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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솔직함이 놓아주는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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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가족이 제일 모른다. 하지만 아는게 뭐 그리 중요할까.
결국 벽을 넘게 만드는건, 시시콜콜 아는 머리가 아니라, 손에 손잡고 끝끝내 놓지 않을 가슴인데 말이다.
결국 가족이다. 영웅 아니라 영웅 할배라도 마지막 순간 돌아갈 제자리는 결국 가족이다.
대문 밖 세상의 상처도, 저마다의 삶에 패여있는 흉터도,
심지어 가족이 안겨준 설움 조차도 보듬어줄 마지막 내 편,
결국 가족이다."
- 응답하라 1988 1화 '손에 손잡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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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금 반복을 켜주심씨오>
치나츠와 함께 보낸 기억 중 가장 먼저 기억나는 것은 차기 가주를 정하는 자리.
두 자매가 걸음마를 떼고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을 무렵, 둘의 운명은 가문의 결정이라는 잣대에 의해 나뉘어졌다.
통칭 시조의 힘. 나나하라 가문의 초대 가주가 갖고 있었다 일컬어지는 능력.
온 세상 모든 바람의 목소리를 듣고,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압도적인 권능.
치나츠는 그런 능력을 타고 태어났다. 그리고 가문의 어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어린 나이에 가주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에 반해 치후유는 아무런 능력도 갖고 태어나지 못했다. 카운터 적성은 D급. 카운터라는 이름만을 거적데기처럼 걸친 평범한 인간.
신도 무심하시지. 고수준의 적성랭크를 가진 언니와, 일반인과 다를 바 없게 태어난 동생이라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신은 공평하다는 말은 헛소리임이 분명했다. 정말 공평한 존재였다면 이렇듯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극명한 운명을 내리지 않았겠지.
하지만 어린 시절의 치후유는 그런 것에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언니를 향한 선망이 있었다.
치후유가 보고 있는 치나츠는 최고의 언니였고, 대단한 존재였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언니는 하고 있었으니까.
자신과 달리 치나츠는 가문의 모두가 우러러볼 만큼 강한 능력을 타고 태어난, 가문의 또 다른 기둥이었다.
차기 가주로써 받는 교육들이 굉장히 엄격하고 혹독했음에도 치나츠는 어떠한 군소리 없이 묵묵히 그것들을 해냈다.
그런 언니의 모습은 동생에게 있어 굉장한 선망과 동경심으로 다가왔다.
치후유는 언니의 곁에 있고 싶었다. 능력은 없을지라도 곁에 서서 언니를 도와주고 싶었다.
저렇게 어린데도 투정 한번 부리지 않고 꿋꿋하게 한 걸음씩 걸어나가는 자랑스러운 언니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어린 치후유가 언니를 돕기 위해 찾아낸 것은 검의 길이었다.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의 어린아이가 나나하라 가문에 내려오는 검술을 완벽하게 익히기로 결심했다.
카운터가 아니라 해도 검을 배운다면 강해질 수 있어.
강해진다면 언니의 곁에서 힘이 되어줄 수 있어.
어린 치후유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 제 키보다 더 큰 목검을 낑낑대며 휘두르곤 했다.
그런 기특한 마음이 열등감으로 바뀌는 것은, 조금씩 자의식이 생겨날 때부터.
.......
두 자매는 어느덧 10대 초반에 접어들었다.
치나츠는 시조의 힘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되었고, 가문의 가주로써 포용심이나 리더쉽과 같은 여러 덕목들을 갖춘 어여쁜 숙녀로 성장했다.
치후유는 가문 내에서 검술로 촉망받는 유망주가 되었고, 가주인 치나츠의 곁에서 그녀를 보조할 힘을 갖췄노라 인정받은 어엿한 숙녀로 성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치후유는 비능력자의 설움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세기말의 세상은 카운터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신분의 고하, 혈통의 귀천, 재력의 유무, 그런 것들은 더 이상 힘이 되지 못했다.
카운터 능력의 실용성만이 오늘날의 세상에서 사람을 판가름하는 척도이다. 그것은 나나하라 가문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언니와 달리, 자신은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했다.
