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통합 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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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겨우 한 명한테 싹 당했단 말입니까?”

 

“장난 아니었다니까요 아저씨! 그 언니 얼굴이 완전 극화처럼 변하더니 공을 막 내려꽂는데! 편입생 언니도..”

 

“아르티, 먹고 말해. 다 튀겠어.”

 

“하하. 아직 많으니 천천히 드세요. 여러분.”

 

“저기, 도시락 나눠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케이시! 이 미트볼 진짜 맛있어!”

 

“아, 으응. 스카이도 많이 먹어.”


점심 시간을 놓쳐 쩔쩔매던 아이들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 중 한 명은 나유빈이 아는 아이였고, 셋 다 서윤과 같은 청팀이었다. 마침 도시락도 버릇처럼 많이 만들다 보니 든든하게 싸 왔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나눠주기로 했다.


주거니 받거니 사이좋은 소녀들을 뒤로하고 나유빈은 부하 직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매우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심술이 가득한 눈. 모양 좋은 입술이 댓발은 나와 있었다. 서윤이 감정을 드러내는 게 익숙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긍정적인 변화임은 틀림없었다. 그녀는 아동용 만화영화의 악역처럼 당했다고 들었다. 그가 파악한 서윤이라면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게 뻔했다. 놀려주기 참 좋은 때였다. 그의 눈썹이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이건 못 참지. 목소리에 숨기지 못한 장난기가 가득했다.

 

“애들 싸움에도 질 수도 있죠. 서윤 양. 주눅들지 마십시오.”

 

“…그래도 제가 점수 1등이에요. 부사장 님.”

 

“그렇군요. 뭐, 아무리 프.로 카운터에.. 그러니까..뭐였죠? 호랑이. 호랑이라도 가끔은 넘어질수도 있는 법이죠.”

 

까득. 나유빈의 귀에도 똑똑히 들릴만큼 큰 소리로 서윤의 이빨이 부딪혔다. 눈빛이 배는 싸늘해졌다. 더 놀려주고 싶었으나 참아주기로 했다. 아직 경기도 남아있었으니 그녀의 멘탈을 긁을 필요는 없었다. 우선은 서윤 몫의 도시락통을 내밀었다. 

 

“자. 농담이니 기분 푸십시오. 식사하셔야죠. 제 자신작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던 서윤은 도시락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유빈에게 잔뜩 심술을 부릴 생각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뚜껑을 열었다.

한입 크기로 동글동글하게 만든 주먹밥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별다른 색을 입히지는 않았다. 새콤한 냄새가 나는 걸로 보아 식초로 간을 한 것 같았다. 도시락은 주먹밥과 한쪽으로 정갈하게 모아진 반찬들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폭신해보이는 계란말이, 식었어도 여전히 바삭해 보이는 가라아게와 빛깔좋은 갈색 소스가 묻은 미트볼. 예쁜 녹색이 언뜻언뜻 드러나는 호박전까지 있었다. 작은 통에는 몇가지 채소와 과일로 만든 샐러드까지 준비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의외로 정성이 들어간 도시락이었다. 내심 감탄한 서윤은 우선 아이들에게도 평가가 좋던 미트볼을 하나 집어들었다.

 

그래. 우선 모양새는 좋네. 

 

적당한 크기를 베어 문 서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한 고기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뭐야. 진심? 리얼? 에바다. 이거 왜 맛있어?

재빨리 무덤덤한척 표정을 바꾸었지만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나유빈이 못 봤을리 없었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듯 그는 씩 웃었다.

 

“마음껏 감동하셔도 좋습니다? 기가 막힌건 이미 알고 있어요.”

 

“….좀 치시네요. 부사장님.”

 

“자취하는 독신 남성의 저력입니다.”

 

 "뭐, 취미라더니 내공이 보통은 아니시네요."

 

“좋아서 시작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실력이 일취월장했습니다. 또 제가 좀 잘났으니까요. 못 하는 게 없죠.”

 

"하."

