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편

중편



기다리는 사람 있었는진 몰겟지만 늦어서 지송...

잘 안 써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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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뜻한 봄을 느낄 새도 없이 유미나가 관리자의 손에 이끌려 찾아온 곳은 그라운드 원 번화가에 떡하니 자리를 잡은 아주 유명한 카페였다. 마녀가 직접 요리하고 서빙하고 청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오컬트 컨셉 카페, 스트레가.


방금 막 오픈한 카페 안은 손님 한 명 없이 무척이나 한적했다. 자연히 두 남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눈에 띄었고, 한창 테이블을 정리하던 소녀가 혼자 '어?' 하고 어깨를 들썩이더니 이내 이쪽의 방문을 알아챘다.


"아, 손님이었구나. 카페 스트레가에 어서 오세요!"

"와아. 마녀다."


핑크빛 마녀의 환영에 유미나가 감탄했다. 그녀가 상식으로 여긴 종업원 차림하고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당장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 그녀도 스트레가는 알음알음 들어본 기억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상당히 본격적인 마녀 코스프레와 웰빙 시대의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 자극적인 맛으로 승부하는 카페.


학창 시절, 그녀의 친구인 신나래가 한 번 가보자고 보챈 적이 있던 곳이었다.


"신기하네. 마녀라고 해서 매부리코 할망구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마녀에 대한 편견이에요."


자신과 또래로 보이는 핑크빛 마녀가 볼을 부풀리고 검지를 치켜세웠다.


"요즘은 개성이 중요한 시대라 엣날 스타일을 고수해선 살아남을 수 없어요. 마녀도 패션에 민감해야지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라구요!"

"그, 그런가?"


과연 이 소녀가 작년 할로윈 전까지만 해도 마녀란 존재에 의문을 품던 존재가 맞는지. 저 멀리서 지켜보던 점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근 몇 년간 할로윈 코스튬 경연 대회 1등은 전부 스트레가의 작품이었죠."

"에헴! 작년 우승작은 저와 제 친구의 합작이었어요!"


관리자의 부연 설명에 마녀의 콧대가 한 층 더 높이 올라간다.


"오오. 그건 나름 굉장하네. 전통의 강호 같은 거잖아?"

"새로운 강호죠. 터줏대감을 밀어내고 승리를 차지한 거니까요."

"헤헤. 그렇게까지 높게 치켜세워주지 않으셔도 돼요. 다른 분들도 이를 갈고 계셔서 올해 할로윈 코스튬은 우승을 장담 못하거든요."


마녀가 손님의 칭찬이 어색한 듯 수줍게 자기 볼을 긁적였다. 누가 뭐래도 할로윈까진 아직 기간이 한참 남았다. 벌써부터 걱정할 일은 아니라며 관리자가 덧붙였다.


"응원 감사해요."

"무얼. 저도 스트레가의 코스튬을 보며 여러 영감을 받았거든요."

"혹시 옷도 만들 줄 아세요?"

"하하. 어쩌다보니... 가끔씩 디자인 쪽을 조금 건드리곤 합니다."


스윽.


관리자가 마녀와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자 유미나가 슬쩍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눈치 빠른 마녀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후후. 그러니까 할로윈 때 코스튬이 필요하시면 꼭 저희 스트레가로 연락주세요. 자신감이 마구 샘솟는 최고의 디자인으로 준비해드릴 테니까요!"

"어 응. 바빠서 여유가 생길진 모르겠지만, 시간 나면 한 번 생각해볼게."

"저도 잊지 않게 메모해둬야겠군요."


묘하게 심드렁해진 유미나와 달리 관리자는 다음 대회도 응원한다며 마녀와 악수까지 주고받았다.


"그나저나 우리 언제 주문해? 나 카페는 오랜만이라 잘 모르는데."

"아하하.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방금 전까지 테이블 세팅하고 있었거든요."


마녀가 메뉴판을 가지러 간 사이, 유미나가 구두 끝으로 관리자를 툭 건드렸다.


"여자 꼬시는 게 취미인가봐요?"

"네?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만..."

"거짓말. 완전 선수던데."


유미나가 불신의 눈빛을 보내자 관리자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로서는 진짜 누군가를 꼬시려 한 게 아니니 억울할 수밖에. 하지만 타인의 눈에 그렇게 비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으음. 미나 양이 불편하셨다면 조금 더 주의하겠습니다."

"불편한 것까진 아니고요. 그냥, 좀 그렇다고요. 저희 회사에 투자해주는 높으신 분인데 논란이 생기면 좀 곤란하고 그러잖아요?"


자신의 변명이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유미나는 떠오르는대로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여기 메뉴판 가져왔어요! 어라? 제가 뭐 잘못했나요?"


뭔가 경직된 분위기에 마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 아무것도 아냐."


대답하기 싫은 듯 시선을 피하는 유미나의 모습에 종업원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한가득 피어났으나 다행히 토를 달진 않았다.


대신 그녀는 활짝 웃으며 침체될 뻔한 분위기를 풀어냈다.


"후후. 별일 없다니 다행이네요! 두 분은 무려 오늘의 첫 손님이랍니다. 첫 손님에겐 저희가 특별한 주문을 걸어드리고 있으니 분명 만족스런 하루가 되실 거예요!"

"특별한 주문? 그게 뭔데?"

"저희 스트레가는 매일 가게를 방문하는 첫 손님과 마지막 손님께 특별한 주문을 걸어드리고 있거든요. 어때요? 조금은 오컬트 카페 같나요?"

"주문의 내용은 무엇이죠?"

"후후. 그건 비밀이랍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기 전에 자연히 깨닫게 되실 거예요. 저, 유나 스프링필드가 견습 대마녀로서 장담드립니다!"

"견습 대마녀...?"

"앗! 그, 그냥 그런 게 있다구요!"


유나라 자칭한 점원이 두 팔을 휘두르며 자신의 말실수를 무마했다.


"마녀의 주문이라..."


