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우리가 게임을 접으면 일어나는 일들






"너 괜찮아?"


유미나가 한참 동안 말이 없는 서윤을 보고 물었다.


"응?"


"아니, 너 괜찮냐고. 왜 아까부터 자꾸 멍을 때리고 왜 그래?"


"어...아니야. 역시 조금 피곤한가 보네."


"회사 일이 많이 바쁜가 봐?

그럼 지금이라도 들어가 쉬는 게 낫지 않아?"


"그 정도까진 아니야. 괜찮아."


유미나는 이 만남이 꽤 불편했다.


고작해야 까페일 뿐인데, 이런 곳을 다른 사람과 언제 마지막으로 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부사장의 병문안을 갔다가 병원 1층 편의점에서 끼니를 대충 때우고, 버스를 기다리다가 서윤을 만났다.


그녀도 부사장의 병문안을 마치고 나오는 길인 듯 했다.


유미나는 이 우연이 인사나 하고 헤어지는 그런 종류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서윤은 생각 외로 반색하며 가까운 곳에서 이야기나 잠깐 하자고 그녀를 잡아끌었다. 이건 확실히 유미나의 예상 밖이었다.


유미나도 처음엔 거절하려고 했지만, 서윤이 자기가 사는 거라고 말하자 역시 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잡아탄 택시는, 전혀 가까운 곳으로 가지 않았다.


사실 같이 온 사람도 사람이지만 장소 자체도 문제였다.

택시가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고작해야 까페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질적인 장소였다.


2층까지 유리벽으로 뒤덮인 매장은 겉보기부터 기가 질릴 정도로 화려했다. 


솔직히 유미나는 서윤이 자신을 웬 명품 가게 같은 곳을 데려왔나 의심했을 정도였다.


내부는 노란 빛이 감도는 편안한 조명으로 감싸여 있었고, 


6미터쯤 되는 높은 천장과 바닥 사이의 벽면에는 세심하게 선정된 벽장식들과 조명등 따위가 세련된 배치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훌륭한 솜씨로 다듬어진 짙은 색의 목재 마감 인테리어와 가구들은 모르긴 몰라도 호두나무나 마호가니거나, 그런 종류임이 틀림없었다.


유미나는 검은 목재에 흰 글씨로 쓰여진, 역시 고급스럽기 짝이 없는 메뉴판을 훑어 보려고 했지만, 


메뉴판 맨 위에 위치한 에스프레소의 가격대가 그녀가 아는 가격의 세 배쯤 되는 걸 보고는 그만두었다.


확실하게 이건 동네에 널린 '커피 파는' 것이 본질인 그런 흔한 장소는 아니었다.


늦은 저녁 시간대라 카페엔 아직 사람이 많았지만, 가게 내부에 그녀들 또래의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도대체 이런 곳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오히려 이 정도로 화려하면 모르는 쪽이 더 이상하지 않니?"


"그런가?"


"그래. 만약 내가 사는 동네에 베르사유 궁전이 있다면 그걸 모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유미나는 잘 생각해 보다가 서윤의 말이 그럴싸하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뭐, 허세만 가득 찬 가게였으면 이런 곳까지 굳이 오지 않았겠지만, 여긴 정말로 '취급하는 물건'도 괜찮거든."


"여기가 블랙 마켓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 가격은 좀 이상하지 않아?"


유미나는 메뉴판 제일 상단의 항목을 가리켰다. 거기엔 메뉴명만 쓰여진 게 아니라


그녀가 들어본 적도 없는 온갖 화려한 이름의 원두 선택지들이 다양하게 쓰여져 있었다.


"어머, 내 벌이가 걱정돼?"


"그런 건 아닌데..."


얻어먹는 입장에서는 솔직히 걱정됐다.


"나도 이런 곳을 자주 오기엔 좀 그렇지만 가끔은 이런 사치도 괜찮아.

너야말로 나랑 버는 것도 비슷할 텐데 그건 다 어디다 저축하고 있는 거야?"


"괘, 괜한 참견이야."


"뭐 그건 그래."


순순히 인정한 서윤은 자기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였다.


"피곤하다면서 무슨 커피를 마시고..."


"어머, 몰랐어? 커피는 원래 피곤할 때 마시는 건데."


