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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시 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나유빈은 오늘도 자발적 야근 중이었다.

코핀 컴퍼니의 부사장실은 아니었다. 더 깊은 곳, 회사에서는 나유빈과 로자리아만 존재를 아는 시크릿 룸이었다.

빼곡히 들어선 모니터들이 세계 각지에서 받아온 저마다의 정보를 표시하는 비밀 작전실. 여기에 그는 관리자와 함께 있었다.


"시윤 군으로부터 정시 연락입니다. 관리자님.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임무가 차질없이 수행되길 빌어야겠군. 나나하라의 봉인은 인류 존속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니까."


"그러면 전력을 더 투입하시지 그랬나요?"


펜릴 소대의 전력은 드러난 것보다는 훨씬 강했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유미나가 클리포트 인자를 각성했다고 해도 그 힘은 함부로 휘두를 수 없었다. 

관리자는 나유빈의 질책어린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알트 소대는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네. 에디 소대는 한국에 머물러야 하고. 자네도 알지 않나?"


"델타 세븐을 움직이는 방법도 있는데요."


"마리아 장군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줄 필요는 없어. 거기다 뭐라고 그녀를 설득할텐가?"


클리포트 게임과 마왕, 고위 침식체들에 관련된 정보들은 아직 알려질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지금의 사건은 그림자형 침식체가 수호가문을 공격하고 있어서 격퇴했다 정도로. 태스크포스 차원에서 처리되어야 했다.


"심각한 상황까지는 아닐세. 식별되는 적도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이야."


"관리자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상관없지만, 시윤 군과 미나 양에게 정보가 공개될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로자리아가 알아서 통제해주길 바래야겠지. 나나하라 가문에도 언질은 주었네. 마침 좋은 핑계거리도 있지 않나. 그들이 잡아둔 건 클리포트의 마왕만이 아니니까."


나유빈은 신적인 존재를 믿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불러도 무리가 없는 클리포트의 마왕이 실존하고 있으니, 이 별에도 그런 존재가 있을법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나하라 가문은 애초에 클리포트의 마왕을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까마득히 오래 전 문명의 태동기. 일본이 야마토였던 시절부터 오직 어떤 것의 봉인만을 위해 존속해 왔던 가문이었다.

어떤 연유로 그들이 숙업을 맡게 되었는지는 관리자조차 알지 못한다. 


단지, 말도 안되는 우연의 일치로 기존의 봉인체에게 깃든 마왕까지 싸잡아 가둬두게 되었을 뿐. 

멀쩡한 봉인에 새로운 것이 섞여들더니 미지의 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구 관리국과의 협조도 그런 연유로 벌어진 것이었다. 

봉인전대 고르디우스는 관리국의 기술 외에도 카운터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마법'이라고 불러도 될만한 결계술을 사용했던 포위전술의 대가였다.

나나하라 가문의 최심부는 자신들을 이렇게 불렀다.


앞으로도 영원히 비밀을 지켜갈 만세봉인의 수호자.


웃기는 일이었다. 수억명이 제각각 부르짖는 그 신은 어디에도 없는데. 인류를 집어삼킬 수 있는 악귀는 버젓이 살아서 갇혀있다니.

그는 입안으로 생소한 이름을 되뇌였다. 야마타노 오로치. 머리와 꼬리가 여덟 달린 큰 뱀.

클리포트의 마왕조차도 온전히 집어삼키지 못한, 고대 일본의 산야를 깎아내어 수없이 많은 하천을 만든 태고의 괴수.


"저로서는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만...정말 확실한가요?"


"나도 직접 본 건 딱 한 번 뿐일세. 하지만 실존하지."


관리자는 피곤한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나유빈은 지극히 합당한 의문을 떠올렸다. 이 남자는 과연 잠은 제 때 잘까. 

좀 쉬는게 어떠냐고 말해봐야 소용없었다. 자신도 필요 이상 과로하고 있었으니 다를 바도 없었고. 

그들의 계획을 위해 준비되어야 할 일이 아직 많았다.


"웃기는 일이지 않나. 확률로 따지면 몇억분의 일도 우습게 넘을 일이야. 클리포트의 마왕들이 현실에 머물 실체를 가지지 못했기에 일어난 우연이지. '큰 뱀'이란 개념이 겹쳤다는 것 하나만으로 존재조차 확실치 않았던 것에 침식될 수 있다니."


"그렇기에 생각할수록 위험도 높은 임무입니다."


