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하라편 통합 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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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멀어진다. 한여름의 찬란한 태양이 내게서 떠난다.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부르며 쫓아간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
한참을 달리다, 무엇에 걸렸는지도 모르게 넘어지고 말았다.
볼품없이 바닥을 뒹굴었다. 일어서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깨져버린 거울들 뿐이었다.
수천 수만개로 깨진 조각에 비친 얼굴들이 흉하게 일그러지며 일제히 비웃는다.
소용없어.
너는, 언니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치후유는 깨어났다.
의식을 잃기 전에 머물렀던 창고가 아니었다. 낯익은 저택의 천장이었다.
그녀를 어지럽히던 목소리들은 사라졌으나 머리는 여전히 개운치 않았다. 핑글핑글 돌았다.
눈을 끔뻑거리며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독한 소독약의 냄새가 났다. 온 몸에 작열감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살아 있어.
여기저기 힘을 주어 보았다. 움직인다.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상처입었던 부위들이 붕대로 친친 감겨져 있었다.
두통 때문인지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힘겹게 손을 짚고 일어났다.
누워있던 이부자리 옆에 앉아있던 유미나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멋쩍게 웃었다.
"어. 안녕."
"...미나 공?"
"응. 나야. 깨어나서 다행이다."
그런가. 토벌조가 돌아왔구나.
치후유는 아직 멍한 머리로 느릿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분명 침식체들에게 포위된 채 의식을 잃었었다.
우리가 생각보다 오래 버텼던 건가. 그래서 구원이 제 때 도착했나?
그렇다면, 창고에는 자신만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이 구출되었다면, 혹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급해졌다. 매달리듯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랐는지 격통들이 몸을 두들겼다.
"어, 언니는, 언니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간절히 물어오는 그녀를 곤란한 얼굴로 바라본 유미나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발견한 건 너뿐이야. 당주는 없었어."
아.
"....그렇습니까."
CRF가 떨어진 자신을 돌풍의 안으로 밀어넣고 앞으로 나섰던 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의식을 잃기 전에 보았던 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아닙니다."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불을 꼭 말아쥔다. 눈물이 방울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절망은 그녀를 무겁게 짓눌렀다.
"제가 조금 더 강했다면.... 여러분이 오실 때까지 버텨냈을겁니다."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기세좋게 떠들어 댔으면서 형편없이 실패했다.
그토록 노력했건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언니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은 무력했다.
오히려 도움만 받고 말았다. 흉하게도 혼자 살아남아버렸다.
"당주가 죽었는지는 아직 몰라."
치후유는 고개를 홱 들었다. 유미나의 말은 끈적이는 절망에 잠겨있던 그녀에게 한줄기 빛처럼 내려왔다.
언니가, 홀로 남겨진 그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어떻게..? 저희는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는데..”
"네가 발견된 창고 벽에 글자를 새겼더라. 봉인지의 위치와 메세지를 남겼어."
"어, 어떤 내용입니까?"
"글쎄.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일단 우리 소대장은 당주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본대."
"그럼. 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 봉인지에? 토벌조에서 구하러 가는겁니까?"
"치후유."
직전까지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던 유미나는 팔짱을 꼈다. 어느새 냉정하게 굳어진 눈동자가 치후유를 응시했다.
소대장은 치후유의 의지를 존중하라고 지시했다. 본인이 원한다면 구출조에 포함시키라고.
물론 본인은 절대 고사하지 않을테니 사실상 격전지로 함께 갈거라는 의미였다.
이해는 갔다. 전력 하나가 아쉽다는건 유미나도 알았다.
실제로 치후유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설 기세였다.
로자리아가 지시한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석연치 않았다. 이 앞은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전장이다.
치후유는 몸과 마음 모두 성치 않았다. 이대로 그녀는 적의 주요 전력인 그림자를 붙들어두어야 했다.
만전의 상태에도 둘은 겨우 호각을 이루었다. 부상을 입은 지금, 그림자가 능력까지 사용한다면?
까딱 잘못하면 죽게 될 것이다. 침식체는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그녀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어한다.