이미 이면세계와 카운터가 존재하는 세상이다. 인제 와서 마녀와 마법이 실존한다고 놀랄 정도로 그녀는 무지하진 않았다. 하지만 마녀의 주문이 영 미심쩍은 것도 사실이었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실 필요 없어요. 한국으로 치면 관상 보러 가는 거랑 비슷하거든요."

"그저 재미로 보면 된다는 거군요."

"네! 그런 셈이죠!"


묘하게 둘의 쿵짝이 잘 맞자 유미나의 심기가 다시 한 번 불편해졌다. 다행히 이번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아 유나도 눈치 채지 못했다.


"듣기로 미나 양은 여자 꼬시는 재능이 탁월하다고 하던데. 이참에 여자가 덜 꼬이게 해달라는 주문을 걸어달라는 건 어떨까요?"

"잠...! 그런 거 아니거든요!"


비록 급한대로 아니라고 외쳤지만, 떠오르는 인물이 너무 많았다. 그게 연애 감정은 아니더라고 사적으로 얽힌 관계라고 해도 유미나 주변엔 이성보단 동성이 훨씬 더 많았다.


"히히. 괜찮아요! 저희 카페는 손님의 취향을 존중해드리니까요!"

"당신 때문에 종업원까지 오해하잖아!"

"아하하하!"


뒤에서 지켜보던 관리자가 놀리자 유나도 재치 있게 맞장구를 친다. 장난스런 두 사람의 눈빛을 깨닫지 못한 유미나만 홀로 억울한 표정으로 이를 해명했다.


"나도 그야 이성적으론 남자가 좋아! 예를 들자면...!"

"예를 들자면?"

"이건 저도 궁금하네요."


관리자가, 그리고 유나가 귀를 쫑긋 세운 뒤 상체를 기울였다.


'망했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일순 유미나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막다른 구석에 몰린 그녀가 허둥지둥 좌우를 둘러보았다. 슬프게도 막 오픈한 카페에 손님이라곤 그녀와 관리자 둘밖에 없었고, 소란에 주방과 캐셔에서 얼굴을 비춘 마녀들도 말없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사방이 적이야!'


평생 살아오면서 엮인 남자라고 해봐야 중학교 때 남학생들과 현재 펜릴 소대의 주시윤, 그리고 최근 카운터 아카데미에서 만난 학생들 정도가 전부인 그녀가 취향이라 들 수 있는 남자상은 마땅히 존재치 않았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눈앞의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인 것만 보아도 유미나가 얼마나 이성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문득 그녀는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조언을 떠올렸다.


지금처럼 화창한 봄날, 벚꽃이 피고 지평선 너머로 노을이 지는 주택가. 그녀는 절친인 신나래랑 그 남동생 신나진과 함께 보충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당시 유미나는 방금 막 떠오른 것처럼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읊었다.


"맞다. 나 오늘 3학년 선배한테 고백 받았어."

"지, 진짜?"


갑작스런 유미나의 발언에 제 누이와 투닥거리던 신나진이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본다. 그의 얼굴엔 후회, 절망, 그리고 미약한 희망이란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겨 있었다.


잠자코 남동생의 심경 변화를 눈치 챈 신나래가 음흉하게 웃었다.


"흐응? 우리 나진이는 아직 몰랐구나? 내가 직접 봤는데. 축구 잘한다고 소문난 엄청 잘생긴 선배더라. 확실히 보통 인물은 아녔어."

"그, 그래서 어떻게 됐어? 설마 받아들였어, 미나 누나?"

"아니. 거절했어."


자신이 꺼내놓고도 고백받은 이야기를 남한테 설명하는 게 멋쩍었는지 그녀가 검지로 얼굴을 긁적였다.


"흐아아..."

"푸흐흡!"


대놓고 안심하는 남동생의 모습에, 신나래가 입가를 가린 채 쿡쿡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둘만 빼고 다 아는 일방적인 짝사랑 관계는, 답답하면서도 청춘을 구가하는 학생답게 어딘가 풋풋한 구석이 있었다.


정작 유미나는 이런 데서만 눈치가 없어 신나진의 태도에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왜 그래, 나진아?"

"어? 으응. 아무것도 아냐!"

"흐응? 우리 나진이, 미나가 고백 받았다구 하니까 많이 놀래쪄요?"

"누나!"

"에베베! 우리 나진이는 언제 자기 마음에 솔직해지려나 몰라?"

"그,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얘네 또 시작이네..."


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한 남매를 바라보는 유미나의 시선이 유달리 포근하다.


곧 흩어질 추억 속이었지만, 그때 느낀 행복은 여전히 생생히 다가온다.


"아항?"


한창 동생 잡는 누나답게 신나진에게 헤드락을 걸던 신나래가 갑자기 히죽 웃었다. 질 나쁜 장난을 떠올렸을 때 짓는 미소였다. 신나진은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미나링은 아직 남자에 대해서 잘 모르지?"

"어? 뭐, 그렇지? 가족이야 언니 한 명뿐이고. 친한 남자애도 나진이 말고는 없고."


친한 남자가 자신밖에 없다는 부분에서 신나진의 안색이 묘하게 밝아졌다.


"근데 그건 나래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후후.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신나래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보아라!"


액정엔 신나래와, 또 낯선 남학생이 함께 스티커 사진을 찍은 사진이 바탕화면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누나 남친 있었어!?"

"나래 너 남친 있었어?"


상상도 못한 전개에 둘이 동시에 외쳤다.


"아직 썸타는 중이야. 뭐, 얘도 미나링이 좋아서 내게 접근했던 바보 중 한 명이지만."


생각보다 나쁜 애는 아니더라. 신나래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이걸로 내가 미나링보다 남자에 대해서 잘 안다는 건 증명됐지?"

"이거 아무리 봐도 사기 같은데..."

"어허! 동생 주제에 누님에게 못하는 말이 없어!"

"아흑!"


신나래가 신나진의 뒤통수를 쥐어박았다.


"그러네. 근데 남자에 대해서 안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야?"


유미나의 질문에 신나래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그녀는 검지를 치켜세우더니 무지한 친구에게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잘 들어, 바보 미나링. 좋은 여자는 그만큼 좋은 남자를 사귀어야 하는 법이라구."

"그런가...?"


