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어디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로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모르겠는데요.”
정원을 연상케 빽빽하게 자란 꽃 말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평범한 언덕 산책로에 로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그런데 정작 돌아온 반응은 그녀의 째려보기였다. 그녀는 로이를 등진 채 슬그머니 가슴을 가렸다. 지나친 과부하로 기억이 날아간 로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아으…. 뭐가 이리도 머리가 아픈지. 혹시 나 어디 부딪치기라도 했냐?”
“부딪치긴 부딪쳤죠. 그것도 아주 세게.”
엘리자베스가 로이의 고얀 엄지를 노려봤다.
“그래? 왠지 그럴 거 같더라.”
묘하게 뭉클했던 감각을 뒤로한 채 주변을 탐색하던 로이가 저 멀리 언덕 끄트머리에 서바이벌이라 적힌 간판을 발견했다.
“서바이벌?”
그는 즉각 팜플렛을 펼쳐 위치를 확인했다.
마침 회전목마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서바이벌 구역이 있었다.
“어디 보자. 각종 가상현실과 페인트 탄을 이용한 서바이벌 훈련 등이 마련되어 있는 서바이벌 존?”
다른 시설과 다르게 추가 비용과 장비 대여비까지 받아서 이쪽 구역은 일반적인 손님과 다르게 작정하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인기가 많은 건 언덕을 지나면 보이는 조그만 동산 아래, 돔 모형의 서바이벌 훈련장이다. 다수의 사람끼리 데스매치로 붙거나, 가상의 침식체를 불러내 점수내기를 할 수도 있다.
데스매치는 서로 정해진 목숨을 먼저 떨어뜨리면 승리한다.
점수내기는 가상 침식체를 상대보다 많이 잡으면 승리한다.
“서바이벌이요?”
어째선지 단단히 삐쳐 있던 엘리자베스가 서바이벌이란 단어에 슬그머니 관심을 보였다.
“역시 관리국답게 상당히 혹독한 어트랙션도 있나보군요?”
“그냥 놀이니까 괜히 넘겨짚지 마.”
“하지만 그 관리국이잖아요?”
“….”
로이는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그래서 관심 있어?”
“눈앞의 난관으로부터 도망치는 건 프리드웬의 기관장답지 못한 선택이죠.”
딱히 난관은 아니지만, 하도 저러다보니 로이도 그러려니 넘어갔다.
요컨대 그녀도 서바이벌이 해보고 싶다는 거였으니까.
“방식은 어떻게?”
“당연히 저와 당신의 진검승부죠.”
서바이벌장 입구에 선 엘리자베스가 거치대에 진열된 레이저건을 집었다.
“단순한 승부는 심심하니 내기를 걸도록 하죠. 진 사람은 오늘 하루, 이긴 사람의 명령을 듣는 거예요.”
“넌 평소에도 나한테 명령하면서 그런 내기를 하냐?”
“두려운가요?”
“그러다 나한테 지면 어쩌려고?”
“모건의 훈련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주제에 자신은 넘치시네요.”
“그야 이건 진짜 총이 아니니까.”
로이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며 마찬가지로 레이저건을 하나 집었다.
“자아, 그럼 룰을 설명해드릴까요?”
배경부터 활활 불타오르는 둘을 보며 캐스트가 담담한 어조로 룰을 설명했다.
먼저 5초의 카운트다운 직후, 각자 좌우에 있는 문을 통해 시뮬레이션 룸에 진입한다. 시뮬레이션 룸에서 튀어나오는 가상 침식체는 레이저건을 쏘아서 맞추면 사라지고, 먼저 맞춘 사람이 점수를 얻는다.
“즉 가장 빠르게, 또 가장 많이 가상 침식체를 잡아낸 쪽이 승리하는 거죠.”
“심플해서 좋네요.”
“이쪽이 할 소리야. 뭐 판정 같은 건 따로 없어?”
캐스트가 좋은 질문이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웬만한 가상 침식체는 맞추면 즉시 사라져 점수에 반영됩니다만, 간혹 3종 이상의 침식체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친구들은 점수를 많이 주는 대신 약점이 따로 존재해서, 그 약점을 맞추지 않으면 쓰러지지 않습니다.”