"지금은 밤이잖아..."


"괜찮아. 난 자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잘 수 있거든."


"그래? 그건 좀 부럽다. 난 요즘도 잠을 자주 설ㅊ..."


자신의 악몽을 떠올린 유미나는 말을 흐렸다.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나도 가벼운 불면증 같은 게 있나 봐. 

그나저나 정말 이런 거 사 줘도 돼?"


유미나는 그녀 앞에 놓인 치즈 케이크를 포크로 어색하게 찌르면서 말했다.


얼마인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아까 흘깃 본 커피 가격으로 미루어 보아 이것도 평소 먹던 것과는 가격의 단위가 다른 케이크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런 걸 팔아서 정말 가게가 유지가 된다고?이런 걸 사 먹는 사람이 정말 있긴 한 건가? 


유미나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서윤을 바라봤다. 


...그녀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럼. 이전에 부사장님 호출 때문에 함께하지 못한 회식 대신이라고 생각해.

따지고 보면 너한테는 신세진 것도 많고."


"그럼... 고마워. 잘 먹을게."


서윤의 말을 듣자마자 유미나는 케이크 옆에 놓인 커다란 사이즈의 오렌지 스무디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러는 동시에 포크로 앞에 놓인 치즈케이크를 휘적거려 먹기 좋은 크기로 조각냈다.


비싼 무언가를 먹는 것 치고는 세심함도, 별다른 감상도 없었다.


품위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유미나도 서윤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난 너랑 친해지고 싶거든."


유미나의 빨대를 타고 올라오던 액체가 멈췄다.


"이거 뇌물이야?"


"그렇게 생각해도 돼."


"너 되게 노골적이다?"


유미나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것도 상관없이, 서윤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간 바빠서 말은 못했지만 실은 언젠가 너랑은 이런 자리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네가 아카데미로 떠나는 바람에 기회가 없었잖아.

우리 첫만남이 좀 안 좋은 방식으로 이뤄지긴 했지만, 너랑 친해지고 싶은 건 정말이야.

이럴 때일수록 우리 같은 신입들이 뭉쳐야지 않겠어?"


서윤은 유미나 쪽으로 고개를 내려 깍지 진 양손으로 턱을 받쳤다.


자신을 지긋히 쳐다보는 서윤의 눈이 부담스러워진 유미나는 그만 시선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서윤의 이 훅 들어오는 거리 감각은 예전부터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녀는 상대가 불편해하든, 노골적인 눈치를 주든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좋은 말로는 넉살 좋고, 나쁜 말로는... 뻔뻔했다.


확실히 리더는 아무나 하는게 아닐지도.


"그건 그렇고 유미나 네가 부사장 병문안까지 왔다니 좀 의외네."


"그게 그렇게 의외야?"


"따지고 보면 우린 고작해야 평사원이니까. 

보통 높으신 분 병문안까지는 잘 안 가잖아?"


"그 노랭이 아줌마가 높으신 분은 무슨. 

여기가 중간직도 몇 없는 구멍가게일 때부터 꾸준히 본 사람인데 뭐.

너도 그렇잖아?"


"그렇게 부른 걸 알면 부사장님이 화낼걸."


서윤이 미소 지은 표정 그대로 딴지를 걸자 좀 뒤가 켕긴 유미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를 거 아니잖아?"


별로 확신이 없는 목소리였다.


"걱정 마. 난 입이 아주 무겁거든. 알다시피 난 비밀이 많은 여자잖아?"


유미나는 그런 서윤을 의심스럽다는 듯이 한번 흘깃 보고는 말을 이었다.


"...뭐. 부사장이 좀 사람을 험하게 굴리는 것 같긴 해도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야.

성과급이라던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예전이랑 다르게 요즘은 초과 수당도 의외로 깐깐하게 쳐 주기도 하고...

다른 회사랑 생긴 분쟁을 어떻게 잘 조정해서 기관에서 이것저것 잘 타오는 걸 보면 되게 유능한 사람이긴 해."


"너 돈 되게 좋아하는구나."


"시, 시끄러워! 돈 벌고 싶어하는 게 나빠?"


"비난하는 게 아니야. 주머니가 두둑해서 나쁠 일은 없으니까.

우리 팀에도 살림을 도맡아서 하는 친구가 있거든. 그래서 잘 알아."


