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에서 어떤 게이가 얘기한 내용이 첫 글에서 이어지니까 그냥 2로 씀

동일 세계관 전편 있음


전작 모음 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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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은 시퍼런 불꽃이 휩쓸고 간 잿더미였다. 

황폐한 폐허에 가까운 이면세계인 만큼 불에 탈 것도 없었지만, 그야말로 그랬다. 

대파괴에서 살아남은 잔재들마저 태워 버릴 만큼, 그녀가 일으킨 불은 파멸적이었다.


"에잉. 놓쳤구나."


사실 로자리아가 퀸을 놓아준 것에 가까웠다. 결말은 좀 더 극적이어야 재미있었으니까.

거기다 그녀가 이정도 변덕을 부리는 것 또한 관리자의 계산 안에 들어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일으킨 불꽃은 전장의 바위들까지 녹여버릴정도로 강렬했지만, 신기하게도 주위로 번지지도 않았다.


클리포트 인자를 가동한 이상 이 정도쯤은 가벼운 일이었다. 오히려 힘을 조절하는 것이 힘들었다.

자신있게 외쳤던 리플레이서 인자의 수준이 참으로 조악해, 그녀는 손수 그것들을 태워버리지 못한 것이 아쉽지도 않았다.

이제 나들이는 끝났다. 남은 것은 '관리자와 나유빈의 각본대로' 유미나가 처리할 일이었다. 그녀는 흥미롭게 지켜보면 될 일이고.


"못 보던 사이에 엉덩이가 참 가벼워졌구나. 의자는 어디에 두었나. 로자리아."


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로자리아 만큼이나 작고 갸냘픈 인물이 서 있었다. 그녀의 몸을 감싼 것은 칠흑의 코트였다.

눈처럼 새하얗다기보다는, 그녀가 이 전장에 칠한 잿빛에 가까운 백발. 순간 순간 심연과도 같은 그늘이 지는 주홍색 눈동자. 

그리고 의식하지 않아도 자극해오는 찌릿찌릿한 살의. 

그녀가 참여한 드라마의 첫 등장인물은 익숙한 클리포트의 마왕이었다.


당연히 별로 반갑지는 않았다.


"이게 누구더냐. 전처녀 아니신가."


마왕은 잔불이 꺼지지 않은 잿더미속을 지나 전장의 바깥으로 한가로이 걸어갔다. 평화로운 공원을 산책이라도 하는 듯.

커다란 바위를 손날로 가볍게 쓸었을 뿐이지만 칼로 자르듯 평평하게 갈라졌고, 거기 무심히 걸터앉았다.

조금의 비웃음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마왕은 덤덤히 로자리아를 매도했다.


"꼴이 참 웃기다. 다들 스승이라고 떠받들어 주다니. 넌 한 발짝 멀리서 구경하는 방관자일 뿐인데. 네 본성이 드러나지 않은 게 신기하군."


마왕과 달리 로자리아는 앉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푹신한 의자와 소파는 지금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조금 더 서있는 것이 나았다.


"언제쯤 나타날지 궁금했다만, 이번에도 참 식상한 대사와 임팩트 없는 등장이구나. 요즘 주말 드라마도 이렇지는 않거늘."


그녀는 느긋이 마왕을 훑어보았다. 코트만 달랑 챙겨입은 마왕은 잠시 꺼냈던 손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 마왕은 무기만 없다면 다른 것들에 비해 상대하기 쉬운 편이었다.


"네 예쁜 조각칼들은 어디다 두고 왔느냐?"


"내 칼이 보고싶다면 좀 더 분발해야 할 거야. 로자리아. 오늘 네 모습은 참 실망스럽더군."


"어머나, 꽤 압도적이지 않았더냐?"


감정의 변화 없이 말하던 마왕이 처음으로 히죽 웃었다.


"유머감각이 늘었군. 그 웃기는 치장품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로자리아는 대답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외부장갑들은 대부분 힘을 이기지 못해 타버렸으니, 새로 만들 때는 그녀의 취향대로 해버리는게 좋을 것이다.


로자리아의 기분에 따라 튀어오르는 잔불들이 너울너울 다가오자, 마왕은 손부채질에 가까운 손짓으로 불을 여유있게 꺼뜨렸다.

리플레이서 퀸이 기를 쓰고 전력을 퍼부었음에도 단 한 줌조차 끄지 못했던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허무히 흔들리다 사라졌다.


이것도 관리자의 계획에 들어있었을 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마왕이 싸울 생각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오늘은 싸울 자리가 아니라 나들이 자리로 나왔으니, 준비가 부족했다. 