약간 모자람이나 장애가 있어도 서로를 향한 사랑과 애정으로 이를 극복하는 게 연애 아니었나?


그런 드라마 속 이야기를 상상하며 유미나가 멀뚱멀뚱 신나래를 쳐다봤다.


"지금이야 미나링도 철벽을 치고 있으니까 괜찮지만, 나중 일은 모르는 법이고. 괜히 이상한 남자한테 꼬여서 미나링 인생이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잘 새겨들어."

"응응. 우리 누나가 간만에 옳은 소리를 다 해보네."

"... 나진이는 나중에 두고 보자."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는 신나진을 조용히 흘긴 신나래가 다시 활짝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여튼, 제일 중요한 건 여지를 주면 안 된다는 거야. 그치 우매한 동생아?"

"아하하. 맞아. 미나 누나처럼 다정하면 남자들이 막 착각하고 그래."

"대체 착각할 구석이 어디 있다고..."

"후후. 원래 남자란 다 그런 생물이란다."


신나래가 짐짓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남동생을 째려봤다. 순진한 얼굴에 걸맞게 우유부단한 남동생을 보면 한숨밖에 안 나왔지만, 본인이 완강히 거부하는데 억지로 이어주기도 뭐했다.


대신 그녀는 자연스럽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이후 이를 받아먹느냐 마느냐는 순전히 남동생의 선택이다.


"먼저 미나링이 최우선으로 조심해야 할 건 바로 상판대기만 번지르르하게 생긴 남자야!"

"어... 잘생긴 남자 말하는 거지?"

"그 다음으로는 돈 많다고 허세부리는 남자!"

"으음. 실제로 만나면 재수없긴 하겠다."

"마지막으로 우리 남동생보다 못난 남자! 나진이보다 못난 녀석이 미나링 옆에 서는 건 내가 용납 못해!"

"누, 누나!"

"나진이보다?"


그때는 무슨 조건이 그러냐며 웃어넘겼지만, 사실 나래의 조언엔 틀린 말 하나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고 희생하는 숭고한 행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리우면서도 남모를 죄책감이 유미나의 가슴을 쿡 찌르고 들어왔다.


비록 나래와 일은 그녀 나름대로 끝을 맺었지만, 과연 웃으면서 떠들만한 이야긴가 하면 그 정도는 아니었다. 미처 떨쳐내지 못한 과거에 유미나가 어딘가 숙연해진 미소로 입을 열었다.


"... 조금 바보 같은 남자. 일단은 여기까지."

"오오... 무척 심오한 취향이네요."

"그러게. 이제 만족했지?"


유미나가 관리자를 째릿 노려봤다.


"네. 미나 양도 저를 대하는 태도가 한결 편해진 거 같아 다행입니다."

"하아. 편해졌으니까 하는 말인데.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놀리면 가만 안 둬?"

"물론이죠."


여전히 실실 웃고 있어 썩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지만, 너무 추궁하는 것도 그래 유미나는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하아. 됐다. 우리 주문부터 하자. 나 배고파졌어."

"그럼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손님?"


지친 기색이 역력한 유미나의 모습에 유나는 타겟을 돌려 관리자에게 물었다. 아담한 메뉴판을 건네받은 관리자는 페이지를 넘기다 흐음, 하고 턱을 괴었다.


"혹시 추천 메뉴 있나요?"


관리자가 여유롭게 되묻자 유나가 활짝 웃으며 두 손을 포갰다.


"물론 있죠! 기본적으로는 저희 카페도 일반적인 카페랑 똑같아요. 커피와 디저트가 메인이랍니다."

"뭐야. 오컬트 카페라면서 이 카페만의 특징이라던가 그런 건 없어?"


유나의 배려로 메뉴판을 보지 못한 유미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슬쩍 관리자의 팔에 얼굴을 기대듯 밀착해 메뉴판을 내려다봤다.


"당연히 있죠! 저희 가게만의 독특한 레시피가 들어간 음료수가 있어요. 젊은 분들께 인기가 아주 많답니다? 저도 마셔봤는데 하나같이 전부 굉장히 맛있어요! 제가 여기 점원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심으루!"

"그래? 근데 이름이 하나같이 신기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네..."


일반적인 카페 메뉴도 처음엔 복잡하고 헷갈리는데 스트레가는 한술 더 떴다. 관리자는 유미나가 두 눈을 찡그리며 턱으로 팔을 쿡쿡 찍어내리자 고갤 돌려 쿡쿡 숨죽여 웃었다.


"정 고르기가 부담스러우시면 과일 주스나 코코아 같은 평범한 메뉴도 있어요."


유나가 메뉴판을 뒤로 넘기자 비교적 멀쩡한 명칭의 메뉴가 나타났다.


"참고로 직원 추천 메뉴로는 민트초코 아이스라떼랑 민트초코 샌드위치, 그리고 민트초코를 얹은 민트초코가 있어요!"

"민트초코? 그거 치약맛 소리 듣는 음식 아니야? 그걸 왜 먹어...?"

"치약맛이라뇨! 엄연히 치약이 민트초코의 맛과 향을 따라한 거라구요!"

"그, 그래? 근데 민트초코에 민트초코를 얹는 건 대체 무슨 음식이야?"

"그야 민트초코죠!"


빡!


"꺄앗!"


멀리서 날아온 티스푼이 유나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티스푼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마빡을 드러낸 쬐그만 마녀가 씩씩 어깨를 들썩이면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미나가 소곤소곤 의문을 표했다.


"꼬맹이?"

"저 분이 카페 스트레가의 점장 라우라 베아트릭스 양입니다."

"저런 꼬맹이가 점장...? 우리 소대장 같은 경운가?"

"하하. 세상엔 이면세계 만큼이나 불가사의한 사람들이 참 많죠."


얼마 안 가 점장이 다가와 유나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 거침없는 손길에 유나가 비명을 질러 고통을 호소했다.


"꺄악! 저, 점장님! 저 머리카락 뽑혀요! 아파파팟!"

"미안. 우리 직원이 실수했네. 서비스로 쇼콜라 브라우니 몇 개 얹어줄게."

