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counterside/26355436


그냥 갑자기 캐시를 주제로 소설을 써보고 싶어서 부족하게나마 끄적여봄

허접한 문학... 비추 달게 받는다.


1편 링크 : https://arca.live/b/counterside/26072219

2편 링크 : https://arca.live/b/counterside/26196158


(3)

캐시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런 것을 알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의 무게가 그녀를 짓눌렀다. 대체 자신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수십억의 목숨을 짊어지고 고뇌하며 노력하던 정치인을 가당찮은 단어 하나로 협박하고 끝내 큰 이득을 얻어낸 행동이 기생충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캐시는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그렇게 그녀는 잠시 자기혐오의 시간을 가지며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유쾌하지 않은 시간이 지나가자 그녀의 머릿속에 현실감각이 매섭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종말이 사이비 종교의 주장이 아니라 미국 정부가 대비를 해야 하는 진지한 현실이라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사실 고민하기 전부터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인류는 이미 한 번 종말을 맞이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정화전쟁이 다시 시작되겠군요...”

 

저번 대정화전쟁에서 인류가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운에 가까웠다. 정말 어떻게 이런 적절한 타이밍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시의적절하게 관리국이 등장하고 관리국에서 침식체와 싸우기 위한 각종 기술들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인류는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행운이 이번에도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전쟁이 또 다시 일어난다면 아마도 최전선에 서게 될 관리국 직할 카운터 소대 중 하나인 오피셜서포트에 소속된 그녀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천운이 따라서 인류가 또 다시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한들 그녀가 살아있을 가능성은 아마도 희박할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책상에 앉아있던 그녀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전화 받았습니다.”

 

-늦은 저녁에 갑자기 전화하게 되어 미안하오. 웨이드 양. 오늘 오후에 만났던 샤키시안이오.

 

번호의 정체는 백악관 비서실장 미하엘 샤키시안이었다. 살다보니 백악관 비서실장의 번호를 다 따는 날도 오는구나 하고 그녀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백악관 비서실장과 개인적으로 연결되는 핫라인을 가질 수 있다면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기자들도 세상에는 충분히 많았다.

 

“비서실장님께서 제 전화번호를 어떻게 아셨을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군요.”

 

-무례라는 건 알고 있소. 그 점은 사과드리지. 이렇게 전화를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웨이드 양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자 함이오.

 

다행히도 협박성 전화는 아닌 모양이었다. 살짝 긴장하던 캐시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에 누웠다. 엘리의 정체에 대해 알았을 때부터 손이 계속 떨리고 있어서 휴대전화를 붙잡고 있기가 조금 힘들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질문도 제가 하게 해주시려고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소만 굳이 원한다면 두 번째 질문도 웨이드 양이 하는 것으로 각하께 전달드리겠소. 그건 그냥 내 호의로 받아두시오.

 

“영광입니다. 비서실장님.”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웨이드 양 덕분에 갑자기 일주일 뒤에 ELE에 대해 공표하게 생기지 않았겠소? 그래서 그 준비를 위해 공보비서관에게도 사실을 알려줄 수밖에 없었는데 충격을 받은 공보비서관이 그만 사임을 해버렸소.

 

“이런... 혹시 제 잘못인가요?”

 

-물론 웨이드 양의 잘못이지.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사임해버린 비서관의 책임을 굳이 웨이드 양이 질 필요야 있겠소?

 

“그래서 그 자리를 제안하고자 저에게 하시는 거군요.”

 

물론 거래가 성공적으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백악관으로써는 조금 더 강한 족쇄를 그녀에게 채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군은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하라는 옛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 맥락인 모양이었다.

 

-웨이드 양은 언제나 눈치가 빨라서 좋소. 그냥 대놓고 말하지. 웨이드 양에게 족쇄를 채우고자 이런 제안을 드린 건 아니오. 이건 어디까지나 대통령 각하의 호의거든.

 

“확실히 영광스러운 제안이기는 하네요. 너무 좋아서 덜컥 받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죠.”

 

-자존심 세우는 것도 좋지만 호의를 베풀 때는 감사히 받는 자세도 필요한 법이오.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ELE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침식재난이오. 관리국과 우리는 이미 계획을 세워두었고 그 계획대로 진행되면 웨이드 양이 살아남을 길은 없소.