치후유가 이렇게나 언니를 구하고자 하는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주인 언니를 구하기 위해서? 봉인이 깨어지는 건 가문과, 나아가서 인류의 위기와 직결되서?
쉽게 생각해낼만한, 타당한 이유였다. 하지만, 서슴없이 목숨을 내놓을 정도일까?
그녀의 맹목적임은 이상했다.
정원에서 나누었던 첫 대화와 욕실에서의 시간을 지나, 그 후로도 나눠왔던 이야기들 모두에서.
그녀는 항상 자신의 어떤 것보다도 치나츠를 우선시했다.
타인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그건 남이 듣기 좋은 거짓말에 불과했다.
누구나 위기의 순간에는 본인의 목숨을 우선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나하라 치후유는 너무도 흔쾌히, 자신과 언니의 목숨을 올려놓은 저울에서 언니 쪽에 무게추를 내려놓았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가 품은, 집념에 가까운 뒤틀린 감정 속에 숨은 진심은 무엇일까.
말해주지 않아도 좋았다. 적어도 스스로가 깨닫기를 바랬다.
유미나는 그녀가 자신의 마음도 자각하지 못한 채로 싸움터에 나아가는 것을 보고싶지 않았다.
어떤 결말을 마주하건 자신의 감정을 속인 채로 그곳에 도달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주제넘은 참견임을 알고 있다. 그래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꽁꽁 숨겨둔 치후유의 마음을 들춰보기 위해 정면으로 부딪쳐보기로 했다.
"그걸 네가 알 필요가 있니?"
"ㅡ예?"
무뚝뚝한 목소리가 유미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냉랭히 바뀐 분위기에 치후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사가 그러더라. 침식 증세나 변이는 없지만 증후군이 도졌대. 일단 며칠은 안정해야 될거래.
그것 외에도 여기저기 자잘한 부상도 많아. 즉. 넌 전력 외야.”
"그러나, 저는, 저는 당주의 호위이니.."
"말했잖아. 넌 부상자라고. 발목이나 잡지 않으면 다행 아닐까."
"...방패막이로 쓰이더라도 좋습니다. 언니를 구하러 간다면 함께 갈 겁니다. 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분명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아, 그림자? 네 검술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그건 만전의 상태일때나 그런거지."
유미나는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당황스러웠다. 급변한 분위기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봉인지의 상황은 아무도 몰라. 적이 얼만지도 모르고, 침식 레벨이 어마어마하게 높을 수도 있어. 장기전이 될 수도 있겠지.
과연 고작 D등급 카운터인 네가 쓸모가 있을까?"
몇번의 낮과 밤을 보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인과 이렇게 오랜 시간 소통한 것은 처음이었다.
대화는 언제나 낯설었지만 즐거웠다. 함께 있는 시간은 편안했다. 그래서,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구출조의 임무는 당주의 확보가 우선이야. 전부 챙기는건 힘들거고."
지나칠 정도로 사무적이며, 냉정하게 던져진 언어들은 송곳처럼 치후유를 찔러댔다.
어지러운 머리 한구석으로 슬슬 화가 치밀었다.
"짐이 되는 인원은 낙오하게 되겠지. 살아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런건 알아. 알고 있어. 그래도 나는 가야만 해.
당신도 알고 있을텐데. 당신은 내 마음을 알아줬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그렇다해도, 언니가 살아계실 가능성이 한 줌이라도 있다면 저는 가야합니다!"
"왜?"
"저는, 당주의 호위니까요! 그게 제 의무이자 속죄니까요!"
시리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유미나에게 치후유는 발악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도대체 왜 이해하지 못하는걸까?
내게 언니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고 있으면서!
이미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언니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단다. 기회가 남아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보잘것없는 목숨을 불태워서라도, 못다한 의무를 수행해야한다.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속죄하는 길이다.
"그게 아냐."
격앙된 치후유와 달리 유미나는 여전히 냉정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허울뿐인 말이 아냐. 네 진심을 들려줘."
"뭣, 허울따위가 아닙니다! 제 각오를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언니를 위해서면 제 목숨도 바칠 수 있습니다!"
