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통합 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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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나는 한 눈에 봐도 비싸보이는 찻잔을 들어 내용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꼴깍. 독특하고 청아한 향이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이 찻잎도 분명 고급일텐데. 얼마인진 몰라도 이 돈이면 국밥이 몇 그릇이냐. 참나.

이제부터 시작할 업무 이야기는 어차피 그녀가 나설 영역이 아니었으니 적당히 한 귀로 흘리면 될 일이었다. 


방 여기저기를 뜯어보던 유미나는 뒤에 시립한 여검사와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길쭉한 장도를 등쪽으로 가게 패용하고 있었다. 

웃는 상에 부드러운 분위기인 당주와는 정반대로 그녀는 차가운 인상이었다. 외모는 꽤 흡사했지만 더 성숙했다. 

머리를 푼 치나츠와는 달리 단정하게 묶어 정리한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머리 장식이었다.

그럼 동생, 혹은 언니일까. 짐작으로는 아마 언니일 것 같았다.

부드럽게 웃은 그녀가 먼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유미나도 엉겁결에 똑같이 답례했다.


무뚝뚝해 보였는데. 생각이 틀렸던 걸까.


인사를 마친 그녀는 시선을 장지문으로 돌렸다. 유미나는 조금 더 그녀를 뜯어보았다. 이유없이 계속 관심이 갔다. 

음. 당주 호위라면 검을 잘 쓰겠지. 미녀 사무라이라. 꽤 멋진데 그거. 생각이 의식의 흐름을 타기 시작할 때였다.


"이름높은 수호 가문에서 왜 외부인인 우리를 불러들였는지 알려줄 시간인 것 같은데."


품위있게 찻잔을 내려놓은 로자리아가 먼저 운을 떼었다.


"물론 말씀드려야죠. 하지만 그 전에...어. 인솔자분을 어떻게 불러드리면 좋을까요?"


"그냥 소대장으로 좋다."


"네. 소대장님." 


"이쪽의 말하는 방식은 상관없는 것일까? 나나하라 당주."


"편하신대로 말씀하셔도 좋아요. 소대장님. 다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우선 비밀을 꼭 함구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셔야 해요."


"서약이라도 해야 하나?"


"아뇨. 구두 약속이면 충분합니다. 여러분을 소개해주신 은사님은 오래전부터 저희 가문에게 과분한 은혜를 베푸신 분이니, 충분히 신뢰할만한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게도 당주로서의 입장이 있으니 부탁드리는 거랍니다."


로자리아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과분한 은혜'라니, 누구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또 연줄을 만들어 두었나.

여러모로 발이 넓은 사내였다. 또 '오래된 목소리'같은 이상한 이름을 대면서 손을 뻗어놨을 것이 뻔했다.


"좋아. 약속하지. 여기서 들은 내용은 발설하지 않겠다."


"감사해요. 그럼 말씀드릴게요. 단도직입적으로, 저희는 공격받고 있습니다. 비공식적인 조사가 필요해요."


"공격? 황도의 입구를 수호하는 대가문을 누가?"


"물론 사람은 아니랍니다. 확실치는 않으나 꽤 고등급으로 추정되는 그림자입니다."


"그림자가 특정 가문의 사람만 골라서 공격한다? 그것도 이면세계에서? 들어본 바 없는 일인데."


"저희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같은 작전에 참여한 세력 중 저희 가문쪽만 사상자가 나오는 일이 반복된다면, 의심해 봐야 하는게 당연하겠죠? 덧붙이자면, 이면세계가 아니랍니다. 현실에서 공격당하고 있어요."


로자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력으로 현실에 침식과 퇴거를 수행할 수 있는 그림자라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4종이다.

정보가 더 필요했다. 나나하라 가문을 특정해서 공격하고 있다면, 고르디우스 전대 출신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최고 간부급이 그림자화했다면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5급까지도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아직 불확실한 것이 너무 많았다.


"그림자라는 근거는?"


"교전기록을 통해 유추했답니다. 영상은 남아있지 않지만, 침식체 경보를 받고 출동한 카운터들이 교신이 두절 되기 전에 보고했던 내용에 모두 그림자 타입 침식체가 등장해요."


"교신 두절? 이미 꽤 당했다는 얘기인가?"


"분가쪽에서 총 세 팀 열 다섯명이 당했답니다. 피해가 상상 이상으로 커지고 있어서 여러분을 모시자는 의견에 가문 총회에서도 반대가 생각보다 적었어요."


