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당신은...?"
"몸은 좀 괜찮나?"
인생이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롤러코스터 같았다.
나는 처음엔 구원의 상징으로, 그 후로는 악마의 증인으로 낙인이 찍혔다.
"특이 체질이라 운이 좋았어."
"특이 체질이요?"
순식간에 나락에 처박힌 나는,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낸 감옥이란 이름의 지옥 안에 갇혀 막연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달빛 한 줌밖에 들이치지 않는 조그만 창밖에선 매일 나를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그들은 그저 그렇다는 멍에를 내게 씌웠다.
나는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 있었다.
태양이 떠 있을 땐 나를 저주하고 원망하는 외침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언어로 담금질한 날카로운 칼날은 끊임없이 내 몸에 상처를 내었으나 날은 갈지 않으면 무뎌진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상처가 너무 깊어 통증을 느끼는 감각이 사라진 걸지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의 공격에 무덤덤해진 나는 슬슬 다른 레퍼토리는 없나 조소를 날릴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픔에 무신경해졌어도 정신적으로 극에 달한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건 아녔다. 나에게도 휴식을 취하고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바로 달이 뜬 밤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상태로 고갤 들어 달님을 바라보며 수없이 기도했다. 나를 구원해달라고. 하지만 그게 허락되지 못한 결말이라면, 부디 나를 고통에 빠뜨린 마을 사람들과 함께 불태워달라고.
단 하루도 빠짐 없이 기도를 하며 지내왔다.
어차피 사람들은 나를 마녀라고, 악마의 종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진짜 그렇게 되어도 상관없는 거 아닐까?
그런 내 노력의 결실이 하늘에 닿았나보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소원이 이루어졌다.
"살려줘!"
"그 악마년 탓이야! 이게 다...!"
"다 틀렸어! 내 아내가! 아들이! 으아아악!"
"엄마! 아빠"
나를 욕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없고, 대신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찬 절규가 들려왔다.
먹구름이 낀 하늘에선 비명과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이 비처럼 쏟아졌다.
나는 좁은 감옥에서 주린 배를 끌어안은 채 키득키득 웃으며 꼴 좋다고, 쌤통이라고 그들을 조롱했다.
하지만 신이 내려준 괴물에겐 선악의 구분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고통스런 죽음을 선사하던 괴물은 사람을 죽이고 또 죽여서, 마지막엔 내가 갇혀 있는 감옥까지 들이닥쳤다.
보라빛 광채를 내뿜는 괴물들을 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저건 신이 내려준 괴물 따위가 아니라고.
눈을 감았다.
이미 메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를 괴롭히던 주체가 전부 사라진 후에야, 뒤늦게 억울함이 밀고 올라왔다.
조금 더 살고 싶다는 보잘 것 없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제 죽는 수밖엔 없었다.
괴물이 철창이 찢고, 조금씩 안으로 그 손을 뻗어왔다.
그렇게.
모든 걸 놓은 내게 돌연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곤란하군. 이런 전개는 전혀 예상치 못했거늘."
신은 내 소원을 외면한 게 아니었다.
그곳엔 구원이 있었다.
어느덧 구원으로부터 족히 십년은 훌쩍 넘기는 세월이 흘렀다.
"선생님?"
정신을 차리니 아끼는 제자가 걱정스러운 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우선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 미안하구나.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또 그러신다. 도대체 그 옛날 이야기는 언제 말씀해주실 건가요?"
"글쎄?"
조만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답변을 얼버무린 채 꼬았던 다리를 잠시 풀어주었다. 짐짓 상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모습이었으나 제자는 익숙한 듯 내게 다음 서류를 건넸다.
"이건?"
"최근 유행하는 반 관리국 단체들에 대한 정보에요."
"그세 또 늘어났구나."
관리국을 불신하고 그에 반하는 단체는 옛날부터 존재했다.
따지고 보면 검은 평의회도 관리국이 무서워 직접적으로 건드리지만 않을 뿐이지 관리국 시스템에 반기를 든 쓰레기들이니 말이다.
다만 그 중엔 진짜배기 광기로 점철되어 진실을 캐내기 위해 사람들을 속이고, 또 희생시키는 정신나간 무리들이 있었다.
바로 마젤란 예언회 같은 듣도보도 못한 사이비 종교 무리들이다.
"엘릭서? 구린 내가 팍팍 나는 명칭이구나."
"선생님도 모르고 계셨나요?"