“약점이 따로 있지만, 맞추기만 하면 한 방이라는 거지?”
“본격적인 것치곤 캐주얼하네요.”
“하하. 기본적으론 놀이니까요. 제가 보기엔 두 분 다 카운터 같으신데. 아마 3종을 겪어보신 적이 있다면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실 거라 믿습니다.”
딱히 3종을 직접 겪어본 적 없는 로이가 짧게 혀를 찼다. 그는 3종한테 약점이 있다는 소리를 난생 처음 들었다.
반면 엘리자베스는 벌써부터 자신이 이겼다는 듯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안타깝네요, 물벼룩. 실전을 중시하며 교육과 훈련을 게을리 한 당신의 패배입니다.”
“벌써부터 결론을 짓긴 이르지. 이렇게 보여도 나는 네 말대로 실전파거든?”
실전의 변수를 얕보지 말라며 로이가 으름장을 피운다.
“흥. 아무리 실전이 몸에 맞아도 압도적인 경험과 실력 앞에선 골리앗 앞의 다윗과 다름없는 셈이죠.”
“하핫! 내가 다윗이야?”
정작 그 골리앗은 다윗의 던진 돌멩이에 맞아 허무하게 사망했다. 필립 신부가 해주던 이야기를 떠올린 로이는 졸지에 다윗이 된 자신의 처지에 키득 웃었다.
그게 엘리자베스의 심기를 거슬렀다. 그녀가 매섭게 로이를 쏘아붙였다.
“설마 제가 우스운가요?”
“아니, 그럴 리가. 다만 여기선 말보단 결과로 보여주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어?”
“좋아요. 어디 그 자신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드리죠.”
누군가는 비장한 얼굴로, 누군가는 승부욕에 몸이 달아오른 얼굴로 각자 입구에 선다.
둘이 제자리에 선 걸 확인한 캐스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자아, 시간은 총 5분이고 지형은 버려진 폐건물 내부입니다.”
커다란 문짝 위로 숫자가 카운트된다.
5, 4, 3….
“참고로 마지막 1분 즈음엔 역전의 찬스가 마련되어 있으니 부디 양측 모두 끝까지 포기하지 않길 바랍니다.”
2, 1.
삐익!
커다란 사이렌 소리와 동시에 문짝이 활짝 열린다.
로이와 엘리자베스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땅을 박차고 시뮬레이션 룸에 들어섰다.
“휘유! 이거 생각보다 훨씬 리얼한데?”
뒷골목을 전전한 기억이 있는 로이한텐 꽤 익숙한 광경이 펼쳐진다.
마치 현실의 폐건물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광경에 로이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는 걸 알리는 알람처럼 맞은편에서 격발음이 들렸다.
“벌써?”
전광판에 삐익 소리와 함께 엘리자베스의 점수가 올라간다.
“방심하면 진짜 큰일 나겠는데?”
잔뜩 허세를 부린 만큼 졌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묘하게 허전한 기억도 그렇고, 일말의 불안감을 애써 뒤로한 채 로이는 마음을 다잡고 폐건물 안을 누비며 침식체를 탐색했다.
마침 무너진 철골 사이로 침식체 몇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가장 흔히 보이는 1종, 니들러다. 로이는 재빨리 레이저건을 겨누어 한 마리를 쏘아 맞췄다.
탕!
- 캬륵!
동료가 죽었는데도 두 마리의 침식체는 당황하는 법 없이 로이부터 찾아냈다. 복수를 획책하듯 날카로운 이빨과 송곳 같은 손톱을 드러내며 이쪽을 향해 달려든다.
“여기서는….”
대개 침식체는 인간을 발견하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공격성을 지니고 있었다. 로이는 재빨리 자신에게 도약해 손톱을 할퀴려는 침식체를 다리로 걷어찼다. 침식체는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땅을 굴렀다.
- 쿠엑!
“뭐야? 이거 주먹이랑 발도 먹히나보네?”
또 다른 침식체의 공격을 가뿐히 피하며 로이가 레이저건을 쏘았다. 실제 방어력이고 뭐고 딱 한 발을 맞추자 침식체는 먼지처럼 스러졌다.
“진짜 캐주얼하네.”
확실히, 이정도면 일반인도 즐길 수 있어 보인다.
