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10년전 고등학생이던 시절,


멀쩡하게 생겼는데 쑥맥인 건지 아니면 여성 공포증이 있던 건지, 잘만 얘기 하다 가도 시야에 여자가 들어오기만 했다면 바로 말도 못하고 시선이 갈 곳을 잃은 채 땅만 쳐다보는 친구가 있었음. 생각해보면 펜스 룰에 최적화 된 진화 인류가 아니었을까 싶지만 어찌 되었든.


그런 친구가 불쌍해서 몇 번 옆의 여고랑 미팅도 시켜주고 그랬는데 항상 여자만 보면 정상적인 사고를 못 하는 친구였기 때문에 우리도 반 쯤 포기하고 저런 친구도 나중에 자신의 짝이 생기겠지.. 하고 생각했음.


근데 이 친구가 어느 날 자기한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더라? 


그래서 다들 누군데!? 하고 궁금해 했는데, 알고 봤더니 모 마비 오는 채팅 온라인 게임에서 만난 여성 분이 엄청 털털한 성격인데, 자신을 잘 이해해주고 자신의 말을 잘 들어줘서, 너무 끌려서 고백으로 혼내주고 사귀게 되었다는 거임.


그 말을 듣고 우리 모두가 이 자식.. 군필 여고생한테 속고 있는 거구나 라고 생각했었음. 물론 그 때는 군필 여고생이라는 단어 보다는 넷카마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아무튼 계속 속는다면 친구가 불쌍하니까, 그래도 연애는 직접 만나서 하는 게 좋지 않겠냐? 라고 했더니 이 새끼 말이 진국이었던게


"나는 여자 얼굴만 보면 아무 말도 못하는데 무슨 직접 만나? 나한텐 랜선 연애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연애 형태라고! 그리고 XX씨가 부산에 산다고 해서 찾아가기도 힘들어."


뭐 이런 식으로 얘기했던 거 같은데, 그 말을 듣고 우리는 그냥 할 말을 잃고 그래.. 그게 너의 행복이라면 어떻게 하겠냐.. 라며 사실 재밌을 거 같다는 이유로 내비 뒀었음.


그렇게 한 1년? 정도 지나고 그 사건도 잊혀져 가던 어느날 그 친구가 자기가 이번에 1주년을 맞이해서 용기를 내 직접 부산에 가보기로 했다는 거임.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아직도 사귀고 있었어??'라는 마음이랑 '이 새끼 실체를 보고 실망하면 어떻게 달래주지?'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지만, 어찌 되었든 응원해 주기로 했음. 언제까지 속고만 있으면 그게 더 불쌍한 거잖아?


그리고 그 녀석이 부산에 다녀온 다음날, 아마 그 때가 광복절 다음날인가 그랬을 거임, 실제론 남자인 자신의 가상 여친을 만나서 절망과 실의에 빠져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멀쩡하게 등교를 하더라? 


그래서 다들 궁금해졌지, 실제로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실제로 여자였다면 만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준내 궁금하잖아?


근데 이 녀석은 그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하고 묵묵부답이더라고.. 그래서 우린 이 녀석이 만난 사람이 사실 남자였는데 마음에 들어서 아무 말도 못하는 거다, 아니면 여자긴 한데 너무 생각과 달라서 아무 말도 못하는 거다. 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갔었음.


근데 한 달 쯤인가? 지나니까 이 친구가 썰을 풀어주는데, 현실에서 처음 만나본 자신의 인터넷 여친은 실제로 여자였다고 함. 


근데 18살에 속도위반으로 아이를 가지게 되어서 자기랑 비슷한 나이 대의 남자아이가 있는 30대 중반의 유부녀였다는 거지. 같은 나이의 아들이 있으니까 이 친구가 하던 말을 잘 이해했던? 아니면 이해하려고 한 거고, 털털하고 억세다는 느낌을 받은 이유는 혼자서 아들을 키우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실제로 만났을 때 자신과 랜선 연애를 하면서 자기의 아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어서 고맙다며 밥도 사주고 자신의 인생 상담도 기꺼이 들어줬다고 하더라?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를 속인 게 너무 미안하다고, 남편이 바람 나서 도망간 이후로 누군가한테 사랑한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말릴 수 없었다고 했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이제 자기 아들이 곧 수능 치고 대학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저녁 알바를 하게 되어 이제 게임에서 만나는 것도 힘들 거 같다며 사실상의 이별 통보를 받았다고 했음.


그렇게 말하는 친구의 표정은 굉장히 홀가분해 보였지만, 듣는 우리들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이야기잖아? 여성 공포증 있는 친구가 넷카마인 확률이 90% 이상인 여자와 랜선 연애, 심지어 장거리 연애(경기도 - 부산)를 했는데 실제로 만나니까 여자였고, 심지어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아들이 있는 돌싱일 이야기가 어디에 있겠냐고..


그런데 그 일이 있고 이 친구 안에서 무언가가 바뀐 건지는 알 수 없는데 정상적으로 여자들이랑 대화하고 졸업할 때까지 여자친구를 5번이나 바꾸는 걸 보고, 진짜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녀석의 인생에 있어서 가치관과 정체성을 뒤흔들 만큼의 큰 일이 있었다고 예상할 수 밖에 없었음.




결과적으로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부산에서의 4일간, 그 친구에게 일어난 일을 우리는 아직도 모른다 ㄹ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