"나나하라가 숨겨둔 힘은 강고하네. 고르디우스 전대를 기억한다면 자네도 알겠지."


"그 고르디우스 전대는 이미 전멸했습니다. 관리자 님."


"의미없이 사라지지는 않았네. 다행히도 큰 뱀의 수하들은 다른 마왕들과 다르게 수가 많지 않아. 주인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고르디우스가 입힌 타격은 여전히 유효할걸세. "


"일단은 수시로 보고받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저도 나서야겠죠."


로자리아와 주시윤 양쪽으로부터 보고받은 내용을 취합해 볼 때 펜릴 소대의 전력만으로도 해결하기 충분했다. 

그래도 만일의 사태는 항상 대비되어야 했다. 일이 잘못된다면 신화 속의 악귀와 클리포트의 마왕이 혼재된 괴물이 풀려날 수 있었다.

그의 염려를 관리자도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음.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이외에도 신경쓰이는 점은 하나 더 있었다. 나유빈은 이 정보를 전달해야 할 지 잠시 고민했다. 말해 두는 편이 좋겠지.


"관리자님. 아직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수연이가 일본에서 관측되었습니다."


"이수연이? 흠. 어째서일까. 육익이 끼어들 판은 아닌데."


관리자와 나유빈은 의도적으로 이수연에게 정보를 흘린 적이 많았으나 이번 건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관심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생각나는 것이라면... 음. 시윤 군에게 관심이 많아 보이던데요."


"추적해서 알려주게. 이수연이 일본에 있는게 확실하다면 경우에 따라서 로자리아의 테크 레벨 5 장비도 정비가 필요하겠군. 추가 보급을 생각해야 할 수도 있으니."


"준비해 두겠습니다."


* *


저녁식사는 정갈했지만 한편으로 호화스러웠다. 

가이세키 요리라고 하던가. 먹성이 좋은 유미나도 차림상에 압도되어 모양새를 감상하고 음미하면서 먹은 시간이었다.

맛은, 주시윤의 기준으로는 조금 심심했다고 해 두겠다.

평소의 나태한 모습으로 돌아와 드러누운 스승을 그는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건방지구나. 눈 깔거라."


"어디서나 참 한결같은 분이시네요. 존경스럽습니다. 스승님."


"너도 눕고 싶지 않느냐? 이 다다미라는 것이 생각보다 꽤나 안락하구나."


"아직 생각 없습니다."


"흥. 그만 무게잡거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스승이 앙탈까지 부려줬는데 말이다."


"한국에서도 자주 그러셨 "그보다 주시윤. 올해가 몇 년이지." ..2045년이죠."


로자리아는 작은 손으로 다다미를 쾅쾅 내리치며 진심을 담아 분통을 터트렸다.


"근데 왜 TV가 없느냐 이 집은? 어? 거기다 와이파이도 안 터지지 않느냐! x플x스도 못 본다! 이게 말이나 되냐고! 일본 드라마에도 흥미가 있었단 말이다! 빼액!"


"돌겠네요. 진짜로."


"씻고 옷이나 갈아입는게 어때, 선배. 여기 욕실도 장난 아니더라."


박시한 후드티와 트레이닝복 바지로 갈아입은 유미나가 로자리아의 옆에 자연스럽게 드러누웠다.

나나하라 가문에서 준비해 준 의복들은 의외로 기모노가 아니었다. 

하긴, 전통 문화 체험을 나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외국인들이 입기엔 불편할 거라는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계속 오늘처럼 밥이 나올까, 소대장? 난 그냥 양 많은게 좋은데. 모양은 이쁜데 아쉽더라."


"네 머릿속에는 미식이란 요소가 없느냐? 이럴 때 먹어두거라. 앞으로 죽을 때까지 못 받아볼 상차림일테니까."


"말 참 이쁘게 하네 요 꼬맹이가."


"못 들은 걸로 해주마. 그보다 맹랑아. 내일은 감자칩이나 좀 달라고 해라. 일본 감자칩은 종류가 어마어마 하다고 들었다."


"귀찮게 왜 시키고 그래. 직접 말하면 되잖아?"


"소대장으로서 체통이 있지 않겠느냐?"


"땅꼬마 주제에 무...악! 야! 너 지금 때렸어? "니가 먼저 두 번 말하지 않았느냐! 건방진 것!" 서봐! 딱 서봐!"


완전히 풀어져버린 두 사람을 주시윤은 방 한 구석에 기대서 바라보았다.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져 있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본래 그는 낙천적인데다 일이라면 전부 미뤄두고 보는 성격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러기 힘들었다. 

