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학부생일 때 과 내에서 석사 학위 받고 일본의 도호쿠 대학으로 박사 학위 공부를 하러 간 선배가 있었음.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내가 다녔던 학교는 지방국립대였던지라 명문대로 박사 공부를 하러 간다는 건 나름 대단한 일이었기 때문에 꽤 화제가 되었고, 나도 내가 학부 연구생으로 있던 실험실에서 그런 선배가 나왔다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었음.
근데 유학을 가고 나서 공부 한답시고 연락 끊겠다고 한 양반이 한 1년?쯤 지나니까 갑자기 연락도 늘고 내가 무슨 실험을 하는지, 그 실험에서 뭐가 문제 인지를 계속 지적질 하면서 슬슬 빡치게 하더니, 뜬금없이 한국으로 놀러 온다고 하는 거임.
그 때가 분명 학기 중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오랜만에 온 거고, 나름 자랑스럽다고 생각한 선배였기 때문에 나랑 후배 몇 명이서 걍 치킨 사 먹으면서 밤새 얘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 인간이 재밌는 영상을 보여줄까? 하더니 우리한테 지구는 사실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속칭 평평이 놈들의 영상을 보여주더라?
근데 우리는 물리학과 소속이었기 때문에, 중력은 사실 없는 거고 거대한 배후 세력의 음모입니다! ㅇㅈㄹ 하는 영상을 보면 웃길 수밖에 없어서 그냥 웃어 넘겼는데,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 줄 때 나한테 '야, 너 아까 그 영상이 진짜 가짜라고 생각하냐? 넌 지금 속고 있어' 이러면서 존나 째려보는데 쉬벌 등 뒤의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역광이랑 겹쳐서 뭐랄까 ㅅㅂ 혐오스러운 생물을 보는 기분이 들었음.
그 이후에도 계속 지구는 사실 평평하고, 나는 명문대 생이라 너희들이 하는 실험은 정말 가소로운 일이다면서 뭔가 개소리를 한 달 내내 지껄이더니 우리가 더 이상 제대로 된 인간 취급을 안 해주니까 갑자기 잠적해서는 대학원도 자퇴해서 추천해 준 지도 교수님을 엿 먹이더라..
그 뒤에 그 인간의 동기 형한테 듣기로는 일본인들이 자기 보고 원숭이라고 놀리고 자기의 연구 결과가 질투가 나서 제대로 된 발표를 못하게 막는다는 피해 망상적인 얘기를 엄청 했다고 하더라고..
그 소식을 마지막으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 인간이 페이스북에 남긴 'Don't hack my e-mail, FBI'라는 짧은 글 이후론 완전히 잠적해버렸다는 사실 뿐임.
나는 아직도 그가 대학원에서 무슨 짓을 당했고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응 실패하고 제대로 된 공부도 안 한 채 명문 대학교 학생이라는 자부심만 갖고 살면 그런 괴물이 된다고 깨달았음.
윌버를 보면서 문득 그 인간이 떠오른 건 분명 대학원생의 스컬 그레이몬 버전이 다 비슷하기 때문이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