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딘가 슬픔을 머금고 있는 매혹적인 호박색눈동자,
주변의 시선을 확 사로잡을만 한 은회색 머리칼의 미소녀가
레스토랑에 홀로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디를 기다리게 하다니 최악이군."
웨이터를 불러 애꿎은 냉수만 계속 주문한다. 벌써 세 잔째,
물배가 불러오는 만큼 오늘 만남에서의 기대감은 꺼져간다.
이 잔을 다 마시고 나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오늘만은 기필코. 라고 다짐한 그녀였다. 그녀의 이름은 힐데,
코핀 컴퍼니의 제 1 소대, 펜릴 전대의 소대장이자 최후의
발키리로 불리며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번 세계는 좀 달랐다. 그녀는 '우연'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관리자의 전면등장에 힘입어 관리국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차근차근 과정을 쌓아가고 있었고, 덕분에 어느정도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한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이번에 되찾고자 한 일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제일 먼저 버렸던, '여성'이었다.
강습전대의 전대장으로서의 오랜 세월과 숱하게 헤쳐나온 전장.
그녀는 누구보다 앞에 서서 부하를 이끌어야 했고 약한 모습은
전대의 사기저하와 직결 되기에 그녀는 여성의로서의 자신을
버렸다. 누굴 만날 생각따윈 진즉 접은 지 오래였고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취향은 코트 허리춤의 리본모양 매듭으로 참아온 그녀였다.
그녀라고 왜 없었겠는가, 남자에게 안기고 싶은 나날이,
품에 안겨 지친 하루를 위로 받고 싶었고, 사랑을 나누고 싶었고,
둘을 닮은 자식을 낳고 키우고 싶었다. 제자를 늘린 것도,
그녀 자신 때문에 갈 곳을 잃은 시윤을 거둔 것도 그러한 마음을
억누른 자신에 대한 보상의 의미가 아예 없진 않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주시윤 생각이라니, 힐데는 피식하고 웃었다.
어느새 홀짝대던 물잔은 텅 비어있었고, 힐데는 한숨을 내쉬며
겉옷과 가방을 챙겨 일어나려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었죠! 헉, 헉.."
만나기로 한 남자가 온몸에 땀이 범벅이 된 채 힐데를 붙잡았다.
그녀와 달리 큰 키, 반듯한 외모의 훤칠한 미남이었다. 삼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힐데는 화를 삭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만큼은, 이라고 다짐했으니까.
"괜찮아...요. 방금 왔으니까."
존댓말이 영 입에 안붙는 그녀였다. 하긴, 존댓말을 써본게 언제인가.
"힐데 씨, 실물로 보니 사진보다 훨씬 더 귀여우시고 어려보이시네요."
"후후, 고맙습니다. 해럴드씨도 사진보다 더 멋있으시네요."
이윽고 식사가 시작됐고, 물배를 채운 힐데는 메인으로 나온 요리를 반도 먹지 못해 의도치 않게 소식하는 여성 이미지를 새겼다.
해럴드는 매너있고 유머러스한 남자였다. 늦은 건 회사 상사가
혼자서는 문서 작업도 못하는 작자라 붙잡혀 도왔다는게 이유였다.
이 만남에 늦지 않기 위해 자기 일을 신입에게 떠넘기고 온 힐데는
웃음 아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화는 물흐르듯이 이어졌다.
이따금씩 소대원들한테 하는 말투가 나갈 뻔한 힐데였지만
어찌저찌 잘 얼버무리며 관계는 진전되고 있었다.
"와인.. 드실래요?"
힐데가 필승의 의지를 다지며 홍조를 띄고 요염하게 물었다.
"아, 네.. 레드 와인 괜찮은 걸로 하겠습니다."
몇 번 이런 장소에 나온 경험이 있었다. 그때마다 주류 주문에서
상대측 남성들이 그녀의 외모를 이유로 퇴짜를 놔왔다.
예쁜건 인정하지만, 법률에 저촉될 것 같은 만남은 사양이라며.
어린 놈의 쉑기들. 내 나이도 모르면서.
당당한 척하며 내색하지 않는 힐데였으나 사실 그녀의 자존감은
점점 하락하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 게
언제였는지, 실제로 경험하긴 한 건지 확신하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전대장의 위치에서 많은 부하들을 발아래 두고
명령을 내리던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자신보다 커다란 남성 밑에
깔려 앙앙거리고 위로받고 싶은, 가녀린 여성일 뿐이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기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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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써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