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7일 오후 6시 10분 코핀컴퍼니 인근 길거리.


5월이 되고 벌써 일주일이 지나갔다. 일단 5월은 가정의 달이라니 뭐라니 해서 공휴일이 많은 달이라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반가운 달이다.


주시윤도 휴일이 반가운 것은 마찬가지다. 코핀 컴퍼니의 주 52분 근무 시위 사건 배후에 있는 인물인 만큼 '일'이라고 하면 질색팔색을 하는 위인이지만, 휴일이 많다고 해서 5월이 꼭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주시윤은 천애고아다. 모든 가정이 웃고 기념하는 5월을 주시윤은 어릴 때부터 어찌할 줄을 몰랐다. 남들이 빨간 종이를 접고, 핑킹 가위로 오려내며 종이 카네이션을 만들 때 주시윤은 나홀로 종이비행기를 만들고 놀았다. 카네이션 따위, 만들어 봤자였기 때문이었다.


길거리에 있는 꽃집에는 온통 카네이션 꽃다발을 앞세워 진열해놓았다. 본 척도 않고 꽃집 앞을 지나려던 순간, 누군가가 주시윤을 불러 세웠다.


"거기 후배님 잠깐 멈춰보시죠."


익숙한 듯하면서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 그렇지만 결단코 잊을 수 없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자신을 불러세운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뒤돌아 보자 그곳에는 안경을 쓰고 베이지색 자켓을 입은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30대 후반의 남성── 나유빈이 꽃집에서 꽃을 고르고 있었다.


"제가 꽃을 보는 안목은 없어서 그런데 같이 꽃 좀 골라 주시죠. 어차피 집에 가서 할 것도 없잖아요?"


"……길 한 복판에서 싸우자는 건 아니겠지요?"


"하하 설마요. 국민들을 위해 일해야하는 공무원이 시민들을 위험에 말려들게 할 생각은 없답니다."


"국민들을 위해 일해야하는 공무원이 사조직을 만들어도 되는 걸까요?"


"시끄럽군요. 잔말 말고 와서 꽃이나 같이 고르시죠."


나유빈이 더 이상 말장난 하기 싫은지 말을 자르고 꽃다발 고르기에 열중하기 시작하자, 저번과 달리 확실히 적의가 없는 것이 확실시한 주시윤은 그로부터 세 발치 떨어져 함께 꽃다발을 고르기 시작했다.


"꽃은 왜 고르는 거죠?"


"머지 않아 스승의 날이잖아요. 뻔뻔하게 코핀 컴퍼니에 들어가기도 그렇고, 그러자니 스승님께 아무 것도 안 드리자니 마음이 영 안 좋아져서 말이죠."


"스승의 날 선물이라면 스승님께는 꽃 보다는 담배 한 보루나 사 드리는 게 더 기뻐하실 것 같은데요?"


"하하하 스승님이라면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제자라면 스승님의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몸에 해로운 것보단 꽃이 낫겠죠. 스승님의 나이가……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스승님도 일단은 여자랍니다. 꽃을 받아서 좋아하지 않은 여성 분들은 없죠."


대강 어느 것을 살지 결정을 했는지 나유빈은 꽃집 직원을 불러 파란 리본으로 치장된 카네이션 꽃다발을 구매하였고, 그것을 주시윤에게 건내주었다.


"저한테 왜 주시는 거죠?"


"저대신 스승님께 전해주시죠. 아까도 말했다시피 제가 뻔뻔하게 찾아가는 것도 그렇잖아요? 거부권은 없습니다. 아, 제가 줬다고는 하지 마시고요."


억지로 꽃다발을 떠밀은 후 나유빈은, "그럼 언젠가 봅시다. 후배님. 그 땐 지금처럼 평화롭게 얘기할 사이로 만나지 않겠지만요."라고 말한 후, 타이밍 좋게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서 타고 사라졌다.


"이거 원참……."


버릴 수도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하는 수 없이 꽃다발을 들고 집으로 간다.


주시윤과 힐데의 집은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집에 들려 갖다 줄까 생각도 했지만 퇴근 이후에 직장 상사를 만나는 것은 극구 사양하고 싶기에 내일 회사에서 건내주기로 한다. 어차피 꽃다발이라해봤자 카네이션 꽃다발이기 때문에 이상한 오해를 받지도 않을 것이다.


한 손에는 장도, 다른 한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다시 집을 향해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이번에는 코트 주머니에서 전화 진동이 울려퍼졌다.


발신자 로리 할망구. 또 어딘가에서 침식현상이 생겨 퇴근 10분 만에 재출근을 하게 될 아찔한 상황이 벌써부터 눈 앞에 아른거리며 받기 싫은 감정이 마음 속 깊숙한 어느 심연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왔지만 받지 않으면 다음날 힐데는 물론 부사장까지 난리칠 게 뻔하니 군침을 한번 크게 삼키고 전화를 받는다.


"예, 스승님."


[어디냐.]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만?"


[빨리 와라.]