항상 모든 걸 안다는 투로 행동했던 게 잘못일까?
드물게 모르는 정보가 튀어나와 질문하자 제자가 우쭐거리며 빙긋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눈앞의 제자는 나를 너무나도 이겨먹고 싶어했다.
"요즘 언더그라운드에서 유행하는 마약이예요. 일반인이 복용하면 카운터에 버금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해요. 하지만 가장 큰 장점은 역시 회복력 증대죠. 풍문으론 잘린 팔도 다시 붙일 수 있다던데요?"
전자도 매력적이지만, 보통 후자의 효과 때문에 용병들 사이에서 목숨값 대신으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며 제자가 덧붙였다.
"샘플은?"
"안타깝게도 카운터에겐 안 팔더라구요."
제자가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제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보다 진해진 걸 깨달은 나는 잠자코 팔짱을 낀 채 그녀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예상대로, 제자는 능글맞게 내 반응을 지켜보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가 살짝, 친한 용병 오빠들에게 '부탁'을 좀 했죠."
제자의 부탁이 상당히 강압적인 방법이었다는 건 굳이 말 안 해도 뻔했다.
제자는 품에서 녹색 액체가 담긴 앰플을 꺼냈다.
"이게 엘릭서라고 불리는 그 약물이랍니다."
"아주 대놓고 수상하게 생겼구나."
웬만한 스포츠 음료도 저런 선명한 녹색은 나타내지 않는다.
대개 액체형 마약이 눈에 띄는 걸 피하기 위해 무색을 띠는 걸 생각하면 마젤란 예언회는 참으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건 내가 지인에게 부탁해 분석을 맡겨보마."
내가 엘릭서란 약품에 손을 뻗기 무섭게 제자가 슬쩍 앰플을 쥔 손을 자신에게 당겼다.
가볍게 뻗은 내 손이 허공을 가른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저기, 선생님? 그거 아세요?"
제자가 슬쩍 왼손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저희가 이거 구하는데 돈이 좀 많이 깨졌거든요..."
"알트 소대의 활동비는 일부러 넉넉히 챙겨줬을 텐데."
"선생님이 저희를 특별히 챙겨주시는 거, 다 알죠. 근데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제자는 드물게 진심으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 소빈 언니랑 유진이 때문에 늘 적자나는 거요."
"..."
나는 말문을 잃었다.
중화력 트리거 해피인 김소빈과, 멧돼지처럼 무작정 달려들어 탄약 낭비와 무기를 비롯한 각종 장비를 박살내는 게 특징인 유진 듀오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서도 말썽쟁이로 소문이 자자했다.
"요즘 린이 감자칩 시먹을 돈도 없다고 아주 우울해 보여요. 그렇지 않아도 못 먹어서 발육이 덜 된 우리 쪼그만 린이... 훌쩍!"
"하아. 그래, 알겠으니까 앰플이나 넘기도록. 이번 건에 한해 추가 수당을 지급해주마."
"역시 선생님이에요! 제가 선생님 사랑하는 거, 아시죠?"
나는 제자의 뻔뻔한 연기에 속아주며 엘릭서를 받아냈다.
"뭐, 이 건은 이제 됐다. 그 밖에 보고 사항은?"
"이건 어때요?"
제자가 다음 서류철을 건넸다.
반 관리국 성향의 언론 보도자료였다.
나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서류철을 덮었다.
관리국이 침식 현상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이다.
우리 세계를 떠나지 않고 남아주신 그분의 은혜를 털끝 만큼도 모르는 한심한 머저리들이라서 그려낼 수 있는 아주 저급한 망상.
딴에는 보고서랍시고 올라온 모양이지만, 눈만 버림 셈이 되었다.
"이딴 걸 정보랍시고 올린 아이는 징계를 줘야겠는걸?"
어떤 징계가 좋을까?
맨몸으로 이면세계에 홀로 떨궈놓고 30일간 생존하기?
아니, 내가 직접 스파링을 해주는 것도 썩 나쁘진 않은 거 같다.
마침 스트레스 발산할 곳이 필요했으니까.
"아, 저 알아요. 유진이랑 툭하면 싸우는 친구거든요."
"아... 또 그 아인가."
원래 알트 소대에 넣으려 했는데 성격이 워낙 괴팍해서 팀워크가 무너진다 판단되어 합류를 보류한 아이. 천성적으로 모난 성격이라 여기저기 시비를 붙이곤 했으나 유독 유진하고 성격이 안 맞아 자주 다투곤 했다.