왠지 마음이 동하질 않았다. 계속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 것도 맘에 걸렸다. 

로자리아는 절대 마음을 꺾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큼이나 일하기 귀찮아하는 스승은 때로는 칼같이 행동했다. 그럴 때면 항상 이유가 있었다. 그러므로, 단순한 그림자 퇴치가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내막이 더 있음이 확실했다. 

장지문 너머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뒤엉켜서 머리를 쥐어뜯는 유미나와 로자리아를 보고 깊게 한숨을 쉰 주시윤은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신지?"


"나으리들. 사나에이옵니다. 송구하오나, 당주께서 아까 마무리 짓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나누자고 말씀하셨기에. 시간 괜찮으신지요?"


대답하기 앞서 주시윤은 로자리아를 보았다. 유미나의 위에 올라타 조막만한 손으로 폭력적인 가슴을 내려치고 있던 로자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엉망으로 쥐어터지던 유미나가 억울한지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무슨 꼬맹이가 이렇게 힘이 세냐.."


"흐흥. 가소롭구나. 좋다. 안될 것 뭐 있겠느냐?"


"그럼 이쪽으로. 정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시윤. 맹랑이를 데리고 먼저 가거라. 난 여가시간 보장을 위해 사나에와 할 말이 있으니."


"적당히 하세요. 스승님."


흐트러진 옷을 정돈한 로자리아는 팔짱을 끼고 섰다. 사나에는 방 안으로 들어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인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충분히 기다렸다. 로자리아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드디어 단 둘이군. 일 얘기를 해볼까."


"나으리는 전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고르디우스의 애송아."


"....기억해주시니 영광이옵니다."


"너희는 전멸했다고 들었다만."


"관리 실패 당시 남았던 비전투원을 제외하면 제가 유일하옵니다."


"흐음. 카미이즈미는 살아있느냐?"


"온전한 상태는 아닙니다. 하지만 핵심 억제 모듈은 아직 가동되고 있나이다."


듣던 중 다행이었다. 관리자는 이 정보를 알고 있었을까. 로자리아는 속으로 웃었다. 

언제나 사람들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다 알면서 모르는 척을 떠는 그 남자였다. 다 아니까 자신들을 여기로 보넀을 것이다.


"당주는 어디까지 알고 있고?"


"마왕과 관련된 정보는 일부만 알고 계십니다. 다는 말씀드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녀가 나나하라의 당주인데도?"


"그렇기 때문이지요. 당주께서는 신경쓰셔야 할 일이 많습니다. 총의에 따라 당주로 추대되셨지만 아직 가문 내의 위치가 굳건하지 않습니다."


"집안의 정치 싸움 때문에 미뤄두었다고?"


"어차피 뱀의 봉인을 수호해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사옵니다. 당주께선 가문의 숙업에 대해는 익히 알고 계시나이다. 나으리."


"우리가 하는 일이 애들 장난이 아니란 건 너도 잘 알텐데."


"사무치게 알고있사옵니다. 그저 시간이 필요할 뿐임을 알아주시지요."


"흥. 내가 알아야 할 내용이 더 있나? 상대해야 할 적은 누구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확실하지 않사옵니다."


"거짓말. 네가 짐작하고 있는 것은 있겠지."


"......."


"고르디우스에 칼을 쓰는 카운터는 많지 않았다. 부전대장이냐?"


"나으리. 저는 모르옵니다."


로자리아는 물끄러미 사나에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캐묻는다고 대답할 것 같지도 않았다. 

과거를 떠올렸다. 기억 속의 사나에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지도 못하는 여린 여성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많이 달랐다. 베테랑 전대원들 뒤에 숨기 바빴던 숙맥은 이제 없었다. 


많이 컸구나. 애송아.


"그렇단 말이지. 알겠다. 가지."


"예. 나으리."


"아."


먼저 방을 나선 로자리아는 중요한 것이 떠오른 듯 잠시 멈춰섰다. 

교환하지 않은 정보가 있었던가. 의문을 품은 사나에도 따라 멈췄다.

이십년이 넘게 지났지만 전혀 늙지 않은 소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티비 좀 갖다 주면 좋겠는데. 채널 많이 나오는 걸로."


"...준비하겠사옵니다."


* *


"와. 멋있는데."


사나에가 알려준 길대로 천천히 걸은 주시윤과 유미나는 낮에 보지 못했던 저택의 뒷편으로 나오게 되었다.