"그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간이야. 그런데도 넌 자꾸 숨기만 하잖아."
“숨는다고요? 어디에 말입니까? 당신은! 당신은 내 마음을 알지도 못하니까 그렇게 쉽게 말하는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유미나는 치후유가 악에 받쳐 내지른 고함에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을 피지 않고 받아냈다.
“그래. 몰라. 모르는게 당연하잖아? 말해 준 적 없으니까. 난 독심술 같은거 배운 적 없어.
선배나 소대장처럼 남들 표정만 보고도 기분을 읽어내는 것도 못 해.
나는, 엄청 단순하거든. 그래서 누가 직접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 밖에 몰라."
"그러니까 말해줘. 의무니, 속죄니... 전부 네가 만들어낸 이유들이잖아.
그런 것들이 아니야. 그런 것들로는 안 돼. 네가. 정말 언니를 구하고 싶은 이유를 알려줘."
그녀는 그저 담담히, 치후유의 마음 속에 송곳을 하나 더 찔러넣었다.
안 그래도 빙빙 도는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았다.
내가, 만들어낸 이유라고?
입을 우물거렸다. 반박해야 했다.
그녀가 품은 것들은 고작 몇 마디로 폄하되어서는 안 됐다. 허투루 품어왔던 각오들이 아니었다.
떠오르는 단어들은 많았다. 그런데 막상 꺼낼 말을 자아낼 수가 없었다.
왜?
유미나는 무표정하게 치후유를 바라봤다.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에게, 나직이 마지막 한 마디를 풀어놓았다.
"너도 네 마음을 모르는구나."
"뭐, 라고요?"
왜 자신있게 말할 수 없지?
만들어냈다고?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냥,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당연시하며 살아왔다.
그 날 이래로.
떠올려보면 지금과 같은 가을이었다. 전국 검도 대회가 있었다.
일본의 카운터들은 시대착오적인 중세 사무라이로 폄하될만큼 검술에 대한 선호가 강했다.
때문에 당시 유망주로 취급되던 카운터들까지 모조리 참가했다. 단순한 중학생들의 장기자랑이 아니었다.
비각성자였던 치후유는 그곳에서 기라성같은 새싹들을 찍어누르고 압도적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모두가 수군거렸다. 과연 나나하라다. 언니만큼이나 동생도 대단하다.
이번에야말로 인정받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가문에게, 당주와 언니에게.
내심, 그렇게 기대하고 말았다.
시상식에는 사나에만 자리를 채웠다. 깊이 고개 숙인 그녀는 꽃다발 하나만 전해주었다.
두 분은 다사다난하여, 자리를 빛내주지 못하셨습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치후유는 가족을 위해 배정되었던, 비어있는 좌석만 한참 노려보았다.
그럼 그렇지. 바빠서가 아니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던게 아닐까.
그 사람들에게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잖아.
명가는 문무양도라 했기에, 학업에서도 누구보다 뛰어남을 증명하기 위해 밤을 새워왔다.
이미 검만 쥐면 치후유보다 몇 살 위인 사람들도 적수가 되지 못했다.
무엇이든 뛰어든 곳에서는 일 등을 놓쳐본 적 없었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입발린 칭찬들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얼마나 더 증명해야 하지? 그런다고 내 가치가 인정받을 수나 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사나에와 함께 타지 않았다. 도와준 사람들과 뒷풀이를 해야 한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
거짓말이었다. 뒷풀이? 그런걸 할 사람이 있을리가 없었다. 언니의 뒤만 좇아 달려왔던 치후유는 늘 혼자였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달렸는데, 보답조차 받지 못했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동경에서 시작된 질주에 지쳐버렸다. 범인에 불과한 자신이 감히 빛나는 태양을 동경해선 안 됐는지도 모른다.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어디까지 거리를 좁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아갈 날개가 전부 타버린 것 같았다.
정처없이 걸었다. 체념하고 나니 더없이 허탈했다.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는 사라져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으로 부려본 투정이었다. 찾지 않는다면, 그냥 죽어버릴 생각이었다.
아무 기차나 잡아탔다. 종점에 도착하면 내렸다.
