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통합 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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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디우스 전대의 기함인 카미이즈미 안은 붉은 조명과 경고음으로 가득했다. 

함교가 피격되어 함내 통신에선 오퍼레이터들의 처절한 비명들이 연신 터져나왔다.

쿵. 해치를 가까스로 열어젖힌 가면의 남자는 간헐적으로 피를 토해내는 남자를 질질 끌고 들어와 바닥에 눕혔다.

이미 곳곳에서 헐떡이는 부상병들이 즐비했다. 살아남은 대원들도 절망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역포위에 당한 전대는 사방에서 십자포화를 얻어맞고 있었다. 다행히 기함은 아직 무사했으나, 전멸은 기정 사실이었다.


관리국 통합 채널도 상황은 비슷했다. 

펜릴은 행방조차 알 수 없었고, 메이즈는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고립되어 있었다. 카멜롯은 기함이 중파되었다는 통신이 마지막이었다.

다른 전대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작전은 실패였다. 인류는 완전히 패배했다. 


가면의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함교의 상황도 불명확했다. 그래도 아직 탈출 프로토콜이 동작할 수 있다. 적어도 나나하라 가문의 당주는 살려야만 했다.


"당주, 정신 차리십시오 당주! 의무병! 의무병은 어디 있나!"


"커흑. 흡. 학..."


당주는 고개를 숙여 시꺼먼 피를 왈칵 토해냈다. 남자의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형님. 어떻게든 이 포위만 뚫으면..."


"카학!....아니. 되었다. 폐까지 뱀독이 들어왔다. 나는 틀렸다."


피를 한번 더 게워낸 당주는 다급히 의무병을 찾는 남자의 목소리를 끊어냈다. 어딘가 결심한, 단호한 눈빛이었다. 


"잘 들어라. 카즈하. 나는 곧 죽는다. 그러면, 시체조차 남아선 안 된다."


가면의 남자는 순간 들고 있던 무기를 놓칠 정도로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형님? 그게 무슨..."


당주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져 갔다. 이미 삶을 포기한 그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그림자로 되살아날 경우 봉인의 위치가 노출된다. 그런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다."


"하지만, 하지만 다른 방법이....."


"아니. 그런 건 없다. 동생아."


"그래도, 혹시라도 탈출한다면 시신만이라도 가문으로..."


"큰 뱀이 추격해온다면? 불확실한 희망에 가문과 인류의 명운을 걸 수 없다."


가면의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방법이, 제발 다른 방법이 있기를. 

사고가 맹렬히 회전했다. 탈출은 당장 불가능했다. 모든 답은 절망적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전대원 하나가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울음이 퍼지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떤 이는 가슴을 쳤고, 어떤 이는 벽에 주먹을 찧었다. 


"...참으로 가혹하십니다. 형님."


"용서해다오. 우리의 모든 것은, 평안과 안녕을 위함임을 기억해라."


당주는 피거품이 올라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남자에게 눈빛으로 최후의 명령을 다시 한번 전달했다.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그의 숨이 끊어졌다. 공허해진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다가, 느리게 호흡을 내뱉고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주인님."


함교를 확인하기 위해 보냈던 남자의 종자. 하야미 사나에가 돌아왔다. 

그녀도 피를 뒤집어썼지만 큰 상처는 없어보였다. 다리미라고 부르는 무장은 총열이 과열되었는지 연신 연기를 피워올렸다.


"사나에. 함교 상황은 어떻지."


"대부분이 전사했습니다. 어떻게든 침식체는 걷어냈습니다. 무기와 방어쪽은 틀렸지만 항법 시스템은 기동중입니다. 주인님."


"탈출 프로토콜은?"


"틀렸습니다. 시스템이 마비됐고 담당 오퍼레이터도 당했습니다."


"...알았다."


"당주께서는..."