발신자는 자기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일단 재출근은 아니니 다행이라 생각한 것도 잠시,


'빨리 오라고……?'


방금 전 상상했던 아찔한 상황보다 더 아찔한 상황이 펼쳐질 상상을 하니 등골에 한기가 들고 곧이어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퇴근 후에 그냥 만나는 것도 끔찍한 직장 상사를 집에서,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단 둘이 있는 것은 어느 누구나 극구 사양하고 싶을 것이다. 주시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주시윤이 직장 상사── 힐데와 단 둘이 있기 싫은 이유는 어색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는 마냥 뺀질거리는 철부지처럼 굴고 있지만 힐데와 단 둘이 있을 때 어떻게 대해야할지 어찌할 지 잘 모르겠다.


힐데는 어린 시절 주시윤의 부모님을 주시윤이 보는 앞에서 죽였다. 이렇게만 본다면 힐데는 주시윤의 철천지원수다. 하지만 마냥 원망할 수 없는 이유는 힘에 취해 날뛰며 자기 아들 조차 못 알아보고 자기 자식을 죽이려던 부모로부터 목숨을 구해주고 이 나이 될 때까지 가르치고 키워준 은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시윤에 있어 애증의 대상, 펜릴 소대의 소대장 힐데다.


숨을 헐떡거리며 집 현관문의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누른다. 너무 급하게 누른 나머지 두 번 정도 틀리고, 다시 재입력하려는 순간 덜컥하고 집 안쪽에서부터 문을 열어주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예상했다시피 문을 열어준 것은 힐데였다.


"뭐가 그리 급해서 버벅거리고 있냐?"


"하하하… 스승님 볼 생각에 설레여서 말이죠."


"또 헛소리하기 시작했군. 들어와서 식사나 해라."


힐데는 콧방귀를 뀌며 홱 돌아서 부엌으로 들어갔고, 주시윤도 신발을 벗고 그 뒤를 따라간다. 


'그나저나 식사라고?'


집안에서 나는 맛있는 냄새도 그렇거니와 와이셔츠에 앞치마를 걸친 차림에 오른손에 국자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음식이 준비돼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힐데가 한 음식이라고 하면 초콜릿을 만들면 석탄 덩어리를 만들고, 밥을 하라고 쌀을 주면 청동기 시대 민무늬 토기와 함께 발굴될 법한 쌀 화석을 만든 것이 그녀의 화려한 업적이다.


'내일은 급체와 식중독으로 병가 확정이구나. 부사장님도 얘기들으면 이해하시겠지…….'


햇반만 덩그러니 올려진 식탁에 앞에 앉아 식은 땀을 흘리며 머릿속 어딘가에 잡지식으로 쳐박혀 있는 셀프 위세척 방법이나 셀프로 손 따는 방법을 찾는 동안 힐데가 오븐 장갑을 낀 손으로 냄비를 들고 오고, 뚜껑을 여는 순간 죽음을 각오한 것과 달리 음식은 겉보기에는 멀쩡─ 아니, 오히려 먹음직스러운 밀푀유 전골이 냄비에 담겨져 있었다.


겉보기만 멀쩡할 지도 모른다. 미심쩍음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에 표정으로 그대로 들어낸 채 덜어먹는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과, 배추 몇 점을 앞접시에 덜어서 조금 식힌 후 발사믹 간장 소스로 보이는 검은 액체에 살짝 찍어 먹어본다.


혓바닥에 닿았을 때 살짝 퍼지는 희미한 국물과 소스의 맛은 일단 합격이다. 그리고 고기와 배추를 천천히 씹자 쫙 퍼지는 육즙은 마치 마포구 동교동 쪽에 있는 모 대학가에서 파는 맛집 못지않은 맛이었다.


힐데가 한 음식이라고 믿기지 않는 눈으로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맞은 편에 앉으며 식탁에 팔꿈치를 대고 턱 괴고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스승을 바라본다.


"미안하다. 뭔가 해주고 싶었는데 음식은 영 젬병이라 급한대로 마트에서 파는 밀키트를 사서 했는데… 맛은 괜찮나?"


"하하 그럼 그렇죠. 하마터면 그림자 침식체인줄 알고 베어버릴 뻔 했네요. 스승님이 이렇게 음식을 잘 하실 리가 없죠."


평소 같았으면, "너도 내 손으로 부모 곁으로 가고 싶지 않으면 입 닥쳐라."라고 했을테지만 힐데는 대꾸하지 않고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미소 짓는 그녀였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애달파 보였다.


"그럼 식사를 하자구나."


그 후 어색한 분위기 속 식사가 시작됐고, 침묵만이 그 공간을 차지하게 됐다. 쥐 죽은 듯 조용한 곳에는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 똑딱이며 울려퍼졌고, 그 침묵을 깨는 것은 '유기체였던 것'이었다.


아까 전에 집에 급하게 들어오며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꽃다발이 떨어지며 힐데의 시선을 끌었다.


"카네이션… 부모님께 드리려고 사온 거냐?"


