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하라편 통합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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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을 상정해야하느니라. 관리자여."

 

“그렇게 되었더군.”

 

나나하라의 당주는 생사불명 상태였다. 

그토록 위험하다고 말해왔던 마왕의 봉인이 위협받고 있다. 클리포트 게임의 총지휘자로서 시급한 위기상황이 아닌가. 

그런데도 통신기 너머의 남자는 지나치게 무덤덤했다. 

짜증이 확 솟구쳤다. 로자리아는 이 불쾌한 감정을 딱히 숨기지 않았다.

 

"그게 끝이냐? 그대는 너무 태평하구나."  

 

"침착할 뿐이네. 보고내용으로 추정컨대 나나하라 당주는 아직 살아있다고 봐야겠지. 지원 장비는 출발했네. 로자리아. 

시간에 맞출지는 확실치 않군."

 

관리자만큼 여러번 세계를 반복하지 않은 그녀는 아직 이 끔찍한 혼합체가 깨어났을 때 벌어진 일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만약 괴물이 풀려나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그대를 보낸 것인데."

 

"이미 물이 엎어진 것을 어쩌겠느냐? 내 사과라도 듣고 싶나?"

 

"아니. 그런다고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먼저 일을 수습해야겠지."

 

"그래서 이렇게 통신중이 아니냐. 묻는 말에나 착실히 대답하거라."

 

"적어도 일본은 멸망하네. 확실히. 그리고 한국도 화를 피하기 힘들겠군. 더불어 세계 침식률이 위험할 정도로 치솟을 것이고.

우리 계획에 전면적인 수정이 필요하겠지."

 

"말이 좀 이상한데. 각성한 클리포트의 마왕이 깨어나는 일이 곧 세계의 멸망이 아닌가?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오로치는 멸망 그 자체는 되지 못한다. 로자리아. 

덧붙여 말하자면, 비록 위급상황은 맞으나 아직 대처할 여지는 남아있지."

 

"무슨 뜻이냐?"

 

관리자는 가르쳐주었다.

 

* *

 

"...승님. 스승님!"

 

"왁!"

 

로자리아는 눈을 번쩍 떴다. 몇 시간 전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방의 다다미에 누워있던 그녀의 위로 주시윤의 얼굴이 가까이 들이밀어져 있었다. 

당황한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버둥거려 그를 밀어냈다. 

앙탈을 받아낸 주시윤이 얼굴을 확 찌푸렸다. 

 

"이건 무슨 짓일까요. 스승님."

 

"너, 어디 감히 숙녀에게 함부로 얼굴을 들이미느냐!"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니까요. 치후유 양이 깨어났습니다."

 

"큼. 크흠. 그런가. 선행 부대로부터 연락은?"

 

"당주가 남긴 메세지가 정확하더군요. 침식체들이 우글거린답니다. 

교두보는 겨우 세운 것 같습니다만 그들만으로 진입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흥. 기대도 하지 않았다."

 

로자리아는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흘끗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저택 습격으로부터 다섯시간 남짓 지났다.

점점 당주가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낮아지고 있었다. 

 

나나하라 치후유가 깨어날 때까지 지체한 시간 만으로도 빠듯했다. 더는 본사로부터의 지원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관리자가 그녀에게 귀띔해준 말이 사실이라 해도 이제는 움직여야 했다.

 

"치후유 양이 도움이 될까요?"

 

"글쎄. 어쨌든 손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다."

 

"치후유 양은 부상자입니다. 들으셨을텐데요. "

 

"그렇다해도 나나하라 치후유는 필요하다. 그녀가 그림자를 맡아줘야 해. 적어도 시간벌이는 해주겠지."

 

코핀으로부터의 지원 없이 로자리아 혼자 강적들 모두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사도는 유미나의 장비까지 동원한다면 처리할 수 있겠으나, 

나나하라 치나츠에게 도달하기까지 분명 그림자와 조우할 것이며 처리해야 할 침식체도 다수일 것이 분명했다.