"제가 알아서 갈 테니까 그만 잡아당겨요, 점장님! 저 이러다 머리카락 다 빠지겠어요! 할머니도 탈모는 마법으로 해결 안 된다고 했단 말이에요!"

"여자는 스트레스성 탈모 외엔 안 와! 오히려 너보다 내 머리가 더 걱정이거든!"


점장은 반듯하게 빛나는 자신의 마빡과 다르게 좌우로 발버둥치는 풍성한 핑크빛 후두부를 바라보다가, 주먹을 움켜쥐곤 괘씸죄로 한 대 더 쥐어박았다.


딱!


"아얏!"


유나한테서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으나 점장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다.


"아프라고 때린 거야 이 멍청아. 내가 누누히 말했지? 가게 메뉴에 이상한 거 멋대로 추가하면 국물도 없다고."

"그, 그치마안..."

"스읍!"

"히잉..."


만담 같은 대화가 끝나자 유나는 우는 얼굴 그대로 점장에게 질질 끌려서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손님이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커다란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


유미나가 관리자를 쳐다봤다.


약간 어이가 없는 듯한 시선에 관리자가 서둘러 해명했다.


"해당 직원의 연례 행사 같은 겁니다."

"연극 같은 거 아니지?"


관리자는 대답하는 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찡긋 윙크를 날렸다.


"어머? 우리 신입이 또 손님들에게 폐를 끼친 모양이네. 젊은 커플 분들은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마침 봄맞이 행사가 한창 진행중이랍니다."

"저기, 우린 딱히 커플이 아닌ㄷ..."

"잘 부탁드립니다."


관리자가 유미나의 말을 싹뚝 잘랐다.


"... 이럴 때만 잽싼 거냐구."

"서비스는 받을 수 있을 때 받아두는 게 제일이죠. 안 그런가요?"

"틀린 말은 아닌데. 그냥 좀 찝찝해서 그렇지."


정작 그렇게 말하는 유미나 본인부터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낀 채였다는 걸 망각한 모습이다.


잠시 후, 에블린이라 자신을 소개한 점원이 둘을 가게 내부에 마련된 커플석으로 안내했다.


전체적으로 고풍스러우면서도 은근히 음습한 분위기를 내뿜는 오컬트 컨셉 카페답지 않게 아기자기하고 핑크빛 연출이 돋보이는 자리였다.


"자아. 여기가 우리 가게에서 시험적으로 선보이는 커플 전용석이야."

"이, 이게 커플석이라고?"


너무나 노골적인 핑크빛 공간에 유미나가 기겁했다.


"화려하네요. 남성분들이 많이 부끄러워하겠어요."

"연인을 위해 부끄러움을 참아내는 것 또한 사랑의 일종 아닐까?"

"과연. 그런 '느낌'이 들게끔 만들어져 있는 거군요?"

"오호호. 눈치가 빠른 분이시네."


관리자와 에블린이 서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유미나는 커플석의 화려한 자태에 정신이 팔려 두 사람의 눈빛 교환을 눈치 못 챘다.


덕분에 주문도 전부 관리자가 직접 고르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자신 몫의 씁쓸한 커피 외에 여성들이 좋아할 법한 달달한 음료와 조각 케이크를 주문했다.


"좋아. 그럼 여기에다가 아까 우리 점장이 약속한 쇼콜라 브라우니 몇 개 더 얹어줄게."

"하하. 감사합니다."

"어? 뭐야, 벌써 주문 다 했어?"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미나에게 에블린이 윙크를 날렸다.


"그럼요. 그쪽도 한 번 잘해봐요, 꼬마 아가씨."

"네? 무, 뭘요?"


오해는 쌓여만 가고, 질문엔 대답 대신 눈웃음만 돌아왔다.


"혹시 요즘 '대답 대신 눈으로 말해요.' 가 유행이야?"

"하하. 미나 양은 유행에 뒤쳐져 있나보네요."

"진짜였어?"


물론 가짜다. 관리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어쩔 줄 모르는 유미나를 조용히 바라봤다. 마치 그리운 무언가를 그녀로부터 투영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아으. 혹시 그쪽은 이런 거 안 어색해...?"

"글쎄요."


자리에 앉자 유미나는 커플석이 어색한지 엉덩이를 들썩였다. 평소와 달리 움츠린 어깨가 그녀가 이 커플석의 위용에 얼마나 위축된지 보여준다.


정열적인 붉은색 하트 모양 테이블과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소파가 한 세트였는데. 하필 커플석은 서로 마주 보는 게 아닌 나란히 앉는 형식이었다. 게다가 쓸데없이 좁아서 둘 이상이 앉으면 강제로 서로의 어깨가 맞닿을 수밖에 없는 크기였다.


소파에 딸린 쿠션도 당연히 전부 핑크색이나 붉은색 하트 모양이었고, 유미나는 괜히 붉은색 쿠션을 하나 집어 양팔로 꾹꾹 조였다.


"어른이 되면, 이보다 부끄러운 짓도 자주하게 되죠. 그래서 저는 이토록 노골적인 자리도 그닥 불편하진 않네요."

"나, 갑자기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졌어..."

"하하. 늦든 빠르든 어른이 되는 시기는 온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나 양이 훌륭한 어른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뭐야, 내가 어른이 되면 꼬셔보게?"

"..."


여태 유쾌하게 답하던 그가 조용히 입가를 가린 채 잠시 말을 골랐다.


'이 아저씨는 왜 하필 지금 진지해지는 거야...!'


관리자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유미나는 괜히 심장이 쿵쾅쿵쾅 두근거림을 느꼈다. 품에 안고 있던 쿠션이 카운터의 힘에 눌려 점점 쪼그라들었다.


"... 그러게요. 미나 양이 어른이 되면, 제게 그런 기회를 한 번 주셨으면 하네요. 분명 엉망진창으로 차이겠지만, 나름 잊지 못할 재밌는 경험이 될 거 같아요."

"왜 당연히 차인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거야?"

"글쎄요. 왜일까요?"


그땐 제가 미나 양에게 무척 미안한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거든요. 관리자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비밀입니다."

