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들은 서문에서부터 밀려들었다. 석재와 목재로 만든 벽에 균열이 생기고 균열 너머로는 횃불이 넘실대었다. 바리케이트를 무너뜨린 고블린들은 기다리고 있던 난장이들의 화살 세례에 손쉽게 쓰러져 나갔다. 그러나 하나 또 하나. 고블린들이 쓰러질 때마다 난장이들이 쌓아 올린 돌과 나무들 또한 착실히 치워져 나가고 있었다. 균열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경고의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이에 응답하는 이는 없었다. 이미 에크룬드의 난장이들은 최후를 맞이할 마지막 장소를 미리 택해놓았으니, 거대한 터널의 어딘가 혹은 선조들의 전당 어딘가에서 그저 다가올 차례를 기다릴 뿐이었다.
마침내 서문의 문간까지 다다른 고블린들은 난장이들의 도끼와 망치 앞에 무수히 쓸려나갔다. 허나 겨우 이제 시작이었을 뿐. 숲 고블린들이 뚫고 들어왔다. 줄지은 거미들이 벽면과 석주들 사이에 다닥다닥 매달려 미끄러지듯 쏟아졌다. 뒤이어 거대한 아라크나록 거미 위에 올라탄 놈들의 추장이 등장했다. 괴수의 두터운 거죽 앞에 난장이들의 화살은 무력하게 튕겨 나갔다. 놈의 아가리에서는 맹독이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에 자극받은 것이었을까. 괴수의 등장과 함께 고블린 무리의 준동은 더욱 심해졌다. 무수히 밀려드는 돌창과 화살들. 지상에서만도 난장이들의 손에 수천은 쓰러졌던 고블린들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수효는 전혀 줄어들지 않아 천을 가볍게 웃돌고 있었다.
그와 비슷한 시각에 남문에서도 공격이 시작되었다. 줄잡아 쉰 마리는 넘는 트롤들을 앞세운 공세. 몸에서는 온통 썩은 물고기와 수초의 악취를 내뿜는 올리브색 거죽의 강 트롤에 청회색 암석과도 같은 거죽을 가진 산악지대의 돌 트롤들, 갈색 피부 위에 붉은 초승달 문양이 선명하게 드러나있는 황야 트롤과 단도만 한 길이의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검은 거죽의 평범한 트롤까지. 온갖 종류의 트롤들이 에크룬드로 모조리 모여든 듯했다. 매섭게 쏟아지는 방어자들의 화살 세례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거침없이 앞길을 막는 돌더미들을 치워대기 시작했다. 그 너머에는 잔뜩 흥분한 오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얼마 만인가. 트롤들을 바라보던 가빅은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만족감을 맛보았다.
이제 세상은 그에게 너무나도 단순해 보였으니, 그의 삶에 남아있는 유일한 것이라고는 그 자신과 손에 쥔 도끼 그리고 끝없이 베어 넘겨야 할 적들뿐이었다. 그는 가능한 한 이 세 가지를 오랫동안 쥐고서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끝을 맺겠지.
어쩌면 삶의 종지부를 품어 안음으로써 그는 모든 것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 모든 두려움과 기대, 욕심과 야망들에게서. 그의 삶을 오랫동안 흐트러뜨려 놓았던 것들에게서. 최후의 맹세를 올리고서 그림니르의 슬레이어가 되는 것으로 그는 마침내 행해왔던 일들은 결코 돌이킬 수 없음을, 그의 명예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죽음과 그에 걸맞은 영광을 찾는 것. 이로써 그는 다시 한번 선조들의 전당에 들어설 기회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가빅은 손에 쥔 도끼를 내려다보았다. 아직은 손에 낯설은 물건. 그림니르의 사당에서 가져온 도끼의 날에는 갑주와 살을 가르는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룬의 표면을 타고서 깜빡이는 마법적인 빛이 명멸하는 것이 보였다. 너도 싸움을 고대하고 있는 거냐?
슬레이어는 곁에 자리하고 있는 형제들의 초조함을 느꼈다. 마침내 달려나갈 시간이었다.
트롤들은 곡괭이와 망치를 들고서 저항하던 난장이 동포들을 손쉽게 무너뜨렸다. 울퉁불퉁한 우악스런 주먹이 갑주째 몸통을 우그러뜨리고, 날카로운 발톱은 배를 찌르고 들어가 희생자의 내장을 발라냈다. 나무 둥치를 통째로 뜯어온 듯한 몽둥이가 휘둘러질 때마다 누군가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가빅은 차분히 한 놈을 상대로 정했다. - 물갈퀴 달린 손을 하고서 늘어진 귓바퀴를 펄럭이는 강 트롤 한 마리. 놈의 늘어진 머리털을 따라 온갖 종류의 뼈와 오물들이 대롱거렸다.