부상자라고 사정 봐줄 여유는 없었다.

 

"사나에는?"

 

"치후유 양의 치료실 앞에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누운 채로 손을 내밀었다. 

본 체 만 체 하던 주시윤은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는 로자리아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곧 못 이기겠다는 듯이 잡아 당겨주었다. 피식 웃으며 일어난  로자리아는 엉덩이를 툭툭 털어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자. 움직이자. 일분일초가 아쉽구나."

 

"태평하게 누워있으셨으면서."

 

로자리아는 뒤따라오는 주시윤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어이쿠, 하며 주저앉은 그를 내버려두고 목적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치료중인 나나하라 치후유의 방 앞에 하야미 사나에는 정좌해 있었다. 

다가가 사나에의 얼굴을 들여다본 로자리아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걷어찼다.

 

우당탕. 볼썽사납게 쓰러진 사나에는 비칠비칠 일어나 앉았다. 

패악질에 가까운 행위를 당했음에도 분노의 감정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시커멓게 죽어버린 눈은 공허함으로 가득했다.  

 

“꼴사나운 짓은 그만둬라.”

 

“...다 끝났습니다.”

 

"아니. 봉인이 깨어졌다는 전조는 없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느니라."

 

"제 알량한 거짓말 때문에 당주는 죽고 말겁니다."

 

로자리아는 성큼 다가가 고개숙인 사나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초점없는 사나에의 눈에 한껏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까득. 이 형편없는 년이.

이빨을 간 그녀는 오른손을 힘껏 치켜들었다. 

짝. 짝. 사나에의 양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감히 내 앞에서 목숨을 걸 때의 기세는 어디 갔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각오였느냐!"

 

"...어떡하란 말입니까?"

 

"쫓아가야지. 가서 이 짓거리를 저지른 놈들을 모조리 태워버릴거다."

 

"불가능합니다. 적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강한지 전혀 모릅니다. 우리만으론 할 수 없습니다."

 

"흥, 그럼 싸움에 진 개처럼 주저앉아 시간이나 조지고 있던가. 네 죽은 주인이 퍽이나 기뻐하겠구나."

 

폭력에도 반응하지 않았던 사나에가 분노한 기색을 드러냈다. 로자리아를 쏘아보았다.

 

"....주인님을 입에 담지 마십시오."

 

"화를 낼 번지수가 틀렸구나. 사나에. 분노가 향해야 할 곳은 내가 아닌데."

 

"방법이 있습니까?"

 

"적의 위치가 명백하다. 소수정예로 돌파해야겠지."

 

"자살행위입니다."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당주는 죽는걸 모르느냐? 그리고 곧 우리들도 다 죽겠지. 

좋다. 더 말하기 입만 아프군. 포기하던지 말던지.

계속 땅이나 파고 있거라. 저 안에 있는 녀석은 어떨지 모르겠구나."

 

"치후유 님을 데려갈 생각입니까."

 

"그래."

 

"이제 막 깨어났습니다. 몸도 성하시지 않습니다."

 

"흥. 사정 봐줄 때인가? 무엇보다 그녀는 당주의 호위다. 

언니가 살아있다는 가능성이 있는 한 스스로가 포기하지 않겠지." 

 

로자리아는 틀어쥐었던 멱살을 풀어주었다. 

사나에는 힘없이 마루에 주저앉았다.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쥔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바랬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공범자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일은 벌어졌지. 

그러니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을 할 생각이니라. 주둥이만 나불대놓고 포기해버린 네년과는 다르게."

 

구 관리국 시절보다 기개가 좀 나아진 줄 알았더니. 실망이로다.

정신차리지 못하면 아쉽지만 버리고 갈 뿐이다. 싸울 의지가 없다면 억지로 끌고가봐야 짐이 될 뿐이었다.

 

싸늘하게 사나에를 노려보던 그녀는 헛기침 소리를 들었다.

뒤늦게 도착한 주시윤이 곤란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거리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끝나셨습니까?"

