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힐데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얽히고 얽힌 먹구름으로 소란스러웠다. 드문드문 빛이 반짝이며 어두웠던 지상으로 번개가 내리쳤다. 그 단엄함은 꼭 죄를 처벌하는 철퇴와도 같았다.


'그렇다면 다음은 내 쪽으로 내리치겠군.'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몇 번의 번개가 빗겨치고 난 후에는 장대비가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거친 전투로 헝클어졌던 그녀의 은빛 머리가 물을 머금고 가라앉았다. 세찬 비는 이어서 도신에 묻은 피를 씻겨 흘려보냈다. 그건 마치 그녀가 저지른 죄를 사하는 것 같아서 힐데는 눈썹을 찡그렸다.


'너는 어떻지?'


힐데는 벽에 힘없이 기대 앉은 소년을 내려보았다. 찢긴 옷가지, 곳곳에 생긴 잔상처, 검은 머리의 소년은 한 눈에 보아도 평범한 상태가 아니었다.

소년의 생기 없는 눈이 비치는 쪽을 따라간 힐데는 곧 만신창이가 된 괴물 두 마리를 발견했다.


'괴물.'


클리포트 인자의 힘을 감당 못하고 폭주해 파괴욕만 남은, 이성을 잡아 먹힌 자들. 힐데가 보기에 그들은 괴물이 틀림없었다.


'... 너에게도 그렇게 보일까?'


힐데의 눈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저들은 부분 변형이 일어나긴 했으나 그럼에도 인간적인 모습에 훨씬 가까웠다. 어린 소년의 두 눈에는 갑작스럽게 미쳐 자신을 죽이려 한 부모님과 그들을 죽인 사람 중 누가 더 괴물로 보일지 힐데는 굳이 생각하기 싫었다.


"... 주시윤."


빗소리에 파묻힐 정도로 작은 목소리, 그러나 주시윤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생기없던 눈에 초점이 잡혔고 그것과 눈을 마주친 힐데는 흠칫했다.

비는 그의 공포와 슬픔을 씻겨내렸지만 타오르는 증오는 미처 끌 수 없었던 듯하다. 오히려 비를 먹이 삼으며 몸집을 더욱 키운 증오심은 그의 총명했던 푸른 눈동자마저 붉게 만들었다.

힐데는 주변에 열기가 후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감정의 격앙, 클리포트 인자의 활성화로 추정되는 여러 요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자가 그렇게 클리포트 인자가 활성화되면 그 힘에 잡아 먹혀 괴물이 되고 만다. 그의 부모가 그러했던 것처럼.

괴물이 되어버린 주시윤의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미 죽은 자들의 유언으로, 친우의 목숨을 스스로 끊은 죄책감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마음을 하늘이 대신하듯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힐데는 괴물들이 소지하고 있던 물건을 수거해 주시윤에게 갖다 주었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힐데를 잡아먹을 듯 흉흉하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주시윤은 붉은 검과 염주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미 빗물에 젖고 젖어 남은 온기라곤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유품으로 하여금 좋았던 시절의 온기를 기억할 수는 있었다. 소년은 조용히 울었다. 비는 그의 흐르는 눈물 역시 흘려보냈다.

힐데는 그렇게 지금의 안 좋은 순간 역시 흘려보내고 싶었다. 그녀는 주시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시윤은 당장이라도 그 손을 쳐내고 싶었으나 이미 두 손에 들린 유품 때문에 그러기 힘들었다. 대신 노려보는 것은 가능해서, 둘은 그렇게 서로의 눈빛을 탐닉하듯 바라보았다.

신경전 끝에 먼저 눈빛을 거둔 건 주시윤이었다. 그리움과 슬픔에 희석된 증오심은 처음과 달리 두려움으로부터 그를 숨겨주진 못했다. 목격자를 살려주는 범죄자는 없으리라, 그녀의 손에 쥐어진 칼이 금방이라도 자신에게 휘둘려질 것만 같았다.

힐데가 조심스레 다가가자 주시윤은 눈을 감고 다가올 고통에 몸을 떨었다. 칼 대신 작지만 따뜻한 손이 그의 머리에 살포시 얹어졌다.