"조만간 개인 면담을 좀 해야겠구나."
"선생님은 너무 무르시다니까요. 조금 더 꽉 조여도 다들 별말 안 할 텐데."
"처음부터 그랬다면 모를까. 기껏 주어진 자유를 빼앗으면 반발도 심해지겠지."
"그런 아이들은 제가 대신 처리해드릴 수 있는데."
제자가 웃는 얼굴로 말하는 것치곤 내용이 꽤 살벌하다.
어쩌다 애가 이렇게 삐뚤어졌지? 내 교육 방침이 문젠가? 여러모로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나는 제자에게 명확히 선을 그었다.
"아카데미 운영은 엄연히 내 영역이다. 윤서 너는 네 가족부터 잘 챙기도록."
"... 네, 그러도록 할게요. 선생님."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미소와 함께 윤서가 등을 돌렸다.
"그럼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선생님."
"조심히 들어가렴."
점점 멀어지는 윤서의 뒷모습을 확인한 뒤 다음 보고서로 시선을 옮겼다.
"하아. 요즘 수상한 짓을 꾸미는 친구들이 많이 늘었어."
최근 내 감시망에 걸려든 유니콘이란 기업에 관한 정보였다. 내전으로 쑥대밭이 된 그라니아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로 모자라 산하에 여러 계열사와 연구소를 두고 있다.
해당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하고 뒤가 구린 놈들인데 근래 여러 태스크포스에 동시 산발적으로 커넥트를 취하고 있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알파트릭스 수준도 아닌 녀석들이 여러 태스크포스와 동시다발적으로 제휴를 맺는다라..."
흔치 않은 일이다.
20년 전, 대대적인 침식 현상과 관리국의 발호 이후 국가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서 기업의 폭거를 제동할 수단이 많아 사라졌다.
관리국은 기업간 다툼에 끼어들지 않는 편이고, 결국 기업은 기업이 상대하게 되었다.
이미 이 바닥은 웬만한 밀림보다 더 치열한 약육강식의 세상이다.
뭔가 색다른 발견을 하더라도 여러 기업에게 공격을 받으며 그 실효성을 입증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막상 입증에 성공해서 기발한 제품을 내더라도 알파트릭스 같은 공룡 기업이 나서서 강압적인 합병에 나서면 대개 얌전히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개 계약이란 비밀스럽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찌끄레기 태스크포스들은 아무리 긴밀하게 연계하고 싶어도 온갖 티를 다 내는 삼류. 비밀스런 작업을 함께하기엔 부적절한 대상이다.
그런데도 계약을 맺었다면 이유는 뻔하다.
"대충 뒤가 구린 일이겠지."
아직 김이 폴폴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근데 유니콘에선 뭔가 특징적인 활동이 없었단 게 마음에 걸리네..."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거래 현황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어야 했다.
"장비나 병기가 아니라 데이터나 자료 관련인가?"
유니콘과 계약을 맺은 찌끄레기 태스크포스들 중 특이사항이 있다면 불법적인 일을 도모하는 아티펙트 채굴 용병업체도 하나 끼어 있었다는 점뿐이다.
평범한 계약이라면 금전이나 무기, 그리고 이터니움 등이 오갔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유니콘 기업이 태스크포스들에게 받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조사한 자금 흔적에 따르면 그랬다.
참고로 나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믿는 쪽이다.
"아무리 봐도 뒤가 구린 친구들인데..."
머그잔에서 담긴 커피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후, 하고 살짝 불어낸 뒤 다음 서류를 집었다.
최근 활동량을 늘린 유니콘과 제휴한 태스크포스들이 참가한 정화 작전 목록이다. 이 놈들은 들어오는 돈은 얼마 없고, 사원도 늘리지 않은 주제에 출동 횟수만 전에 비해 현저히 높아졌다.
"딱히 관리국에서 대대적인 협조나 공고문을 내린 것도 아닌데. 참 이상한 일이야."
대놓고 자신들이 수상하다는 걸 마구 뽐내고 있다.
"이쯤 되면 조사해달라고 광고를 하는 수준인데..."
역시 직접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으려나?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제자들의 명단 중에서 일단 눈에 덜 띄는, 업계에 뛰어든 적 없는 아이들을 각 태스크포스에 임시직으로 파견하여 증거를 모은다.