달이 휘영청 밝게 비추는 정원은 구역을 정해 나눠 심었는지 관상용 식물들이 보기 좋게 꾸며져 있었다.

정원 한 구석, 큼지막한 나무 아래에서 나나하라 치나츠가 기다리고 있었다. 낮과는 다른 복장이었다. 

산들바람을 형상화한 무늬가 들어간 연녹색 후리소데를 걸친 그녀는 달빛을 받자 동화 속의 요정같이 아름다웠다. 여검사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만 산책로를 따라 걸어오자 치나츠는 작은 머리를 갸웃했다.


"소대장님께서는 같이 오지 않으셨나요?"


"조금 늦게 오실 것 같습니다. 그보다 하실 말씀이라는게?"


앞서 걷던 주시윤이 묻자 치나츠는 장난스럽게 혀를 빼꼼 내밀었다. 이 모습 역시 낮과는 달랐다. 훨씬 친근했다.


"사실 아까 있었던 일을 사과드리고 싶었답니다. 조금 편한 자리에서 얘기하고 싶기도 했구요. 정원은 저희 가문의 자랑거리거든요. 민폐였을까요?"


"아닙니다. 좋은 구경 하네요."


"난 이런건 잘 모르는데. 진짜 멋지다고 생각해."


"감사합니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원래 그런 분이 아니신데... 이번에 휘하 무사들을 많이 잃으셨거든요. 직접 복수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셔요."


"괜찮습니다. 집안사람끼리 일에 저희같은 출장 회사원들이 불편할 일은 아니죠."


주시윤이 넉살좋게 대답했다.

그보다 진짜 무사라고 부르는 거냐. 통역기를 거쳤으니까 사무라이겠네. 장난 아니다. 유미나는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치나츠는 잠시 두 사람의 얼굴을 뜯어보고는 싱긋 웃었다.


"잠시 걷는 건 어떠세요? 남자 분."


"예? 저만요?"


"이야. 뭐야뭐야. 다녀 와 선배. 난 구경이나 좀 할게."


"아니, 잠시만요?"


"가요. 밤에만 피는 꽃도 있답니다?"


장난스럽게 웃은 치나츠는 주시윤의 소매를 잡아끌고 산책로에 들어섰다. 

주시윤은 이상하리만치 쉽게 자신을 보내준 유미나에 대한 당혹감과 갑자기 들이대는 치나츠에 대한 의문으로 속내가 복잡했다. 

앞서 걷는 치나츠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말을 꺼냈다.


"성함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주시윤입니다. 시윤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좋은 울림이네요. 시윤 님은 여기가 맘에 들지 않으시죠?"


아주 잠깐, 그는 생각을 멈추었다.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해? 내가 얼굴에 드러낸 적이 있었던가?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일어났다.


"아뇨?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제게는 보이니까 숨기실 필요 없답니다."


무슨 의미지. 멈춰선 그의 뒤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들이 산들산들 흔들렸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치나츠는 부드러운 밤바람처럼 말을 이었다.


"코핀 컴퍼니 직원분들을 초대한 건 은사님의 추천때문만은 아니랍니다. 제 가문에, 핏줄에 전해져 내려오는 능력이 있죠."


치나츠도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렴풋한 이미지 뿐이지만 미래의 형상이 보여요.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여러분들을 모신 미래가 가장 밝았답니다."


그녀는 꽃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옆모습만 볼 수 있었지만 주시윤은 치나츠가 미소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부 알 수는 없어도 시윤님의 불안도 조금은 보인답니다. 오늘 처음 뵈었지만 저를 믿어주세요. 당신이 걱정할만한 두려운 음모도, 결말도 이곳에 없을거에요."


그녀는 꽃 하나를 따 시윤에게 내밀었다. 이름을 모르는 꽃이지만 아름다웠다.

이야기가 진짜일까?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돌처럼 굳어진 그를 잠시 바라본 치나츠는 아쉬운 듯 가볍게 웃고는 손을 되돌렸다.


"받아들이시기 힘든 얘기죠. 이해한답니다. 악의로 여러분들을 불러들인 게 아니란 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의심과 불안이 소용돌이쳤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치나츠는 다시 산책로를 앞서 걸어갔다. 시윤도 따라 걸었다. 그녀는 꽃과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주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산책을 나선 두 사람이 사라지자, 유미나는 어물쩍 여검사쪽으로 다가갔다. 


"안녕."


"반갑습니다. 손님. 좋은 밤이지요."


"어, 응. 난 유미나. 그쪽은?"