- 크아악!
“넌 왜 안 죽었냐?”
제법 세게 찼는데도 죽지 않고 이쪽을 향해 손을 뻗는 침식체를 사뿐히 즈려밟는다.
“아무래도 마무리는 레이저건만 가능한 모양이네.”
이상한 데서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며 비틀거리는 침식체의 머리에 한 발 꽂아 넣는다.
바닥에서 발버둥 치던 침식체는 레이저에 닿기 무섭게 픽 쓰러지더니 먼지가 되어 가루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삐익!
전광판에 새겨진 점수가 오르는 걸 본 로이가 새삼 감탄했다.
“재밌는데?”
단순히 시각적인 것뿐 아니라, 촉각과 후각조차 완벽히 재현해내고 있다. 조금 어설픈 구석도 있었지만,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애교나 다름없다.
“할배가 가르쳐준 사격술을 여기서 다 써보네.”
모건이 쥐어줬던 훈련용 총에 비하면 묵직함이 현저히 모자랐지만, 레이저건이라 그런지 사격 자체는 오히려 이쪽이 더 편했다.
“뭐, 감은 대충 잡았으니 슬슬 다음 녀석을 물색해볼까?”
멈춰선 다리를 다시 바삐 움직이면서 힐끗 전광판을 확인하니 이미 엘리자베스가 큰 점수 격차를 벌려놓은 상태였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격발음이 그녀의 사냥이 얼마나 순조로운지 광고하고 있었다.
“이대로 잡몹만 잡아선 절대 홍차 폭탄을 못 따라잡아.”
점점 익숙해지는 레이건을 능숙히 다뤄 눈에 띄는 침식체를 닥치는 대로 잡아내는데도 둘의 점수는 좀처럼 좁혀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7 : 21
대충 눈대중으로 비교한 스코어 차이만 해도 10점을 아득히 넘어선다.
벌써 제한시간 중 2분 가까이 지나 3분가량밖에 안 남은 상황. 로이는 제발 3종이 그녀가 아닌 자신한테 나타나길 빌면서 시뮬레이션 룸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전광판의 표시가 3에서 2가 되도록 3종은커녕 비교적 높은 점수를 지닌 2종도 코빼기 하나 비추지 않았다. 점수 격차는 이제 따라잡는 게 무의미할 지경이 되었고, 로이는 결국 발걸음을 돌려 엘리자베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녀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침식체를 처리해나가고 있어서 위치를 특정하기가 매우 쉬웠다. 그녀가 방심하고 있어 위치를 숨기지 않는 것에 감사하며 로이는 저 멀리, 또 한 마리의 침식체를 조준하는 엘리자베스를 발견했다.
“잠까아아아안!”
“물벼룩?”
갑작스런 로이의 난입에 엘리자베스가 멈칫했다.
탕!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로이는 그녀가 노린 침식체를 선수 쳤다.
로이의 점수는 오르고, 엘리자베스의 점수는 그대로였다.
뒤늦게 자신의 사냥감이 빼앗긴 사실을 깨달은 엘리자베스가 총구를 로이에게 겨눴다.
“이게 무슨 짓이죠?”
“아무리 생각해도 네 점수는 못 따라잡겠더라고.”
능청스런 답변에 엘리자베스의 눈빛이 점차 표독스러워진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을 끌어낸 로이는 태연히 두 팔을 벌리며 뒤에 있던 침식체를 겨누고, 쏘아 맞춘다.
탕!
엘리자베스가 놀라 등을 돌리자 그곳엔 소형 침식체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승산이 있는 방법을 고른 거야.”
“그리고 그 방법이 제 사냥감을 빼앗는 것이고요.”
“역시 우리 기관장. 상황파악은 빠르네?”
활짝 웃는 로이와 대비되게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거리를 좁히다가… 캐룩, 하는 침식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오케이!”
“큿!”
타이밍은 동일했지만, 점수가 오른 건 로이였다.
‘아니, 타이밍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빗나간 건 말이 안 돼요.’
엘리자베스는 침식체가 있던 각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궤적을 곱씹었다. 방아쇠를 당긴 순간 흔들린 총구. 떠오르는 건 로이의 능력이다.
