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 오류, 충돌이 있을 수 있음

6지역 이후의 시점


1편~마지막 편까지 모음

https://arca.live/b/counterside/39057596


"........"

시윤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숙박 업소 방의 침대 위였다. 내가 나유린한테 안긴 채로 잠이 들었었구나. 그런데 이게 얼마만에 깊게 잠든거지? 꿈 조차도 꾸지 않았고, 과거에 시달리지도 않은, 평범하게 잠에 든 것은 대체 얼마 만이지? 울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한참을 안겨있었는데. 그리고,

"일어나셨나봐요?"

"헉....!"

아직도 안겨있었다. 아마 자신이 잠 들자 유린은 그대로 시윤을 안은 채로 침대에 누웠던 모양이다. 다행히 옷은 입고 있었지만 미성년자인 자신이 성인 여성의 품에 안겨 침대 위에 누워있다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악몽을 꾸셨으면 깨워드렸을텐데, 이번에는 잘 주무셔서 그냥 그대로 내버려뒀어요."

"아니, 그냥 침대에 눕혀주셨을 수도 있지, 그대로 계속 안고 계셨나요?!"

시윤이 붉어진 얼굴로 유린을 밀어냈다.

"그렇지만 귀여운 후배님의 무방비한 모습을 볼 몇 안되는 기회...

"그리고 귀엽다는 말도 그만 하세요! 진짜 징그러우니까!"

언제나 능글 맞고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던 시윤이 잔뜩 얼굴을 붉힌 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미나, 힐데, 수연, 알트 소대 등 코핀 컴퍼니 사람들이 목격 했다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적 조직의 수장인 나유린의 품에 안겼었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면 반응은 더 가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좋으셨어요?"

"뭐가요!"

보나마나 또 자신을 놀리는 말이겠거니 싶어 시윤은 일부러 거친 말투로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요. 잘 주무시는 것 같다고."

"......!"

그러고보니 그 동안은 수면제를 먹어도, 악몽을 꾸지 않는 방법을 써도, 늘 과거가 반복되는 꿈을 꿨는데 이번에는 꿈 조차도 꾸지 않고 깊게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부정은...안 하겠습니다. 제가 몇 시간이나 잤나요?"

얼마만의 편안한 수면이었지? 몇년 전이 마지막으로 편하게 잠든거였었나? 생각 조차 나지 않는다.

"5시간 정도 주무셨어요. 낮잠 치고는 제법 오래 주무셨네요."

유린이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하고 답해주었다.

"그럼 벌써 저녁인데 도시락이나 먹을까요? 오늘 하루 동안 아무것도 안 드신 것 같은데, 드실거죠?"

"어차피 당신은 안 먹겠다고 해도 묶어놓고 협박해서 강제로 먹일 사람 아닌가요?"

"그렇게 말하니까 제가 너무 위험한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진짜로 시윤군을 생각해서 한 소리인데...."

생각해서 한 소리는 무슨, 그래서 저번에는 초면부터 다짜고짜 부모님 거들먹거리고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팼습니까? 라는 말이 시윤의 목구멍 언저리까지 나왔지만, 유린과 계속 입 씨름만 하다가는 정말 지칠 것 같아 시윤은 입을 다물었다.

"먹고나서 조금 쉬었다가 다른 분들과 만나게 해드릴게요. 이제 시윤군도 육익의 일원이니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 겸 환영회라도 해야하지 않겠어요?"

유린은 그렇게 말하고는 방안에 배치된 전자레인지에 도시락 두개를 넣고 다이얼을 돌렸다.

"네, 뭐. 어차피 만날거 미리 만나는게 좋겠죠."

"다들 좋으신 분이예요. 남성 분은 시윤군 뿐이지만 그래도 잘 대해주실테니 걱정은 하지 마세요."

펜릴 소대에 있었던 시절에도 소대원이라고 해봤자 힐데와 미나 뿐이었고 옆 소대인 알트 소대원들도 전부 여자였다. 그리고 이제는 육익까지. 주변에 여자는 많은데 제정신 박힌 여자가 없다는게 이걸 두고 하는 말인가?

"글쎄요. 뭐, 일단 만나보면 알지 않을까요? 사실 딱히 끌리지는 않지만. 저로서는 그냥 작전 중이 아닐 때는 서로 무시하면서 사는게 딱 좋을거라고 생각되네요."

"너무 매정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래도 정말로 좋은 분들인걸요?"

"당장 그들을 이끄는 수장이라는 사람이 초면부터 10대 청소년한테 다짜고짜 패드립이랑 묻지마 폭행을 시전 했다는 것부터 신뢰가 전혀 안 갑니다만....."

"아직도 담아두고 있었어요? 뭐....할 말은 없네요. 미워하고 싶으신 만큼 미워하셔도 돼요."

"됐습니다...이미 지나간 일이고, 저는 이 조직에 들어와 버렸으니까요."