"저희 부모님께는 카네이션 보단 흰 국화가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부모님 섭섭해하신다."


몇 마디 오고 가며 대화가 트는 가 했지만 대화는 또 다시 끊기고,


"스승님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뭐라고?"


"다음 주에 스승의 날이고 해서……."


"……고맙다."


몇 마디 이어지고는 또 대화가 끊긴다. 그리고는 기나긴 침묵이 시작되고 두 사람은 말 없이 식사만 하였고 식사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이 집에서 육성이 울려 퍼지는 것은 모든 식사가 끝난 후였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뭐지."


"평소에 하지 않던 걸 하시는 걸 보니 스승님도 슬슬 가실 때가 되신 건가요?"


"그냥 변죽이다. 죽네 마네 소리 듣는 걸 보니 나도 어지간히 제자한테 미움 받는 스승인가 보군."


"농담입니다.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설거지는 제가 할테니 스승님은 댁에 가서 쉬시는 게 어떠실까요?"


"너도 쉬어야할테니 그럴 생각이었다."


조금도 쉬었다 갈 생각은 없었는지 힐데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테이블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외투와 꽃다발을 챙겼다. 그리고 곧바로 현관을 향해 걸어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아직도 원망하고 있냐?"


"무슨 말씀이실까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럼 잘 쉬어라. 그리고 꽃… 고맙다."

힐데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현관에서 주저하다가 현관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갔다.


"예 원망하고 있죠… 그렇다고 증오할 수도 없으니 참 얄궂은 분이시죠 스승님은…."


드르륵 의자를 끌며 주시윤도 밥상에서 일어나 다 먹고 텅 빈 냄비를 싱크대에 옮겨놓고 식탁을 치웠다.


설거지는 조금 쉬었다 하고 싶기에 일단 물만 받아놓고 거실에 있는 소파로 몸을 던진다.


퇴근 후의 피곤함과 식곤증에 눈이 감길 때 테이블에 웬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종이 규격 크기와 잉크로 빽빽히 무언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아 편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주시윤은 그 편지를 집어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친애하는 제자에게


멋쩍고 익숙하지 않기에 형식적인 서두문은 생략하겠다.

이틀이나 지나서 늦은 감은 있지만 일단 지나간 어린이 날 축하한다.

네 부모를 대신해 거두어 키웠다고는 하지만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단 한 번도 네게 양부모로서 잘해준 것이 없는 것 같아 늘 네게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너는 잘 성장해주었고, 지금은 평소에는 악우처럼, 현장에서는 등뒤를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동료로 있어주어 나는 네게 감사한다.

네가 어릴 적 매년 5월이 될 때마다 남들은 가정의 달이라고 가족 나들이를 다닐 때 너는 혼자 쓸쓸히 회사에 있었고, 다른 남자아이들이 한참 개구지고 엉덩이 붙이지 않고 가만히 있지 않을 나이에도 혼자 덩그러니 사무실 소파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지.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할까.

눈 앞에서 부모를 죽인 사람이 말을 걸어오면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할까.

이 아이에게 나는 사람으로 보일까.

돌이켜보면 이런 생각을 한다는 핑계로 너를 정서적으로 보듬어줘야하고 책임을 져야할 나는 매일매일을 네게서 도망치기 바빴던 것 같다.

하지만 작년에 이면세계에서 그림자에게 부상을 입고 입실했을 때 문뜩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긴다면 네게 단 한 번도 속죄할 행동을 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고.

그래서 네게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려고 생각 했고 오늘 그렇게 한 거다.

겨우 이 정도로 네게 용서 받으려고 한다면 뻔뻔하기 그지 없겠지. 나도 알고 있다. 겨우 이 정도로 네게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쯤은.

네가 날 원망해도, 미워해도, 증오해도, 갈갈이 찢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해도 난 괜찮다. 복수를 하고 싶다면 해도 괜찮아. 다만, 복수를 하고 싶다면 조금만 기다려줬으면 한다.

모든 게 끝나면 네 원망 다 받아들일테니 그 때까지만 기다려줘라.

글이 다소 길었다. 글 읽어주어 고맙고 내일 보자구나.


힐데



에필로그


다음 날 점심 시간 코핀 컴퍼니.


"점심 뭐 먹을까요 스승님?"


"뭐냐 갑자기 친한 척하고? 징그러우니까 저리 가라."


"그냥 해본 말입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쇼~"


싱거운 녀석…. 왠일로 치근덕대는 제자의 행동에 익숙치 않은 힐데는 제자를 뿌리친 후 점심을 먹기 전 책상을 정리해두려고 서류를 정리하던 중 방금 붙이고 간 것인지 본 적 없는 노란 포스트잇이 책상에 붙어있었다.


[복수는 하지 않을겁니다. 다만, 스승님을 용서할 이유를 찾을 때까지는 원망하겠습니다. -시윤-]


"정말이지… 내 제자 녀석들은 왜 하나 같이 괴짜들 밖에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