"예전부터 느낀 건데. 어른은 비겁한 거 같아."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아는 게 많으면 그만큼 숨기고 싶어지거든요. 모르는 입장은 그게 기만이라 여길 수도 있죠."

"왜 숨기는 건데?"


의아함이 담긴 유미나의 보라빛 눈동자에 관리자가 비친다.


관리자는 검지를 입가에 대었다.


쉿.


"서로가 곤란해지거든요."



   *



얼마 후, 과감한 노출 패션을 자랑하는 마녀가 물구나무서기를 한 채 주문한 음식을 가져왔다. 그녀는 솜씨 좋게 두 발로 서빙을 끝냈고, 마지막엔 좋은 시간 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방금 전 대화로 둘 사이에 어색함이 맴돌았다. 관리자는 그대로였지만, 유미나가 대놓고 어색한 듯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걸 피했다.


하지만 배는 고팠기에, 그녀는 망설이다가도 끝내 치즈케잌에 포크를 대었디.


"... 맛있다."

"다행이네요."


편의점에 놓인 디저트도 엄두를 못내는 그녀에게 카페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조각 케이크는 사장의 1주년 취임식 때 먹은 음식들 마냥 천상의 맛을 느끼게 했다.


"으음! 이 쇼코 뭐시기도 맛있어!"

"쇼콜라 브라우니. 커피랑 같이 먹어도 괜찮은 디저트죠."

"근데 쉐이크는 너무 달아서 맛이 잘 안 느껴진다."

"대신 제 커피 한 모금 마셔볼래요?"


선뜻 관리자가 내민 커피를 받은 유미나가 뒤늦게 놀라 움찔했다.

 

"왜 그러시죠?"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기엔 얼굴이 굉장히 새빨갰지만, 관리자는 구태여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이거 완전 간접 키스잖아...!'


커피잔에 남은 선명한 커피의 흔적. 관리자의 입술이 닿은 자리를 확인한 유미나가 허둥지둥 잔을 고쳐 잡아 반대쪽으로 한 모금 들이켰다.


"으읏. 이거 왤케 써?"

"그야 커피니까요. 설탕이나 시럽을 좀 넣고 드릴 걸 그랬나보네요."


인상을 쓴 채 혀를 샐쭉 내민 유미나에게 관리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쇼콜라 브라우니를 포크로 찍어서 건네주었다.


"커피가 너무 쓰면 단 걸로 중화시켜야죠."

"흐아아..."


잔뜩 구겨졌던 표정이 쇼콜라 브라우니 하나로 풀어진다.


아직 애는 애라고 생각하며 관리자가 커피를 들이켰다. 공교롭게도 유미나의 입이 닿은 곳과 일치했다.


"하아. 커피도 이런데 술은 다들 어떻게 마시나 몰라."

"하하. 카운터는 알코올이 잘 안 받는다더군요. 아마 조금 쓴 음료 느낌일 겁니다."

"그래? 그럼 어른이 되어서도 술 마실 일은 없겠네."

"딱히 몸에 좋은 건 아니니까요. 될 수 있으면 마시지 않는 게 좋긴 합니다."


둘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카운터로 활약하면서 어려운 일은 없습니까?"

"글쎄? 처음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힘들었는데. 지금은 나름 할만한 거 같아. 선배도 소대장도 나름 인정해주는 거 같고. C급이라 무시받던 것도 아카데미에선 베테랑이라고 치켜세워주니까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


근황을 알리며.


"코핀 컴퍼니에 친해진 사람은 있나요?"

"어, 생각보단? 알트 소대 녀석들도 지금은 나름 괜찮은 관계고. 여전히 서윤 녀석을 보면 내게 불만이 가득해 보이긴 하지만..."

"아하하. 실제로 서윤 양은 까다롭기 그지없죠. 부사장이 자주 푸념합니다."


차츰 분위기를 풀어갔다.


"최근 힘든 일은 없습니까?"

"잘 모르겠어. 진짜 힘든 일은 다 지나서 그런가. 요즘은 오히려 할만한 거 같아."

"과연..."


진실을 아는 관리자는 남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무지한 유미나는 그녀 나름대로 보람찬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덧 접시 위가 깨끗해지고,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화 소재가 다 떨어지기 무섭게 수다스러웠던 방금 전 모습에 위화감이 생길 정도로 둘은 어색해 보였다.


칸막이 너머를 슬쩍 훑어보자 슬슬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적당한 소음이 둘 사이의 어색함을 조금이나마 중화시키고, 관리자는 손님 응대로 정신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마녀 차림의 점원들을 응시했다.


유미나는 입술이 삐죽 나온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관리자를 나무라듯 질문했다.


"남자들은 저런 차림이 좋은가봐?"

"물론 싫어하진 않습니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그는 덤덤히 긍정했다. 고개를 되돌린 관리자가 유미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분한 표정을 짓는 유미나와 달리 그는 시종일관 능글맞았다. 


"어릴 땐 누구나 동화 속 마녀와 마법사를 꿈꾸죠. 고난을 마법으로 뚝딱 해치우는 모습은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기 충분하니까요."

"도로시나 신데렐라를 도와준 마녀처럼?"

"그렇죠.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길보단 편한 길을 택하기 마련이죠. 그에 도취되어 인과관계를 망각하곤 합니다."

"무슨 인과관계?"

"주인공의 존재를 말이죠."


관리자가 텅 빈 쉐이크를 양손에 쥔 유미나를 빤히 응시했다.


"사람들은 으레 겉만 보고 남에게 주어진 기회와 선택을 보며 질투와 시기를 표하곤 합니다. 사실은 선택받았다는 것조차 이야기의 주인공이기에 가능한 일이란 걸 망각하고 말이죠."


앞으로 주인공이 헤쳐갈 위기를 애써 외면한 채, 자신들도 가능하다 여기며 박탈감과 상실감을 논한다.


"저는 그런 사람을 너무 많이 봤지요. 그래서 마녀라는 존재를 동경하곤 합니다. 늘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거야?"


관리자의 몸이 찔린 듯 미약한 떨림을 보였다.