"역시 시윤군은 상냥하시군요, 후훗."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웃음이지만, 시윤의 눈에는 그저 사악하게만 보였다. 웃는게 정말 기분 나쁘시네요. 라고 말하려던 찰나, 전자레인지에서 삑삑대는 소리에 그 말은 아마 영원히 시윤의 입 밖으로 나올 일이 없게 되었다.

"아, 다 됐나 보네요."

유린은 전자레인지로 가서 데워진 도시락을 꺼냈다.

"근처 가게가 다 문을 닫아버려서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서 사왔는데...그냥 편의점 도시락이라서 미안해요. 다음에는 시윤군이 먹고 싶으신걸 사드릴테니까 용서해주실거죠?"

"당신 진짜 부사장님이랑 동갑이세요? 하는 짓이랑 외모만 보면 저하고 나이차도 얼마 안 나는 것 같으신데 실제로는 최소 30대 중후ㅂ...."

"한번만 더 제 나이를 언급하신다면 전에 싸운 것과는 다르게 진짜로 전력을 다해서 시윤군과 싸울거예요?"

"네, 네....죄송합니다..."

전혀 죄송하지 않은 말투로 중얼거리면서 시윤은 도시락을 받았다. 자고 일어나니까 별로 배고프지도 않은데, 꼭 먹어야 하나 싶다.

그러고보니....나유린과 어머니가 제법 닮은 것 같았다. 돌아가실 무렵, 어머니도 지금의 이 여자와 비슷한 나잇대였는데.

"......"

"시윤군, 아~ 하세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시윤을 다시 현실로 내팽개친 것은 유린이었다.

"?"

지금 이게 뭐하자는거지?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벙쪄 있었는데, 유린이 도시락에 있던 튀김을 들어 시윤에게 가져다댔다.

"이게 뭐예요?"

"그야, 시윤군이 안 먹을 것 같아서 먹여드리려는건데요?"

"아니, 제가 애도 아니고 진짜 뭐하자는거예요!"

시윤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고개를 돌렸지만 유린도 질새라 튀김을 계속 들이밀었다.

"저는 시윤군이 드실 때까지 이러고 있을건데요? 설마 안 드시겠다는건 아니겠죠? 슬퍼요..비록 편의점 도시락이지만 시윤군을 위해서 사온건데....."

"머...먹으면 되잖아요!"

왜 이 여자는 남의 말을 죽어라 듣질 않는걸까? 잠시나마 어머니 같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울상이 된 표정을 짓는 유린을 보는 것보다는 그냥 먹어주는게 낫겠다. 시윤은 한숨을 내쉬고 튀김을 먹었다.

"먹었어요. 됐죠?"

"잘했어요~ 그럼 한번 더?"

"제 손으로 먹을거니까, 애 취급은 그만 해주세요...."

"네네, 여기 물도 있어요. 기왕이면 저는 제가 먹여드리고 싶었는데..."

"당신이 제 어머니도 아니고, 아니, 어머니라도 지금 이 나이에 누가 먹여주는건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드세요?"

말은 이렇게 했고 부정하고 싶지만....소름이 돋으리 만큼 유린은 돌아가신 어머니 같았다. 기억 조차 가물가물한 어렸을 시절 악몽을 꾸면 어머니 품에 안겨서 잠에 들었었고, 반찬 투정을 할 때는 먹어야 잘 큰다면서 먹여주기도 하셨는데.

부모님의 사망 후 힐데와 같이 살 때와는 상상 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힐데는 최소한의 것만 신경 쓰고 나머지는 전부 방관 하였으며,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힐데가 잠적하면서 끝나버렸으니까.

아무튼 간에, 시윤이 다시 젓가락을 들려던 찰나 유린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네? 그렇군요....알겠습니다. 네. 곧 갈게요."

통화를 끊은 유린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시윤군, 이제 나갈 시간인 것 같네요. 예정보다 빨라요."

"뭐가 말인가요?"

"당신의 육익으로서의 첫 활동이요."

유린은 그렇게 말하며 에코백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건 육익에 오신걸 환영하는 기념으로 드리는 선물이예요."

유린이 건넨 그것은, 유린의 것과 같은 보라색 넥타이였다.









시윤이 사라진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힐데는 필사적으로 시윤을 찾으려 노력 했으나 야속하게도 시윤은 나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수연의 호출에도 듣는둥 마는둥 하면서 주시윤을 찾을 궁리를 하는 것이다.

"소대장, 주선배는 괜찮을거야."

미나 조차도 걱정이 되는지 힐데를 달랬지만 힐데는 손톱만 물어뜯으며 시윤을 걱정할 뿐이었다.

"델타세븐 측에서 다시 한번 협력 요청이 왔습니다."

이수연은 그렇게 말하며 펜릴 소대를 쳐다보았다. 언제나 능글 맞은 표정으로 미소 짓던 소년의 빈자리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리플레이서 사건 이후 델타세븐은 이면 세계에서 침식체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빔 프로젝터로 영상과 사진이 띄워졌다.

"이건..."

"방금 전 찍힌 것들입니다."

