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출처

https://arca.live/b/counterside/30213231?mode=best&p=2


나는 잘못들은게 아닐까 싶어 목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소영 경위가 평소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웃음을 참는 듯한

장난꾸러기 표정으로 내 쪽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뭐야, 또 장난인가.


"하하, 강소영 경위는 이유미 경정에게도 그렇고, 상사에게

장난치는게 취미인가?"

"경정님은 리액션이 참 좋단 말이죠,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

자중하자 싶다가도, 그 '강소영 경위!' 하면서 열내는 걸 안 들으면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가시질 않아요. 그런데 사장님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을 이었다.


"리액션이 썩 재밌으신 분은 아니죠, 솔직하게 말해서, 아하하."

"하하, 재미 없는 사람이라 미안하네, 직업병이라고 해두지."

"제 말의 본질은 그게 아닌데요."

"음?"

"제가 굳이 재미없는 사람에게 장난치는 사람은 아니다, 라는 말?"


그녀는 능숙하게 허공에 소주를 따르고 원샷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시원한 듯 찡그리는 표정과 함께.

하하, 못 이기겠군 정말.


"그럼 슬슬 일어나지."

"어, 아직 퇴근 시간까진 조금 남았는데요?"

"퇴근하고 싶을 때 퇴근하는게 사장 아니겠나?"


***


"안내를 좀 부탁해도 되겠나?"

"윽, 남자가 에스코트해주는 게 멋있다는 것도 모르세요?"


메롱하고 혀를 내미는 강소영 경위에겐 함께 있는 사람에게 

편안함을주는 매력이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포장마차는 익숙하지 않은 장소라 말이지. 근사한 바라면 

얼마든지 안내하겠지만."

"듣기만 해도 느끼한 그런 장소는 사양입니다, 하하. 

그럼 제 단골집으로 모실게요!"


그녀는 비슷비슷한 골목을 요리조리 돌며 길을 잘도 찾아나갔다.

십오분쯤 걸었을까, 여전히 길이 눈에 익지 않은 나의 옷깃을 잡아

끌며 그녀가 가리킨 곳엔 전혀 그 전에는 전혀 눈치도 못 챈 

조그마한 포장마차가 자리하고 있었다. 


"짜안~ 들어가시죠 사장님!"


자연스레 내 팔짱을 껴온 그녀의 능청스러움에 나는 못이기는 체

푹신하지 않은 포장마차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이를 얹었다.


"아이고, 경찰 처자 또 왔어?"

"에헤이, 이모 또라뇨?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제가 술꾼인줄 알겠어요."

"일주일에 5-6번 오면 술꾼 아니여?"

"크흠, 그래도 하루는 쉬는군."

"아하하, 간도 휴일은 줘야죠."

"이왕 쉬게 해줄거면 주 5일제로 해주지 그러나."

"스읍! 즐거운 술자리에서 우울한 소리 그만 하시고! 이모, 여기

계란말이에 골뱅이 소면 하나, 소주 두병 주세요!"


내 말을 손짓으로 제지한 그녀는 단골답게 거침없이 주문을 했다.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포장마차 주인 아주머니의 손에 시선을

뺏겨버렸고 잠시 멍해있는 사이 내 몫의 소주잔에 술을 가득

채운 강소영 경위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어떤 현자가 말씀하셨죠, 가득 채운 술잔은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이라고."

"아니 이정도로 가득채우면 들다가 흘리겠어."

"술 흘리시면 안돼요! 아까운 거."


그녀는 예의 그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건배를 권했고 나는 조심스레

잔을 들어올려 그녀의 잔에 부딪혔다. 결국 조금 흘릴 운명이었군.


"캬아~ 이 맛에 산다니까요?"


찡그린 얼굴이지만 결코 싫지 않다는 듯한 행복한 표정. 저 만큼

사회인의 하루를 요약할 수 있는 표정이 있을까. 간만에 맛 본

소주는 쓴 맛을 남기며 목을 뜨겁게 달궜고 나 또한 절로 찡그린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싸장님, 그 쓴 맛이 가시기 전에 계란말이 한 입, 아~"


그녀는 거침없이 거리를 좁히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왠지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나는 멋쩍은 듯 입을 벌려 계란말이를 받아 먹었다.


"맛있죠? 여기 이모가 손맛이 끝내준다니까요? 한 번 딱 먹자마자

단골이 되어버렸지 뭐에요."

"음, 정말 맛있군. 내가 즐거먹는 오믈렛보다 나아."

"네에? 오믈레엣? 사장님 지금 서민문화 처음 접하는 귀족같은 거 

알아요? 아하하."


강소영 경위는 자신의 빈 잔을 채울요량으로 다시 한 번 소주병을 집어들었다. 나는 무심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거친 일을 하는

것에 비해 정말 가느다란 손목에선 따스한 그녀 체온이 전해졌다.


