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https://arca.live/b/counterside/23733751




이상하다. 내가 알던 세상이, 내가 알던 사람들의 상황이 아니다.


용혈의 힘에 취해 날뛰어 죽였을 터인 주시윤의 부모는 멀쩡히 살아있고, 주시윤은 지인의 아들인 평범한 고등학생.


코핀 컴퍼니의 관리부 부장인 김하나 부장은 평범한 인사과 대리 사원에 부하 직원인 레나 멕컨지, 클로에 스타시커는 외국인 채용 전형에 뽑힌 인턴.


이수연은 두 눈이 멀쩡하고, 나유빈은 육군 중령인데다가 둘의 과거는 고등학생 시절 힐데에게 과외 받은 학생들.


그리고 유미나는 코핀 컴퍼니 사무실에 없는지 보이지도 않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유미나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


"정말 기억 안 나는거에요 선생님?"


이수연은 소파 의자에 앉아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바닥을 내려다보는 힐데에게 휴대전화를 들이밀며 어느 사진을 보여주었다.


휴대전화 액정에는 육군사관학교 생도의 정복을 입은 나유빈과 신촌에 있는 모 대학교 학생증을 자랑스럽게 앞으로 뻗어 보이는 이수연을 사이에 베이지색 프랜치 코트를 입은 힐데가 찍혀 있는 사진이 비춰져 있었다.


"이 때 선생님이 '육사가 아니라 고O대 갔으면 둘이 볼만 했을텐데.'라고 농담하신 것도 기억 안 나시나요?"


"전혀……."


큰일이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은 이수연의 성격이 이해타산적이지도, 속물적이지도 않은, 20년 전 이수연처럼 천진난만하고 밝은 성격인 것과, 자신이 알고 있는 현재의 이수연에 비해 10살 정도 젊어 보이는 것이다.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상에 머리를 쿵쿵 박아보지만 아픈 것을 보니 꿈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면 집에서 잠든 사이에 국지적 침식 현상에 휘말려 평행세계로 온 것일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가정해봐도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알려주는 사람은 없다.


"하아… 뭐가 도대체 뭔지…."


"선생님… 혹시나 하지만 겉은 몰라도 속은 모른다고 하잖아요…."


"무슨 말은 하고 싶은 거냐?"


"그… 선생님이 겉모습은 수십 년간 노화가 안 왔을지는 몰라도 치매가 온게 아닌가 싶어서……."


"야, 이 무슨! 이 일은 이, 이 이는 사, 이 삼은 육, 이 사 팔, 이 오 십, 미국 수도는 워싱턴, 호주 수도는 캔버라, 캐나다 수도는 오타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은 무구정광대다나리경, 조선 초기 세계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광대토대왕의 풀시호는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 이게 치매 환자 같냐!"


"……그 기억력과 지기 싫어하는 유치찬란한 모습을 보면 아직 치매는 아닌 듯하네요."


하아. 이수연은 한숨을 내쉬고는,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시죠. 이 상태로 업무 보시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시윤이는 제가 돌려보냈고 내일 다시 오라고 했으니까 시윤이 견학은 내일 하는 걸로 하죠."



밀려나다시피 조퇴를 하고 길거리에 나오게 됐지만, 아직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2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이 변한 세상에는 마왕도, 침식체도, 침식 현상도, 관리국도, 리플레이서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원래부터 이렇게 평화롭게, 누구 어느 이도 침식 현상과 침식체로 고통 받고 슬퍼하는 이가 없어야만 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없다면── 평생을 클리포트 게임이라는 전쟁에서 마왕과 침식체들과 싸우고 그것들로부터 평범한 시민들을 지키는 것이 평생의 일이었던 힐데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휘청거리며 걷다보니 맞은편에서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고 부딪히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부딪힌 행인에게 사과를 하고 상대방의 얼굴을 보려고 앞을 보았으나 신장차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아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괜찮아? 언니가 못봤어 미안해."


"신…입…?"


교복을 입은 팬릴 소대의 막내, 유미나가 있었다.


"앞좀 똑바로 보고 다녀 미나링!"


"네가 자꾸 말시키니까 그렇잖아!"


익숙한듯,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도 들려와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그곳에는 리플레이서 비숍─ 아직 리플레이서 인자가 주입되지 않은 상태니 신나래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좌우지간 분명 죽었을 터인 사람이 버젓이 살아있었다.