"명예롭게 전사하셨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가면의 남자는 우뚝 서서 형님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는 당주를 들어올려 격납고 한 구석에 온전하게 남아있었던 가몬이 새겨진 깃발로 시신을 정중히 덮었다.

영광스러운 승리의 선두에서 전대기와 함께 언제나 자랑스럽게 휘날렸던 나나하라의 깃발이었다.

남자는 조용히 폐기실로 향했다. 그의 행동에 깜짝 놀란 사나에가 제지하려 했지만 전대원 하나가 그녀를 붙잡았다. 고개를 저었다.

금세 상황을 이해한 사나에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통곡 소리가 한층 커졌다. 



분쇄기가. 시끄럽게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작동하던 기계가 멈췄을 때는 울음 소리도 잦아들었다.

격납고의 분위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러나 직전과는 조금 달랐다.

절망을 누를만큼 큰 분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존경받을만한 남자가 이런 최후를 맞이하게 만든 적들에 대한 분노.

당주는 인생의 전부를 바쳐 인류를 위해 싸웠다. 시신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하고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가면의 남자가 돌아왔다. 피눈물이 틈새로 질질 흘러나왔다. 그는 전대원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마음이군. 남자는 이가 빠진 칼을 주워들었다. 가까스로 기능하는 통신기의 버튼을 눌렀다. 

모든 전대원이 연결된 채널에,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숨기지 않고 최후의 무전을 전달했다.


"살아남은 고르디우스 전 대원은 주목하라. 전대장께서 전사하셨다. 모든 생존자는 기함으로 집결하라. 반복한다. 생존자는 전원 기함으로 집결하라. 당주께서 홀로 가시게 둘 수는 없다."


열린 해치로 하나 둘 전대원들이 모여들었다. 미처 격납고에 들어오지 못한 인원들은 밖에 시립했다. 

겨우 기동하는 기갑병기 몇 기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집결했다. 

부상병들은 잃어버린 전대기 대신 격납고 안에서 찾은 온전한 깃발들을 새로 세웠다. 

숫자를 헤아리니 삼분의 일이 될까 말까였다. 모두가 저마다의 병기를 준비하며 남자의 명을 기다렸다. 

남자는 생각에 잠긴 채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나에도 그의 뒤에 섰을 때였다.


"사나에, 너는 도망쳐라." 


그녀의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주인님?"


"프로토콜이 망가졌으니 물리적으로 부상해야겠군. 고르디아스의 매듭이 하나라도 남는다면, 봉인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 카미이즈미를 보존하라."


"따를 수 없나이다."


"살릴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살려야 한다. 큰 뱀 봉인의 중요한 안전장치를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따를 수 없나이다!"


"명령에 복종하라. 지금은 전시다."


"제발. 주인님.."


"잔존병력을 동원해 포위만 뚫으면 대공 화력도 약해진다. 함은 빼낼 수 있다."


"이 차원의 시간선은 불명확합니다. 현실 부상이 성공할 거란 가능성은 낮.."


"성공할 확률이 있으니 적어도 여기서 함을 잃는 것 보다는 낫겠지. 다음 당주에게 오늘 벌어진 일들을 전달할 사람도 필요하다. 아마 다른 전대도 몇몇은 탈출할 것이다. 여기서는 졌지만 인류가 끝난 것은 아니다.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그 역할이라면 살아남은 오퍼레이터들이 있습니다! 저도 함께.."


"아니. 네가 가야 한다. 그들은 모든 내막을 알지 못한다."


사나에가 애절한 눈빛으로 호소했지만 남자는 이미 결심을 정했는지 단호했다.


"가라. 동생에게 우리가 명예를 지키며 죽었다고 전해라."


시간이 없었다. 고위 침식체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었다. 더 시간이 흐르면 정말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툭, 남자가 그녀를 격납고 안으로 매정히 밀어넣었다. 전대원들이 하나 둘 목례하며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반항심이 솟아올랐다. 이럴거면 당주는 왜. 그런 말이 떠올랐지만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끊이질 않았다. 오명을 씻겨주기로 약속했으면서. 지옥에서 건져주기로 약속했으면서.