 

휴대전화 너머로 샤키시안 비서실장의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통령 각하는 웨이드 양처럼 재능있고 젊은 여성이 별것도 아닌 카운터 능력 때문에 총알받이로 죽기를 원하지 않소. 솔직히 나는 웨이드 양이 그렇게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각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을 어떻게 하겠소. 밑에서 섬기는 사람이 그냥 따라야지. 그리고 고작 카운터 능력 때문에 죽어버리기에 당신이 유능한 사람인 것도 사실이긴 하오. 

 

“지금 대답을 해야 하나요?”

 

-다음 주 대통령 성명이 끝나고 공식적으로 제안을 하겠소.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민을 해주었으면 하오. 그래도 웨이드 양보다 30년은 더 오래 산 입장에서 한 마디 더 보태주자면 백악관 비서관으로 오면 내가 죽고 싶을 만치 괴롭힐 거지만 그래도 죽어버리는 것보다는 낫소. 버려질 동료들이 눈에 들어오고 배신자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겠지만 그래도 살아야 하오. 인생을 길게 보시오.

 

“감사합니다. 고민해볼게요”

 

전화가 끊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의 머릿속에서 폭풍이 일었다.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무조건 저 제안을 받는 것이 맞았다. 

관리국에 들어온 것 자체가 도피성 취업이었고 오피셜 서포트 소대는 그냥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한 임시 직장에 불과하다. 그간 소대 멤버들과 적잖이 정이 쌓이긴 했지만 결국 그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딱 잘라서 결정할 수 없는 게 세상사가 아니겠는가.

 

다행히 캐시는 그런 고민이 있을 때 도피하는 좋은 해결책을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술이다.

 

BEER-BAR, 간판을 볼 때마다 캐시는 무슨 저딴 이름을 바의 이름이랍시고 지어놓았나 하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개성 없는 이름과 달리 술값은 개성이 생길만큼 저렴했고 바텐더는 틱틱거렸지만 나름대로 잔정이 많아서 이 주변에서는 알음알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는 했다.

 

“오, 아가씨가 또 오셨군. 늘 마시던 걸로?”

“오늘은 스트레이트로 주세요.”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군.”

 

바텐더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늘 마시던 몽키 숄더를 한 잔 따라주었다. 보통은 언더락으로 주문해서 홀짝거리면서 조금씩 마시고는 했으나 오늘은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캐시는 위스키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잘못된 선택에 후회하며 콜록거렸다.

 

“한 잔 더 주세요.”

“나야 돈 벌면 좋은 거지만 얼마나 마시려고?”

“한 보틀 다 주세요.”

“돌겠네...”

 

바텐더는 고개를 젓다가 몽키숄더 한 병을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잔에 술을 따르고 그것을 비웠다. 그것이 한 잔이 되고 두 잔이 되고 반병이 되자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바텐더. 늘 마시던 걸로.”

“자네가 늘 마시던 거? 밀크셰이크 말인가?”

“로망이 없구만. 보는 눈도 있는데 이런 대사는 멋있게 좀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닌가?”

“몇 년째 팁도 한 푼 안내는 수전노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군.”

“하하 그러게 말이지. 그나저나 옆에 있는 아가씨는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은데? 나보다 밀크셰이크가 더 필요해 보이는군.”

“자주 오는 단골인데 오늘따라 갑자기 달리는군.”

“저런...”

 

갈색머리를 한 용병차림의 남자는 밀크셰이크를 받아들더니 캐시의 앞에 내려놓았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 그렇게 마시는지는 몰라도 속은 차려가면서 마시는 게 좋을 거야.”

“남자 만들 생각 없으니 관심 끄시죠.”

“저런, 이제 와서 술집에서 여자나 엮어보기에는 내가 너무 나이가 있는 것 같은데? 내 딸이 앞으로 10년만 크면 아가씨랑 비슷한 나이가 될 거야.”

“그러면 그냥 관심 끄시고 드시던 거나 마저 드시죠. 귀찮게 굴지 말고.”

“하하 이것 참. 원하는 대로 신경 끄고 조용히 있어줄 테니 주는 건 그냥 먹으라고. 빈속에 술만 먹으면 속이 다 상하거든.”

“......고마워요.”

 

캐시는 얌전히 밀크셰이크를 마셨다. 술에 취해서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었지만 달콤하고 시원했다.