"... 뭐 어디까지나 겸사겸사, 라는 거죠.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기적을 낳기도 하죠. 그리고 저는 그 기적을 필연으로 만들고자 행동합니다. 왜냐하면 그 기적은 필히 저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일 테니까요."

"뭔가 어렵네. 근데 그쪽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왠지 모르게 알 거 같아. 분명 보답받을 거야. 그... 별로 도움은 안 되겠지만, 나라도 응원할게."

"하하. 고마워요. 충분히 힘이 됐습니다."


전보다 떠들썩해진 카페 전경을 훑은 유미나는 슬쩍 유리컵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곤 머리카락을 베베 꼬았다.


'마녀 차림이라...'


별로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동경한다고 하니 한 번 정도는 꿈을 이뤄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였다.


대신, 마녀가 되는 건 눈앞의 남자가 아닌 유미나였다. 관리자는 신데렐라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한 번 정도야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녀는 상상만 해도 우스운 광경에 푸흡 웃음을 흘렸다.


사실은, 약간의 사심이 담겨 있었다.


옆에 앉은 남자가, 비록 처음 본 건 아녀도 초면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자꾸 타인에게 시선이 가는 게 퍽 기분 좋진 않았다.


자신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으나, 묘하게 거슬리는 건 사실이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가며 유리컵에 비친 자신을 오밀조밀 살폈다.


'나도 어디 뒤쳐지진 않을 텐데...'


심지어 몸매는 스트레가의 다른 점원들보다 자신 있었다. 회사 내에서도 그녀에 견줄 사원은 몇 없었다. 강력한 대항마가 존재하긴 했지만, 그들은 이 남자와 별다른 관계가 아닐 수고 있었고...


'아니, 내가 왜 이런 걱정을 하고 있담?'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왔다.


"저희도 슬슬 일어나볼까요?"

"그, 그럴까?"


비록 커플석이라고 아주 구석진 곳이긴 했지만, 손님이 차츰 밀려드는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고 매너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관리자가 먼저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유미나는 잠시 그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선뜻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다행히 칸막이로 가려져 커플석에서 튀어나온 둘을 의식하는 손님은 없었다. 있다면 순수하게 둘의 외모나 분위기에 절로 시선이 모여든 거다.


두 사람이 가게 밖으로 나오기 직전, 서빙을 마친 유나가 황급히 달려왔다.


"아! 손님, 가시기 전에 이거 받아가세요!"


헐레벌떡 다가온 유나가 그녀의 손에 작은 주머니를 쥐어줬다. 안에 납작한 무언가가 담긴 주머니였다.


"이게 뭐야?"

"전에 말한 주문이 걸린 부적이에요. 효과는 비밀이지만, 분명 손님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저희 점장님이 그러셨거든요."


저래 봬도 엄청난 마녀라며 믿어도 된다고 유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점장님께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세요."

"뭘요. 그럼 다음에 또 오세요!"

"응. 그럴게."


마녀의 부적을 받은 둘은 유나의 배웅을 받으며 카페를 나왔다.


태양이 중천에 뜬 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 서늘했던 날씨가 이제는 완연히 달아올라 옷가지 안에선 희미하게 땀이 차올랐다. 유미나는 생각보다 높은 기온에 슬쩍 옷자락을 쥐고 팔랑팔랑 흔들었다.


"어때요? 괜찮았나요?"

"응. 나쁘지 않았어. 다음엔 선배나 소빈이랑 함께 오려고."

"좋았다니 다행이네요. 사실 맛만 놓고 보면 꽤 호불호가 갈리는 카페거든요."


시대의 흐름이 웰빙으로 넘어간 건 관리 실패 사태 직후 세계의 식량 사정 전반이 좋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원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늘 인스턴트로 식사를 때우는 유미나는 비싼 웰빙 음식보단 씨고 자극적인 맛이 좀 더 익숙했다.


"분명 처음엔 가볍게 떼우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엄청 먹어버렸어."

"그럼 소화도 시킬 겸 다른 데서 놀아볼까요?"


아직 시간은 많다며 관리자는 그녀를 이끌고 옷가게가 즐비한 아울렛으로 향했다. 관리자의 제안은 다름아닌 쇼핑이었다.


"쇼, 쇼핑? 됐어. 돈도 없는데 무슨 쇼핑이야."

"자금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려고 있는 카드잖아요?"

"이거? 함부로 막 써도 되는 거 맞아?"


물론 안 된다. 하지만 카드의 주인은 관리자였다. 이수연이 유미나에게 맡긴 카드를, 관리자가 보란듯이 눈앞에서 채갔다.


"당연히 되죠. 그러라고 있는 카드인데."

"아, 잠...!"


황급히 뒤를 따라갔지만, 이미 그는 옷가게 안으로 폴짝 뛰어든 후였다.


이후는 지옥이었다.


"어머 손님! 인물이 굉장하시네. 애인께서도 엄청 귀티가 나시고. 손목에 시계 차신 거 보니 혹시 카운터? 어쩜! 제가 활동에 방해되지 않는 스타일로 싹 꾸며드릴게요."


하필 관리자가 고른 곳은 아울렛 중에서도 사장이 극성인 곳이었고,


"어머 살 뽀얀 거 봐. 아가씨처럼 조숙한 스타일은 의외로 강렬한 색상이 잘 어울려. 대충 걸쳐도 핏이 다 살아나잖아?" 


유미나의 코디에 원한이라도 있는지 사장은 가게의 옷이란 옷을 다 가져와 그녀를 옷걸이처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역시 봄에는 좀 화사한 게 어울리겠지? 남친 눈엔 어때요?"

"하하. 전부 다 어울려서 하나만 고르지 못하겠네요."

"그치? 내가 좀 싸게 쳐줄까?"

"좀 더 입혀보죠."

"이걸 더!?"


정신나갈 거 같애! 울상이 된 유미나가 속으로 울부짖었다. 


패션쇼는 카페에서 보낸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간신히 끝을 맺었다. 원래는 끝이 보이던 찰나, 갑자기 가게를 방문한 손님들까지 합세해 아주 그녀의 혼을 쏙 빼놓았다.