"왜 네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힐데는 작게 중얼거렸다.


"근데 이 시간에 '외국인 꼬마'가 여기에 있는 걸까?"


"미아 아닐까? 나래야 112에 연락 좀 해봐."


"알았어. 그 동안 인적사항좀 물어봐."


"어… 헤이, 걸? 웨어 유어 페런츠? 아이 원트… 야 안 되겠다 나래야 네가 얘기해봐라."


어깨에 손을 살포시 올리고 되지도 않는 영어를 하던 유미나의 팔을 뿌리치고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한다.


"야! 어디 가!"


으아아아아아!!!! 서울 도심 한 가운데에서 소리를 지르며 전력질주를 하며 달린다.


이상하다.


세상이 미쳤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도대체 누가 이 말도 안 되는 장난질을 치는거야!! 빨리 나와! 빨리 나오라고!! 아스모데우스 네 녀석이냐!! 숨지 말고 빨리 나오라고!"


아무도 없는 허공에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힐데를 바라본다──라는 상황이 벌어져야 정상적인 상황일 터이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성이 반쯤 날아가버린 상태라고 하지만 이 정도로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행동을 했음에도 눈길 하나 주는 이가 없는 상황에 위화감이 느낄 즈음 푸르렀던 하늘이, 건물이, 가로수가 세상이 점점 흑백영화처럼 흑백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흑백으로 물들었을 때 힐데의 등뒤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거리며 나타났다.


"어떠니? 참 평화로운 세상이 아니니?"


"드디어 본모습을 나타냈구만."


검은 연기는 휙하고 힐데를 앞질러 그녀의 앞으로 자신의 모습을 들어냈다.


"세상은 본래 이랬어야했단다. 누구 하나 클리포트 게임으로 고통받지 않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어야 했단다 아가야."


검은 연기는 사람 형태는 아니지었지만 왜인지 힐데는 그것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면서 말하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네가 지금 본 사람들 중에서도 클리포트 게임만 아니었어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 참 많지 않았니? 이 이외에도 클로포트 게임이 없다면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참 많단다."


"닥쳐……."


"자 저기 횡단 보도를 건너는 보라빛 머리를 땋은 세일러 교복을 입은 여학생 보이지? 저 아이도 클리포트 게임이 없으니 저기 길 끝에서 언니와 평범히 만날 수 있잖아?"


"닥치라고……."


"그리고 지금 네 옆을 지나가는 옥빛 웨이브 머리를 한 여자와 옆에 크림 와플을 세상 행복하게 먹고 있는 여자 아이 보이지? 저 친구들, 네 소대원들이 이면세계에서 죽인 그림자들의 생전 모습이란다. 클리포트 게임이 아니었다면 저 친구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단다."


"입닥치라고!!!"


검은 연기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도 해보았지만 타격은 전혀 없었고, 일반 기체처럼 살짝 흩날릴 뿐이었다.


"아가야,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녀'도 클리포트 게임이 없는 세상에선 안전하다는 거란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네가 어떻게…."


"네가 가장 염원하던 것 중 하나 아니니? 아가, 네가 원한다면 나는 클리포트 게임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단다."


마치 뱀이 사람을 감아 조이듯 검은 연기는 힐데의 발끝부터 천천히 감아올라오기 시작했다.


"정말…이야…?"


"그럼. 더 이상 '그녀'에게도, '이수연'에게도, '나유빈'에게도, '주시윤'에게도 미안해하지도,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단다."


힐데의 몸을 다 휘감은 검은 연기는 왕관을 쓰고 망토를 두른 사람 형태가 되어 그렇게 속삭였다.


"그런 세상이 있다면… 당장 그런 세상으로 만들어줘…."


"대신 조건이 있단다."


"조…건…?"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자 검은 연기는 씩 웃는다.


"세상이 평화로워지는 대신 아가 네 존재는 사라지는거란다. 쉽게 얘기하면 네가 희생해서 세상을 구하는거야!"


"존재가 사라진다고…?"


"죽는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존재가 사라지는 것 뿐이야! 그렇게 되면 너를 알아보는 사람은 나와 내 딸들, 그리고 내 어머니 밖에 없어. 걱정은 하지 마렴. 함께 재밌게 놀면 되는 거야. 함께 가는 곳에는 바닷가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고, 내 딸들이 밤마다 너를 위해 축제를 열고 노래를 불러줄거란다."