 

콧방귀를 뀐 서윤은 다음 반찬을 하나 집어들었다. 외관처럼 폭신한 식감의 계란말이도 짭쪼름하면서 달콤함이 적당히 조화되어 있었다. 분하지만 이것도 맛있었다. 콧대를 바짝 세운 나유빈의 기를 더 살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인정할만한 맛이었다. 

 

어딘가 분하단 표정으로 식사를 이어가는 서윤을 나유빈은 승리자의 기분으로 관찰했다.

 

구 관리국시절엔 제때 끼니를 챙겨먹기 힘들었다. 한정된 인원으로 수많은 작전을 수행해야 했으니 적절한 급양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렇다보니 시간이 날 때 급히 해결하는게 일상이었다. 스승인 로자리아는 컵라면 물도 끓이기 귀찮아하는 사람이었고, 이수연은 뭘 참혹하게 태워먹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자연스럽게 나유빈이 식칼과 국자를 잡았다. 그의 시작은 서툴고 난폭한, 질보다는 양을 우선한 것이었다. 요리보단 조리에 가까운 전투적인 행위였다. 

 

그럼에도 맛있다며 싹싹 비워줬던 친구가 있었다. 둘이 먹다 하나쯤 침식체에게 죽어도 모르겠다고 추켜세워줬던 동료들이 있었다. 싫은 소리는 꼬박 해도 맛있는 반찬은 은근슬쩍 한 접시씩 더 받아가던 스승이 있었다. 그들의 기대에 응하는게 기뻤다. 그래.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나유빈은 고개를 저어 묵은 생각을 몰아냈다. 그는 자신 몫의 도시락 뚜껑을 열며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오전 경기는 즐거우셨습니까?”

 

서윤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멋쩍게 웃었다. 이 섬에 오고 나서는 꽤 자연스럽게 미소가 나왔다. 스스로도 신기했다.

 

“어… 네. 운동회라는게.. 생각보다 재밌더라구요. 웃기죠?”

 

“웃길 게 뭐가 있습니까. 서윤 양도 '일단은' 사람인데요. 당연히 경험해야 했을 것을 오늘에서야 즐길 뿐입니다.”

 

"'일단'이란게 무슨 뜻인지 궁금하네요? 그보다 부사장님은 학생이셨을 때 운동회 안 나가셨어요? 타고나셨다고 하시는 거 보면 이것저것 잘 하셨을텐데."

 

“저도 운동회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진짜요?”

 

“짐작하셨다시피, 저는 올드 카운터 출신입니다. 철이 들었을 쯤엔 이미 전선에서 뛰고 있었죠. 남들 같은 평범한 학창 시절은 없었습니다.”

 

“좀 아쉬우시겠어요.”

 

“글쎄요. 오늘 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당연히 가끔은 누리지 못했던 것들이 아쉬웠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행복했었다. 어린 마음으로 품었던 이상이었지만 함께 싸운 동료들이 있었기에 옳다고 믿었다. 모두와 같이 싸워나간다면 못 할게 없을 것 같았다. 그도, 이수연도 참 어리숙했던 시절이었다.

 

더 말하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는 젓가락을 집었다. 서윤도 눈치가 빨랐기 때문에 더 묻지 않았다. 한 수저 뜨고 몇 분씩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 쪽과는 달리 그들의 식사는 조용히 이어졌다.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은건 서윤이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었어요.”

 

“콧대높은 서윤 양이 이렇게 싹 비워주니 보람이 있군요.”

 

어느새 나유빈은 본래의 페이스를 되찾았는지 그녀를 살살 긁었다.

 

"..인정해드릴게요. 생각보다 맛있었어요."

 

솔직한 칭찬을 보낸 서윤은 뚜껑을 열어 물을 몇 모금 마셨다. 평소라면 나유빈과 서윤은 사무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아니었다. 서로를 관찰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두 사람 다 세워둔 가드가 낮아져 있었다. 그래서, 본래라면 절대  시도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이라면 그녀가 품은 호기심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궁금한게 있는데요.”