"그럼 됐어.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내가 다니는 아카데미 말이야. 추천서의 보호자 항목에 부사장이 자기 이름을 써 놨더라고."


"정말로?"


"그래.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부사장은 지금 내 대모 같은 거잖아?

나 같은 거 후견인을 해 주는 게 모르긴 몰라도 꽤 귀찮은 일이었을 텐데, 

그럼 병문안 정도는 가 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어..서..."


"푸훗!"


"뭐야, 왜 웃어?"


"아하하! 미안! 하지만 그게 부사장님 테이블에 

네 아카데미 성적표가 올라가 있었던 이유였구나?"


유미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뭐?야! 그걸 네가 왜 봤어?"


"얘, 너 진짜 카운터 육성 과정을 뺴면 

일반 교과는 영 꽝이더라?"


"너...!"


"하하하! 미안해, 미안해. 하지만 뭐, 괜찮잖아? 일반 교과 정도는."


"너 정말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놀려서 미안하다니까. 그래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

그걸로 밥벌어먹고 살 것도 아니고. 넌 이미 실전에서 활약하는 훌륭한 카운터잖아."


금새 웃음을 그친 서윤이 유미나를 달랬지만,


아픈 곳을 찔린 유미나는 애써 변명을 주워섬겼다.


"나도 처음부터 성적이 나빴던 건 아니다 뭐. 

그냥... 그냥 회사를 다니다 보니 잊어버린 게 많아서 그래."


"이미 취업한 데다 경력까지 쌓고 있는데, 나라면 학교 시험 같은 건 그다지 신경쓰지 않겠어."


서윤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했지만, 유미나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그래도 중요해.

회사에서 나한테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줬으니, 뭐가 됐든 성실하게 배우는 게 맞는 일이라고."


"..."


그 말을 들은 서윤은 좀 놀랐다는 표정으로 유미나를 바라봤다.


"왜, 왜 그래 또?"


"아니, 유미나 너 의외로 되게 성실한 사람이구나 싶어서."


"무슨 소리야? 난 언제나 성실했어."


"그래? 지원 나온 용병 아저씨들한테 '내 앞길 방해하지 말고 꺼져'같은 말을 하던 때랑은 영 딴판이잖아."


서윤은 과장된 어투로 유미나를 흉내냈다.


"흥, 생각보다 시시했어. 그리고 친한 척 하지 말고 좀 떨어져 줄래?"


"너, 너 그건 또 어디서..."


겨우 내려간 유미나 얼굴의 홍조가 다시 확 올라왔다.


"주시윤 선배 주말 당직 바꿔주니까 금방 다 말해 주더라."


"그 실눈뜨기 작자가 진짜..."


약이 잔뜩 오른 유미나를 보며 서윤은 웃음기를 숨기지도 않았다.


"몰랐는데 너 생각보다 정말 놀리는 재미가 있다 얘.

점점 더 친구가 되고 싶어지는걸?

아, 케이크 더 먹을래?"


"부사장이 왜 너를 싫어하는 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유미나는 뚱한 표정으로 이야기했지만,


"...더 먹을래."


케이크를 굳이 거부하지는 않았다.


유미나는 카운터로 가서 케이크를 더 가져오는 서윤의 뒷모습을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뭘 하면 저런 사람으로 자랄 수 있는 거지?


예리한 성격이 아닌 그녀가 보기에도 화낼 것 같은 타이밍을 구렁이처럼 넘어가는 서윤의 솜씨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저런 건 타고나는 건가?


"아카데미 생활은 좀 어때?"


이번엔 케이크를 종류별로 네 조각이나 더 가져온 서윤이 앉으면서 물었다.


"왜 내가 그런 이야기까지 너한테 해야 돼?"


"난 들으면 안 돼?"


유미나가 방어적으로 대답하자 서윤이 가져온 케이크를 유미나 쪽으로 슬쩍 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또 무슨 이야기 들으면 놀릴 거잖아."


"그냥 궁금해서 그래. 사실은 나도 학교 생활 같은 건 좀 동경해 왔거든."


"네가 왜 그런 걸 동경해? 너도 학교라면... 아."


리플레이서 사태의 기억이 떠오른 유미나가 말을 멈췄다.