전부 거절할 수 있음에도 차마 손에 쥐어지는 옷가지를 거부하지 못한 건, 그녀가 보기에도 옷들이 그녀와 무척 잘 어울렸고, 또 이를 지켜보는 관리자의 모습이 굉장히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런 희생을 치룬 건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는 그녀는 녹초가 되어 한적힌 호수공원 벤치에 늘어졌다.


"하아. 하아. 침식체보다 상대하기 더 힘든 사람은 처음이야."

"상인을 얕보면 큰일납니다."

"사장뿐 아니라 손님들까지 합세했잖아."


자꾸 새로운 옷가지를 쥔 채 다가오는 이들이 침식체보다 무서웠다. 다시 생각해도 오싹한 광경에 유미나가 치를 떨었다.


당분간 옷가게는 쳐다도 보지 않겠다며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마치 내가 인형이 된 느낌이였어..."

"그만큼 미나 양을 꾸며주고 싶었던 거죠. 원석을 아름답게 세공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너무 가볍게 여기셨네요."

"하아. 보석이라니. 나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자신을 가지세요. 저는 미나 양 정도면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관리자의 응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듣고 있으면 주시윤이 그녀를 응원하고 신뢰하여 등을 밀어줬을 때처럼, 가슴 속 한켠이 따뜻해진다.


때문에 유미나는 더욱 의문스러웠다.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야?"


비록 알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받긴 했어도 고작해야 발렌타인 행사 때 한 번 마주친 사이다. 코핀 컴퍼니의 관계자라는 우연은 차치하더라도, 그게 그녀에게 잘 대해줄 이유가 되진 못한다.


"그렇게 느끼셨나요?"

"내가 아무리 세상물정 모른다지만, 일개 사원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투자자가 어딨어."


사실 따지고 보면 오늘 아침부터 모든 게 수상했다. 착각할 리가 없는 작전 날짜를 헷갈린 것부터 시작해 부사장의 뜬금없는 제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은 실수에서 비롯된 일련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정말로 흑심을 가지고 접근한 걸까?


유미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기본적으로는, 그때 받은 초콜릿에 대한 보답입니다."

"초콜릿? 설마 발렌타인 때 그거...?"


고작 그런 걸로? 유미나가 반문했다.


"자신에겐 별 거 아닐지도 모르는 행동이 남에겐 크게 보일 수 있죠."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이란 거야?"

"당시 저는 무척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쐰 상황이라, 초콜릿을 먹은 건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어요. 원산지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맛은 괜찮았죠."


심지어 초콜릿을 건네준 주인공은 귀여운 바니걸이었다. 개성 넘치는 토끼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그녀의 당시 모습을 떠올린 관리자가 옅게 웃었다.


"그거면 제가 큰 감동을 느끼기 충분했어요."


아니다.


분명 무언가가 더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유미나는 당최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줄곧 자신을 괴롭힌 고민을 깊은 한숨과 함께 바깥으로 토해냈다.


"에라 모르겠다."


옛날부터 머리 쓰는 일은 그녀와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머리를 새하얗게 비웠다.


"나 하나만 물어도 돼?"

"무엇이죠?"

"오늘 내게 베푼 친절도 그쪽에겐 별 거 아니였어?"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미나가 빤히 쳐다보는 앞에서, 그는 턱에 손을 댄 채 한참을 고민했다.


"모르겠네요. 하지만 리스크가 있는 일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 그래?"


유미나가 히히 웃었다.


그가 말하는 리스크가 뭔진 모르겠지만, 어째선지 썩 나쁜 기분은 아녔다.


"다음에."


유미나가 운을 뗐다.


"내가 직접 요리해줄게."


다른 말로 다음에도 만나자는 일방적인 선언이었다.


"미나 양의 요리요?"

"내가 빈말로도 요리 잘한다고는 못하거든?"


차라리 선배가 더 잘할 거라며 유미나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당장 하긴 좀 그렇고. 대신 직접 연습해서 내 실력이 괜찮아졌다 싶으면 그쪽을 초대해서 대접할거야. 어때, 괜찮지?"

"영광이네요."


눈이 마주친 둘이 동시에 웃었다.


"자아. 그럼 저는 슬슬 가볼 시간이네요."

"벌써? 아직 해도 안 졌는데."

"따로 선약이 있거든요."


관리자가 옷을 구매할 때 사용한 카드를 다시 유미나의 손에 들려주었다.


부사장이 공인한 그의 법인 카드였다. 그것도 관리국의 것이 분명한.


"이건 왜?"

"곧 쓰일 곳이 생길 겁니다."


그리 말한 그는 옷이 담긴 쇼핑백을 한아름 안아들었다. 다만 허약한 체질이란 게 거짓은 아니었는지 그 모습이 무척이나 버거워보였다.


"이건 제가 따로 부탁해 집으로 미리 보내드리죠."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유미나가 냉큼 쇼핑백을 빼앗았다.


이쯤 되면 무게가 아니라, 그냥 손에 쥐는 게 문제인 수준이었다.


"하하. 이거 곤란하네요."

"뭐가? 사장 아줌마도 일부러 튼튼한 쇼핑백으로 줘서 끊어질 염려는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유미나가 쇼핑백을 휙 흔들었다.


옷가게 사장의 말은 진실이었는지 격한 움직인에도 쇼핑백은 끄떡 없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하아."


서로가 마주보는 상황 속에서, 유미나의 뒤편을 확인한 관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요. 부득이하지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미나 양."

"어? 버스 정류장까지 같이 가자. 어차피 나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아닙니다. 미나 양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거든요."


할 일? 미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관리자가 등을 돌렸다.


"여기 있었네요, 미나 양."

"선배?"


갑작스런 주시윤의 등장에 그녀의 머릿속에 의문 부호가 튀어나왔다.


"선배가 어째서 여기에?"

"무슨 소린가요? 저는 펜릴 소대 회식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잽싸게 달려왔다며 주시윤이 능글맞게 웃었다.


"펜릴 소대 회식이라니? 난 금시초문인데."

"어라? 이상하네요. 분명 스승님이 호수공원에서 집합이라 하셨는데요."