 

“말씀하시죠. 들어는 보겠습니다.”

 

“부사장님은 왜 사장님과 일하세요? 어, 그게. 잘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도 같아서.”

 

주변은 몇몇씩 무리를 지어 다니는 학생들이나, 가족과 함께 앉은 학생들로 북적했다. 온갖 기념품을 파는 잡상인들도 자리를 펴고 있었다. 홍보부에서 섬 전체에 틀어놓은 방송에선 유행하는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나 생동감있는, 삶의 냄새가 났다. 긴장감 하나 없이 완연히 평화로운 한 때였다. 


“그야 돈 많이 주시니까요? 부도 직전인 회사도 살려주셨고.”


나유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웃었다. 그는 두 손을 머리 뒤로 돌려 깍지를 꼈다. 강철 의수가 빛을 반사시키며 빛났다. 그대로 나무에 자연스럽게 등을 기대고, 식사를 거의 끝낸 아이들을 응시했다. 손을 꼭 잡은 두 소녀는 서로의 귓가에 수줍게 말을 몇 마디 나누고는 킥킥 웃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다른 아이는 흐뭇한 얼굴로 한 두마디를 거들었다. 조금 큰 소리로 셋이 떠들기도 했다. 

 

“단순히 말씀드리면 이해가 일치한 사람끼리의 계약관계죠.”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유빈은, 그를 아는 사원들이라면 깜짝 놀랄만큼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저 아이들. ”

 

“네?”

 

“저는 언제 어디서나 저런 아이들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미지의 공포에 떨기보다 사소한 일로 가득한 내일을 기대할 수 있기를. 사람들이 매일의 참혹한 생존을 걱정하기보다는 지루한 일상을 마치고 가족에게 돌아가 평안히 삶을 이어갈 수 있기를. 그게 쭉 나유빈이 품어온 소망이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세계가, 그 세계의 자신이 실패해 왔을 일이었다. 때문에 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져다 써야 했다. 그들이 세운 계획의 끝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혹여라도 그런 미래에 도달할 수 있다면. 더 많이 구하기 위해서 피를 얼마를 흘리더라도 밟고 지나가야만 했다.


“우리는 좋은 세상에서 자라지 못했죠.”

 

젊은 시절과 달리 나유빈은 냉소적이었다. 시시각각 찾아오고 있는 거대한 종말로부터 모두를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몸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그렇기에, '준비 과정'에서 필요한 희생들은 얼마가 되었든 짊어져야만 했다. 그렇게 각오했다.

 

헛된 이상이 죽어간 병실에서, 꿈이 깨어진 소년과 계속해서 실패해왔던 남자는 마지막 반격을 모의했다.

어리숙한 자신은 잃어버린 팔과 함께 그곳에 두고 왔다. 배신에 치를 떨며, 혹은 희망이 꺾여 떠나간 동료들을 붙잡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유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관리자가 전체적인 판을 짰다면 그는 세부적인 그림을 그렸다. 과거의 자신이 경멸했을 음모를 꾸몄다. 많은 죽음들을 방조했다. 필요한 인력을, 기술을, 자산을 한 줌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멈추지 않았다. 자신에게, 인류에게 주어진 기회는 앞으로 오직 한 번 뿐이었다. 치루어야 할 죗값은 외상으로 달아두었다.

 

“이 아이들이 자라날 미래는 달라야합니다. 그게 제가 함께 일하는 이유입니다.”

 

월급쟁이같지 않은 무거운 각오네요. 같은 농담을 건네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유빈의 말은 짧았지만, 품은 마음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어떤 각오를 품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비밀이 많은 관리자가 이 남자를 선택할 만한 이유일 것이다. 서윤은 가벼운 질투감을 느꼈다. 유미나에게 느끼는, 그녀의 독점욕과 열등감에서 비롯된 질투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관리자가 어깨를 맡긴 남자가 부러웠다. 