학교에서 반장 선거에 당선되어도, 쪽지시험에서 1등을 해와도, 새로운 검법을 익혀와도, 가문의 어른들의 관심은 치나츠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들이 치후유를 홀대한 것은 아니었다. 치후유는 살면서 자신이 요청한 것들 중 무엇 하나 거절로 돌아온 것이 없다는걸 잘 알았다.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할 수 있게 됐다.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갖게 됐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얼마든지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어른들은 치후유의 성취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가주님, 가주님, 가주님. 오로지 가주님 이야기 뿐.
성장기의 아이들이 다 그렇지 않은가. 자신의 성취를 인정받으려 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려 든다.
그것이 잘 되지 않자, 언니를 선망의 눈으로 쳐다보던 치후유의 마음에도 서서히 검은 묵이 튀기 시작했다. 치후유에겐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했다.
얄궂을 정도로 두 자매의 운명은 각자의 이름이 가리키는 대로 펼쳐졌다.
언니(ちなつ)는 매우 강력한 힘을 타고 태어난 나나하라의 아이.
가문의 가주로써 모든 이들이 미소로 대해주고, 그녀 역시 여름(なつ)의 햇살처럼 따스한 빛을 발하는 존재.
그에 반해 자신(ちふゆ)은 일반인에 준할 만큼 능력 적성도 부족한 나나하라의 아이.
가문의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그저 겨울(ふゆ)에 소복히 쌓이는 눈처럼 조용히 묻혀있는 존재.
그림자.
치후유는 부러웠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언니가 너무나 부러웠다.
치후유는 사람들이 미웠다. 다들 오로지 언니만을 바라보니까 미웠다.
나도 언니 곁에 항상 있는데,
나도 이렇게 잘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성취에 기뻐해주긴 하지만, 금방 그 시선은 언니에게로 쏠리고 만다.
왜 사람들은 나를 봐주지 않는걸까?
내가 언니보다 강한 카운터가 아니기 때문일까?
내가 언니보다 예쁘지 않기 때문일까?
내가 언니보다 똑똑하지 않기 때문일까?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무엇이 문제일까? 치후유는 그런 고민을 수도 없이 속에서 곱씹었다.
나눌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 조용히, 그림자처럼, 뒤에 숨은 채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 애를 썼다.
어릴 때와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언니도 자신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었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나이였다. 무엇보다 현실이 치후유를 홀로 서게 만들었다.
치나츠는 가주로서 날이 갈수록 바빠졌고, 활발했던 자매간의 대화는 어느샌가 없어졌다.
저 여름 햇살과 같은 웃음이 자신에게도 내리쬐는 것일지 의심마저 들었다. 더는 이전과 같은 자매관계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마음에 든 것을 스스럼없이 웃으며 내보이던 동생은 이제 없었다.
동생을 보며 웃어주던 똘망똘망한 눈의 언니는 이제 없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홀로 가주라는 사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소녀와, 그림자처럼 살은 끝에 자신이 뭘 원했는지도 희미해져버린 소녀.
각자의 일로 바쁜 나머지 서로에게 신경써줄 겨를이 없어진 관계 속에서 치후유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이젠 언니마저 자신을 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샌가, 언니가 미워지고 말았다는 것도.
.....
시간은 또 흐르고 흘러, 치후유가 15살이 되던 해.
그 해에 열렸던 가문 회의에는 순서가 다 끝난 후에 나나하라 가문 소속 카운터들간의 대련이 준비되어 있었다.
거기서 치후유는 카운터 능력도 없는데 과감하게 참가했다. 모두가 크게 놀랐다.
예상했던 대로 가문의 어른들은 치후유를 말리려 들었다. 카운터도 아닌 네가 대련에 참가한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위험하다. 다 그런 이유였다.
그런 것들은 치후유도 알고 있었다. 어른들보다도 훨씬 더 분명하게 알았다.
애초에 검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제아무리 검을 갈고 닦은들, 카운터 능력자 앞에서는 큰 효과를 보기 힘들었다. 기본적인 피지컬부터 큰 차이가 났다.
카운터는 기본적으로 강력한 신체를 갖는다. A등급의 카운터라면 총탄을 맞아도 아프지 않게 튕겨낼 정도이며, 당연히 그 아랫 등급이라고 해서 신체가 약하지는 않다.
가녀린 여자아이의 몸으로는 피지컬 수준에서 이미 상대가 되질 않는다.
능력은 또 어떤가? 그런 우악스러운 피지컬 앞에서 검술이 얼마나 먹혀들 수 있을까?