"유미나 공이시군요. 저는 나나하라 치후유입니다. 편하게 치후유라 부르셔도 좋습니다."


"음, 그럼 난 그냥 미나라고 불러 줘. 저기, 당주와는 가족이야?"


"언니입니다."


언니였냐.


"의외네, 난 치후유가 언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언니쪽이 훨씬 어른답지요. 저는 겉모습만 이럴 뿐. 아직 미숙합니다."


대화는 여기서 뚝 끊겼다. 어, 뭐라고 해야 하냐. 유미나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본래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그녀였으나 치후유에게는 자꾸 관심이 갔다. 

그녀는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을 꺼냈다.


"치후유는 학생이야?"


"아뇨. 저는 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미나 공."


"어, 부모님들이 싫어하셨을 것 같은데?"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도 병환으로 따라가셨죠. 저희 자매는 전대 당주님인 작은 숙부 님 밑에서 자랐습니다." 


갑자기 입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렇게 무거운 얘기가 갑자기 나올 줄은 몰랐는데. 지뢰였냐고.


"미안. 너무 생각없이 물어봤지."


"괜찮습니다. 아버님은 전전대 당주셨던 큰아버님과 함께 대정화전쟁에서 용감히 싸우셨다고 전해들었습니다. 슬픈 것은 아니지만.. 가문의 이름에 걸맞는 무사셨으니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


"...그럼. 언니 쪽도?"


"마찬가지죠. 언니는 저보다 더 일찍부터 그랬습니다. 어려서부터 가문의 만장일치를 받아 후계자로 키워졌으니까요."


아무래도 화제를 잘못 선택한 것 같았다. 회사 동료였던 서윤이 항상 자신에게 퍼부었던 핀잔이 떠올랐다. 

넌 진짜 자각없이 사람 기분 나쁘게 할 때가 많다니까. 유미나. 

틀린 말이 아니긴 했다. 그녀에겐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게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또 실수했는지도 모른다.


"좀 무겁네. 나, 주변에서 배려가 부족하단 얘기를 많이 듣거든. 기분 상했으면 미안해."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미나 공. 언니의 마음은 모르지만, 저는 직접 선택했습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그래ㄷ..."


"어머, 치후유. 손님분과 친해졌나요?"


어느새 돌아온 치나츠가 끼어들었다. 조금 뒤에서 따라온 주시윤은 그답지 않게 생각에 잠긴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뭔 일이 있었던 거야. 두 사람.


"유미나야. 미나라고 불러 줘."


"잘 부탁드릴게요. 미나 양. 치후유가 딱딱해서 재미 없으셨죠?"


"언니. 곤란합니다."


치나츠는 장난스럽게 다시 웃었다.


"내일부터 잘 부탁드려요. 가문을 일원을 해친 그림자의 원형이 누구인지 꼭 알아야 연합 전체의 이름으로 단죄할 수 있으니까요."


"어. 응. 맡겨줘. 우리 소대장은 보기엔 그래도 유능하니까 기대해도 될 거야."


"반가운 이야기네요."


"혹시 직접 나서고 싶지는 않아?"


왜였을까. 그저 순수히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는 곧장 후회했다.


"미안. 말실수였네."


"사과하실 일은 아니랍니다. 저는 당주니까요. 여기서 그저 기다리기만 해야죠."


밤의 태양처럼 화사했던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나지막히 목소리를 냈다.


"아주. 아주 분하답니다. 가만히 앉아서 제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건."


"언니."


치후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어깨를 감싼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갠 치나츠는 살포시 웃었다.


"먼저 들어가 볼게요. 내일은 아침에 사나에를 통해 의심되는 포인트를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멀어지는 자매를 눈으로만 배웅했다.

밤의 나나하라 치나츠는 낮의 의젓한 모습과는 달랐다. 

잠시 드러난 모습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마치 갇혀있는 나비같다. 유미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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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 이 편에서 끊으려다보니 약간?많이? 글이 길어졌?습니다? 둘로 나눌까했는데 끊기가 애매하더라구

치나츠 미래 예측 비스무리한 능력이 있는거같은데 캐릭소개에 딱 한 줄 적어놓고 말았더라

나나하라는 설정이 너무 없어서 창작요소가 많으니 적당히 감안하고 봐 줘

보기 괜찮으면 이 정도 길이로 쭉 쓰고 싶긴 한데 어떤지 알려주면 좋겠워? 읽기 힘들면 자를 수 있게 써보던지 해볼게

항상 개추댓글 꼬맙워 카붕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