카운터는 물리적인 공격에 쉽게 죽지 않는다. 오죽하면 교통사고로 죽는 카운터는 절대 없다는 말이 나왔을까. 

그들을 죽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같은 카운터, 혹은 침식체였다. 

사실 침식체라도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개체는 지성이 없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움직이는 태스크포스 쪽이 유리한 게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카운터 중 비전투인력으로 평가받는 D급이라 해도 교전 중 사망하는 일반인과의 비율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런데 열 다섯이라. 일본 굴지의 수호 가문 연합 소속이니 최소 C급 이상의 카운터였을 것인데. 분명 적지 않은 숫자였다.  


"흠. 맡을 임무는 격퇴인가? 우리는 고작 셋이다. 현실 침식이 가능한 그림자라면 수행하기 어려운 임무인데."


로자리아 자신은 클리포트 장비는 챙겨오지 않았으나 리플레이서 퀸 정도의 특수 개체가 아닌 이상 싸우기엔 충분했다.

주시윤도 단독으로도 3급은 쉽게 떄려잡고 4급과도 교전이 가능한 즉전력이었다. 

거기다 만약 필요하다면 유미나의 장비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니 사실 전력을 낸다면 충분히 섬멸까지도 해볼 수 있었다.


마왕 봉인의 한 축을 맡는 나나하라 가문과는 긴히 협력해야 하니 그들에게 곤란한 일을 해결해 빚을 지워두는 것도 좋았다.

그래도 패를 아직 전부 보여줄 것까지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 어린 당주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아직 미지의 영역이었다.

힐끗. 로자리아는 가만히 대화를 듣고있는 사나에를 흘겨보았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흐응. 아직이란 말이지. 흥미롭구나.


"알고 있답니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지요. 그러니 일단은 정체 파악이 우선이랍니다."


"정예 인력이나 군대를 동원하면 될 일인데 격퇴보다 굳이 정체를 먼저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


"지금부터 보여드리겠어요. 사나에, 부탁할게요."


사나에가 몇 장의 사진을 건넸다. 후속처리를 위해 출동했던 가문 사람들이 회수한 시신들의 사진이었다.

치명상을 입힌 상처들에는 공통적으로 전부 명백한, 무기를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녀도 몇 번 본, 아는 검술이었다. 


"검상이군."


"조사를 가문 내부인이 아닌 외부인에게 부탁드리는 이유이며, 은밀하게 일이 진행되어야 하는 이유랍니다."


지금까지 시원하게 말해왔던 치나츠가 처음으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가늘고 예쁜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몇 번 매만졌다. 막상 입을 떼기가 곤란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방향 없이 갈팡질팡하던 눈이 조용히 시립한 여검사에게 닿았다. 말 없이 눈빛이 교차했다. 

이윽고 치나츠는 결심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서글프게 웃은 그녀는, 덤덤하게 가문의 치부를 드러냈다.


"이 상처들은 전부, 나나하라류 고검법이 만든 것이에요."


추측이 현실이 되었다. 가문을 공격하는 것은 고르디우스의 망령이었다.


쿵쿵. 장지문 너머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제지할 시간도 없이 한 인물이 방으로 들어왔다. 오는 길에 마주쳤던 사내였다.


"당주. 납니다. 말씀... 잠깐. 외부인은 물려 주시지요. 전할 내용이 있습니다."


"가져오신 소식이 제 짐작대로라면, 이제 이 분들도 들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남자는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하. 당주의 생각이 어떠하든, 이들이 있다면 나는 말하지 않을거요. 나중에 직접 일러바치시던지."


두 사람의 시선이 날카롭게 부딪혔다. 먼저 눈을 피한 건 치나츠 쪽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펜릴 소대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나중에 마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아요. 사나에, 손님들을 모셔요. 객실을 부탁할게요."


"예. 당주. 손님 여러분,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방 안의 분위기는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었다. 입이 근질거린다는 표정의 로자리아를 주시윤이 다급히 잡아끌었다. 

문이 닫히기 전, 유미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여검사가 치나츠와 대화를 나누는 남자를 차갑게 쏘아보고 있었다.


* *


안내받은 손님용 방도 굉장히 넓었다. 장지문 하나로 남자와 여자가 머물 공간이 구분 되어 있었지만 나눠놓고 보아도 코핀 컴퍼니 사장실보다도 컸다. 


사나에는 식사를 준비하겠다며 자리를 비웠고, 주시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다미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완전히 퍼진 로자리아에게 솔직하게 진심을 꺼냈다.


"스승님. 그냥 돌아가면 안 될까요."