“마음이 상당히 급하셨던 모양이네요. 이런 수까지 사용하시는 걸 보면.”
“경험과 실력, 모든 방면에서 내가 너보다 뒤떨어지는 건 명백해. 이기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밖에 없지.”
탕!
“….”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전광판에서 엘리자베스의 점수가 오른다.
로이가 조심스레 고갤 뒤로 돌리자 침식체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좋아요. 어디 한 번 끝까지 발버둥 쳐보세요, 물벼룩.”
“… 하! 난 쉽게 안 져줄 건데?”
로이가 엘리자베스를 방해하고, 그 방해에 굴하지 않고 엘리자베스가 득점한다.
어느새 제한 시간이 2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 속에서, 시뮬레이션 룸에 난장판을 일으킨 장본인은 이제 대놓고 그녀와 등을 맞대거나 꼭 붙어서 사냥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능력의 정확도를 위해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
어두운 폐공장 속에서 두 줄기의 빛이 교차한다. 빛은 서로를 침범하거나, 때론 반사하고 튕겨낸다. 하지만 결국, 제일 중요한 건 누가 먼저 상대한테 닿느냐, 였다.
“젠장! 적당히 좀 해라!”
“어머? 지금도 적당히 하고 있답니다. 당신에겐 그조차 벅찬 듯 보이지만요.”
로이는 필사적으로 새디어스 모건으로부터 배운 사격술을 활용해 엘리자베스의 점수를 뒤쫓았다.
그러나 점수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역으로 초조해진 로이의 명중률이 점차 낮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남은 건 서바이벌 캐스트가 언급한 3종을 잡아내는 것뿐이었다.
‘대체 3종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 거야?’
자신보다 명백히 동체시력이 빼어난 엘리자베스를 쫓아 쉬지 않고 눈을 굴렸더니 슬슬 안구가 따끔따끔 아파온다. 이대로 가다간 진짜로 져버린다는 생각에 로이는 아예 능력으로 엘리자베스를 속박해버릴까 생각했으나, 그것까진 너무한 거 같아 방금 떠올린 발상을 접었다.
혹여나 그랬다간 그를 봐주고 있는 엘리자베스가 화려하게 날뛸 가능성도 있었기에, 로이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엘리자베스의 궤적을 좇았다.
“아.”
그때였다.
엘리자베스의 짧은 탄성과 동시에 바닥이 흔들렸다.
로이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3종이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자 그곳엔 흔히 볼 수 없는 3종 침식체, 비스트가 이쪽을 향해 포효를 지르고 있었다.
‘비스트한테 약점이랄 게 있었나?’
상식이 모자란 로이는 일단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모든 공략은 그녀로부터 나왔다. 그녀도 로이의 수작을 알고 있기에 이번만큼은 그와 거리를 벌리고자 앞으로 치고 나갔다.
“어딜!”
로이가 황급히 그녀를 뒤쫓는다. 다만 시선은 비스트에 고정한 채다. 그가 확인해야 할 건 엘리자베스가 노리는 약점. 레이저건은 포인터가 활성화되어 어디를 조준하고 있는지 뻔히 보였고, 로이는 이를 노렸다.
하지만 대놓고 사냥감을 빼앗는 작전을 펼쳤던 그에게 엘리자베스가 쉬이 낚일 리가 만무. 그녀는 화려하고 절제된 동작을 서로 섞어가며 로이의 판단에 혼란을 주고, 틈을 타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사실, 딱히 3종을 잡지 않아도 제 승리지만요.’
이미 둘 사이의 점수 차는 압도적이었다.
저 3종 침식체가 비정상적인 점수를 내주지 않는 한, 로이가 그녀를 따라잡긴 요원해 보였다.
그럼에도 굳이 3종을 잡으려 한 건, 자신을 이기려고 발버둥 치는 그의 모습이 워낙 재밌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어떻게든 같은 위치에 서보려는 로이가 기특했다.
‘평소에도 저런 모습을 보여주면 어디 덧나나….’