더 최악의 경우, 혹여나 원거리 계열의 카운터를 상대로 만난다면? 검을 뽑기도 전에 원거리에서 능력에 당한다면?
그런 천성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치후유는 대련에 참가하겠노라 고집을 부렸다.
반항심이었다.
이럴 때만 나를 걱정하는 것이 원망스러워서, 아무 능력도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그저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탈이었다.
대련의 결과는 뻔했다. 치후유는 그냥 시원하게 져버렸다. 검술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상대에게 싱거울 정도로 승리를 안겨다 줬다.
엄밀히 말하자면, 검술을 일부러 쓰지 않고 시시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승자를 발표하는 사회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맥빠진다는 듯 옷가지를 툭툭 털고 치후유는 가주들 사이에 둘러쌓인 채 대련을 보고 있던 치나츠를 차갑게 한번 쳐다봤다.
그것은 가문의 어른들과 언니인 치나츠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였다.
그 길로 치후유는 경기장을 나가 사라져버렸다.
아예 가주회의가 열린 공간을 벗어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정처없이 걸었다.
버스에 올라탔다. 내리고 싶을 때 내렸다. 아무렇게나 걷다가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걸었다.
치후유는 숨어버리고 싶었다. 모든 것이 다 미워서, 이런 반항을 꾸민 자기 자신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한심해서, 아무 곳이나 가버리려 했다.
이렇게 걷고 걷다보면, 가문의 모두가 알지 못하는 곳에 도착하면, 아무도 날 찾으러 오지 않을 테니까.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언니의 뒤를 떠받드는 호위는 또 다른 누군가를 적당히 세우면 된다. 어차피 사람들은 언니만 있으면 되니까.
나나하라 치후유라는 존재는, D급 카운터 따위는, 검술밖에 모르는 도태된 인간은, 가문에 있으나 마나한 존재니까.
그러니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그냥 잊혀져버리자.
길을 떠난지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흘러가는 대로 걷고 또 걷던 치후유의 눈 앞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 서 있었다.
치나츠였다.
"-??!!"
빛을 잃었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확대된다.
어떻게 언니가 여기에 온거지? 주변 수행원들의 도움도 없이, 어떻게 자신을 찾아온 거지?그런 생각과 함께 치후유는 치나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시간만에 다시 보는 언니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과 함께 잔뜩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몰골을 보아하니 대련 행사도 전부 취소시킨 채 자신을 찾아 헤맸던 것 같았다.
치나츠의 얼굴을 봤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아. 혼나겠구나.
두번째로 든 생각은, 언니는 가주니까 공식 행사를 망쳐버린 날 문책하러 온거구나.
그러나 정작 치후유의 귓가에 들려온 말은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치나츠는 헐레벌떡 뛰어와선 치후유의 몸을 덥석 끌어안았다. 흐느끼는 소리가 뒤따랐다.
"미안해."
단 한마디만을 반복하면서,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아이처럼, 치후유를 끌어안은 채 치나츠는 서럽게 울었다.
왜?
이해가 되질 않았다.
뭐가 미안한 거지? 애초에 잘못한 건 이쪽이다. 고집을 부려 카운터도 아닌데 대련에 참가했고, 고의에 가까운 패배를 유도했고, 행사를 거하게 망쳐버렸다.
"언니가 미안해... 치후유가 이렇게나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알지 못해서..."
그런데도 왜 언니가 사과하는 건가요?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왜 언니가?
구현화되지 못한 언어가 마음 속을 맴돌았다.
"언니..."
"뭐가 시조의 힘이야.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서, 정작 가장 소중한 사람의 앞길도 마음도 못 읽는데. 치후유가 이렇게 아파하고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데...! 이딴게 뭐가 시조의 힘이야...!!"
"....."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던 치나츠가 밉다지만, 사실은 치후유도 알고 있었다.
치나츠가 가주로써 얼마나 많이 괴로워하는지, 얼마나 큰 짐을 지고 있는지, 그 때문에 자신에게 신경써주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이런 투정을 부린다. 겉사람은 이렇게나 어여쁘게 자랐는데, 속사람은 아직도 어린아이인 채였다.
언니와는 다르다. 완전히 성숙한 채로 가주로써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언니와는 다르다. 나나하라 치후유는 그저-
"거짓...말..."
신경써줄 필요가 없는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그런데 왜 치나츠는, 언니는, 아직도 나를 이렇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치후유...?"