 

“좀 진정이 되나?”

“죄송해요. 제가 너무 공격적이었죠?”

“술집에서 접근하는 남자는 일단 쳐내는 게 맞긴 하지. 저 친구만큼 잘생겼으면 모를까.”

 

잘 생긴 남자라는 키워드에 캐시는 무의식적으로 남자가 가리킨 손가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짝 정돈이 안 된 금발머리에 잘 어울리지 않는 검은 선글라스를 낀 사람. 오늘 낮에 봤던 번개남자였다. 백악관 사람들이 제이크 대령이라고 불렀던 것 같았다.

 

“기자에 용병에 오늘 하루는 끝까지 일진이 좋지 않군.”

“감시하러 오셨나보죠?”

“자의식이 과잉이시네. 저도 여기 단골입니다.”

 

물론 겸사겸사 감시도 하러 왔겠지만 제이크는 굳이 입으로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이런... 내가 모르는 복잡한 사연이라도 있나보지? 저 친구랑 싸우기라도 한 건가?” 

“싸우긴 했죠.”

 

그녀가 일방적으로 털린 그것을 싸움이라고 부를 수나 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군...”

 

남자는 제이크와 캐시를 번갈아 보면서 슬쩍 웃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제발 신경 끄라고. 그리고 웨이드 양, 술은 충분히 드신 것 같습니다. 많이 취하신 것 같으니 댁으로 바래다드리죠.”

 

캐시의 곁으로 다가온 제이크는 그녀를 일으키면서 주변에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했다.

 

“조용히 나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 말고는 캐시에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실 취할 정도로 많이 마시기도 했다.

 

“그 용병아저씨?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네요.”

“그냥 에디라고 부르라고.”

“에디씨.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좀 뜬금없을 수도 있지만 에디씨는 목숨보다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 믿으시나요?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는지 에디 피셔는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그리고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아가씨... 용병 나부랭이한테 인생론을 물어보는 건가?

 

그는 물어본 캐시가 무안할 정도로 호탕하게 웃었다.

 

“정말 소중한 게 있다면 자기 목숨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야. 이미 잘 알고 물어보는 것 같은데?”

“그러게요.... 고맙습니다.”

 

그녀는 제이크와 함께 조용히 바의 밖으로 나왔다. 술값은 제이크 대령이 지불했다.

 

“그대로 집으로 가시길 바랍니다. 윗선과 이야기가 다 끝난 것 같으니 평상시에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만 술김에 비밀을 누설하는 사람들을 저는 많이 봤습니다.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주의할게요. 술은 오늘까지만 마시는 거예요. 오늘은 취하고 싶었거든요.”

“이해는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말씀드리자면?”

“개인적으로는 백악관에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장이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는 법입니다.”

 

캐시는 제이크에게 살짝 목례를 했다. 그는 그냥 손을 흔들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녀를 감시하겠지만 직접 접촉하는 일은 아마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술기운이 가득한 캐시는 조금씩 비틀거리면서 숙소로 들어갔다. 

 

“캐시! 뭐하다가 이제 온 거야!”

 

문이 열리자마자 아이리가 강아지처럼 쪼로로 문 앞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그녀 몸에서 풍기는 술냄새를 맡고 바로 도망갔다.

 

“아아악!! 제나!!! 캐시가 술이 떡이 되어서 왔어!! 어떻게 좀 해줘!”

“뭐???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더라?..... 이런 건 매뉴얼에 없는데. 으으... 일단 물부터 줘봐.”

 

캐시가 힐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비틀거리며 복도로 들어오자 물컵을 든 아이리가 쪼르르 달려왔다. 술기운인지 오늘따라 그런 아이리의 모습이 너무 슬펐던 캐시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뭐야?? 캐시 울어??? 왜?”

“미안해.... 미안해..... 아이리... 내가 미안해....”

“캐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제나!! 캐시가 술 먹고 막 울어!!”

“아이리 또 장난치는 거 아니야?? 뭐야? 캐시 왜 저래?”

“미안해... 아이리...”

 

샤키시안 비서실장의 좋은 제안에 잠시나마 흔들렸던 자신이 너무 역겨워서, 그리고 이렇게 귀여운 소녀가 맞이해야 할 운명이 너무 서글퍼서 그녀는 아이리를 끌어안고 끝도 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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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완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