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식된 세계에서도 비는 내린다. 옛날부터 비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더욱 그렇다. 침식체들이 접근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침식파라거나 침식체에 관한 이야기는 뉴스에서 지겹게 들었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에야 히어로를 망상하며 혹시 나에게도 카운터의 힘이 있지 않을까, 그런 헛된 꿈을 꾼 적이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평범한 일반인 A. 단지 그뿐이었다. 침식재난 경보가 울리면 대피하기 바쁘고 방공호에서 재난이 끝나기를 바라마지 않는, 일반인.
그렇기에 침식체는 평생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볼 일따윈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관리의 실패.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회사에서 지나가는 태스크포스 고위직의 이야기를 들었을뿐. 기밀이었던것 같지만 그들은 더이상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곧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다.
큰 전투가 있었고 인류는 패배했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것을 관리니 어쩌니, 마치 신이라도 된것마냥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듯한 그 단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우리들, 일반인들이다.
제일 처음 목격한 것은 회사의 동료들이 변하는 모습이었다. 몸뚱아리가 기괴하게 부풀어오르며 터져나가거나 사람 하나는 쉽게 죽일만한 가시, 혹은 칼날이 자라나는 모습들.
가장 먼저 변한 이들은 아직은 멀쩡했던 다른 이들을 덮쳤다. 그것이 친구였건 연인이었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저 덮치고 살해하고 잡아먹을뿐. 지옥같은 상황에서 단 하나 부럽다고 생각했던건 악질상사를 덮치던 침식체가 되어버린 동기였다.
아니, 이건 별 의미없는 이야기군.
어찌되었건 나는 그 지옥에서 빠져나왔다. 어떻게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른다. 정신을 차려보니 집이었을뿐. 어째서 나는 변하지 않았던 걸까. 그것도 모른다. 가족에게 연락을 해보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다.
그렇다고해서 이건 가족을 찾으러 간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헐리웃 영화의 주인공도 아니고 만화책의 주인공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일반인. 영화로 치면 재난에 휩쓸려 죽을뻔했다가 주인공에게 구출받으며 주인공이 선량한 사람이라는걸 알려주는 장치로 활용되는 엑스트라.
그럼에도 나는 살아남아 이곳에 있다.
수일, 수십일, 수백일이 지나도 나는 이곳에 있다.
그저 그것에 감사하며 모든 세상이 변해갈때도 침식체를 피해 도망치며 홀로 멸망한 세상에서 살아간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오늘을 기뻐하며 다시금 침식체를 피해 도망친다.
아무것도 먹지않아도 되고 마치 영원히 살아가도 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모든것을 파괴해대는 침식체들을 피해서.
시간이 흘렀다.
몇년? 몇십년? 몇백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살아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세상이 멸망했다고 하는건 내 착각이었을까. 아직 어린 소녀들이다. 카운터일 것이리라. 총기를 들고 침식파가 가득한 이곳을 거닐며 전투를 치른다.
숨어서 그것을 지켜보던 나는, 모든 전투가 끝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놀랍군요. 아직도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침식체라니. 만난 게 알트 소대라 다행이군요. 스승님이었다면 문답무용으로 처리했을 테니.”
이수연은 격납고에 감금된 자를 바라보았다. 어느모로 봐도 침식체다. 불길한 붉은빛 안광이나 피부아래에 흐르는 붉은색으로 빛나는 그 무언가.
그럼에도 그는 인간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정신 또한.. 완전히 멀쩡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적인 의사소통은 충분했다. 침식체 특유의 광기, 호전성도 보이지 않는다.
“꽤 많은 일들을 겪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군.”
“개인 수기도 있습니다만. 읽어보셨습니까, 사장님?”
“그래. 아주 감명깊었지. 생존에 대한 그 의지라니.”
잠시 적막이 흐르는 사이, 누군가가 뛰쳐들어왔다.
“아빠! 어떻게 할거야? 얘기해보니까 좋은 사람 같아! 내가 꾸며줘도 돼?”
이수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는 싸우고 싶어합니다. 혼자서는 몰랐겠지만 지금은 자신이 침식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죠. 침식체들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세계의 최후의 생존자.. 그 소원을 들어줘도 되겠지.”
“와아! 그럼 내가 무장시킬게! 이것도 달고 저것도 달아줘야지!”
“이름은 어떻게 하실거죠? 그는 자신의 이름도 잊었습니다만.. 그래도 서류상에 적을 이름은 필요합니다.”
그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이볼브 원”

이거보고 씀. 이거 이볼브원이라고 본거같은데 맞나?
다른짤은 그냥 타이탄 초기컨셉아트같아서 이게 더 이볼브원스러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