어차피 정규 넘버링을 받은 태스크포스도 아닌, 최저 시급조차 맞춰주지 않는 저급한 회사들이니 적당한 카운터가 입사 의견을 피력하면 옳다구나 하면서 넙죽 받아들일 심산이 컸다.
안타깝게도, 이 바닥은 늘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그럼 이제 누굴 보내느냔데..."
뭔가 팟, 하고 떠오르는 적당한 인선이 없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좀 더 고민했다. 기준치를 조금 더 낮춰서, 아직 실전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나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아이들까지 범위를 넓혔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제자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나 선생님! 혹시 소문 들으셨나요?"
"윤서?"
이미 간 줄 알았는데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제자의 모습에 나는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버리고 찬물을 담아 그녀에게 건넸다.
"무슨 소문을 들었기에 그렇게 급하게 달려와?"
제자는 잠시 머그컵을 빤히 바라보다, 빙글빙글 돌려 한 모금 들이켠 뒤 입을 열었다.
"최근 수수께끼의 부호가 코핀 컴퍼니에 엄청난 자본을 투자했대요!"
콰직!
손에 쥐고 있던 서류철이 구겨진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오늘 보고서 명단에는 코핀의 'ㅋ'자도 없었다.
나는 완전히 날것인 정보를 물어온 윤서를 쳐다봤다.
"코핀 컴퍼니라면 설마...?"
"네! 선생님이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저희들에게 거듭 충고한 그 태스크포스예요!"
역시나.
세상에 회사명을 관짝으로 짓는 괴상한 취향을 자랑하는 회사가 거기 말고 또 있을 리가 없지. 그리고 다 망해가는 좆소에 구태여 투자를 할 큰손의 정체도...
"윤서야. 알트 소대 전원 다 집합시키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잡다한 서류를 전부 치워버렸다.
"네? 갑자기요?"
윤서가 말똥말똥 두 눈을 깜빡였다.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가 입사해 활약할 회사가 드디어 나타났거든."
공교롭게도, 그 회사의 이름은 내가 이 아이들에게 죽어도 들어가지 말라고, 용병 계약조차 맺지 말라고 칭한 코핀 컴퍼니였다.
덤
절차는 중요하다.
특히 상대가 관리국 공식 넘버링 태스크포스라면 이는 더 까다로워진다.
뭐, 상대는 적자에 시달려 블랙 중의 블랙으로 소문난 기업이지만, 그쪽 사장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면 쉽게 해결될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게 되었다.
상대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흔쾌히 내 방문을 허락했다.
"오랜만이야, 애꾸눈.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더 쳐졌네."
"쳐, 쳐져요?"
아차! 너무 반가운 나머지 얼굴을 보자마자 선빵을 쳐버렸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나는 이수연이 주춤거린 틈을 놓치지 않고 입을 놀렸다.
"사장은 기업의 얼굴과 같은데. 관리 좀 받지 그래? 내가 괜찮은 데 소개시켜줄까? 어차피 현장에서 물러난 지도 한참되지 않았던가?"
"참신한 인사법이군요. 덕분에 크로펠 아카데미의 수준이 어떤지 잘 알겠어요."
이수연의 미소에 경련이 생긴다.
나는 여유를 잃지 않고 계속 공격을 가했다.
"어머? 설마 그걸 이제 깨달았어? 하긴, 다 망해가는 회산데 내 제자들 수준이 어떤지 겪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 괜찮아, 우리 사이잖아? 난 다 이해해."
"일부러 이쪽의 지원 요청도 다 씹은 그쪽이 할 말이야?"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네. 앞으로도 같잖은 연기는 집어치우는 게 어때?"
"제이나 너..."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이수연의 반말에 나는 그제야 피부에 돋았던 소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래, 우리 관계는 이래야지. 그분과 연락이 닿았으면서 나한텐 일언반구도 없던 것에 대한 복수다.
"뭐, 네 스승이 떠나서 회사가 폭삭 망한 건 안타깝게 되었어. 진심이야."
"이쪽 거래처까지 홀라당 훔쳐간 도둑고양이 주제에 말은 아주 청산유수네."
"오해할 말은 하지 말아줘. 나는 어디까지나 코핀이 처리 불가능한 의뢰들을 대신 처리해줬을 뿐이야. 덕분에 업계 신뢰도는 지켜냈잖아?"
오히려 이수연은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업계 최상위권이었던 코핀의 자존심을 지켜줬으니까.
"덕분에 우리 회사는 태스크포그 중개업자 취급을 받게 됐어."
