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통합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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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 훅훅 피어오르는 욕실은 전체가 편백나무로 짜맞춰져 있었다. 특유의 향이 은은하게 멤돌았다.
치후유의 말처럼 굉장히 넓었다. 욕조엔 두 사람이 아니라 다섯 사람이 들어가도 넉넉할 것 같았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히노끼 탕? TV에서나 봤지 상상도 못했던 시설이었다. 유미나는 순수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와. 어젠 샤워만 해서 몰랐는데 안쪽에 이런 탕이 있었네."
"아쉽게도 온천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시설은 훌륭합니다. 가문 사람들 모두 즐기는 탕이지요."
"난 온천은 가 본적도 없어서... "
"저도 그렇습니다. 대정화전쟁 이후에는 지하수가 오염된 곳이 많아서.. 이젠 멀리 큐슈쪽에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몸을 간단히 씻은 치후유가 먼저 탕 한쪽에 들어갔다.
유미나는 따라 들어가기보다 우선 탕 가장자리에 앉아서 가볍게 손으로 물을 떴다. 딱 좋은 온도였다.
병원비와 생활비에 쪼들리는 그녀에게 목욕은 낭비였다. 가을이나 겨울엔 주로 회사에서 씻고 집에서는 세수나 하는 정도였다.
테라사이드 사태 이후 급여가 오르긴 했지만 시간도 없었고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그 돈이면 국밥이나 특으로 먹지.
"이 정도만 되도 나한텐 엄청난데. 물을 이렇게 펑펑 써 본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
"일본에 오셨다면 즐기고 가셔야지요. 안 들어오십니까?"
"어, 으응. 가야지?"
막상 들어가려니 괜히 얼굴에 열이 올랐다.
목욕탕 다닐 땐 몰랐는데, 두 사람이 한 욕조에 들어가는 거. 생각보다 엄청 부끄러운 일이었구나.
치후유의 반대편에 조심히 발부터 집어넣었다. 목재의 자연스러운 까끌거림이 기분좋았다.
욕조가 워낙 커서 적당히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
한 쪽에 편히 등을 기댔다. 따듯한 물이 지친 몸을 노곤하게 해주었다.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진짜 좋구나. 목욕.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표정을 보고 치후유가 가볍게 웃었다.
"저희는 목욕을 몸과 마음 모두를 씻어내는 일이라고 부릅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언제 이렇게 같이 목욕했더라. 샤워실에서 다른 직원들을 마주쳤던 적은 있었지만 목욕은 아주 오래전이었다.
카운터니 침식체니. 그런 것들과는 관련없던 시절에는 동네 목욕탕에 자주 갔었다.
취향은 아니었지만, 목욕이 끝나면 꼭 먹어야 한다는 성화에 커피우유를 먹곤 했었지.
사실 몇 년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까마득한 예전 일처럼 느껴졌다.
음. 누구랑 갔었지. 언니랑 같이 갔었나? 아니면...
아차. 가슴 한구석에 잊고 있었던 먹먹한 감정이 슬며시 차올랐다.
문득 이번 봄 회사에서 다 같이 나갔던 야유회 생각이 났다. 깡통 사장이 꽃놀이 가자면서 시끄럽게 사원들을 볶았었지.
처음 마셔본 캔맥주 하나에 형편없이 취한 그녀가 밀려오는 기억들에 가끔 견디기 힘들다는 주사를 내뱉었을 때,
항상 그녀를 갖고 놀기 바빴던 소대장은 비웃지 않았다.
"견딜 필요 없다. 그대로 추억에 잠기면 그만이니라. 네 마음에 그만큼 그 사람과의 시간이 소중한 의미로 남아있는거니까."
취향인 달달한 술을 병째 가볍게 들이키며, 봄날의 바람처럼 잔잔히 웃었다.
"잃어버리지 않게 잘 간수해라. 맹랑아."
물론 다음날은 실컷 놀려댔다. 겉만 귀엽게 생겼지 속은 폭삭 썩은 못된 꼬마 할망구같으니.
어쨌든 유미나는 조언을 받아들였다.
원했던 형태는 아니었지만 결착은 났다. 그래도 역시, 전부 깨끗이 훌훌 털어낼 수는 없었다.