그러나 주인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남자는 그녀의 망가진 인생에 다시 의미를 준 사람이었다. 

사나에는 지독한 무력감과 자괴감에 휩싸였다.


"주인님...제발. 같이 죽게 해 주세요."


"용서해라. 사나에." 


마지막 애원도 그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해치가 큰 소리를 내며 외부에서 천천히 닫혔다. 

남자는 사나에를 바라보았다. 잠시 말없이 서있던 그는 가면을 벗고 피와 땀을 닦았다. 

얼굴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배신의 흉터. 그는 사나에가 죄책감을 되새기지 않게 하기 위해 늘 가면을 썼다. 

점차 해치가 닫혀가며 두 사람은 멀어져갔다. 남자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몇 번 고민하는듯 했다. 

사나에는 매달리듯 주인을 응시했다. 지금이라도 함께하자고 말해준다면. 동료들과, 주인과 함께 죽게 해준다면.

그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완전히 얼굴이 가려지기 전, 그는 힘없이 웃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구나. 부디. 딸을 부탁한다."






"핫!"


사나에는 온 몸이 차갑게 젖은채로 깨어났다. 자신이 치나츠에게 받은 방 안이었다. 

문을 닫는 것을 깜빡했는지 서늘한 밤바람이 들어왔다. 

정원과 가까워 날씨가 좋을 날은 창을 열어두면 나비가 날아 들어올 때도 있었다. 그녀는 이 방을 좋아했다.


한동안 악몽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녀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항상 그녀를 괴롭히는 악몽이었다. 사나에는 수천번도 더 죽은 주인을 원망했다. 자신도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

가혹한 사람. 배신자의 핏줄인 나를 거둬놓고는 혼자 도망치라 명하시다니.


인류가 패배했던 날. 소수의 생존자들과 긴급 탈출을 시도한 그녀는 장장 10년을 건너뛰었다.

가까스로 기어올라온 현실은 바보같을정도로 평온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거의 정신착란에 빠진 그녀는 기함을 은닉하자마자 당주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모셨던 주인의 동생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인물을 마주한 당주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통곡하면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그녀는 전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당주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같은 사람을 잃은 슬픔으로 두 사람은 밤새 울었다.

그녀는 맡은 임무를 완수했다. 하지만 삶은 끝나지 않았다. 더이상 삶을 이어갈 의미가 없었지만 그녀는 살아있었다.


전우들은 전부 죽었다. 오직 사나에만이 살아남아, 주위의 의심어린 시선을 받았다. 배신자의 딸. 전혀 늙지 않은 여자. 마녀.

견딜 수 없었다. 자살을 기도했다. 쓸데없이 부지런했던 시종들 때문에 불행히 죽지 못했다.


병원에서 당주와 그가 데리고 온 두 소녀를 만났다. 

고개숙인 그녀 앞에 말없이 한참을 앉아있었던 당주는 소녀들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제서야 주인이 남긴 또다른 명령을 기억해냈다. 

삶이 끝나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직 살아갈 의미는 남아있었다. 


퇴원한 사나에는 가문으로 돌아가 멸시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했다. 

가문의 내무부터 대 침식전까지 가리지 않았다. 밑바닥부터 기어올라간 그녀는 가문의 시종장이 되었다.


당주는 대정화전쟁에서 고농도 침식파에 노출되어 오랜 시간 와병중이었고, 얼마 전에 죽었다. 주인의 딸이 당주가 되었다.

사나에는 여전히 임무를 수행했다. 이제 그녀가 살아가는 의미는 주인이 남긴 두 딸이었다. 

치나츠는 아직 어렸다. 그녀가 당주로서 짊어져야 할, 마주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 전대 당주와는 공유했던 비밀도 꼭꼭 감춰두었다. 그런데 그림자가 나타났다.