"그... 미안."


"괜찮아. 신경 안 쓰니까. 미안할 거 없어.

피차 안 좋은 기억은 매한가지고."


"...너도 아카데미 정도는 원하면 갈 수 있지 않아?

너라면 거기서도 금방 우등생이 될 수 있을 텐데."


유미나는 화제를 돌리면서 이게 혹시 서윤이 판 함정인가 생각했다.


내가 이런 말을 꺼낼 줄 알고, 날 미안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이 화제를 채택한 걸까?


"난 지금 팀의 리더니까. 그리고 내 팀원들도 다 내 또래인데, 

에이스 팀이 한꺼번에 아카데미로 떠나 버리면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부사장님이라도 슬퍼하지 않겠어?"


"너 진짜 말은 잘하는구나..."


"그러니 나보다는 훨씬 못한 네가 혼자 아카데미로 떠나는 특권을 얻어도 뭐, 넓은 도량으로 이해해 줄 수 있어."


"하아..."


유미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한 의심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해도 아카데미 생활이 많이 특별하지는 않아.

그냥... 어떻게 보면 회사랑 비슷해."


그리고 학교 생활은 이미 겪어 본 일이기도 했다.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더니, 의외로 우리 회사 쪽이 더 선진적인 부분이 많던데.

실습 시설 같은 것도 뭔가 뒤떨어진다고 할까...

그리고 그것도 그냥 시키니까 하는 거지. 별로 대단할 건 없어."


"친구는 생겼어?"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을 아는 사람 정도라면 뭐. 몇 정도는."


"잘 됐네. 괜찮은 사람 있으면 코핀 컴퍼니가 취업하기에 좋은 회사라고 말 잘해둬."


"벌써 그런 거까지 신경 써?"


"물론이지, 네 생각은 어때?

후임이 많이 들어오면 고참이 된 나도 좀 위엄이 살지 않을까?"


"너 이 회사가 되게 마음에 드나 보다."


"얻어갈 게 많은 회사잖아. 라이센스까지 이렇게 일사천리로 발급해 주는 데가 흔하겠어?"


"뭐 아카데미에 연수도 보내 준 건 사실이지만...

난 고작해야 여기가 애먼 사람 부려먹기나 하는 블랙 기업인 줄 알았는데."


"날 믿어. 여기만한 데는 흔하지 않으니까."


"그런가..."


유미나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찡그리자 서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너 정말 이 바닥에서 제대로 된 라이센스 갖기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

그것도 우리 같은 경력 적은 초짜들이?

너도 우리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좀 실감을 가져야 돼."


"행운아는 무슨. 휴가 준다더니 바캉스 시즌에 카운터 사원을 크루즈 갑판 닦으라고 파견 보내는 회사가..."


"그, 그런 일이 있었나? 그래도 그건 옛날 일 아니겠어?"


유미나가 투덜거리자 서윤은 애써 얼버무렸다.


서윤이 생각하기에도 그것까지 회사를 편들어 주기는 좀 그랬다.


"아. 그렇지. 아카데미 동급생한테 네가 이미 라이센스 갖고 있다고 말해 봤어?"


"아니... 몇 명한테만."


"말하면 분명 다들 깜짝 놀랄걸?

그런 걸 좀 적극적으로 어필해 봐. 분명 친구도 잔뜩 생길 테니까."


"그런 걸로 꼬이는 사람들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어?"


"물론이지. 친구란 게 꼭 그렇게 뭔가 긴밀한 관계만은 아니잖아?

서로 원하는 걸 주고받는 합리적인 관계도 충분히 친구지.

넌 걔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해 주고, 걔들은 널 무리에 넣어 주면, 서로 윈윈이지."


"...글쎄 뭐, 그런 건 아무래도 됐어."


유미나는 회의적인 태도로 말하며 표정을 흐렸다.


서윤은 유미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그녀가 아직 카운터가 아니던 시절의 친구들을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번엔 내가 대화 주제를 잘못 꺼냈을지도.


죽음과 죽음보다 더 안 좋은결말로 끝났던 그녀의 친구들을 생각하면 이건 그다지 좋은 화제가 아니었다.


그녀 내면의 깊은 우울함을 부채질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회사가 크면 클수록 초창기 멤버인 내 주가도 올라가지 않겠어?"