"미안... 하다...."


힐데의 눈빛은 그녀의 잠긴 목소리만큼이나 슬퍼 보여서, 주시윤은 이어지는 힐데의 말을 멍하니 듣게 되었다.


"복수를 원하든, 답을 원하든...."


소년이 알기에 너무 무거운 것들, 때문에 자신의 부모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 몰라야 된다. 관리자는 말했다. 주시윤이란 소년의 길은 가시밭길이어야만 한다고, 그 길에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자만이 가능했다.


"언제든지 받아 줄 테니 네 힘으로 얻어내라, 그때까지...."


주시윤은 힐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네 스승이 되어주마."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는 건 확실하리라. 슬픔은 증오를, 증오는 용기를 낳아 원수를 기꺼이 뒤따라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맞잡은 힐데의 손은 사람을 그렇게 죽일 정도로 피와 심장이 얼어붙었을 거란 그의 생각과는 달리 매우 따스했다.



-



"널 만난지도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군."


코핀컴퍼니 본사 내부 복도의 끝, 드문드문 켜진 불빛 탓에 다소 어두운 조명 아래로 변함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힐데는 그러고 상념에 잠겨 뜸을 들였다. 십여 년이 흘렀다. 겁 많고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작던 소년은 훤칠한 키와 남 부럽지 않은 전투능력을 갖춘 청년이 되었다. 비록 공백은 있었지만, 많은 시간 동안 소년은 힐데의 보호 아래, 지도 하에 그런 덕목을 하나하나 갖추었다.

힐데는 그를 더 이상 '남'이라며 모르는 사람처럼 취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한참 전부터 깨달았다. 처음 거두었을 때 주시윤과 그녀의 관계는 친우의 '유언'이라는, 관리자의 '부탁'이라는 연결고리가 따랐지만 그와 자신 간에 그 모든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유대감이 생겼다고 확신했을 때부터다.


'어째서 미나 양만이 예외인 거죠?'

'제 부모님과 미나 양은... 대체 뭐가 다른 거죠?'

'대답해 보세요, 스승님.'

'왜 미나 양만이 그렇게 특별한 건가요?'


방금 전 주시윤이 쏘아붙였던 말들.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라 힐데의 가슴 한 쪽이 아려왔다. 그녀의 기억은 틀림없었다. 클리포트의 힘에 잡아 먹혀 이성을 잃고 신체 변형이 일어나 괴물이 되어버린 자들, 그래서 죽이는 걸 주저하지 않았었다.

다만 어린아이가 그날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약간의 기억 보정이 필요했던 듯하다. 주시윤은 그의 부모가 클리포트 인자의 힘을 사용했을 뿐 틀림없이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절한다.'


때론 거짓이 가혹한 진실보다 더 달콤한 법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힐데는 더더욱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주시윤의 진지한 얼굴 뒤편에서 왠지 모를 슬픔이 전해졌다. '스승님' 하고 내뱉는 그의 입술은 평소보다 뒤틀려 있었다.


힐데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낳았다. 주시윤의 부모는 클리포트 인자의 힘에 잡아 먹혔었고 유미나는 그 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있다. 한 번 그 힘에 손을 댄 이상 유미나는 좋든 싫든 클리포트 게임에 참여하든가 죽어야만 했다. 게임에 참여하면 그 목숨은 풍전등화와도 같다. 마왕을 상대한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힐데는 그런 위험천만한 곳에 주시윤을 내몰 자신이 없었다. 그럴 바에야 영영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다음 평생토록 그의 수발을 드는 편이 훨씬 나았다. 반면 유미나가 클리포트 게임에 참여하는 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의 힘은 특별하기도 했고, 힐데로서 그녀는 죽어도 상관 없는 사람에 속했기 때문이다.


"어때? 이제 자신감이 좀 생겼나?"


주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힐데는 바보 같은 제자를 때려 패서라도 빌어먹을 호기심을 끊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 한번 해볼 생각이냐?"

"... 스승님."