"호수공원?"


유미나가 황급히 뒤를 돌아섰다.


그곳에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미나 양?"

"저기 선배, 혹시 여기 내 옆에 있던 키 큰 남자 못 봤어?"

"정장 차림의 남성분이요? 방금 저기 산책로를 따라서 걸어가시던데."


주시윤이 가리킨 방향으로 재빨리 달려갔으나 이미 남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온 데 간데 없었다. 뒤를 따라온 주시윤이 넌지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요? 손에 한가득 담긴 쇼핑백은 또 뭐고요."

"... 아무것도 아냐. 그냥, 나중에 부사장 아줌마한테 따질 일이 좀 생겨서."

"오오. 미나 양이 부사장님에게? 늘 있는 일이라 신기하지도 않네요."

"그러게. 늘 있던 일이네."


허탈해진 유미나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아. 슬슬 돌아가자. 어차피 소대장도 오고 있지?"

"하하. 스승님도 참 너무하죠? 약속은 본인이 잡아놓고 정작 본인은 코빼기도 안 비추다니. 이렇게 게을러 터져서 어디 제자에게 모범이 될 수나 있으련지..."


돌아가는 길, 주시윤은 연신 소대장인 힐데의 뒷담을 깠다. 그게 자신의 일인 것처럼 유미나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귀신같이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던 힐데에게 들켰다.


"겍! 스, 스승님?"


힐데가 손에 쥔 담배를 입에 머금었다.


스읍.


"후우."


담배 연기가 청명한 하늘로 피어오른다.


한동안 담배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힐데가 꽁초를 던졌다. 꽁초는 포물선을 그리며 쓰레기통 안으로 깔끔하게 들어갔다.


"됐다. 가지, 신입."

"응. 회식은 어디서 할 거야, 소대장?"

"족발이다. 누가 강력하게 추천하더군."

"저기, 스승님? 왜 저만 무시하시는지...?"

"신입, 벌써 여름인가보다. 자꾸 모기가 앵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군."

"푸훕! 모기래... 선배!"

"스, 스승님! 아무리 제 목소리가 비교적 얇고 높아도 그렇지 모기라뇨!"


시끌벅적한 펜릴 소대와 함께 걸으며, 유미나는 주머니 속에서 까글거리는 카드의 감촉을 되새겼다.




 *




- 테라브레인 절전모드 OFF.


- 기동 개시.


"어머? 생각보다 금방 돌아오셨네요, 사장님."


테라브레인에 전원이 들어오자 이수연이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섰다.


"사장님?"


하지만 전원이 들어오고도 반응이 없는 테라브레인의 모습에 그녀가 의문을 표했다. 연결되기 무섭게 래퍼라도 될 것처럼 시끄럽고 수다스러운 그가 침묵을 지키자 수상한 나머지 그녀는 조심스레 사장에게 다가갔다.


"관리자님?"

"여심은 어렵구만 어려워..."


뭐야. 별 거 아니었네. 이수연은 괜히 걱정했다며 테라브레인을 가볍게 쥐어박았다.


"부사장?"

"불만 있나요?"


관리자는 침묵했다.


"... 그나저나. 펜릴 소대가 회식을 한다던데 자네는 거기 안 낄 텐가?"

"누구누구 때문에 일감이 밀려서요. 저녁에 정자랑 술 약속도 잡아놨구요."

"그렇구먼. 다들 저마다 가스를 빼는 방법이 있기 마련이지."

"그리 말씀하시는 거 보니 생각보단 잘 안 되신 모양이네요?"


테라브레인이 이마를 짚은 채 상체가 뒤로 살짝 기울였다. 도취된 상태는 아니니, 필히 이수연 말대로 실패한 게 틀림없어 보였다.


"원래 목적의 반절도 달성하지 못했네. 안타깝지만, 나머진 펜릴 소대와 알트 소대의 몫으로 둘까 하네."

"바쁜 사원을 사적인 용도로 부려먹지 말아주셨으면 하는데요, 사장님."

"추가 수당은 내 사비로 충당하겠네."

"후후. 사장님께서 정 그러시겠다면야 못해드릴 것도 없죠."

"하이고야."


돈에 관련해선 늘 악마가 되는 이수연을 보며 사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조금 더 일찍 지원할 걸 그랬나?'


그녀가 이리 변한 데에는 자신의 탓도 있었기에 그가 작게 한탄했다.


- 문자왔숑!


"시작했나?"


과거를 한탄하는 사이 들린 문자음에 슬슬 회식을 시작했거니, 하고 관리자는 결제 내역을 확인했다.


"..."


관리자가 두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두 눈을 비비고 테라브레인의 카메라를 닦아도 핸드폰 액정에 뜬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결제 금액이, 생각보다 많았다.


"어머? 마침 미나 양이 알트 소대원까지 불러서 같이 회식을 하는 모양이네요."

"뭣이?"


관리자가 당황하자 이수연이 사내 단톡에 올라온 사진까지 보여주었다. 사진엔 알트 소대원과 유미나가 활짝 웃는 모습이 찍혀 있었고, 저 멀리 가장 자리에 주시윤이 힐데에게 쌈을 먹이는 모습이 희미하게 잡혔다.


관리자가 빠르게 머릿속 계산기를 두들겼다.


"저기, 부사장? 생각보다 오늘 지출이 커서 그런데..."

"절대 안 됩니다."


이수연이 선을 딱 긋자 관리자의 어깨가 축 쳐졌다.


"내 비장의 머신갑 화보집에 쓰일 예산이..."

"꼴 좋네요."


이수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



조만간 솔메 대회였나 마침 쓰고 싶은 거 하나 있어서 그거 단편 하나 마무리한 뒤 슬슬 카사 팬픽은 지난번 쓴 스승의날처럼 걍 가벼운 대사집 위주인 거 끄적이거나 아예 안 쓸듯 허요.


본격적으로 다시 글이나 써보려고 함.

여기서 활동한 몇 달이 5년 넘게 상실한 자신감 되찾는데 꽤 큰 도움이 됐음.

 다들 평생 카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