필사적이고 진지한 로이는, 솔직히 말하자면 멋있었다. 어린 시절 그녀를 지켜주던 무적의 기사가 떠오를 정도로. 그처럼 화려하고 절조 있진 못하지만, 투박하면서도 필사적인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 시합이 끝나면 다시 껄렁이는 양아치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 생각하니, 그게 참으로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마지막 한 발자국만큼은 로이를 단숨에 떼어낼 정도의 힘을 담아 도약했다. 경악스런 로이의 표정을 상상하며 조준을 마친 뒤, 자그마한 원망을 담아 방아쇠를 당긴다.
탕!
여기에서 나가면 어떤 명령으로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까?
상상만 해도 즐거운 미래를 그리며 쏘아진 탄환은,
“물벼룩 당신….”
불행히도 비스트에게 닿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쏘아낸 궤적을 몸으로 직접 가로막은 로이를 경악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다행히 사람 몸은 관통 안 되는 모양이네?”
이번 매치는 서로의 목숨을 깎는 데스매치가 아니라, 침식체를 얼마나 많이 잡느냐로 승패가 결정되는 점수내기. 그녀의 탄환은 로이한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태연히 엘리자베스의 사로를 가로막은 로이는 그녀를 등진 채, 방금 전 보았던 궤적을 읽어 비스트의 약점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 크아아아악!
고막을 울리는 괴성과 함께 비스트의 거체가 바닥에 쓰러지고, 전광판에 로이의 점수가 대폭 오른다. 하지만 여전히 엘리자베스의 점수를 따라잡긴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로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60초를 세겠습니다.]
역전의 찬스를 알리는 아나운스가 울렸다.
[저희가 사전에 지급한 탈부착용 간이 센서를 기억하시는지요?]
로이는 게임 시작 전, 바지 호주머니에 넣은 센서를 떠올렸다.
앞서 캐스트가 절대 몸에서 떼어내지 말라고 한 녀석이었다.
[지금부터 상대의 센서를 맞추시면, 상대의 점수를 빼앗을 수 있습니다. 모두 건투를 빕니다!]
“아니, 데스매치 아니라며!”
마침 엘리자베스를 등진 상태였던 로이가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황급히 몸을 돌렸다. 센서를 넣어 볼록 튀어나온 호주머니는 누가 보아도 그의 약점이었다.
“어딜!”
뒤늦게 이쪽을 향하며 엉덩이를 가리는 자세를 취한 로이로부터 센서의 위치를 깨달은 엘리자베스도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듯이 손에 익은 나이프를 빼들었다.
“아니 넌 진지하게 안 한다며 홍차 폭탄!”
“세상에 절대란 건 없답니다!”
“젠장! 귀족이면서 갑자기 두말하기 있냐고!”
면전에 쏟아내고 싶은 불만은 차고 넘쳤지만, 그보단 코앞까지 날아온 나이프의 처리가 우선이었다.
주로 다루는 무기가 쇠사슬이긴 했지만, 총알처럼 빠르게 쏘아지는 나이프를 쇠사슬로 전부 떨궈낼 신기가 로이에겐 없었다.
기관에서 구를 땐 그런 기예를 익히는 것보다 능력을 다듬는 게 더 시급했다.
그래서 던졌다.
손에 들린 레이저건을.
“하다못해 이젠 무기까지 버리는 건가요!”
엘리자베스의 호통에도 꿈쩍 않고 낮은 자세로, 호주머니를 노출하지 않는 선에서 양팔로 얼굴을 보호하며 달려든다.
동시에 그가 나이프를 막고자 던진 레이저건이 훌륭히 방패 역할을 수행해낸다.
채채챙!
하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완구용이긴 해도 레이저건은 비교적 섬세한 물건이었고, 카운터의 힘이 실린 나이프 투척을 견딜 내구성을 지니진 못했다.
즉, 박살난다.
“빛이…!”
처참하게 망가진 레이저건 안에 설치된 조그만 부품이 미러볼처럼 화려한 불빛을 흩뜨린다. 신이 그의 손을 들어주려는 것처럼 달을 검은 먹구름이 가리고, 어둠이 드리운 폐건물에 붉은 섬광이 어지럽게 흐트러진다.
“잔머리를 좀 쓰셨군요. 하지만…!”
선글라스.
로이가 씌워준 선글라스가 본래라면 시야를 차단했을 빛을 완벽히 막아냈다.