때때로 쏟아지는 감정들이 남기는 흔적들은 괴로웠다. 그래도 기억이 흘러갈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었다.
기억들은 먹먹한 그리움과 바늘로 찌르는 아픔을, 끝내 온전한 진심을 전하지 못했던 미안함을,
그로부터 비롯된, 여전히 빠져나갈 출구가 없는 짙은 후회를 남겼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소중한.
이를테면,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추억상자에서 빛바랜 사진을 찾아냈을 때 느끼는 아련함과 같은,
반짝반짝 빛나는 보물처럼 소중한 감정들도 채워주었다.
평범한 인사, 때로는 귀찮았던 참견, 짖궃은 말장난, 별 것 아니었던 잡담, 사소한 다툼, 같이 걸었던 길, 공유했던 일상의 시간들.
그녀에겐 너무 달짝지근했던, 삼각 커피우유.
뒤돌아보니 함께한 모든 순간이 행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 곁에 있었기에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유미나는 이제 더는 볼 수 없는 사람을 그렇게 추억했다.
생각에 잠긴 동안 치후유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조심히. 이쪽의 기분을 살피듯 가끔 시선만을 주었다.
좋은 애구나. 유미나는 짐짓 목소리를 밝게 해 말을 건넸다.
"진짜네. 머리까지 싹 씻기는 기분이야. 너무 좋다."
"다행입니다."
그제야 부드럽게 웃은 치후유는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정리해 넘겼다.
나올 곳은 나온 부드러운 굴곡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치후유는 몸매가 좋은걸. 운동을 해서인가?"
"특별히 신경쓴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미나 공쪽이 더 훌륭하신게 아닐까요. 세간 사람들 식으로 말하면 글래머가 아닙니까?"
"그런가? 난 잘 몰라서... 가슴 큰 건 불편하기만 하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사로서 도움이 되지 않지요."
만약 서윤이 들었다면 이를 박박 갈았을 대화가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저기, 아까 말 못했던건데 말야. 고마워. 오늘 도와줘서."
"괘념치 마십시오.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속으로 가볍게 웃었다. 괘념치 말래. 이런 말을 쓰네. 이런 걸 고풍스럽다고 하던가.
"실력이 대단하더라. 역시 당주 호위다운데."
"과찬이십니다. 카운터로서의 능력이 부족한만큼 일신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꾸준히 정진했을 뿐입니다."
"어? 카운터 등급은 높지 않은 편이야?"
"예. 저는 여러분들 식으로 측정하면.. 음, D급정도일까요."
"D급? 진짜?"
"예. 카운터 능력도 전투와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지요. 보조 장비들이 없다면 고위험 침식 지대에선 오래 활동하기 힘듭니다."
"그런데도 아까 그림자를 몰아붙였잖아? 전부 직접 익힌 검술때문이란 거니까 더 대단한 거 아냐? 선배는 B급인데도 쩔쩔맸다구."
"단지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겠죠. 미나 공이나 시윤 공이 본래라면 더 뛰어난 전투인력이실겁니다."
"선밴 몰라도 날 엄청 고평가 해주는거 같은데. 난 평범한 C급인걸."
"그런가요? 미나 공은 제가 보아온 보통의 C급 카운터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다만..."
우와. 얘 감이 좋은데.
그렇긴 하지. 남한테 자랑하고 다닐 일은 아니어도.
사실 유미나 자신도 진짜 평범한 C급이었던 과거보다 얼마나 강해졌는지 잘 알지 못했다.
숨겨진 힘이 있다는 것도 코핀에서 일하면서 알았던데다,
비교군이 전부 기존 상식을 우습게 올려치는 소대원들이었다 보니 자기 객관화가 힘들었다.
3종 침식체도 귀찮다고 앉아서 때려잡는 소대장이랑 같이 일하는데 어떻게 알겠어. 이게 그냥 당연하게 느껴지지.
다만 어디 가서 티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주시윤의 당부에 따라 말을 아낄 뿐이었다.
데이마인이었던가. 합동 컨소시엄에서 3종 때려잡는걸 별 생각없이 말했다가 나중에 두 사람한테 엄청 깨졌었다.
괜히 또 말실수가 나올 수 있으니 적당히 화제를 돌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 치후유가 쓰는 그 나나하라 검법은 언제부터 배운거야?"
