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끝나버린 세상 앞에서 힐데는 우두커니 앉아있다. 이제 관리자가 사라졌으니 그녀의 과업도 끝났다.
관리자와 힐데. 그들은 서로 모르는 척하고, 못본 척 했다. 처음 침식체들 사이에서 깡통사장을 구출했을 때부터 알았다. 이가 관리자이고, 우리 모두 배수의 진에 다가섰다는 것을. 구원과 클리포트 게임, 발키리와 마왕. 그들은 부가적인 목표는 달랐으나, 서로 같은 배를 타고 같은 이상을 품고 있었으니, 아는 척 할 필요 없이 서로 묵묵히 길을 걸어 왔다. 이제는 모두 고꾸라져 침식의 아지랑이 속에 묻혔지만 힐데는 후회하지 않았다.
힐데는 후회한 적이 없다. 이수연을 버릴때도, 클리포트 인자를 지닌 자들은 학살하고 다닐때도, 용혈을 가진 자들을 죽이고, 그 아들을 제자로 삼았던 때도. 이는 비단 그녀의 비정함을 맹목적으로 비난하기 전에, 미쳐버린 세계의 일면을 너무 빠르게 알아차려, 그녀를 괴물로 만들어버린 세상이 있었음을 염두해두어야 할 것이다.
뒤에서 힐데를 지긋이 보던 유미나가 걸어온다. 신경질적으로 초코바를 먹고 있는데, 류드밀라가 배고픔도 잊은 채 그림자들과 싸우던 이야기가 신경쓰였기 때문이다.
유미나 : 어때. 소대장. 세상 참 아름답지?
힐데 : ...
유미나 : 흠. 눈이 멀었지, 귀가 안들리시는건 아닐거 아냐?
힐데 : 귀도 가까운 소리 말고는... 잘 들리지는 않는다. 지금... 세상이 어떻지?
유미나 : ...
유미나는 참으로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이수연 부사장의 마음을 절실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힐데는 눈이 멀었고, 강인한 마음은 이미 꺾여서 없어진지 오래다.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그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이었지만, 그녀의 가슴팍에 있는 펜릴의 엠블럼이 바람 속에서 흔들리며 그 존재를 과시했다. 그랬기에 유미나는 힐데를 못본 척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소대장이 살아준다면, 언제라도 희망이 되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미나 : 지금 저기 보여? 애들 축구하고 있네. 저기서는 소대장님같은 노인네들이 앉아서 먹거리를 먹으면서 구경하고 있고. 치킨이랑 맥주가 맛있어 보이네. 그들의 머리 위에는 벚꽃이 가득 쌓여있어. 벌써 4월이거든. 시간 참 빠르지?
힐데는 멀쩡한 세상이라면 있을 수가 없는 고농도 침식파의 따끔거림을 느꼈다.
힐데 : 그런가... 다행이군. 주시윤은 뭐하고 있지?
유미나 : ... 선배야 뭐. 알아서 잘 지내고 있겠지. 어이쿠. 어이쿠. 하면서. 또 누군가의 복장을 터뜨리고 있을거야.
주시윤은 용서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이미 그림자가 되었다. 용혈에 취한 그림자. 이제 유미나에게 그런 것을 상대하는건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다만 그가 힐데를 죽이려 들때 유미나가 이를 저지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녀 자신도 헤아리지 못했다. 그래서 유미나는 그 둘이 영원히 만나게 두지 않으리라.
힐데 : 그러면 미나. 이제 우리는 뭘 해야하나?
유미나 : 그건... 소대장님이 내게 가르쳐 주던거잖아.
힐데 : ... 미안하다.
유미나는 말 없이 힐데를 업혔다. 너덜거리는 힐데의 팔과 다리가 힘없이 부딪힐때마다 유미나도 무너질 것 같았다.
유미나 : 관ㄹ.. 아니 사장님을 찾으러가자. 뭔가 우리에게 일을 주시겠지. 우리는 아직 펜릴 소대니까.
힐데 : ... 관리자가 살아있을리 없을텐데?
유미나 : 역시 직감은 대단하네. 솔직히 살아있다고 생각하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그 양반은 살아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그럴 것 같거든. 하아, 그냥 소대장님은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면서 살아.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하고. 안 좋은 생각하면, 건강도 더 나빠질테니까. 우리 소대장님 오래 살아야지.
힐데 : ...
유미나는 천천히 건물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힐데는 유미나가 품은 희망이 그녀를 더 아프게 갉아먹을까 두려웠지만, 입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미약한 희망마저 꺼져버리면 그들에게 남아있는 게 없을까봐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