자신이 바라보던 세계와 치나츠의 말이 가져다주는 괴리감을 치후유는 이 이상 견딜 수 없었다.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저 너머에 있는 진실일지도 모르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눌러담아왔던 감정을 폭발시킨다.
"아무도 나 신경써주지 않았잖아. 가문 사람들 누구나 할거없이 다 언니만 바라보면서, 언니도 날 더 이상 봐주지 않으면서!! 이제와서 그런 말 한다고 뭐가 달라지는데요? 어차피 나 같은거, 있으나 마나 한 그림자니까 아무도-"
"아니야!!!"
치나츠가 울음 섞인 고함을 내질렀다. 치후유를 끌어안은 손아귀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두 자매의 푸른 눈동자가 서로를 응시했다.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라고? 그림자라고? 그런거, 그런거 언니는 절대 인정 못해."
"인정 못한다고 바뀌는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가주면 다냐고! 그 잘난 시조의 힘이 그런거까지 해줄 수 있을리가 없잖아!!"
"있어!!! 넌 내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내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내 동생이니까... 결코 그림자 따위가 아니니까, 그런 생각 갖지 마."
바뀌는 건 없다. 가주의 권력이, 시조의 힘이, D급인 카운터 능력을 끌어올려줄 수도 없다. 그런데도 치나츠는 바뀌는 것이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치후유는 그것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뭐가 그렇게 당당하단 말인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음에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 켠이 따스해졌다. 어째서지? 그것조차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양 팔을 잡은 손아귀가 부르르 떨린다. 치나츠의 카운터 능력 때문인지 잔잔한 바람이 두 자매 사이를 신성한 안개처럼 은은하게 감싸고 맴돌았다.
"치후유. 언니 따라해."
"예?"
"나, 나나하라 치후유는 그림자 같은게 아니다."
"지금 무슨-"
"나, 나나하라 치후유는 언니의 유일한 자랑이고-"
언니의 또 다른 생명이자
언니를 지키는 제일 강한 사람이라고.
울먹거리지만 또렷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치후유의 귓가에 들려왔다.
"따라해. 따라해줘 제발... 절대로, 절대로 그림자 같은게 아니라고. 우리 치후유는, 절대 그런 의미 없는 사람 아니라고..."
"...."
흐느끼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말문이 떨어지질 않았다.
치나츠가 자신을 그렇게 바라봐주고 있다는 것은 기뻤다. 하지만 그것이 언어로 생명을 얻기까지는, 한번도 저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치후유에게 무리였다.
"ㄴ, 나, 나나하라 치후유는...."
힘겹게, 정말 힘겹게 첫 마디를 떼었다. 아이가 언어를 처음 배우는 것처럼 어눌한 발음이었다.
"그림자 같은게, 아니다..."
그 다음 말을 이어가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언니의 유일한 자랑거리요, 또다른 생명이자, 언니를 지키는 제일 강한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아로새기는 주문은 첫 구절 이상을 넘어가지 못했다.
눈물이 뿌옇게 시야를 가렸다. 넘쳐 흐르는 감정이 목울대를 힘겹게 뒤흔들며 숨쉬는 것조차 무겁게 만든다.
"그림자 같은게, 그림자 같은게... 그림자가...."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겨우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림자가 아니라는 말.
오직 그 한마디만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기도문이라도 된 것처럼, 유일한 희망이라도 되는 양, 치나츠가 해준 말을 힘겹게 반복한다.
"그림자, 같은, 게... 아니야.... 나는.... 나는....!!!"
그 순간, 치후유는 처음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자신은 그림자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반대로 자신 대신 언니가 많은 것을 짊어져야 했다는 것을.
가문의 어른들도, 언니도, 자신을 항상 소중하게 여겨줬다는 것을.
그저 서로 표현을 할 기회가 없었을 뿐.
그걸 인정해버린 순간, 자신이 알고있던 모든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었다.
치후유는 결국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며 치후유는 치나츠를 부둥켜 안고 서럽게 울어댔다.
십 여년의 세월동안 쌓여있던 모든 응어리가 한순간에 폭발했다. 우는 것이 아니라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보일 만큼, 치후유는 그저 소리치듯 목놓아 울었다.
치나츠 또한 치후유를 안고 함께 울었다. 거대한 새의 형상이 바람이 되어 두 자매를 날개로 다소곳이 품어주었다.