"기초는 어릴 때부터 배웠습니다. 본격적으로 익힌 것은 학교를 그만 둔 후일까요."
"아예 안 다닌건 아니었구나."
"예. 중학교 일 학년까지는 다녔습니다."
치후유는 물 밖으로 드러난 어깨에 손으로 물을 떠서 살살 끼얹었다.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밖에서는 무뚝뚝하고 쿨해보였는던 그녀였는데, 쉴 때는 이렇게 풀어지는구나.
지금이라면, 그녀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유미나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저기, 싫지 않다면 말인데... 치후유에 대해, 좀 더 말해 줄 수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린 치후유는 약간 곤란한 듯 웃었다.
"이유가 있을까요?"
"그게, 음... 그러니까.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널 꽤 맘에 들어하는거 같아서. 좀 더 알고 싶다? 그런 느낌."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치후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너무 이상하게 들렸나? 그니까 뭔 싸구려 작업멘트 같은 말을 했냐. 그것도 같은 여자끼리.
심지어 꽤 횡설수설 말하고 말았다. 더 괜찮은 말이 있었을텐데. 머리를 싸매고 싶었다.
잘못된 단어 선택에 자괴감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걱정을 날려버릴만큼 맑은 웃음소리로, 치후유가 웃었다.
"처음 듣는 말입니다. 하지만 싫지는 않군요."
"어? 지, 진짜?"
"예. 뭐랄까요. 보통 가문을 찾아오시는 분들은 언니께 용무가 있으시니, 제게는 관심이 없으니까요.
물론 저를 통해 언니께 접근해보려는 사람들은 간혹 있었습니다만. 미나 공은 그런 분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이미 언니와도 꽤나 안면을 트셨으니 딱히 저를 통하실 이유도 없고요."
"그렇게 생각해줬다니 고마운데.."
"순수하게 제게 관심을 두신다니 신기한 기분입니다. 조금 부끄럽군요."
치후유는 멋쩍은 듯 볼을 살짝 긁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얘기를 해 본적이 없다보니.."
"어, 아무거나? 생각나는게 없다면 검을 배우게 된 이유같은 거라도 좋아. 치후유는 검사잖아."
"그거라면... 음. 말씀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말주변도 없는 편이니 별로 재미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
"에이. 말하기 싫은 것만 아니면 난 좋아."
"그렇습니까... 어디부터 얘기하면 좋을까요. 단순히 말하면, 처음엔 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치한 이유죠. "
"오호."
약간 의외였다.
진지한 캐릭터니까 '곁에서 언니를 수호하는 것이 동생이자 무사로서의 소명입니다. 그래서 검을 배웠습니다' 라던가 하는,
그런 교과서적인 이유가 튀어나올줄 알았다.
"전대 당주께선 자식을 보지 않으셨기에, 언니는 어릴적부터 나나하라의 직계로 후계자 수업을 받으셨습니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는 힘든, 굉장히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하셨죠. 놀랍게도 전부 잘 해내셨습니다. 싫은 소리 하나 없이요.
대단하다고 생각했었죠."
치후유는 기억을 되새기는지 천장 한 구석을 바라본다.
조곤조곤히, 또 조금은 덤덤히.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뭐든 척척 해내면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언니는 태양같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찬연히 빛나보고 싶었죠."
찰랑.
치후유는 가볍게 손장난으로 물을 밀어낸다.
'찬연히'같은 어려운 어휘를 요즘 누가 써. 농담삼아 그런 지적을 할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생각보다 깊이있는 이야기였다.
소녀가 품었던 첫 마음은, 자신도 언니처럼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동경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저를 언니와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칭찬해 주지도 않았죠. 관심이 없었던 거라고 해야 할까요."
찰랑.
작게 일어나는 파문이 유미나 쪽으로 밀려온다.
어린아이는 누구나 어른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한다. 치후유도 당연히 그랬을 것이고.
"기대를 받는 언니가 부러웠습니다."
찰랑.
그렇기에 그녀는 노력했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사랑받기 위해.
"자매니까. 언니가 할 수 있는 건 열심히만 한다면 당연히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따라다녔죠. 같은 것을 익히려고 밤을 샌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귀찮아했죠. 후계 수업에 방해된다면서."