 

"보다시피. 맹랑이는 어디 있느냐. 주시윤."

 

"치후유 양의 치료실에 함께 있습니다."

 

"그렇군. 두 사람이 나오는대로 출발한다. 준비해라."

 

"아뇨. 저는 남겠습니다."

 

우뚝. 로자리아는 주시윤에게 향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잘못 들었나. 귀라도 후비고 싶었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남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 나와."

 

로자리아는 주시윤의 손을 붙잡아 끌고 나왔다. 

사나에 앞에서 싸움박질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주시윤은 평온한 얼굴로 순순히 따라왔다. 더 성질이 났다.

 

그녀는 복도로 나오자마자 주시윤을 밀어붙였다. 도망치지 못하게 양손을 벽에 짚었다.  

덩치는 로자리아가 훨씬 작았으나 뿜어내는 기세는 몇 배는 더 강했다.

주시윤은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던 그녀의 신경을 제대로 건드렸다. 

남색 눈동자 속에서 시뻘건 진홍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후달리니 숨어있겠다는 농담이라면 집어치워라. 그럴 때가 아니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진심인데요."

 

"전력이 부족하다는 건 너도 충분히 알텐데."

 

"압니다. 그래도 남아야 합니다."

 

로자리아는 습관처럼 튀어나가려는 손찌검을 자제했다. 

뺀질거리기는 했지만 주시윤은 상황을 가릴 줄 아는 제자였다. 필경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터져 나오려는 화를 가까스로 눌렀다.

 

"...무얼 숨기고 있느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아가리 다물고 따라와!"

 

"싫습니다."

 

"주시윤!"

 

"어차피 전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개소리 집어치거라! 빙빙 돌리지 말고 이러는 이유를 말해. 쥐어패서 끌고가기 전에."

 

쿵. 로자리아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휘두른 주먹에 벽에 실금이 갔다. 

스승이 만든 흔적을 힐끔 쳐다본 주시윤은 감겨있던 실눈을 활짝 떴다.

 

"먼저 말씀하시죠."

 

"뭐라?"

 

두 시선이 부딪쳤다. 잔뜩 화가 난 스승에게 굽히지 않고 주시윤은 말을 이어갔다.

 

"본사와 통신하셨죠. 스승님."

 

"그게 어쨌단 말이냐?"

 

"정말 한치가 급한 상황이었다면, 치후유 양이 깨어나건 말건 우린 이미 출발했을겁니다. 

전력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스승님이 계신 이상 작전이 실패할 리는 없죠. 

그렇게 만드실테니까. 그런데 우린 아직 여기 있습니다." 

 

흠칫 놀란 로자리아는 한 발짝 물러섰다. 주시윤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바뀌었다. 

큼직한 손아귀가 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하려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당주의 생사가 불분명해진지 꽤 오래 지났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통제 가능한' 상황이겠죠?"

 

"......"

 

"하하. 말해주지 않으시겠죠. 항상 그러셨으니까. 들을거란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제 멋대로 추측해보죠.

왜 우리가 아직 출동하지 않았을까요. 본사로부터 지원이 오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아마 테라사이드 사태 때 사용한 장비일까요. 

치후유 양이 깨어나는 것을 기다린 것 뿐만 아니라 그걸 기다린 것도 있을 겁니다."

 

정답이었다. 숫자로 압도할 수 없는 이상 화력의 우위로 적을 짓밟아야 했다.

장비가 제 때 도착한다면 혼자서도 이 상황을 능히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앞에서의 싸움에서, 개인전에 특화된 저는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데려가려는 이유를 말씀하십시오."

 

"그러니까 손이 아쉽다고.."

 

"거짓말은 그만 하세요."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으나 관리자는 너무 늦기 전에 지원을 보내줄 것이다. 그런 남자였으니까. 

만에 하나라도 증원이 제 때 이루어지지 못해 현재 전력만으로 봉인지에 진입하게 된다면,

보조화력을 지원할 수 있는 사나에나 폭발력을 가진 유미나는 도움이 된다.