마왕의 매도가 이어졌다.


"고작 잡졸 하나 태워버리는데 이렇게나 시간을 쓴 건가. 네 전력이었다면 순간이면 충분했을텐데."


이제 마왕은 조약돌을 튕겨 잔불들을 꺼뜨리며 말을 이었다.


"불멸체 코어 자체를 숯검댕이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고."


그것 참 강아지 밥주는 것처럼 쉽게 말하는구나.

로자리아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가 그럴 맘이었다면 물론 틀린 말도 아니었다.


"누구 좋으라고 그런 짓을 하겠느냐? 그야말로 드라마 제작 일정이 빨라지는 것 아니냐."


그녀는 이 자리가 편치 않았다. 마왕이 나타나는 것은 상정 범위 안이었지만, 이 등장인물이 불편했다.

마왕은 로자리아를 너무 많이 알았다. 나태함으로 꽁꽁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던 자신을 너무 많이.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게다가, 이번 작품은 꽤 흥미있 "변명이군." ..거든."


중간에 말을 잘린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전력으로 나섰다면 다른 마왕들도 모두 깨어났기 때문이겠지."


말리는 기분이었다. 역시 이 마왕은 불편했다. 마왕들은 하나같이 꼴보기 싫었지만, 특히 상성이 나빴다.

다행히 이 장소에 나타난 마왕은 한 명 뿐이었으나, 몇 명이 더 깨어났을 수도 있었다. 

그녀의 힘의 아주 일부만 사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정보를 확인해 두는 것이 좋았다.

로자리아는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참 재미없구나. 하필 너라니. 막에 올라올 다른 등장인물들은 아직이냐?"


"고작 이 정도의 힘으로 뭘 기대했지? 그리고 누가 깨어났건 네가 알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래, 이 클리포트 게임은 사전촬영 작품이 아니니까 말이다. 스포일러 금지란 것이로구나."


정보를 주지는 않는군. 그렇다면 여기서 더 볼 일도 없었다. 

마왕도 딱히 대화를 이어갈 생각도 없어보였으니, 이쯤에서 로자리아는 자리를 뜨고 싶었다. 

작별인사가 어울리는 사이도 아니었다. 자연스레 돌아선 그녀를 생생한 감정이 담긴 마왕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분명한, 비웃음이었다.


"칭찬하지.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구나. 로자리아."


이죽거리기는.


"공교롭게도 이번엔 주연 배우 중 하나라서 말이다. 캐스팅이 화려하니 분명 이번에는 히트작을 기대해도 좋다. 브륜힐데."


"참 신기하게도 매번 배신을 일삼는 네게 주변에 남은 사람이 있군. 그 시끄러운 여자가 없는 것도 당연하지만. "


로자리아는 아주 천천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익숙했다.


"'시끄러운 여자'가 누우구를 말하는 것인지 나아는 자알 모르겠다만?"


"모른척은 됐다. 불편한가? 우린 배신을 꽤 즐긴다는 공통점이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화르륵, 새롭게 불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붉은색을 넘어 새파란 색을 띈 그 불꽃은, 우습게도 마왕의 코트 깃조차도 태우지 못했다.

마왕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코트를 툭툭 털고는 일어섰다. 로자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모욕감을 주다니. 썅년.


"네가 말하는 '본편'에서는 만족스러운 모습이었으면 좋겠군."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 갑작스레 찾아왔던 것과 똑같이 클리포트의 마왕이 떠났다.


성급했다.


로자리아는 급격히 찾아오는 피로감과, 익숙치 않은 감정을 느꼈다. 지독했다.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 후회에 가까운 감정들이었다. 그녀가 가질 필요도, 자격도 없는 것들이었다.


멀리 델타 세븐의 지휘관과 해커가 오고 있었다. 시끄러워 지기 전에 떠날 시간이었다.


"설명해라. 나유빈. 작전실 모니터 하나 비우고."


방금 전까지의 표정을 숨기고 자연스럽게 나태한 웃음을 띄웠다. 

손짓 하나만으로 마술 모자처럼 뿅. 화려한 의자가 나타났다.

알아서 공중으로 떠오르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늘 그녀가 맡은 출연분량은 여기까지였지만, 좀 더 연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드라마 시작할 시간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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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인터루드가 대화위주에 짧아서 얘도 좀 짧고 제이크랑 존메 바꾸는거는 짱구좀 굴려봄

또 써볼만한 소재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