찰랑.
마지막 파문을 일으킨 그녀는 무심코 손을 꽉 쥐었다. 물은 주먹 사이로 전부 새어나간다.
"언니도 곤란한 듯 말했었죠. '치후유까지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마 언니는 혼자 힘들어하는 자기를 생각해서 함께 있어준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언니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이 악물고 언니의 뒤를 좆아 달렸던 어린 소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녀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자조하듯 말했다.
"언니를 미워했었습니다. 아주 많이."
소대장은 낮에 만났던 그림자가 어쩌면 4종 이상일거라고 말했었다.
고작 D급에 불과한 이 소녀는, 도시도 짓뭉갤 수 있는 괴물과 자신이 익힌 기예만으로 겨룰 수 있을때까지 얼마나 검을 휘둘렀을까?
그녀는 다리를 쭉 뻗었다. 새하얀 피부였지만 깨끗하지는 않았다. 크고 작은 흉터들이 가득했다.
옷을 입었을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몸도 마찬가지였다.
아물어 흉터가 된 상처들과 굳은살 아래로는 한계까지 팽팽히 단련된 근육들이 자리잡혀 있었다.
전부 지금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의 흔적일 것이다.
치후유는 '미워했었다'고 말했다. 그럼 지금은 생각은 다르다는 건가. 무엇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모두에게. 언니에게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더 잘하는 게 있다는 걸. 당신들이 무시한 내게도 이런 가치가 있다는걸요.
그래서 찾아내게 된 게 검이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것들까지 누리는 언니를 하나라도 이기고 싶었죠.
그때는 언니가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어리석고, 열등감에만 가득찼던. 자기밖에 모르는 꼬마였습니다. 저는."
그녀의 얼굴 근육들이 움직여 하나의 감정을 만들었다. 한쪽 손이 이마를 짚었다.
유미나도 잘 아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을 짙게 후회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결국. 큰 실수를 저질렀지요. 언니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습니다."
"상처?"
잠시 치후유는 말을 멈췄다.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건, 말씀드리고 싶지 않군요. 죄송합니다."
"어, 아냐아냐! 치후유가 불편하다면 당연한거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튼, 시작은 그런 형편없는 이유였습니다만, 꽤 자질은 있었는지 이렇게 되었습니다. 언니를 위해 제 몸을 바칠 수 있으니 다행이지요."
"언니를 위해, 라는건.. 지금은 언니를 좋아해? 치후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녀는 멈칫했다.
억지로 본심을 부정하는 것처럼.
"저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미나 공."
"자격이라니, 그런게 필요해?"
"예. 그저, 요행히 익혔던 검술덕에. 언니의 곁에서 방패가 되어 지켜드리는 것으로 속죄를 할 수 있다. 그렇게만 생각합니다."
속죄라니. 무슨 뜻일까.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흔쾌히 이야기해주었다. 조금 부담스러울정도로. 물론 말하지 않은 것들도 있겠지.
누구에게나 떠올리기 싫은 기억은 있다. 특히나 자신의 실수와, 그것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에 이야기라면 더욱 더.
유미나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캐묻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꼭 묻고 싶은 것은 있었다. 처음 정원에서 대화를 나누었을때도 품었던 의문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치후유에 대해 알고 싶었던 이유기도 했다.
치후유는 지금의 삶을 '직접 선택했다'고 말했었다.
"그럼 치후유는, 지금에 만족하는거야?"
"만족하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그런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군요. 제 감정은 중요치 않습니다."
이전의 물음들과는 달리 조금의 고민도 없는 즉답이 돌아왔다.
치후유는 단호한 결심이 담긴 눈동자로 유미나를 응시했다.
"그저, 제 남은 인생은 모두 언니의 것입니다. 그렇게 정했습니다."
무언가 뒤틀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실수가 무엇이든 간에 그런 맹목적임은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고 싶었다.
이건, 정말 네 의지로 한 '선택'이 맞을까?
그러나 쉽게 참견할 수는 없었다. 억지로 넘겨짚고 싶지 않았다. 유미나는 두 자매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외부인이었으니까.
"..언니에게는 이야기 해 본 적 있어?"