"제게 미녀의 잔을 채울 영광을 주지 않겠습니까?"

"앗,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아까의 복수같은 느낌으로 잔이 넘실거릴만큼 그녀의 잔을 

가득 채웠다. 제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그녀라도 이정도의 양을

한번에 마시기는 부담스러우리라.

의기양양하게 그녀의 표정을 살피자, 형용할 수 없을만큼 다채로운

표정이 범벅된 얼굴의 그녀와 눈이 맞았다.


"사장님도 저를 이만큼이나 생각하시는 줄 몰랐는데~"


그녀는 내가 들고 있는 잔에 쨍, 하고 요령 좋게 건배를 하더니

그대로 그 잔을 쭈욱 들이키고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으~ 절 향한 사장님의 마음, 잘 마셨숩니다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네만.."

"어? 사장님은 지금 여자의 마음을 갖고 노신건가요? 흑흑."

"총각, 그 처자 괜찮은 여자여, 델고 살아줘 좀."

"에헤? 들었죠 사장니임? 저 괜찮은 여자래요, 호호호."


그렇게 술을 좋아하더니 벌써 취한건가? 기분좋은 알딸딸함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 그녀는 적당히 풀린 모습이, 무방비한

모습이 평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매력적이었다. 아직 채 한병도

다 비우지 않았건만, 그녀는 빈 잔을 내 앞에 척 내밀었다.


"숙녀의 잔을 비운 상태로 두는 건 실례아닌가요오?"

"강소영 경위, 이미 취한 것 같은데 안주나 좀 더 먹게나."

"아아아아앙~ 사장님이랑 술 마시고 싶어요~ 안돼요?"


그녀의 앙탈에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술의 마력 탓일까 그녀가

오늘따라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잔을 채우고 술을 들이켰다. 어쩐지 이번 술은 달게 느껴졌다.


"하아, 경정님이랑은 이런 자리 못가져서 너무 아쉬웠는데,

사장님이랑은 함께 마실 수 있어서 너무 좋네요.."

"난 강소영 경위가 이렇게 술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이렇게

빨리 취할지 몰랐다네."

"저언혀 안 취했거든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자기입으로 취했다고 시인하는

사람을 여태 본적이 없는 까닭이다. 

어느새 고개를 꾸벅꾸벅 흔들다 엎어진 그녀를 들쳐업고, 

주인 아주머니에게 계산을 부탁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어딘가

눈에 익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잘 좀 부탁할게, 총각."

"아, 네. 걱정마시죠."


그녀는 깃털처럼 가볍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녀를 업은 등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체온이, 향기가 나를 설레게 했다. 

내 등에 업힌 강소영 경위에게선 술냄새보단 성숙한 여인의 체취와

향수냄새가 어우러진 아찔한 향기가 풍겼다. 

나는 몇번이나 번뇌를 떨쳐내려 애쓰며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에 도착하고, 나는 어떻게 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에 

빠졌지만, 이내 헛된 고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강소영 경위가 나지막이 현관 비밀번호를 속삭이며 내 귓가를

간질였기 때문이다.


"아, 아니 강소영 경위? 이,일어났나?"

"하하, 네. 사장님.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취하지 않았던듯한 맑은 목소리. 

아무래도 나는 속은 것 같다.


"연기를 아주 잘하는구만, 강소영 경위. 한방 먹었어."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에헤헤."

"하하, 오늘 즐거웠어. 그럼 들어가 쉬게."


내 이성도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상사와 부하간의 일선을 

넘지 않기 위해서는 여기서 등을 돌려야 하는게 맞다.

근데 어째서 나는 이렇게도 아쉬운 걸까?


"하아.. 사장님, 안에서 한잔 더하지 않으실래요?"

"강소영 경위, 더 이상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주겠나?"

"어머, 저 지금 창피를 무릅쓰고 끼부리고 있는 거라구요?"


말과는 반대로 그녀는 대담하게 내 넥타이를 잡아끌어 당겼다.

순식간에 좁혀진 둘 사이의 거리에선 남녀사이의 묘한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절 이대로 두고 가실건가요? 제 이모한테 걱정말라고 해놓으시고선?"


그녀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보니 포장마차 주인아주머니와 

아주 똑같은 표정이었다. 아, 내가 가족사기단에 당했구나.


"하하하.. 그 분이 진짜 이모이신 줄은 몰랐는데."

"집안 어른 허가도 받았는데.. 정말 한 잔 더 안하실 건가요?"


내 고막을 간지럽히는 그녀의 녹아내릴 듯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나는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그녀의 집 안에 들어서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아무래도 술에 취한게 아니라, 그녀에게 취한 모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