다음 기차에 올라탔다.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한 휴대폰도 어디선가 버렸다.
목적지도 없이, 바다에 닿을 때까지. 서쪽 끝까지 달아났다.
그녀는 이름 모를 작은 어촌에 도착했다. 거기서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을 보냈다.
신경이 너무 곤두서서 쪽잠밖에 자지 못했다. 돈은 갖고 있었지만 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언제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노력한 날 알아줘, 내가 당신들에게 소중하단 걸 알게 해 줘. 의미있는 사람이라고 믿게 해 줘.
비가 왔다. 싸늘함이 묻어나기 시작하는 가을비. 가문은 치후유를 찾아냈다.
직접 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언니였다.
겨우 시종 한 명만 대동한 채였다. 언니는 조그마한 절의 처마 아래, 비를 피해 숨어있던 자신을 찾아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옷차림도 엉망이었다. 만나자마자 언니는 격한 울음을 터트렸다.
기운없이 주저앉아있던 자신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완전히 흐트러진 언니의 모습을 보면서 기묘한 쾌감과 만족감을 느꼈다. 그런 한편으로 위화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날 방치했으면서,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혹시 무언가, 잘못 생각해왔던 것은 아닌가?
그리고 사건은 일어났다.
일본 굴지의 수호 연합이었던 나나하라 가문은 주시하는 눈이 많았다.
경쟁자도, 그들이 차지한 것을 노리는 승냥이들도 수두룩했다.
대동한 시종은 꽤 오래전부터 가문에서 일했으나, 그 중 하나와 연이 닿아있었다. 처음부터 감시역으로 심어진 사람이었다.
귀중한 다음 대의 당주가 가문 밖으로, 변변한 호위도 없이 나왔다. 그들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납치당했다. 언니가 먼저 습격당해 기절했다.
칼은 갖고 있었으나 상대는 카운터였다. 아직 비각성자였고 지쳐있던 그녀도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
둘은 따로따로 감금되었다. 사고가 벌어진 상황을 따라잡지 못했다.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그대로 며칠이 더 지났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치후유의 얼굴이 나오는 영상을 촬영하며 요구사항을 읊으라고 강요했다.
납치범들은 막대한 이터니움과 가문이 가진 이권 중 일부를 원했다.
거부했다. 처음엔 위협적인 말뿐이었다. 나중에는 조금씩 수위가 올라갔다. 머리채를 잡고 뺨을 때렸다. 배를 걷어찬 적도 있었다.
가끔 옆방에서 성난 고함소리와 물건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썅. 이왕 좆된거 차라리 둘 다 돌려버린 다음 다른데 팔아버립시다. 그리고 우린 걍 이 나라 뜨는거고.
마침내 그런 말이 나온 날이었다. 와병중이었던 당주가 직접 이끈 가문의 정예들이 납치범들을 찾아냈다.
진압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그들은 전원 살아나가지 못했다. 자매는 구출되었다.
투정의 결과는 너무나도 처참했다. 끔찍한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대로 내쳐질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여기서 그냥 죽게 될지도 몰랐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이 일은 불문에 붙이겠다. 전원, 기억에서 지우도록 해라.
하지만 당주는 그렇게 선언했다. 동반했던 가문 직속의 카운터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귀를 의심했다. 가물가물했던 의식이 끊어졌다.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가벼운 영양실조였단다. 그것 뿐이었다.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당주는 그녀에게 질책을 퍼붓지 않았다.
오랜 시간 앉아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들여다보던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너를 너무 혼자 두었구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용서해다오.
이상해.
하야미 사나에가 우는 모습을 그녀는 그 때 처음 보았다.
언제나 엄격했던 시종장은 표정을 무너뜨리며 그녀에게 몇번이고 사죄했다.
송구합니다. 제가 미숙하여 아가씨의 괴로움을 알아채지 못했사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이상해.
가문으로 돌아왔다. 유령처럼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거라고 생각했다.
주위의 눈이 무서워 내치지 않을 뿐 그녀의 인생은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모두가, 일상의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그녀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었다.
이상해.