하물며, 만전의 상태가 아닌 치후유조차 일대일 대결로 그림자를 묶는데 필요한 인력이었다.

 

그러나 주시윤은 다르다. 그의 실력은 분명 돌파 과정이나 사도와의 싸움에 한 손 거들기에 충분했으나,

어차피 결전은 지원 유무와 상관없이 로자리아 본인이 어떻게든 사도 앞에만 도달하면 끝날 싸움이다.

냉정하게 바라봤을 때 주시윤은 반드시 필요한 전력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주시윤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일부러 손이 부족하다는 말까지 꺼냈다.

하지만 눈치 빠른 그녀의 제자는 통제된 정보들 사이에서 감추었던 진실을 통찰해냈다.

로자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핑계를 대며 실랑이할 시간이 없었다. 

 

"...네 피를 노리는 자가 여기 어딘가 있다. 너를 떼놓고 싶지 않다."

 

주시윤은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스승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답지 않게도 순순히 말해주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언제는 특별취급을 기대하지 말라며 매몰차게 대하더니.

지금은 손에서 놓아주기 싫은 귀중한 보물을 아끼듯 행동하시는군요.

당신이란 사람을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스승님.

 

로자리아가 말한 사실은 주시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그가 여기 남고자 하는 이유였다. 

 

습격당한 저택에 가장 먼저 도착한 주시윤은 생각보다 많은 생존자를 발견했다. 

필경 전멸했을거라고 생각했던 저택에는 나나하라 치후유 뿐만 아니라 카운터들, 심지어 일반인들까지 몇몇 생존해 있었다.

 

습격해왔던 침식체들은 대부분이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도륙당한 상태였다. 

처음엔 당주와 치후유가 저항하면서 만들어낸 시체들이라고 생각했으나, 곧 주시윤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침식체들을 박살낸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발견한 흔적은 본 기억이 있는 것이었다.  

육중한 것으로 때려부수듯 베어낸 상흔들은 치후유의 장도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궤적이 아니었다. 

다른 무기였다. 예컨대, 대검 같은.

 

주시윤이 아는 로자리아는 현장을 직접 확인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상대 역시 그걸 잘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대놓고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보란듯이 남겨진 존재감은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이 저택은 인질입니다."

 

"누구의?"

 

"방금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제 3자가 있다고. 스승님도 그게 누구인지 짐작하고 계실텐데요."

 

"......하. 맙소사. 어디 숨어있지?"

 

"모릅니다. 확실한 건, 제가 떠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다면 더더욱 너를 여기 남길 수 없다."

 

"못 갑니다. 제가 떠나면 다 죽일테니."

 

로자리아의 얼굴에 얼핏 절망이 스쳐지나갔다. 스승을 주시하고 있었던 주시윤은 잠깐 스쳐간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랬다고 같잖은 정의감을 내세우는 것이냐? 너는 그런 녀석이 아닐텐데."

 

"그렇죠. 근데 기억 나십니까. 스승님이 제게 말했습니다. 힘을 가졌다면 사람들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허울좋은 핑계였다. 그녀가 꺼냈던 말은 그가 어린 시절 힘을 함부로 휘두르지 못하게 교육했던, 교과서적인 발언일 뿐이었다.

애초에 로자리아와 주시윤 둘 다 정의감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나하라 저택의 사람들은 철저히 타인이다. 정이 들 시간도 없었다.

냉정히 말해 주시윤에게 있어서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이런 핑계를 굳이 대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직 경애와 증오 사이에서 고뇌하며, 스승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 주시윤은.

일찌감치 스스로의 감정을 결론내버린 그 여자가 스승과 만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맞닥뜨려, 자신보다도 먼저 결말을 내버리는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를 상대하는 것은 자신이어야 했다. 또한 여기 로자리아가 남아있어선 안 되었다.

 

"정작 스승님은 안 지키시는 말이지만. 못난 제자라도 잘 해야죠. 스승님은 스승님의 일을 하십시오. 저는 제 일을 할테니." 