서윤은 이야기를 돌렸다.


"...좋겠다."


"뭐가?"


"그렇게 비전이 있는 게 좀 부러워.

몸담은 곳을 키우고, 출세하고..."


"벌써 무슨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고 그래?"


"그런가..."


유미나는 괜히 빈 잔을 흔들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나이가 먹은 자신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서윤 말대로 코핀 컴퍼니가 다니기에 그렇게 나쁜 회사는 아니었다. 차가운 것 같지만 소대원도 믿을 만한 경력자들이고,


부사장은 성격이야 어찌 됐든 유능한 사람이고, 


사장이 엉뚱해 보여도 그가 취임한 뒤 회사 사정을 생각하면 분명 나쁜 이는 아니었다.


계속 이 회사를 다니게 될까?1년,2년...그러다 10년이 지나면 자신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유미나는 힐데 소대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는 뭣 때문에 카운터가 됐지?'


잘 몰랐다. 그냥... 이 능력으로 필요한 돈이나 벌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을 뿐, 카운터가 뭔지,


카운터의 삶이 어떤 건지 깊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바로 다음 순간 죽을 지도 모르는데, 미래 설계 같은 건 너무 뜬구름잡는 일이었다.


"꿈 같은 걸 찾아?

너도 금방 생기겠지."


"글쎄... 없으면 또 어때.

그건 그렇고 너는?"


서윤은 한참 말이 없던 유미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지만,


유미나는 진심으로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 말았다.

"나?"


"너도 부사장 병문안을 온 거잖아.

넌 그 사람이랑은 사이가 별로 안 좋은 줄 알았는데."


"얘는. 부사장님은 나랑 정말 친해.

다 부끄러워서 아닌 척 하시는 거라고."


"그래...? 그렇게는 보이지 않던데..."


"그럼. 부사장님이 날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편애한다는 걸 들키면 곤란하잖니?

이건 비밀인데, 부사장님이 널 잘 부탁한다더라."


서윤이 속삭이는 시늉을 하며 이야기하자 유미나는 아예 서윤의 언변에 질려 버렸다.


"가만 보면 넌 날이 갈수록 더 능글맞아지는것 같아..."


"어머. 갑자기 칭찬은."


"칭찬 아니야..."


유미나는 한숨짓고선 입에 마지막 남은 케이크 조각을 집어넣었다.


접시가 비는 것과 동시에 잠깐 정적이 찾아왔다. 


마치 이 조금의 달콤함이 그간 대화에 기름칠을 해 주고 있었던 것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자 이미 사람들이 많이 빠져 있었고, 영업을 슬슬 마무리하려는 듯


구석진 자리의 조명들이 하나 둘씩 꺼져들어갔다. 모르는 사이 카페를 가득 채우던 소음이 잦아들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목소리는 너무 크게 들렸다. 


가게를 나서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유미나의 시선이 좆다 그것이 어느 순간 테이블의 맞은편 위에서 멎었다.


서윤의 커피잔 역시 이미 비어 있었고, 


그녀는 괜히 컵의 빨대를 휘적거리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컵에 남은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잔잔하게 울렸다.


"...진심이야."


얼음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멎었다.


볼륨이 줄어든 음악소리 사이로 서윤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였고,


공기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녹아든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침묵이 아직 깨지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유미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뭐가?"


"너랑 친구가 되고 싶다는 거."


서윤의 분위기는 생글생글 웃던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너랑... 첫만남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

그 다음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네.

작전이라고는 해도 널 두들겨패고 심한 말을 잔뜩 했으니까."


"갑자기? 괜찮아. 그런 건. 사장님 작전이었다며."


"그래도 사과하고 싶어.

기만 작전이니 뭐니 해도 그때 했던 말들은 진심이었어. 난 정말 네가 재수 없다고 생각했거든."


"너 그거 사과하는 거 맞아?"


유미나가 좀 질색하며 말했다.


"미안해. 하지만 그땐 여유가 없었거든. 계속.

변명 같겠지만...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고 해야 하나.

정말 작은 기회 하나라도 놓치면 모두 끝장이라고 생각했었어.

주변 사람을 모두 등쳐먹고... 버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었지. 