옆 병실에 언니가 있었지만 퇴원할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앓아 누웠다가 그녀보다 조금 늦게 깨어난 언니는 거의 세 달을 병원에 머물렀다.
당주와 사나에의 대화를 엿들었다. 언니에게 마음의 병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지옥보다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온 첫 날. 잔뜩 긴장하며 만난 자신에게 언니는 어떤 탓하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왜 도망쳤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깨뜨리기 쉬운 것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일 등 축하해 치후유. 못 가서 미안했어.
....이상해.
왜, 아무도 날 탓하지 않아? 어째서 내게 사과하는거야?
잘못을 저지른건 나였는데. 수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쳤는데.
언니를 돌이킬 수 없을만큼 상처입혀 버렸는데.
나는. 어떻게 용서받은거야?
그제서야 나나하라 치후유는 깨달았다.
그녀가 세심히 둘러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당주에게. 그리고 언니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자신은 의미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 한번도, 자신을 무시하거나 밀어낸 적 없었다.
모두 그녀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만들어냈던 환상에 불과했다.
언니는 걸음마를 시작했던 날부터 집안에 갇혀 한 발짝도 편히 나오지 못했다. 일분일초도 사소하게 쓰지 못했다.
그러나 치후유는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원하는만큼 시간을 낭비할 수 있었다,
어린 마음에 무관심이라고, 방관이라 여겼던 것들은 배려였다.
언제라도 그만두고 자유롭게 발을 뺄 수 있도록. 그들은 지켜본 것이다.
누구도 나서서 그녀에게 수천년을 이어온 가문의 묵직한 의무를 지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방법이 서툴었다. 세련된, 애정이 가득한 사랑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녀를 생각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미련한 자신은 그 모든 배려를 산산조각 냈다.
눈치채지 못했다. 혼자 생각하고, 거기 매몰되어갔다. 멋대로 결론짓고 행동했다.
견디지 못하고 유치한 발버둥을 쳤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치졸한 미움은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애초부터 동경에서, 언니를 향한 존경과 사랑에서 시작되었던 감정이었다.
인정받고 싶었던 이유는 찬란한 언니의 곁에 있고 싶어서였다.
그 자리를 죄책감과 공포가 채웠다. 감히 언니를 좋아할 자격이 없었다.
도저히 수습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감히 몇마디 말로 해결할 수 없었다.
남들이 모른 척 행동해준다고 해서 그녀가 저지른 죄악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으로 버림받는 것이 무서웠다. 언제라도 손바닥 뒤집듯 돌변해 자신을 쳐내버릴것 같았다.
지독하게 이기적이란 사실은 알고있었다.
모름지기 용서를 빌어야 했다. 그러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두려웠다. 전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용서받기를 바라고, 진심을 터놓는 것이 두려웠다.
자신을 대하는 얼굴 아래에 숨어있는지도 모를, 증오와 마주하기 무서웠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일생을 바치기로 정했다.
부수어버린 곳을 메우기 위해 내어줄 것은 목숨밖에 없었다.
그런, 내막을 아는 사람들에게도 그럴싸한 핑곗거리를 만들었다.
가문에 내려오던 워치를 계승했다. 이를 악물고 검에 매진해 호위의 자리를 얻었다.
다시는 누구도 언니를 해할 수 없도록 지키기로 맹세했다. 그렇게 이유를 하나씩 늘려갔다.
스스로를 묶는 매듭들을 만들어 구속했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듣기 하나씩 좋은 말들을 덧씌워, 그녀는 삶의 의미를, 언니의 곁에 머무를 이유를 빚어냈다.
그렇게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그녀는 아직 시작점에 있었다. 언니에게 사과하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었음에도 아직까지 미뤄왔다.
이런 이기적이고 비겁한 자신에게 언니는 먼저 다가와주었다.
'언제나 사랑해. 앞으로도 쭉. 너무 늦게 말해서 미안해.'
대답해주지 못했다. 늦었지만 답을 돌려줘야 했다. 그런데 언니는 곁에 없었다. 너무 끔찍했다.