그런 것은 어찌됐든 상관 없는 이야기다. 다만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클리포트 게임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없는 세상은 무척이나 매력적이고 고혹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면… 그렇게……"


─해줘. 라고 말한 순간 눈 앞에서 공간이 베어졌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이 상황은 마치 허공이 벽지가 벗겨진 것 같았다. 그 벽지가 벗겨진 곳에서 누군가가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방해꾼이 나타났군…."


방금 전까지 달콤한 목소리를 내던 검은 연기는 뭔가 수가 틀려지자 성난 노인의 목소리로 변하여 중얼거렸다.


"어이쿠, 이런 곳에 계셨군요 스승님. 일단 상황이 급하니 잡담은 이따하도록 하겠습니다~"



* * *


에필로그


"옆집에 불이 났었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자면서 연기를 마시고 있었다고?"


다음날 점심.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잠에서 깨어난줄 알았더니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다가 의식을 되찾은 것이었고, 화재현장에서 그대로 죽을 뻔한 힐데를 들쳐엎고 구출한 것은 다름 아닌 주시윤이었다.


"하마터면 스승님 저희 부모님한테 멱살 잡히러 가실 뻔 했어요."


생명의 은인은 천연덕스럽게 농담이나 하며 보조의자에 앉아 배를 깎고는 이쑤시개로 배 한 조각을 꽂아 그걸 힐데에게 건내주었다.


"속이 좀 풀릴 겁니다. 드시죠."


"고맙다… 근데 어쩌다 네가 날 구하게 된 거냐?"


"오랜만에 스승님 곁에서 자고 싶어서 침대 옆으로 들어가려다가 그렇게 된거랍니다."


"너도 나이가 18살이다. 어렸을 때는 귀엽다고 그렇다하지만 이제는 그런 소리하면 소름 끼치는 성희롱으로 밖에 안 들린다. 헛소리 말고 제대로 말해."


"하하하, 자식은 백 살을 먹든, 이백 살은 먹든 애로 보인다던대 양부모인 스승님은 진짜 저를 자식처럼 보고 계시진 않은 것 같네요.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현장에서 이걸 분실하셔서 말이죠."


제자가 주머니에서 꺼내 건낸 것은 늑대 머리의 모양을 한 휘장이었다.


"끔찍하게 여기시는 걸 막 잃어버리시면 안 되죠."


"아… 고맙다…."


작게 중얼거리자 제자는, "천만해요."라고 받아친다.


"그나저나 스승님의 무의식 중에서 스승님을 감싸고 있던 건 결국 뭐였을까요? 공간베기까지 이용해서 내쫓을 정도면 침식체거나 그것에 준하는 것 같은데 말이죠."


"'마왕'이라고 들어본 적 있던가?"


"프란츠 슈베르트의 가곡 말인가요?"


"맞아. 거기서 나오는 마왕, 엘쾨니히. 그게 그 녀석의 이름이야. 클리포트 게임의 마왕과는 다른 존재지만… 너희 나라 말로 하면 염라대왕이랑 비슷하겠군. 정말이지, 고향 떠난지 몇 년인데 고향 쪽 사신이 멀리도 출장을 다니는구만."


뭐가 못마땅한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배를 한 입에 집어넣고는 다람쥐처럼 우물우물 씹어먹는다.


"슈베르트의 마왕에서는 아이에게 온갖 사탕발림으로 저승에 데려가려고 하던데, 스승님께는 무슨 사탕발림을 하던가요."


"비미이다."


"음식 씹으면서 말하지 마시고 다 드시고 얘기하시죠."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동안 우물우물 거린다. 그리고는 다 먹었는지 꿀꺽삼키고는,


"……비밀이다."


그렇게 말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하여간 스승님이 그렇게 허망하게 가시면 전 곤란하답니다. 아직 스승님을 용서할 이유를 못 찾았거든요. 그러니 그 이유를 찾을 때까지 원망해야하니 부디 건강하게 계셔주세요."


"……알았다."


그렇게 힐데의 4월 1일은 거짓말처럼 지나갔다.



원래는 만우절에 다 써서 마무리 지으려고 했던 글인데 여러가지로 바빠서 미루다가 흐지부지 결말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