“감사해요. 말씀해 주셔서.”


“오늘따라 말이 길었습니다. 얘기는 이쯤 해두죠.”

 

도시락 통을 챙기며 나유빈이 먼저 일어서 아이들에게로 갔다. 서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는 가만히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아마 오늘이 아니었다면, 이 남자와 이런 이야기를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이가 참 좋아 보입니다. 서로 손을 꼭 잡고있네요.”

 

“이렇게 하면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아서요..”

 

“좋군요. 잠깐 놓치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짜 친구는 잠깐 잊어버릴 수 있어도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는 문득 다른 길을 가고있는 친구를 떠올렸다. 누구보다도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컴컴한 밤길을 걷고있는 이수연.

 

“한쪽이 잊어버리더라도, 다른 한쪽이 기억한다면.. 곧 다시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친구잖아요.”

 

너의 마음은 어떨까. 그때와 변했을까 수연아. 이젠 알 수도, 알 자격도 없었다. 그녀 또한 그와 관리자가 체스판 위에 풀어놓은 사나운 말이었다.


"자, 이렇게 싹싹 비워주시니 만든 사람으로서 아주 기쁩니다. 마지막 보물찾기도 힘내세요. 지켜보겠습니다." 


소녀들과 서윤에게 응원을 남긴 나유빈은 답지않게 팬시한 봉투에 도시락통을 챙겨넣고 떠났다. 서윤은 계속 손을 잡고 있던 소녀 중 하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느 순간 기억에 없어졌었던, 검은 머리칼에 활동적인 분위기를 가진 아이였다.  왜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오전 경기에서 많은 활약을 했던 꼬마였다.


“너, 첫번째 경기에서 꼬리를 많이 딴 꼬마구나.”


"어,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장애물 달리기에선 캔을 갖다놓기도 했었지? 참 이상하다. 기억이 안 났었네. 둘이 친한 친구야?”

 

“응! 아직 친해진지 얼마 안됐지만, 소중한 친구에요!”

 

아이는 밝게 웃었다. 금발 소녀도 부끄러운지 볼을 붉혔지만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그렇구나.”

 

소중한 친구. 서윤에게도 있었다. 정확히는 있었었다. 알트 소대. 함께 아픔을 나누고 의지하며 수라장을 같이 헤쳐온 가족들.

그들을 억지로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건 언제부터였더라? 내심 귀찮은 짐으로 여긴 건, 그러면서도 편리한 수족이자 언제든 쓸 수 있는 방패로 생각한 건?


한때는 자신에게도 순수한 감정이 분명히 있었다. 아마 서윤이 잃어버린 다른 것들처럼 그 끔찍했던 연구소, 혹은 다음 지옥을 지나오며 어느새 잊어버렸을 것이다. 

 

“응. 앞으로도 소중히 하면 좋겠다.”

 

자세히 듣지는 않았지만 아이들도 소원 구슬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언니도 소원 구슬이 필요하니까 쉽게 주지는 않을거지만, 힘내자?”

 

"어.. 네!"


"저, 스카이를 위해 꼭 이길거에요!"


계속 조용히 있던 금발 아이가 꽤 결연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검은 머리의 아이는 약간 놀란 표정이었지만 곧 환하게 웃었다.

조금 눈부셨다. 부숴버리고 싶었다. 절망으로 가득 찬 얼굴을 마음껏 비웃어 주고 싶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고개를 쳐든 시꺼먼 감정을 서윤은 애써 눌러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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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하고 타임라인은 살짝 바꿨음. 

이번 편은 쓰다보니 분량이 길어져서 두 편으로 나눠버림 오늘 더 쓸수있으면 써?봄?

끝내면 무지성으로다가 시원하게 때려부수는걸 써야겠다 처음엔 운동회편 뇌 빼놓고 가볍게 쓸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이까지왔노..

너무 시리어스하게만 가는거같아서 좀 그러네 아무튼 개추댓글 항상 꼬마어 카붕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