는 중앙집권/탈중앙화의 문제에 대하여 명확히 언급한 적이 없다. 파리 코뮌에 관한 마르크스의 저작은, 분명히 탈중앙주의적 관점과 흡사하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이 결론을 도출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코뮌이 빠르게 행동하여 혼란 상태에 있던 반동세력을 공격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코뮌이 프랑스 은행의 금을 확보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레닌과 같은 이들은 이러한 언명을 근거로, 마르크스는 보다 중앙집권화되고 독재적인 파리 코뮌을 원했다고 주장한다.

일부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발생했던 지역 총회(이 지역 총회는 18세기의 프랑스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활 시도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 내의 지역 클럽의 중요한 역할도 논의하지 않았다. 사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역적이고 직접적이며 대면에 기반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노동계급 민주주의는 언제나 노동계급이 통제할 수 있는 선출직 관료들에 대한 논의에서 멈추었다. 이는 결국 가장 민주적인 대의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은 결코 노동자들이 자신의 기구와 공동체에 대해 행사하는 일상적 통제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에게 이러한 통제는 발생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파리 코뮌에 대한 서술은 경제적 · 기술적 중앙화에 관한 마르크스의 믿음과 무관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적 대공장과 대기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대공장과 대기업이 기술적 진보라고 보았다. 대공장은 생산성의 증대를 가져온다. 이는 대도시를 건설할 수 있게 하고, 이 안에는 대규모의, 중앙집중화된,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거주할 것이다. 이 거대한 세력은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어낼 것이다. 이것이 『자본론』이 말하고자 하는 바라 하겠다. 사회주의는 이러한 기저 위에 건설될 것이고, 더욱 대규모의 산업을 만들어낼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대규모 산업이 노동자들을 더 잘 통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자본의 집중과 중앙화”는 생산성 증대가 아닌 금융적 이유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잦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이 요인들이 장기적으로는 기술과 생산성의 진보에 복무한다고 믿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중앙집중화의 가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사회주의 강령을 제시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차례 빼앗고 모든 생산 도구를 국가의 손안에, 즉 지배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안에 집중시키며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생산력을 높이게 될 것이다.” 이 선언은 10개 조항의 강령으로 뒷받침된다. “5. 국가 자본과 배타적인 독점권을 가진 국립 은행을 통해 국가의 손안에 신용을 집중시키는 것. 6. 운송 수단을 국가의 손안에 집중시키는 것. 7. 국영 공장의 수와 생산 도구를 늘리고, 공동 계획에 따라 토지를 개간하고 개량하는 것. 8. 모두에게 똑같은 노동 의무를 부과하고 산업 군대, 특히 농업을 위한 군대를 키워 내는 것.” 1850년의 『공산주의자동맹에의 성명』 역시 국유화와 중앙집중화를 위한 요구가 제기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강령의 여러 부분을 바꾸는 과정에서도, 완전히 중앙집중화된 경제라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가의 숭배자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공산당 선언』의 2부를 국가 경제가 중앙집중화되고 계층화된다면, 국가는 국가로 존재하기를 포기할 것이라 선언하며 마무리한다. “발전을 거치는 가운데 계급적 차이가 사라지고 모든 생산이 연합된 개인들의 손안에 집중되면, 공권력은 그 정치적 성격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무언가를 더 이상 국가라 부르지 않더라도, 생산을 그 손안에 집중한 “전 민족의 광범위한 연합”은, 사회의 나머지 위에 군림하는 중앙집중화된 관료기제가 된다. 그러니까, 국가다. 이 산업군대의 구성원들, 그러니까 노동할 것에 “책임이 있는”(강제된) 이들이 중앙의 계획자들과 공통된 이해관계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혹여 있을 노동자들의 반란을 막기 위한 경찰이나 군대를 재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공권력은 그 “정치적”(국가주의적) 성격을 재건하게 될 것이다.

레닌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레닌은 언제나 “중앙주의자”라고 자칭했다. 레닌이 (개별 민족국가의 연방적 결합이라는 의미에서)연방주의를 옹호하던 때에도 그는 이것이 완전한 중앙집중화로 향하는 도상에서의 임시적 방법일 뿐이라 여겼다. 레닌의 당과 국가는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도록 설계되었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이 담고 있는 자유의지주의적 문장들 속에서도 그가 중앙집중적 경제를 신봉함을 분명히 했다. 그가 지향하는 경제 모형은 근대 제국주의, 특히 독일 국가에서의 전시 “국가독점자본주의” 모형이었다. 그는 독일의 체신 체계를 선망했을 뿐 아니라, 정부와 자본주의적 요소를 결합하는 대규모 중앙집중적 기업을 선망했다. 레닌은 만약 제국주의-자본주의 국가가 노동계급의 국가로 대체되고, 이와 같은 형태의 중앙집중화된 기업을 운영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사회주의로의 일보전진이 될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 “모든 시민들은 국가가 고용한 피고용인으로 변할 것이다. ... 모든 시민들은 피고용인이자 단일한 범국가적 ‘신디케이트’의 노동자가 될 것이다. ... 사회는 총체적으로 하나의 사무소이자 하나의 공장이 될 것이다...” 레닌은 이 단일거대공장 안에 상당 기간 동안 “기술자, 감독관, 회계사”를 비롯한 다른 관료들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 관점의 국가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해서는 더 강조할 것도 없다. 사회가 감독관과 관료들을 가진 하나의 거대한 공장이나 사무소가 된다니! 혁명의 확산이 실패하고, 외침과 내전이 계속되고, 러시아 전역에서 극도의 빈곤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압력 아래에서,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들은 레닌의 자유의지주의적 측면들을 압도하고, 전체주의적 악몽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적 강령과는 다르게, 크로포트킨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기고한 글에서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에 경제적 생활의 주된 원천들(토지, 광산, 철도, 금융, 보험 등)을 넘겨주거나, 산업의 통제권을 넘겨주는 것은 국가가 이미 가지고 있는 기능들(교육, 종교, 국방 등)과 결합하여 새로운 폭압의 기구를 만들어낼 뿐이라고 여긴다. 국가자본주의는 관료제와 자본주의의 힘을 강화시킬 뿐”이라고 언급한다. 1세기쯤 지나 돌이켜볼 때, 누가 옳았었는지는 자명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