가문을 공격하는 그림자. 확연한 나나하라 검법의 흔적. 가면을 썼다는 정보. 확실치 않았으나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답답한 가슴을 꾹 눌렀다. 부디. 당신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제발. 당신의 끝만은 평안하셨기를. 제발. 당신의 딸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기를. 주인님.


* *


"여기와 여기 이렇게 두 곳이 오늘 중점적으로 순찰할 포인트다. 주로 침식체들이 등장하는 지역 중 최근에 나나하라 가문 소속 카운터들이 당한 지역이다."


결국 출동 전에 받아낸 콘소메 맛 감자칩 봉투를 한 쪽에 낀 로자리아가 간단히 목표를 브리핑했다. 

주시윤은 화면에 표시된 두 지역을 턱에 손을 괴고 바라보았다. 어제의 불안감은 어느정도 진정된 상태였다.

스승과 그는 소대의 주 목표가 탐색이므로 적극적인 전투에 임하지 않는 것을 잠정적으로 합의했다. 

지켜질 지는 미지수였지만, 마음의 짐은 어느 정도 덜었다. 적어도 그녀의 허가는 떨어졌으니 자신은 적당히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그가 가장 잘 하는 일이었다.


"또 나타날까요?"


"두번씩 모습을 드러냈으니 또 나타날 수도 있겠지. 이쯤 되면 유도하는 거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겠느냐?"


펜릴 소대를 운송해준 나나하라의 작전차량은 안전구역 직전에서 정지했다. 

순찰을 마치고 복귀할 때까지 위치에서 대기하기로 약속했다. 

오늘 순찰할 구역은 민간인은 전부 소개된 침식 위험지역으로, 나나하라 가문 소속 전투원들이 주기적으로 수색하는 장소였다. 

CSE 수치도 항시 1에서 2에 가까웠다. 일본은 이런 장소가 많았다.


치나츠는 추가적인 인력 지원이 필요한지 물었지만 로자리아가 거부했다.

그녀는 상황이 전투로 번졌을 때 그들까지 신경쓰며 싸우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유도 있었고. 그러니 셋이면 충분했다.


"자. 수색 시작하자. 각자 정한 대로 순찰하고 집결지에서 합류하렴. 농땡이 피지 말거라. 제자야."


"스승님이나 잘 하시지 그래요. 과자까지 챙겨오신거 보면 그럴 생각 가득이신데."


"적당히 낮잠 잘 곳 정도는 찾아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 마침 날씨도 좋구나. 오늘만 날이 아니니 공쳐도 그만이다."


주시윤은 피식 웃었다. 진지하게 말할 땐 언제고 퍼질 생각 가득이구만. 오히려 좋았다. 

아직 일할 기분이 아닌 것일 수도 있고, 그녀의 판단으로는 여기가 아닌 것일 수도 있었다. 그녀의 감은 꽤 잘 맞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그만 마을이었던 지역 같았다. 민간인들이 떠난 집들은 을씨년스러웠다. 

뭐가 있어봐야 침식체가 아닌 이상 카운터에게 위협이 되기는 힘들었다.

침식 위험지역이니 낮잠은 못 자더라도 누워서 시간을 보내기엔 괜찮아 보였다. 

가장 후미에서 걷던 유미나가 총을 어깨에 걸치고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일들 좀 열심히 해. 소대장하고 선배."


"아니, 안 찾겠다고 했느냐. 좀 억울하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스승님. 저희는 언제나 열심히, 의욕적으로, 왕성히 일하잖아요. 근데 적이 없으면 어쩔 수가 없죠."


"음. 그게 맞지.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는구나. 역시 내 제자답다."


"아 쫌. 치나츠 당주한테 댁 자랑했단말야."


"내 칭찬을?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 맹랑아. 뭐 잘못한거라도 있느냐?"


"시끄럽고, 빨리 끝내자구. 여기 없으면 다음 지역으로 가면 되잖아."