.....
"모든 것이 끝나고 언니와 함께 앉아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 때의 저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죠. 언니는 이름이 여름이어서 여름같이 빛나는 사람인데, 나는 이름이 겨울이어서 이렇게 어둡고 무능력한 사람이 된건 아닐까. 언니는 그게 아니라며 이런 말을 해줬습니다."
그렇지 않아, 치후유. 겨울에 쌓인 눈은 너무나도 하얀 세상을 만들잖아.
그러니 치후유는 하얀 눈처럼 세상을 빛낼 수 있는, 순수하고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치후유의 눈동자가 아련한 기쁨을 머금었다. 그 때 치나츠가 해줬던 말이 그녀에게는 아직도 귀에 선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언니의 호위를 고집한다거나, 검술에 집착한다거나 하는 것들을 일체 그만뒀습니다. 대신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았죠. 이젠 언니를 따라가는 것에 목을 메지 않아도, 언니가 절 사랑하고 있다는걸 알고 있으니까요."
"아, 잠시만요."
주시윤은 살짝 고개를 돌려 눈가에 서린 눈물을 손으로 훔치는 시늉을 했다.
"됐습니다. 듣다보니 눈물이 좀 나와서요."
"후훗. 그렇게 포장이 될 만큼 감동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치후유는 멋쩍게 웃었다.
"아뇨, 회사 일로 여기까지 끌려왔다지만 두 분의 아름다운 자매애 이야기를 들으니 되려 잘 왔다는 생각도 드는걸요?"
"감사합니다. 재미있는 말이네요."
"빈 말 아닙니다. 진심이에요. 오히려 부러울 정도로."
그의 말대로였다. 눈을 감고 있으니 눈을 바라보고 참거짓을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주시윤의 목소리에는 치후유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굳건한 진심이 서려 있었다.
"치후유 양의 옛날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의 제 형편이랑 많은 부분에서 겹쳐져 보이거든요."
"....주변의 누군가를 믿지 못하고 계시는군요."
"....."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하던가. 주시윤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치후유가 겪었던 과거 이야기 속에서 주시윤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치후유의 입지가 가주의 동생이라는 점과 카운터 등급이 낮다는 이유로 격하되었던 것처럼, 자신의 입지 또한 변종 클리포트 인자의 소유자라는 점과 부모님의 죽음을 은폐하려 드는 힐데에 의해 영 미묘해진 채였다. 자신을 둘러싼 사실과 정보들은 제한되어 있었다.
머릿속에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힐데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모님의 소천 이후로 주시윤은 지금까지 줄곧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부모님이 왜 죽었어야 했는지, 스승인 힐데는 대체 어떤 존재인지, 그 날의 진실을 캐내는 걸 막으려 드는 힐데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부모님을 죽인 스승님을 용서해야 하는지.
그 고민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주시윤은 힐데의 일본 파견행 제안에 선뜻 응한 것이기도 했다.
“시윤 군. 주제넘게 들리실 수도 있으나, 혹여나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당신이 아는 것과 현실은 전혀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 때의 제가 언니를 믿지 못했던 것처럼, 상대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답니다.”
“하하하... 노력해보도록 할게요.”
주시윤은 사람 좋게 웃으며 치후유의 말을 받아들였다.
물론 반신반의한 채로 말이다.
힐데에게 진실을 묻는다, 과연 그것이 효과를 볼 수 있는 대화전략일까?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몇번이고 물어봤을 테고, 자신이 일본에 올 필요도 없었을테니까.
노력해보도록 하겠다. 현재 주시윤이 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이며 최선의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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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주시윤 각성 문학인데 한 편 전체를 치후유 옛날 이야기로 뗌빵친거 같은데 뭔가 잘못됐다는걸 절실히 느끼고 있다.
빌드업이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그게 좀 ㅈ노잼이라서 걱정이야. 내가 재미없는 글은 남이 보면 더 재미가 없잖아? 콘티 계속 읽어보면서 이걸 이렇게 써볼까? 저렇게 써볼까? 하는데도 계속 머릿속에는 아 노잼~ 이생각밖에 안들더라. 내가 이렇게 재미없게 느껴지는데 보는 게이들은... 이런 생각 들어서 기존 업로드 일정보다 훨씬 늦어짐 ㅅㅂ;
역량이 딸려서 미안하고, 계속 봐주는 게이들 때문에 너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