"이미 위쪽에서 계약이 오간 일이다. 거기다 약식이지만 비밀 서약도 했지. 땡깡부리지 말거라."


"저도 진심인데요. 냄새가 나요. 귀찮은 일 정도면 다행입니다."


"주시윤."


"현실에 침식하는 그림자는 흔하지 않습니다. 거기다 칼만 썼다는 건 초상 능력도 드러나지 않았다는거니 만만치 않은 상대죠. 다 아시는 내용이겠죠. 스승님?"


"답잖게 혓바닥이 길구나. 겁먹었느냐?"


"이 가문, 겉은 거대 수호가문이니 뭐니 할지 몰라도 속은 개판일 겁니다. 보셨다시피 공공연하게 당주에게 무례하게 말을 꺼내는 사람이 있어요. 아까 그 남자 말고도 불만을 품은 사람이 아마 더 있겠죠. 우린 여기서 불청객입니다."


"어떻게 말해도 돌아갈 수 없다."


"하. 결정하신 겁니까?"


"그래. 싫다면 여기 짱박혀 있어도 상관없느니라. 맹랑이만 데리고 나갈 수 밖에."


"정말 그래도 될까요?"


"농담을 진담처럼 받아들이는구나. 진짜 쥐어터질때가 된 것 같은데."


주시윤이 걱정하는 바는 모두 옳았지만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당주가 비밀을 전달받지 못했다는 정황이 명백했지만, 그래도 나나하라 가문이 맡은 역할은 중요했다.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가문 안이 흔들리고 있는 사실은 의외였다. 하긴, 당주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으니까. 정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로자리아에게 그쪽은 우선순위가 높지 않았다. 예상되는 적은 그녀와 관리자, 나유빈의 계획에 명백한 위험 요소임이 분명했다. 


그림자,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자의 목적은 뱀의 봉인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했다.


이 모든것을 주시윤과 유미나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둘에게 설명하기엔 아직 일렀다. 단순한 회사 업무로 이해해 주는 것이 좋았다. 어차피 주시윤은 눈치가 빨랐으니 내막을 자기 나름대로 짐작해보고 있을 터였다. 지금은 그저 이해해주길 바라는 수 밖에.

로자리아는 특별한 불만을 꺼내지 않는 유미나를 바라보았다.


"맹랑아. 너는 상관없느냐?"


"나? 나는.. 그러니까, 일단 사장님이나 부사장님이 결정한 거잖아? 거기다 소대장도 하자고 하고.. 그럼 해야지 뭐. 위험하면 소대장이 나서줄거고, 일이 빡세면 돌아갔을 때 보너스라도 주시지 않을까?"


"태평하게도 말씀하시네요. 미나 양."


"맹랑이도 이렇게 말하지 않느냐. 거기다 의뢰주도 일단은 격퇴까지는 바라지않는다고 말하고 있고 말이다. 응? 응? 어떠냐?"


"저 심각하거든요. 조르듯이 말씀하지 마시죠."


"요즘 너무 날로먹지 않았더냐? 일할 시간이란 말이다. 으응?"


다시 두 사람 간에 대화가 오가는 동안 유미나는 당주와 함께 있었던 여성을 떠올렸다. 사실 이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계속 그녀가 생각났다.

왜일까. 이미지는 분명 달랐지만 그녀에게서는 어렴풋이 예전의 자신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녀를 다시 만나보고 싶었다. 말을 나눠보고 싶었다.


"나으리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문을 열지 않은 채 사나에가 기별을 전하자, 로자리아가 짐짓 신이 난 목소리를 냈다.


"자, 먹고 이야기하자. 쿄는 또 정찬으로 유명하지. 옆 동네긴 하지만 여기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기대되지 않느냐?"


"뭐? 난 완전 찬성. 더 달라면 주실까?"


"빈티는 그만 내라고 말했지 않았더냐. 그리고 애초에 컵라면이 딱인 네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구나?"


"말 겁나 심하게 하는거 알아, 소대장? 댁도 과자 원툴이면서 왜 자꾸 이래?"


"나는 기호식품과 미식의 영역이 확실하단다. 맹랑아."


"...하. 알겠습니다."


구미가 당겼는지 로자리아의 분위기에 유미나도 올라탔다. 

주시윤은 두 사람 다 한껏 신이 난 것을 보니 더 이야기를 꺼낼 기분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이야기를 정리해두어야 했다. 그는 이 땅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땅 밑에서 계속,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났다. 그는 이게 소름끼치게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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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있을때 무지성으로 한편 더 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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