 

그래서 그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내뱉었다. 전부 탄로날 것을 알면서도.

 

"좀 그럴듯한 핑계를 대는게 어떠냐."

 

"하하. 바로 알아채시네요. 티났나요?"

 

"막장 드라마 짬이 몇 년인데 모르겠느냐."

 

몸에서 힘을 뺀 로자리아가 주시윤에게 기대왔다. 폭력이라도 휘두를까 긴장했지만 탄탄한 복근에 힘없이 작은 머리가 얹혔다. 

콩. 콩. 심술을 부리듯 부딪혀오는 박치기는 아프지 않았다. 끓어올랐던 화는 진정된 걸까.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손을 얹자 가소롭다는 듯 쳐낸다. 까다로운 사람.

 

"관둬라. 건방지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은 왜 해 버릇 하는지. 그러지 말라고 누누히 가르쳤거늘."

 

"전 스승님을 닮아서 남이 시키는대로 잘 안 하거든요."

 

"네 조동아리는 쉬는 법이 없구나. 진짜 이유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냐."

 

"예."

 

로자리아는 다시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기량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주시윤이 죽을 수도 있다. 

자신이 여기 남아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끌고가야 할까.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을만큼 그녀와 제자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게 싫었다. 우스웠다.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로자리아의 본질은 불꽃이었다. 

인간들의 불행과 갈등. 혼탁한 감정들을 장작삼아 타오르는 화염.

타인의 감정 따위는 관조할 유흥거리에 불과했다. 그랬을 것이었다.

 

왜 이리 감상적으로 변해버린 것이냐. 로자리아.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대의란 명목 아래 계약이란 목줄을 차버린 때문일까. 혹은 인간들의 감정놀이를 곁에서 너무 오래 즐긴 때문일까.

 

"..... 절대. 전력으로 상대하지 마라. 정리되면 바로 돌아올테니. "

 

"그러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다."

 

"글쎄요. 해 봐야 알지 않을까요? 마침 잘 된 일입니다. 저도 두 번 지는 건 자존심이 상하거든요."

 

"한 번 지면 두 번 지기도 쉬운데."

 

"그냥 못 이기는 체 넘어가주시죠. 제자 이기는 스승 없다지 않습니까."

 

"난 지는거 싫어한다. 언제나. 항상."

 

"그럼 이번 기회에 한번 져 보세요. 어떤 기분인지 알아 보실겸."

 

"약속해라. 적당히 싸우다 도망가겠다고. 넌 그거 하나는 잘하는 놈이니까."

 

"스승님."

 

로자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주시윤은 스승의 당부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혹시라도, 용혈이 깨어나면 저를 죽이실 겁니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과거에도 주시윤의 마음을 짓밟았다. 대의를 위해 소년의 가장 소중했던 것을 지워버렸다.

 

여러번 반복해왔던 세계에서도 이미 해왔던 일이다.  편집증적으로 그녀는 클리포트 인자의 변수를 제거해왔다.

'소각 과정'에서 소년이 살아남았던 것은 그녀가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 정말, 간신히 일어난 우연에 불과했다. 

 

소년 역시 변종 인자의 보유자. 당연히 위험요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로자리아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던, 같잖은 측은함으로 소년의 목숨을 끊어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부터 실수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 잘라버리지 못했을까. 이제, 주시윤은 그리 쉽게 쳐낼 수 없는 존재였다.

어느새 로자리아는 지나온 세계에서 자신이 마음을 깨뜨려 왔던 사람들과 주시윤을 겹쳐보고 있었다. 


수없이 반복해왔던 그 모든 세계에서 배신을 일삼았다. 심지어 이 세계에서 마저도.

사명을 위해서라 변명한들 버림받은 당사자들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목적을 위해 많은 상처를 남겼음을 알고 있었다.

과거의 로자리아에게는 사소한 일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과거만큼 매몰차지도, 강하지도 않았다. 