정말 오만한 애송이였어. 그러는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그래서인가봐. 널 삐뚤게 생각했던 게."


"잠깐만, 갑자기 그런 말을..."


유미나가 손사래를 쳤지만 서윤은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좀 괜찮아진 다음에도 그 못된 버릇이 쉽게 사라지지 않더라. 

그러다 보니 네게 사과할 타이밍도 놓치고...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까 궁지에 몰린 건 너도 마찬가지였는데, 넌 나랑 전혀 다르더라고.

그래서 알게 된 거야. 내가 그동안 정말 못된 년이었구나 하고.

그게 병원에서 만난 널 굳이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야. 사과하려고. 이번엔 네게 거짓말하지 않으려고.

그리고 오늘, 이런 나도 뒤끝 없이 솔직하게 대하는 네 모습을 보고 확신이 들었어.

넌 네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야."


처음엔 좀 낯뜨거운 사과나 하려나 싶었지만, 서윤이 그 이상의 말을 쏟아내자 유미나는 당황했다.


"왜, 왜 이래 쑥스럽게. 너 이것도 나 놀리려고 하는 말이지?"


"아니, 이건 널 놀린다거나 주변인 관리라거나 그런 이유에서 하는 말이 아니야.

이건 내 진심이야. 유미나.

...내 사과를 받아줄래?"


"무슨 새삼스럽게... 그런 건 다 잊었어.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고."


유미나가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고마워. 역시 넌 솔직하구나."


부끄러운 말을 서슴없이 하는 서윤보다도 그걸 듣는 유미나의 얼굴이 훨씬 붉어져 있었다.


"우리가 비슷하다... 거나 그런 말은 하지 않을게.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우린 많이 달라. 

어쩌면 정 반대에 가까울지도.

그런데 이상하지? 네 반응이 정말 익숙해. 네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할지 뭔가 감이 잡힐 것 같아.

네가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너랑 그렇게 오래 같이 있지도 않았는데, 되게 오래 전부터 알았던 것 같아.

그래. 마치 네가 내 소꿉친구였던 것 같은... 웃기지?"


서윤은 그녀잡지 않게 말을 흐렸다.


"미안해, 역시 이 말은 잊어줘."


"너 그거 헌팅 대사로는 최악이야."


서윤이 역시 이건 좀 아니라는 듯이 말을 주워담았지만, 유미나는 가벼운 농담조로 받아넘겼다.


"후후... 그럴지도 모르겠네..."


자조적으로 웃은 그녀는 자신의 연락처와 주소를 적은 쪽지를 유미나에게 건넸다.


"내킨다면 나중에라도 우리 소대 숙소로 찾아와. 모두한테 널 소개시켜 줄 테니까.

그리고 내 생각에..."


서윤이 활짝 웃었다.


아까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미소였지만, 유미나는 왠지 그녀가 처음으로 가면을 벗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 소대원 모두 금방 널 좋아하게 될 거야."




서윤은 까페 앞에서 유미나를 배웅했다.


유미나는 서윤에게서 받아든 쪽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당황 반 어색함 반의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멀어져갔다.


서윤은 유미나에게 굳이 회사 분위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부사장의 심각한 모습도, 그녀가 털어놓은 사장의 실종도,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부사장이 이런 이야기를 비밀로 해야 한다고 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미나에게 이 모든 비밀들을 털어놓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왜일까. 이런 기분은 한 번도 든 적이 없었는데. 나만 아는 비밀을 굳이 누군가에게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유미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녀에게 더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타인에게 보이는 솔직함을 자신도 그녀에게 그대로 돌려 주고 싶어졌다.


그러나 결국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잖아.'


변명이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이 자리가 무거운 자리가 되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회사 사정이니, 세상의 운명이니 같은 복잡한 일들을 떠나 순수하게 유미나와 같은 인간으로서,


또래의 소녀로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신 근처 나이대의 소녀들이 할 법한 평범한 이야기를 하고, 평범하게 헤어지고 싶었다.


왜 갑자기 이런 기분이 들게 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왜 시덥잖은 소꿉친구 이야기를 꺼낸 건지도 몰랐다.


날 누구보다 의지하는 내 소대원을 제쳐 두고 왜 하필 그녀를?


그러나 이건 모두 진심이었다.


"만남은 끝났니?"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