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붕일기(日記) 1편

 

 


신묘(新墓)일. 맑다.

 


작일(昨日)의 소동 때문인지 노곤하여 늦잠을 자는데 밖이 소란하여 깼다. 창을 열어 내다보니 카붕들이 아침부터 쌀을 던지고 춤을 추며 놀고 있었는데, 이윽고 던질 쌀이 떨어지자 우리 마을은 망했다며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이 우스워 실소가 났다.  

 

전날 객잔 아포갈립소(芽胞渴粒所)의 처자를 엄히 꾸중한 뒤 밖에 나와 연초를 태우는데 구경꾼 중 한 아낙이 따라 나와 말을 붙였다. 바로 고빈상회(高彬商會)의 대행수(大行首) 이수연(李授捐)이란 자로, 생김새가 훤칠하고 호리호리하였으나 애꾸였으므로 미색이 있지는 않았다. 수연이 감히 어디서 오신 누구신지 물었는데 비록 천한 상인이나 그 말투가 정중하여 대(大)라오국(裸娛國)에서 사령관(司令官)을 지낸 김라붕(金裸鵬)이라 친히 일러주자, 수연이 크게 놀라 외쳤다.

 

 

     “타지의 위인들이 하나둘씩 당장시작해(黨張時作海)를 건너 유입(流入)되고 있으니 이제 우리나라는 살았다!”

  

 

이어 수연(授捐)이 고빈상회(高彬商會)에서 머물며 바깥소식을 알려주십사 청하니 가소로웠으나 한편으론 기특하여 응하게 된 것이다.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먹자 수연(授捐)이 나타나 상회(商會)의 회장(會場)이 만나길 청한다 했다. ‘알았다’ 하자 어느 방으로 안내됐는데, 방 안이 어두컴컴하고 아무도 없어 매우 당황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옆에서 특이하고 경박한 음성이 들렸다.

 

 

     “만나서 반갑소. 내가 바로 이곳의 회장(會場), 마신갑(魔新甲)이오, 핫핫핫!”

 

 

기척없이 내 범위에 들어온 것에 화들짝 놀라 남궁세가(南宮世家)의 비전무공(祕傳武工) 천풍장력(天風壯力)의 자세를 취했는데, 상대도 나의 날렵한 반응에 당황한 듯하였다.

 

 

     “아니, 아니, 싸우자는 게 아니오! 멈추시오, 멈추시오!”

 

 

이에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니 사람 키만한 벼루가 서 있었는데 옆에는 용수철로 만든 팔이 붙어 있었고 밑에는 괴상한 바퀴가 달려있었다.



     “내가 이수연(李授捐)에게 홀려 귀신소굴에 들어왔구나! 어찌 말하는 벼루가 있단 말인가!”


     “아니 글쎄 진정하고 내 말부터 들어보라지 않소!”


 

벼루의 사연을 들어보니 원래는 관리국이란 관청(官廳)에서 일하던 관인(官人)이었는데, 사정이 생겨 저주가 씌어 이 벼루 모양의 것에 빙의(憑依)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후 고빈상회(高彬商會)를 세우고 은둔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 했는데, 사연을 듣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사죄하자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괜찮다 하였다. 사람이 아니니 기척이 없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실은 우리 김선생(先生)께 가르침을 청하고자 하여 만나자 했소.”

 

 

예전 양이(兩珥)의 학문을 읽다가 ‘세상에 무료 점심이란 없다’는 구절(九折)을 보고 깊이 느낀 바가 있었는데, 바야흐로 이곳에서 지내는 셈을 치러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었다.

 


     “실은 근자에 상회(商會)의 형편이 좋지 못한데….”

 


듣자 하니 고빈상회(高彬商會)는 침식체(侵蝕體)라 불리는 무리를 쳐죽이는 일을 한다고 했다. 이전에 일당백(一當百)의 무인(武人)이 있어 크게 성하였는데, 그 무인(武人)이 홀연히 사라진 뒤로 세(世)가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행수(大行首) 이수연(李授捐)이 백방(白放)으로 노력하였으나 군사는 날로 패하고 장졸들은 앞다퉈 떠나니, 쇠하고 쇠하여 작금의 신세가 카사국(佉沙國)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에 마신갑(魔新甲)에게 조언하였다.