"이런 화제로 말인가요? 아뇨. 언니께선 신경 쓸 일이 많으시니,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마치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쓸쓸히 말했다.
"가끔 그런 생각은 듭니다. 제가 저지른 과거의 실수에 대해... 언니가 아직도 원망하고 계시지 않을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만."
나나하라 치후유라는 소녀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았다.
차갑고 무뚝뚝하고 생각했던 첫인상은, 틀렸던 것 같다.
유미나와 그녀는 만난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거기다 길게 얘기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인데도.
그녀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호의 하나에 들떠서,
과거의 치부나 본심까지도 자각없이 말해버리고.
아직도 미움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면서도,
차마 언니에게 묻지 못해 멋대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해버릴 정도로.
사람 간의 감정과 소통에 그저 한없이 서툰 것이 아닐까.
"죄송합니다. 재미만 없는게 아니고 무거운 이야기였군요. 이런 이야기가 듣고 싶으셨던건 아니셨을텐데.."
"에이, 아냐! 쉽게 하기 어려운 얘기였을텐데 말해줘서 고마워."
뭐가 정답일까.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언니는 용서했을거야'라고 말해 주는 것?
사정을 모르는 그녀가 꺼내기엔 그건 너무 건방진 말이다.
이제 그녀도 섣부른 말은 꺼내지 않는 것만도 못하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서윤이라면. 사람 속을 훤히 내다보는 그녀라면, 자신과 달리 치후유에게 필요했던 위로를 해줄 수 있을까?
"그런가요? 남과 이런 이야기를 해본 게 처음이라서...무심코 정신없이 떠들어버리고 만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많이 얘기해줄 줄은 몰랐어."
속죄라는 단어로 감정도 제한하고, 이 넓디넓은 가문에서 친구라고 할 사람 하나 없이 오직 언니의 등 뒤만 지켜온 소녀.
치후유는 정말 이런 삶에 만족하고 있을까?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뻔한 말밖에 꺼내지 못했다.
그 후로는 시덥잖은 이야기가 오갔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치후유는 꽤 부끄러워하는 목소리로 유미나와 펜릴 소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말했고,
유미나는 주로 로자리아와 주시윤의 단점에 대해 낱낱이 알려주었다.
예컨대, 한껏 어른인 척 하면서 신파극만 보면 참지 못하고 몰래 울어버리는 소녀라던가.
늘 기를 쓰고 농땡이를 치려고 애쓰지만 상사에게 탄로나서 볶여버리는 글러먹은 선배.
일부러 그런, 가벼운 이야기들을 했다. 치후유는 가끔씩 입을 가리고 조용히 킥킥 웃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미나 공."
"다행이네. 나도 재밌었어."
탕에 들어가있었던 시간은 삼십분이 훌쩍 넘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왔어도 아직 뜨끈뜨끈했다.
"누군가와 이렇게 오래 이야기를 해 본 것은 처음입니다. 대화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 지는군요. 기억해 둘 만한 일입니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치후유는 왼손을 가슴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버릇인 것 같았다.
"또 얘기할 수 있음 좋겠다. 이것저것."
"좋습니다. 아. 미나 공께서도 언니가 있으시다고 하셨지요? 다음엔 그 쪽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어? 어어. 안될 거 없지. 근데 우린 그냥 평범한 자매인데.."
치후유가 유미나의 손을 꼭 쥐었다. 눈이 반짝거렸다.
"좋습니다. 그거야 말로 꼭 듣고싶은 이야기군요. 기대하겠습니다!"
"어어어어? 음, 그래. 기대할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럼, 다음에 또. 좋은 밤 되십시오."
잡았던 손을 놓고 고개를 숙인 그녀는 평소의 당주 호위로 돌아와, 늠름한 걸음걸이로 떠났다.
유미나는 떠나는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했다. 마냥 개운한 기분은 아니었다.
역시 이상했다.
보통. 평범한 자매 얘기가 그렇게 신나서 듣고싶은 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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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카바 존나 마려웠는데
개추메타덕이든 아니든 추천 찍어주고 글 읽어주는 게이도 있으니 구상한대로 끝은 내야한다고 생각되서 코악물고 써옴
다음편까지 쓰면 거의 삼분의 일쯤 오는거같은데 열시미 서보겟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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