유미나의 잔소리를 마지막으로 셋은 찢어졌다. 주시윤은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비교적 멀쩡한 집에는 들어가서 잠시 쉬기도 했다.

중간에 돌아다니는 1종 침식체 몇 마리도 깔끔하게 처리했다. 칼을 쓸 필요도 없었다. 

쉬었던 시간을 제하고도 한 시간이 좀 넘게 걸었지만 특이사항은 없었다. 그의 바램대로 공친 것 같았다. 

이렇게 며칠만 넘길 수 있다면, 나나하라 가문이 포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은 주시윤은 발걸음을 멈췄다. 

집결지였다. 두 사람은 도착하지 않았다. 어떻게 내가 일 등이지. 농땡이 피지 말라더니 뭐 하는거야. 이 사람들. 

머리를 긁적인 그는 무전기 버튼을 눌렀다.


"스승님. 여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모여서 다른 포인트로 이동하시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몇 번 더 버튼을 눌러보고 흔들어 보았다. 먹통이었다.


"스승님? 미나 양? 뭐야. 고장인가. 아님 미나 양이 밧데리 안 갈아뒀나?"


삑삑. 삑삑삑. 

시끄럽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주시윤의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무전기가 아니었다. 경보음이었다.

CSE 레벨이 급상승하고 있었다. 수치를 표시하는 바늘이 파들거리더니 순식간에 4와 5 사이에 멈췄다. 

그는 경보 장치를 신경질적으로 꺼 버렸다.


하. 안 좋은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더니. 


"운수가 좋나 했더니 오히려 처음부터 당첨인가."


일본은 최근에는 거의 고등급은 나오지 않는 지역이었다. 침식 위험지역도 가뭄에 콩나듯 2종이 출몰했고 대부분 1종이었다.

그런데 4레벨 이상이라. 지역과 상황이 모두 부합하니 아마도 목표물일 것이다. 칼을 감싼 천을 풀었다.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어차피 이 섹터는 그리 넓지 않았으니 잠시 시간만 끌어도 스승과 유미나가 소리를 듣고 와 줄 것이었다. 

여기가 집결지인 것도 다행이었다. 무선이 먹통이지만 알아서 올 것이다. 그들도 CSE레벨이 상승했다는 걸 파악했을테니까.


현실을 찢으며 그림자가 내려왔다. 다른 침식체는 없었다.

짧은 잿빛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생전에는 남자였던 것 같았다. 

흰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새빨간 눈빛만 드러났다.

오른팔은 칼처럼 보이는 물체와 완전히 일치되어 있었다. 많이 보아 왔던 그림자형 침식체의 모습이었다. 

양 다리는 비교적 멀쩡해 보였지만, 강화형 전투복같은 복장 밑으로 드러난 피부는 역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듣기만 해도 불쾌해지는 울림이 가면 사이에서 새어나왔다.


"나나하라냐."


"정보가 사실이군요. 나나하라 가문만 골라 죽인다니. 혹시 부모의 원수라도 되시나요?"


"나나하라인지 물었다."


"말씀 잘 하시네요. 그림자답지 않게. 주로 비명 지르는데 성대들을 쓰시던데."


"대답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죽인 후에 몸뚱이에 물어보겠다."


"적당히 용서하시지 그래요. 전 원수랑도 아득바득 참고 사는데."


그림자가 훌쩍 뛰어 근접했다. 깡, 깡깡, 깡. 네 번의 검격이 빠르게 교환됐다. 

검로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주시윤은 거의 본능적으로 검을 갖다댔다. 

단검으로 겨우 막아낸 공격에 가슴팍이 베였다. 

침식체가 되며 증대된 신체 능력? 아니었다. 가속 능력? 그것도 아니었다. 순수한 검기였다. 


"세상에나."


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초상 능력을 퍼붓는 그림자보다 훨씬 까다로운 상대였다. 검의 기술만 따지면 그의 스승에 필적했다.