대의와, '그녀'와의 계약에 묶여 있었을 뿐이었던 맹수였던 자신과 이 시간을 사는 자신은 다르다.

이제 다시 할 기회는 없다. 이번 세계는, 로자리아에게도 마지막이었다.

 

인정해야 했다. 더는 배신하지 않고 싶었다.

웃기는 일이구나. 쌓아온 죄악은 이미 가늠하지 못할 만큼 깊은데 이제 와서. 나는 이기적이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그녀는 무엇을 말해주어야 할까.

너는 예외라고? 자신이 방법을 찾아주겠다고?.

 

아니. 품은 마음이 어떻든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것은, 로자리아 르 프리데가 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단 한번도 이해를 바라며 살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왔다. 나약하게 말하는 법은 모른다.


더는 관계를 부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나유빈과 이수연. 그리고 그보다 더 전. 이제는 이름도 가물가물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며 걸어왔다.

오직 그에게만 특별할 수는 없었다.


손을 짚어 주시윤과의 거리를 벌렸다.

자조적으로 웃었다. 미움받아도 어쩔 수 없다.


그녀는 불꽃이다. 주위를 집어삼켜야만 계속 타오르는. 

불은 오롯이 타오를 뿐이다. 주위의 온기를 갈구하지 않는다.


"말했을텐데. 나는.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항상 그래왔듯이."

 

주시윤은 물끄러미 스승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신비로운 남색 눈동자 안에는 항상 불꽃이 깃들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으나 조금 달랐다. 바람에 꺼질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잔불이었다. 

닥쳐올 미래를 두려워하는 작은 불빛.

 

그렇군. 그런가.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도시를 집어삼키는 괴물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면서, 고작 말 한마디 꺼내는 건 두려워 하십니까.

매몰차게 말했으나, 감정은. 바보같을 정도로 읽어내기 쉬웠다. 

 

그녀는 참 비겁하다. 

그런 얼굴로 말한다면, 난 또 당신을 용서할 이유 하나를 늘릴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할까요.

 

"알겠습니다. 머리 간수하려면 처신 잘 해야겠네요."

 

"...뭐라? 그게 끝이냐?"

 

"예. 죽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스승님 말마따나 밀리면 도망가겠습니다. 전 가늘고 길게, 오래 살고 싶거든요. 됐죠?"


주시윤은 몰아붙여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토록 강맹하게 자신을 밀어붙였던 팔을 쉽게 떼어낼 수 있었다. 

예측했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황망한 얼굴로 선 로자리아를 지나쳐 걸었다. 

 

"잠깐. 주시윤!"

 

"더 할 말은 나중에 하시죠. 서로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이것으로. 충분하단 뜻이냐?"


"예."


로자리아도 더는 붙잡지 않았다. 스승도 나름대로 생각에 잠길 것이다. 

서로의 결론은 이 시간, 이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해결할 것이다. 지금은 당면한 현실을 우선해야 했다.


오늘 듣고 싶은 말은 충분히 들었다. 그가 대적해야 할 적은 스승의 말마따나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마음을 추슬러두지 않으면 볼품없이 썰릴 것이다. 


지금껏 귀찮은 일은 피해왔다. 그래야 엮이지 않으니까. 어쩌면 그냥 스승을 따라가는게 낫겠지.

그가 내린 결정은 스스로에게도 생소했다. 고개를 돌려 어둑해지는 밖을 보았다.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곧.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을 마주할 것이다.

 

'당신이 걱정할만한 두려운 음모도, 결말도 이곳에 없을거에요.'

 

생사가 불명확해진 여자와, 밤의 정원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주시윤은 칼을 감싼 천을 꽉 쥐었다.

 

글쎄. 어떨지 한 번 확인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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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전체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치후유 닥등이 파트는 다음 편으로 잘랐읍니다...

그래서 계획했던 쌈박질 시작 파트도 한 편 밀렸읍니다....

개추 댓글 항상 카운터 고맙습니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