화면에는 눈에 띄게 기형적인 모습의 침식체들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소형 침식체 한마리가 자신보다 훨씬 큰 건물을 간단히 부수는 모습,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침식체의 모습, 고작 침식체 몇마리로 가능할 수준이 아닌 파괴 행각을 보이는 모습 등.

"분석 결과, 클리포트 인자의 힘까지 느껴진다고 하는군요."

클리포트 인자. 그 말을 듣자마자 힐데의 관심이 순식간에 수연이 띄운 사진으로 쏠렸다.

"자세히 말해봐."

"다만, 통상적인 클리포트 인자와는 제법 다르다고 했습니다. 전문가인 스승님이 직접 가셔서 보시는게 낫겠군요."

힐데의 머릿속이 불안으로 채워진다. 나유린과의 재회, 주시윤의 실종, 변이된 침식체들, 클리포트 인자....

"뭐하고 있어! 당장 출격한다!"

힐데는 급하게 회의실을 빠져나와 함선이 있는방향으로 달렸다.







델타세븐과 합류 후 이면세계에 도착하자 힐데는 재빠르게 함선에서 내렸다. 평소와는 다른 소대장의 초조하고 급박한 모습에 미나 역시 걱정이 되었는지 힐데에게 말을 걸었다.

"소대장, 진짜로 괜찮은거 맞아? 주선배가 없어졌다고 너무 긴장된 것 같은데..."

"그건 네가 걱정할게 아니다. 너는 네 걱정이나 하도록.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잠깐, 저기 좀 보십시오!"

카일이 총구를 겨누며 바라본 곳에는 긴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어떤 여성이 뒤돌아보고 서 있었다. 침식체와 알 수 없는 위협이 들끓는 이면 세계에 가녀린 여성이 있다니, 하지만 뒷 모습만 마주했을 뿐인데도 힐데는 그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한 때는 등 뒤를 맡기고 싸웠던 믿음직한 동료이자 제자였으나....

"오셨군요, 스승님."

이제는 적대하며 싸워야 하는 운명의 여자. 나유린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펜릴 소대, 알트 소대! 전투 준비!"

"전원, 전투 태세를 갖추십시오!"

"와아....연약한 여성을 향해서 무자비하게 공격을 하시겠다니 너무하시네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힐데는 재빠르게 시선에서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유린의 앞에 도달했다.

"이런."

힐데는 매섭게 유린의 멱살을 잡으면서 쏘아붙였다. 어린 소녀의 외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나운 눈빛과 언행.

"이번에는 또 무슨 개 수작이지? 주시윤이 사라진 것도 네 짓이냐?"

"글쎄요. 과연 제 짓이라고만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유린은 옛 스승에게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멱살을 잡혔고, 자신에게 총구, 칼날이 들이밀어질 상황인데도 유린은 시종일관 여유로움을 유지할 뿐이었다.

"하지만 저한테도 비장의 수라는건 있으니까요.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죠."

그 말이 끝나자 누군가가 힐데를 향해서 기습 공격을 해왔다.

"큭-!"

갑작스러운 기습에 힐데는 나유린을 놓치고 말았다. 간신히 공격을 막아냈지만, 힐데는 자신을 향해 휘둘러진 습격자의 검을 보고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

칼등이가 없는 붉은 날의 검. 뱀의 허물처럼 벗겨지는 검을 가린 검은 천. 수백, 수천번도 더 봐왔던 검. 전장에서는 거의 언제나 함께였으나 절대, 자신에게 휘둘러질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그 검.

가능성은 둘이었다. 습격자가 검의 원래 주인에게서 어떠한 방법으로건 검을 습득해 사용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어이쿠, 역시 스승님이네요."

습격자가, 그 검의 주인이라는 것.

"어....어....?!?!"

습격자에게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습격자는 힐데에게서 한발짜국 떨어져, 그 호박색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제가 누군지는 아시겠죠?"

"너는....!"

힐데는 식은 땀을 흘리며 습격자를 노려보았다. 목소리와 체격으로 봐선 아마 10대 후반의 남성. 유린과 같은 색의 넥타이, 후드가 달린 긴 남색 후드 집업. 얼굴은 후드 모자와 검은색 마스크로 가리고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것 같다.

"역시 기습 공격을 해도 스승님은 스승님이네요."

그리고 습격자는 후드와 마스크를 벗었다.

"그 동안 얌전하고 착하게 있었으니, 일탈 좀 즐겨도 문제될건 없겠죠?"

펜릴 소대의 소대원, 주시윤. 아니, 이젠 전 펜릴 소대의 소대원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펜릴 소대의 소대장인 힐데에게 자의로 공격을 감행 했다는것은 이미 더 이상 펜릴 소대를 아군으로 보고 있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그 증거로, 펜릴 소대의 상징인 늑대 마크가 새겨진 제복과 늑대 장식은 현재 시윤의 모습에서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

.

.

.

.

.

사실 한참 전에 써놨던건데 쉬는 김에 그냥 올림. 나중에 짤도 그려서 다시 재업하겠습니다 아마 다음화가 마지막 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