다시 그림자가 공격했다. 한 번 보고 나서였는지 조금은 공격이 보였다. 주시윤은 눈썰미가 좋았으니까.

횡베기, 이어지는 종베기 두 번, 튕겨낸다. 칼은 거의 동시에 공격하는 것처럼 휘둘러졌다. 다음은 횡베기? 아니, 다시 종...

깡. 칼이 불꽃을 튀어올렸다. 반은 맞았지만 어쨌든 틀렸다. 이번엔 팔을 얕게 베였다. 

가장 나중에 날아온 공격은 눈썹 바로 앞을 지나갔다.

그의 장기인 역공을 구겨넣을 타이밍조차 잡치 못했다. 뇌가 경보음을 울렸다. 도망쳐야 한다. 이 그림자는 위험하다.

급수는 알 수 없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이 남자는 생전에 최상위의 검사이자 고위 카운터였을 것이다.


총격소리가 울려퍼졌다. 위협사격에 그림자가 한발짝 물러섰다. 유미나였다.


"선배! 무사해? 다쳤어?"


"미나 양, 근접하지 마세요! 이 그림자는 위험합니다. 스승님을 찾아 와요!"


"선배가 위험한데 어떻게 그래?"


"말씀은 고맙지만 후방에서 도와 줘요!"


자신보다 빠른데 기술도 힘도 더 강하다. 유미나까지 신경쓰며 싸울 수 없었다.

차라리 일반적인 침식체였다면 그의 장기대로 치고 빠지며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그림자는 다르다.

빈틈을 만든 다음 도망치는게 상책이었다.


다시 몇 번의 공격이 반복됐다. 주시윤은 직감만 가지고 검을 막아냈다. 

점점 검로는 보였지만 빈틈이 없었다. 유효타라곤 한 번도 꽂아넣지 못했다.

상황의 심각함을 인식한 유미나가 새파랗게 질렸다. 그림자는 주시윤을 공격하면서 그녀의 사격도 전부 피해냈다.


"뭐, 뭐야 이거? 장난 아닌데?"


"절대 근접하면 안됩니다. 미나 양! 한 칼에 썰릴 수도 있어요!"


손이 축축했다. 땀을 닦을 시간도 아까웠다. 검격 하나 하나에 집중해야 했다. 

그림자는 다시 그를 향해 쇄도했다. 유미나의 엄호사격 소리가 들렸다.

주시윤이 검을 들어 올렸을 때,  그림자가 갑자기 크게 훌쩍 도약해 물러섰다. 

물러선 그림자를 향해 화염의 비가 쏟아졌다.

그가 지금 가장 기다렸던 나른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게 무슨 꼴이냐. 주시윤. 피가 뽑고 싶었으면 헌혈이나 할 것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서 놀다 오셨습니까? 빨리도 오셨네요."


"걷기 운동이 부족해서 간만에 산책 좀 했다. 숨막히는 각선미가 내 장점 아니더냐?"


"재밌는 농담이네요. 오늘은 그거 안 하십니까. '감히 날 어쩌고' 말입니다."

"주둥이가 산 걸 보니 내가 더 늦게 왔어야 했나 보다. 제자야."


주시윤의 허리를 주먹으로 툭 친 그녀가 한발짝 앞으로 나섰다. 이미 몸의 일부같은 의자에선 내려선 상태였다.

싸움에 나설 때면 항상 짓는 자신만만한 미소. 절대 지지 않을거라는 자신감이 묻어나오는 목소리.


"내 사랑스런 심부름꾼들에게 무슨 짓이냐."


펜릴 소대장 로자리아 르 프리데가 전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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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역시 새벽에 써야하지 않겠노? 길이 괜찮다고 하길래 오늘도 무지성으로 9500+ 박고감 읽기 불편하면 말해줘

개추와 댓글 항상 넘모 꼬맙읍니다 카붕쿤들 다이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