자각은 한순간이었다. 일찍이 해야 했던 일로부터 쭉 도망쳐왔다. 이대로 언니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무서웠다.
눈을 부벼도 고장난 것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냥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내서 울었다.
"치후유."
다시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더는 차갑지 않았다. 엄격하지만 다정했다.
온기로 가득한 연보랏빛 눈동자가 그녀를 품었다. 생각의 늪에 잠겨 자책하던 자신을 현실로 힘껏 건져올렸다.
"너는, 어떻게 하고싶어?"
"저는, 저는......언니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요...."
"왜?"
"아직, 언니에게 내가 더. 훨씬 더. 너무너무 미안했다고... 나도 사랑한다고 대답해주지 못했으니까요..."
속죄. 의무. 듣기는 좋았다. 거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부 나약하고 서툴었던 자신이 만들어냈던 허울 좋은 핑계였다.
그 날,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했을 사과는 아직까지도 미뤄둔 채 그대로 있었다.
언니가 보고싶었다. 구해야 했다. 마주한 적은 강대했다. 목숨을 태워버린다고 해도 구해내지 못한다.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제발, 도와주세요..같이 가게 해 주세요. 언니를 구할 수 있게.."
너무 울어 끝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치후유는 애원했다.
유미나는 오열하는 치후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쿡쿡 쑤셨다. 잘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분명 속마음을 찾아냈다.
비로소, 이 아이에게 끌림을 느꼈던 이유를 깨달았다. 뒤틀린 채 전장으로 내모는 것이 자꾸 왜 마음에 걸렸는지 알았다.
아마 본능적으로 알아본 것이리라.
나나하라 치후유는, 과거에 사로잡혀 울고있는 또 하나의 유미나였다.
그렇다면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그치. 나래야.
다행히도 아직 그녀는 늦지 않았다. 과거의 자신과 닮았으나 또한 달랐다.
이 자매는 우리와는 다르게, 어느 한 쪽이 끝나버리기 전에. 돌이킬 수 없을만큼 비틀리기 전에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치후유의 빨갛게 부르튼 눈가에서 또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문대 지웠다.
"미, 미나 공...?"
"미안. 안 그래도 힘들텐데 떠봐서."
양반다리를 풀고 일어났다. 한 걸음 다가가, 몸을 덜덜 떠는 그녀를 조심히 감싸안았다.
"네가 깨닫길 바랬어. 나처럼 후회하지 않도록. 근데 난 요령이 없어서 방법이 생각이 떠오르질 않더라구. "
밀어내야 할 지 갈팡질팡 헤메던 치후유의 팔이 우뚝 멈추었다.
"사실 지금도 생각한 것처럼 됐는지 긴가민가해."
대답은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거칠게 숨을 들이쉬는 치후유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냥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대로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코를 훌쩍인 그녀가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어색하게 말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래. 미안해. 진짜로."
"미나 공이 밉습니다."
"미안. 꼴도 보기 싫어?"
"그런 건 아닙니다. 그래도 밉습니다."
"한 대 칠래? 지금은 맞을만 할 것 같은데."
여전히 울음섞인 목소리였지만 치후유가 킥킥 웃었다.
망설이며 꼼지락대던 손이 머뭇대며 자신의 등에 닿았다. 마주 안아주었다.
".....고맙습니다. 더는, 숨지 않겠습니다."
"그래. 갈 거야?"
"네."
포옹을 풀고 치후유를 조심히 눕혔다. 눈이 마주치자 괜히 멋쩍어 한 번 웃어주었다. 치후유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돌렸다.
"조금 더 쉬어. 그리고 같이 가자. 네 언니를 구하러. 가서 싹 쓸어버리자구."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치후유를 눈에 담았다. 가슴 한구석이 근질거렸다.
뭐냐 이거. 몸을 일으켰다. 오래 앉아 있어서 다리가 좀 저렸다. 툭툭 털며 밖으로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 것은 그녀의 소대장이었다. 내내 짜증으로 가득찼던 얼굴이 확 풀려있었다. 이 사람은 또 왜 이런대.
"뭐야, 이 상황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알 거 없다. 그보다 상태는 어떻더냐?"