도끼날이 괴수의 다리를 내리쳤다. 룬의 힘이었을까. 파고든 날은 너무나도 손쉽게 살과 뼈를 가르고 지나가 이를 예상치 못했던 가빅이 순간 휘청거릴 정도였다.
다리를 잃고서 쓰러진 괴수 위로 올라탄 가빅은 놈의 목을 노리고서 도끼를 힘차게 휘둘렀다. 트롤의 살점들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무참히 난자당하는 순간에도 놈은 조금씩 상처를 재생시키려 들고 있었다. 잘려나간 근육과 피부들이 다시 달라붙으려 용을 쓰고 박살 난 뼈가 절단면에서 다시 삐죽삐죽 자라나고 있었다.
양손에 도끼 한 자루씩을 든 자무즈가 그에게 합세했다. 두 명의 슬레이어들은 트롤의 머리통을 완전히 잘라내 저 멀리 걷어차버렸다.
“첫 번째 트롤이다!” 가빅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훌륭해,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 되진 않도록 하자구.” 자무즈가 화답했다.
가빅은 돌파구를 향해 눈을 돌렸다. 여전히 수많은 트롤들이 동포들을 짓이기며 전당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놈들의 뒤편 어두운 터널 속에서는 질서정연하게 전진해오는 군홧발 소리가 쇳소리와 함께 울려왔다. 블랙 오크. 전신을 철갑으로 뒤덮고서 곡도와 막칼로 무장한 채 머리통에는 뿔난 투구를 뒤집어쓴 무리들.
놈들의 뒤로도 적들의 행렬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실로 끝이 없는 적들의 물결. 마침내 에크룬드 최후의 날이었다.
치열한 전투의 소란 속에서 도끼를 치켜든 가빅은 한바탕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그와 함께 동료 슬레이어 무리들은 하나 되어 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가빅의 입에서는 그토록 오랫동안 함께해왔던 가문의 전투구호가 마지막으로 터져 나왔다.
“드라주트 앙복 카락!”
전에도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와이번과 대면했을 때의 기억. 분명 죽고 말 것이라 생각했었지. 헌데 우습게도 죽음을 확신한 그 순간 오히려 두려움은 힘을 잃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강렬한 감각 앞에서는 다른 모든 것이 희미해졌던 것일까? 기나긴 밤 고블린 무리를 피해 도망치던 때에도 그랬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가족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겠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았던 그때. 오히려 두려움은 그의 가슴 속에 들어설 자리를 잃고 밀려났었다.
기억 속에서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되살아났다. 아버지 스크라피와 어머니 오드헬가. 이제 그는 추억들에서 떨어져 나와 멀리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다른 누군가의 삶을 한 발자국 떨어져 지켜보는 것처럼. 분명 자신의 삶이었건만 이제 그것을 돌이켜보는 그의 눈은 바로 죽은 자의 것이었다.
프리에드라와 혼약을 맺던 날도 떠올랐다. 맥주는 흘러넘치고 그녀의 미소는 그의 가슴을 얼마나 부풀어 오르게 만들었던가. 그답지 않게 피로연에 들어간 비용조차도 개의치 않았던 날이었다. 부엌을 정리하고, 상을 차리고 또 바닥을 청소하던 그녀의 작은 모습들. 그것은 의지가 된다는 말로도 부족한 무엇이었다. 저 깊은 곳에서부터 그의 삶을 송두리째 지탱해주던 무언가. 그로써 모든 것을 쌓아 올릴 수 있었던 가장 아래서 그를 받쳐주던 삶의 기반.
그리고 할도라. 나의 작고 어여쁜 할도라. 갓 씻은 몸으로 그의 품 안에서 옹알이하던 그 모습. 작디 작은 손가락이 수염 속을 숨바꼭질하며 꼼지락거렸더랬지. 자라나면서 할도라는 어머님의 모습을 너무나도 닮아갔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그랬다. 그가 기억하던 강인하고 자립적인 여장부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찌나 자랑스러웠던지.
훌륭한 삶이었다. 정작 그 속에서 살아가던 때에는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선조들께서 내려주신 삶의 축복들을 소중히 보듬어 감사하며 살아갔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누구보다 힘써 근면하게 일했고, 모두가 그의 자린고비스러운 씀씀이를 비웃고 수전노라 놀려댈 때에도 사실은 손에 들어온 금화보다도 가슴 속 깊은 곳에 몰래 품은 진정 소중한 것은 따로 있었다.
가족이야말로 그 무엇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는 그만의 보물이었다.
진실로 아름다운 삶이었다. 이제는 아름다운 죽음을 맞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