 

     “회장(會場)은 후한(後漢)의 소열제(昭烈帝)와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일화도 모르시오? 후한(後漢) 소열제(昭烈帝) 또한 젊어서 군사가 적고 지략이 부족해 거듭 패하니 결국엔 유표(劉表) 따위를 섬기게 되었소이다. 소열제(昭烈帝)가 삼고초려(三顧草廬)하여 무후(武侯)를 영접했을 때 무후(武侯)가 올린 계책이 무엇인가 하니, 파촉(巴蜀)을 얻고 굳게 지키며 훌륭한 인재를 기다렸다가 때가 오면 삼군(三軍)을 휘몰아 관서(關西)와 관중(關中)으로 짓이겨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실로 그리 되었소. 회장(會場)은 고빈(高彬)이라는 파촉(巴蜀)을 얻었으니 굳게 지키며 훌륭한 인재를 찾는 게 마땅할 것이오.”

  

     “선생(先生)의 말이 참으로 옳소만 이미 세(世)가 기울었는데 훌륭한 인재를 어찌 얻는단 것이오?”

 


이에 노(魯)나라 임금 애공(哀公)과 재상(宰相) 유약(有若)의 일화를 들러주었다.

 


 애공(哀公)이 유약(有若)에게 묻길, 

‘기근이 들어 재정이 부족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이에 유약(有若)이 답하였다.

 ‘세법을 절반만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애공(哀公)이 의아하여 다시 물었다.

‘세를 두 배로 늘려도 부족한데 어찌 그럴 수 있겠소?’

 

 유약(有若)이 다시 답하였다.

‘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이 어찌 부족하겠습니까?’

 


 마신갑(魔新甲)이 듣고 크게 기뻐하며 사례하였으나 정중히 거절하고 나와 거리로 향했다.

 

카사국(佉沙國)이 거듭된 실정(失政)으로 매우 어지럽다 들었으나 그래도 아직은 사람 사는 곳이라 저잣거리가 제법 왁자지껄하였다. 예를 들면 몇 카붕들이 가은(嘉恩)이란 무희(舞姬)를 두고 이쁘네마네 하며 패를 지어 싸웠는데 갈수록 정도가 심해졌다. 이에 파란 완장을 찬 포졸들이 몰려와 몽둥이찜질을 했는데 구경하던 카붕들이 껄껄 웃으며 일부는 손가락질을 하고 일부는 손뼉을 치며 좋아하니, 순박해보여 보기 좋았다.

 

시간이 흘러 외각을 구경하는데 모퉁이에 반짝이는 것이 있어 가보니 작은 은도끼가 떨어져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 관청(官廳)으로 걸음을 재촉했는데, 얼마지 않아 어느 좁은 골목에 어린 여자아이가 쪼그려 앉아 토끼 인형을 껴안고 훌쩍이고 있었다. 아이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 묻자 일어나 답하길, 도끼 두 개를 가지고 심부름을 가고 있었는데 그만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은도끼를 보여주며 물었다.

 

 

     “이 도끼가 네 도끼냐?”



그러자 여자아이가 가까이 다가와 수줍게 치마를 들어 올려 하얀 속곳을 보여주며 말하였다.



     “제 도끼는 옥도끼옵니다. 한번 보시겠사옵니까?”

 


그 요망한 행태에 그게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는데, 여자아이가 팔짱을 끼며 거듭 말하였다.


 

     “일각(一刻)에 겨우 주화 일천(一千)개 이옵니다. 소녀가 정성껏 모실 테니 어서 가시어요.”

 

     “옛 성현(聖賢)께서 아버지가 낳으시고(父兮生我) 어머니가 기르시니(母兮鞠我) 그 깊은 은혜가 하늘과 같다(昊天罔極)고 하셨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이런 외람된 짓을 하느냐?”

 


아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근엄하게 꾸짖자 아이가 낯빛을 바꾸며 앙칼지게 말했다.



     “아, 씹할. 호구가 왔나 했더니 선비새끼였네. 도끼 다시 갖다 놔야 하니 얼른 내놓고 꺼져.”



그 매몰찬 음색과 흉흉한 눈빛에 얼이 빠져 가만있으니 계집이 다시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빨리 꺼지라고!”

 

 

계집과 드잡이질을 할 수 없어 한달음에 관청(官廳)으로 달려가 아전에게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말하였다. 그러자 아전이 하는 말이 그 계집은 조숙하여 음부(陰部)에 숲(林)이 무성하니 하림(下林)이라 불렸는데, 이미 상부에 총애하는 자가 많아 잡아넣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길게 탄식하며 상회(商會)로 돌아왔으나 밤새 하림의 속곳이 아른거려 쉬이 잠들지 못했다.

 

동 틀 무렵 밖에 나와 연초 다섯 순을 태우고 겨우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