덧없는 중얼거림은 이어지는 굉음에 묻혀 사라졌다. 오해는 오해를 낳고, 착각은 착각을 낳는다. 힐데는 그녀 자신도 모르게 주시윤을 더욱 절벽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



리플레이서라는 시끄러운 집단이 정리되었음에도 부사장 이수연의 매일은 여유로울 틈이 없었다. 무슨 일이든 수습과 정리가 필요한 법이었고 그런 점에서 사장이라는 작자가 잡다한 일들을 그녀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뿐이라면 숨 돌릴 틈은 얼마든지 있었으리라. 이수연은 커피를 마시는 시간도 쪼개가며 그녀 스스로의 호기심을 채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좀비처럼 코핀컴퍼니 내부를 돌아다녔다.


"아얏!"


모퉁이를 돌던 중 누군가와 부딪힌 이수연은 그녀답지 않게 소녀 같은 소리를 내었다. 동시에 상대의 손에서부터 나풀거리며 떠오른 무언가를 초월적인 반사신경으로 잡아챈 그녀는 눈을 의심했다. 탄 흔적으로 많이 훼손된 사진의 중앙에 힐데가 있었다.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이쿠."


손을 뱀처럼 움직여 사진을 낚아챈 주시윤은 곧장 품속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수연의 기억마저 끄집어 낼 수는 없었다.


"... 시윤 군, 그 사진은 뭐지?"

"아, 이거요?"


주시윤은 품속에서 사진을 꺼내 흔들었다.


"부적 같은 거죠. 누구나 소중한 걸 가까이 두고 싶어하는 법이잖아요? 부사장님은 이런 거 없으신가요?"

"나는 그런 취미 없다네, 닳거나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하, 역시 그렇죠?"


빙글빙글 웃던 주시윤은 슬쩍 장도를 어루만졌다.


"그나저나 안색이 많이 초췌해지셨네요. 피곤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제가 잘하는 마사지샵을 알고 있는데, 소개라도 해드릴까요?"

"... 전에 누가 임무 중 마사지샵으로 발길을 돌렸던 게 떠오르는군, 그게 그렇게 몸에 좋은가?"

"하하, 그것 참 몹쓸 인간이네요. 하지만 부사장님도 한번 갔다 오시면 그 사람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될 겁니다."

"시윤 군,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임무 준비나 하게."

"넵, 알겠습니다."


이수연은 멀어져가는 주시윤의 등을 바라보았다. 느릿느릿하게 걷는 모습이 얄미웠지만 한편으로는 기운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문득 이수연은 카운터케이스 보고 중 사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연옥에 떨어진 번뇌룡이 이번 생에는 바라밀을 완성할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나?'


찾아 본 결과 바라밀은 높은 곳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을 뜻했다. 지난 생까지 바라밀을 완성할 수 없었다는 그의 말에 따르면 업을 따르던 용들은 수행이 부족했거나 자멸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사진이 계속해서 이수연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절반은 불에 훼손된 사진, 그 중에서 멀쩡한 부분은 힐데와 사장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검은색 펜으로 덧칠돼 있었다. 기억을 더듬던 그녀는 사진에서 불에 타 버려 훼손된 부분에 세 명이 더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 중에 주시윤의 부모가 있었다면, 만약 사장이 주시윤의 수행을 위해 억지로 그의 부모의 클리포트 인자를 활성화시켰다면, 그래서 힐데가 그들을 처분하게 만들었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사장이 부모에게 손댔다는 걸 주시윤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어서 사진 속 사장의 얼굴에 덧칠했고 악감정을 갖고 있다면, 사장이 모습을 숨기고 회사에 들어온 많은 이유 중 주시윤도 포함돼 있다면.

억측일지도 모르는 추측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이수연은 잡념을 떨쳐내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한꺼번에 피로가 몰려와서 그녀는 벽을 짚으며 억지로 몸을 지탱했다.


'이유가 뭐가 됐든....'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처럼, 그의 앞길도 결코 평탄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이수연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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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데가 주시윤 애호했으면 해서 자급자족으로 글 써봤는데 팬픽은 쓸게 못 되는 듯 설정 다 틀리면 뭐라할 것 같아서 찾아보는데 힘들었어

그리고 보통 종신하면 사장이 얼굴 비추는 걸로 알고 있는데 주시윤 종신 대사 보면 아닌 것 같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