"역시 컨디션은 영 아냐. 그래도 가겠대."
"흥. 그건 이제부터 해결해야지. 뭐 의지만 있다면 방법은 있다. 현대의학은 만만한게 아니거든."
"정말 괜찮을까?"
"강요한게 아니라 그녀가 정한 일이다. 마침 우리에게 필요한 전력이기도 하고. 걱정된다면 네가 잘 챙겨보던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로자리아는 기세좋게 대답하는 유미나를 흘끗 훑어봤다. 결의에 찬 얼굴이었다.
처음에 봤을 때만 해도 무뚝뚝하기 그지 없었던 이 녀석은 이제는 자기와 좀 엮였다 싶으면 되려 감정이 너무 풍부해져서 곤란했다. 또 제멋대로 뭔가 생각한 것 같았다.
"질문은 없느냐?"
"없어. 아, 이거 특근 수당 두둑이 나올까?"
"글쎄다. 슬슬 재정이 악화되어 간다고 들었는데."
"아니, 그 많은 돈을 다 어디다 썼대? 그럼 우린 완전 사서 고생이네."
"일단 세계평화를 위한 헌신으로 해두자꾸나."
"본인이랑 제일 안 어울리는 말인건 알아?"
뜨악한 표정인 유미나의 지적에 로자리아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유미나."
"뭐야, 갑자기 이름으로 부르고."
"전투가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지 모른다. 우리가 떨어지게 된다면 내 지시 없이 힘을 써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을거다.
그렇게 될 때는, 무작정 터뜨리기보다는 신중히 사용 시기를 정해라.
늑대의 이빨은 먹잇감의 숨통을 끊을거란 확신이 들 때만 드러내는 법이다."
"또 잔소리야?"
"긴급 중에도 긴급상황에만 쓰란 말이다. 너희가 알아서 잘 한다면 내가 입 아프게 떠들 필요가 있겠느냐?"
입을 삐죽이는 유미나의 허리를 툭 친 로자리아가 피식 웃었다.
긴장하지 않은 건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과한 텐션은 곤란하니 당부는 전해둬야 했다.
"소대장."
"뭐냐?"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
"흥. 별 걱정을 다 하는구나. 이보다 큰 일도 겪었으면서."
"오늘은 싸울 사람이 그때보다 더 적은데?"
"그야, 테라사이드가 시즌제 드라마의 피날레였다면 지금은 겨우 단막극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등장인물이 적은건 당연한 일인 것을. 쫄 필요 없다 맹랑아. 내가 있지 않니?
사실 너희들은 안 그래도 치명적인 날 더 빛내줄 들러리라는 거 아느냐?"
"요 꼬마가 또 쎈 척은."
유미나가 젠 체 하는 소대장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즉시 날아오는 자그마한 팔을 몇 번 피했다.
"야! 이 건방진 것! 손 안 떼?"
"요즘 뭘 보길래 자꾸 고풍스러운 말투를 쓰는거야. 원랜 좀 더 귀여웠는데."
"귀, 귀여워? 내 나이가 몇인데 감히!"
"아, 됐어. 아무튼 알겠다구. 걱정 할 필요 없단 말이지. 믿을게."
"갈수록 건방져 지는구나 너! 씨잉! 아니. 아니지. 어흠. 흠. 그래. 그거다. 딱 한 번만 봐주마. 소대장을 믿고 존경해야지."
성을 냈던 로자리아는 몇 번 헛기침을 하며 다시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움직이자. 하루종일 휘둘렸더니 내 자존심이 어디 갔는지 찾질 못하겠으니 가다가 그것도 좀 줍고."
"좋아. 시원하게 패버리자구."
"흐흥. 깝치는 벌레들에게 갚아주자꾸나. 지금부터는. 늑대들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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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에 치여서 늘어지면서 쓴 편이라 몇 번 고쳐썼는데도 영 불만족스럽네 감정이 잘 전달될지는 몰?루겟서?
이제 서사들은 다 쌓았으니 결말까지 일직선으로 달리겠읍니다...
긴 글 읽어주는 챈럼들 언제나 카운터 고맙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