"업계 최고의 중개업자라니. 나름 괜찮지 않아? 후후후."
"파견 업체를 운용하는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야."
"파견 업체라니. 엄연히 오갈 곳 없는 아이들을 데려와 실전에 입각하여 훌륭한 카운터로 길러내는 아카데미야. 자선단체에 가깝지."
"그 아이들은 대개 네 말이라면 껌뻑 죽는다던데. 무슨 마술을 부렸는지 궁금한데?"
"오히려 내가 묻고 싶어. 대체 무슨 마술를 부렸기에 소대장 한 명 사라진다고 회사가 폭삭 망하는 걸까? 이빨 부러진 늑대답게 싸움만 못하는 줄 알았는데 경영 실력도 형편이 없나봐?"
"그쪽이 이쪽 거래처를 훔쳐가지만 않았어도 지금보단 나았어."
"그 거래들을 소화할 능력은 되고? 아아, 우리 아이들을 데려기면 가능하긴 했겠네."
세간에 내가 세운 아카데미 출신 카운터들은 우수한 인력으로 정평이 났다.
일종의 보증 수표가 된 셈이다. 제이나 크로펠의 인증을 받은 카운터들은 실력 하나는 확실하다는 그런 증표.
실제로 제자들은 넘버링 태스크포스에 쉽게 취직했고, 또 큰 활약을 떨쳤다. 그에 비해 코핀은 관리국 공식 넘버링이 무색하게 추락했다.
고작 한 명의 우수한 소대장이 실종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때문에 나는 이수연에게 한껏 비웃음을 담아 쏘아붙였다.
"하지만 나는 우리 애들이 등쳐먹어도 남에게 등쳐먹히는 꼴은 못 보거든. 관리국에 아첨해서 여태 살아남은 블랙 기업의 이수연 사장님."
"하! 실상을 알면서도 세간의 평가를 좋을대로 이용하는 부분은 여전하네. 온갖 태스크포스에 아첨하면서 재능 있는 아이들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제이나 선생."
"그럼! 누굴 보고 배웠는데."
우린 서로를 보며 웃었다.
"하하하."
"호호호."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 웃되 웃지 않았다.
확실한 건, 서로의 눈은 이 와중에도 상대의 약점을 물어뜯고자 굶주린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저기, 잠시 자리 좀 비워도 될까요...?"
한창 나와 이수연이 눈싸움을 하는데 난데없이 두려움에 찌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의 출처로 향하자,
"그, 제가 없어도 되는 자리 같아서..."
묘령의 여성이 시퍼렇게 질린 안색으로, 용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손을 들고 있었다.
대충 도미닉 대신 관남충에게 거두어졌을 경우.
배경은 대신 구해준 관리자가 이것저것 편의 봐줬는데. 생각보다 능력이 뛰어나서 코핀으로 입사하게 유도. 그 후 스스로 관리자와 세계의 진실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낸 뒤 코핀에서 퇴사.
원작에서 도미닉 신봉하듯 여기선 관남충을 신봉해서 후에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를 도울 인재들을 육성하고, 그 인재들을 비교적 싼값에 파견해서 여기저기 정보를 긁어모으는 스파이 행위도 서슴지 않는 느낌으로 설정함.
일부러 아카데미는 자신처럼 불행한 과거가 있거나, 연고지가 없는 아이들을 데려와서 카운터 내지 오퍼레이터 관련 교육을 진행시킴.
약간 큰그림을 보느라 자잘한 데를 신경 못 쓰는 관남충을 보좌하는 포지션으로 상상함.
다만 고민이었던 건 이수연과 동년배냐 더 어리느냐.
근데 도미닉에게 거두어졌을 때 바로 입대한 거 보면 서로 동년배 같음.
대충 이수연 싫어하는 건 순수하게 관리자와 직접 연락이 닿는, 펜릴 전대 출신이란 점을 질투해서. 확실한 건 관남충의 도움이 되고 싶어함.
원작보단 순한맛이지만 퀸답게 이용할 건 이용하고, 그닥 사람을 믿진 않는 느낌으로.
단발소재라 더 쓸 생각 없어 최대한 할애해봤음.
이하 잡설.
놀이공원 데이트 잘 안 써져서 지우고 썻다 반복하다가 오랜만에 1인칭 한 번 끄적임.
원래 2차 창작에선 오리주 아님 1인칭은 가급적 잘 안 하는 편인데.
그냥 연습삼아서 써봤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