그대로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달려오는 로이를 향해 나이프를 칼등치기로 휘두르려 할 때, 짧지만 확실한 검정이 엘리자베스의 시야를 가려버렸다.
“어!?”
당황한 엘리자베스가 무심코 뒷걸음질을 치며 틈을 만들어냈고, 로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양팔을 붙잡아 넘어뜨렸다.
“잡았다아아!”
회심의 승리. 로이가 포효했다.
바닥에 쓰러진 둘의 시선이 교차한다.
자빠진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져 로이의 안경을 툭 떨어뜨린다.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의 시야를 가린 토끼귀 머리띠가, 로이의 안경과 함께 뒤엉켜 바닥을 뒹군다.
“어때? 체크메이트지?”
“으읏….”
엘리자베스가 양팔을 비틀거리며 전광판을 확인했다.
아직 근소하게나마 엘리자베스가 앞서고 있었다.
“아직 제 점수가 더 높아요.”
“헹! 그거야 내가 이제 네 총으로 센서를 쏘면….”
자신만만하던 로이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한다.
잠깐, 그녀의 센서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로이의 시선이 엘리자베스의 몸을 훑는다. 하얀 원피스를 제외하곤 무엇 하나 걸친 게 없는 그녀는 센서를 숨길 곳이 마땅치 않았다.
굳이 후보를 내세우자면 워치나, 신발, 그리고 소맷자락 정도다. 하지만 워치 안에 숨기는 건 너무 비겁하고, 엘리자베스답지 못하다.
그렇다고 소맷자락은 이미 로이가 붙들었고, 그녀가 흘린 땀으로 인해 속이 비쳐 매끈한 피부가 옷감 사이로 언뜻 비쳤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신발을 직접 벗겨서 확인해야 하는데….
‘어, 그래도 되나?’
영국 신사의 마음가짐이 로이의 행동을 멈춰 세웠다.
로이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엘리자베스의 얼굴로 향한다.
머리 위로 자신에게 붙잡힌 양팔과 살짝 눈물이 맺힌 수치심 가득한 표정은, 여러모로 이상한 상상을 연상시키기 충분했다.
그런데 여기서 사귀지도 않는, 게다가 친하지도 않은 여성의 신발을 강제로 벗긴다?
‘아니, 이거 완전 외통수잖아!?’
로이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철창 안에 갇힌 자신, 경멸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4기동 걸캅스, 스승이 성범죄자가 되었단 사실에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제자, 침울한 라이언 영감의 품에서 훌쩍훌쩍 우는 엘리자베스까지.
“젠장!”
결국, 로이는 엘리자베스를 놓아줬다.
“빨리 안 끝내고 뭐하시는 거죠?”
“그걸 몰라서 묻냐….”
어쩌면, 이 순진한 아가씨는 진짜 모르는 걸지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로이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아. 결국 허무하게 져버렸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
- 쿠어어어어억!
잔뜩 풀어졌던 둘의 표정이, 순식간에 다시 긴장으로 굳어졌다.
땅을 울리는 포효는 분명 로이가 방금 쓰러뜨린 3종 침식체, 비스트의 것이었다.
“뭐야, 한 마리가 아니라 더 나오는 거였어?”
로이가 황당한 표정으로 전광판을 확인했다.
고작 10초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3종이 출현한다고?
방금 전 자신이 3종을 처리해 얻은 포인트를 계산한 로이가 황급히 레이저건을 찾았다.
“어, 없어!?”
“혹시 이걸 찾고 있나요?”
머리 위에서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흐트러진 앞섬을 왼팔로 가린 채, 오른손엔 로이한테 빼앗겼던 레이저건을 쥐고 있었다.
“홍차 폭탄!”
“후후. 아쉽게도 이번 내기는 저의 승리인 것 같네요.”
엘리자베스가 비스트를 겨눈다. 방아쇠가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당겨진다.
저걸 어떻게 막지? 어떻게 해야 역전할 수 있지?
맹렬히 회전하는 머릿속에서 로이의 시야가 무언가를 잡아낸다.
“붉은빛?”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안경에 붉은빛이 일렁인다.
생각은 거기까지.
이후 로이는 모든 걸 본능에 맡겼다.
평소처럼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사슬이 아닌, 방금 전 엘리자베스의 토끼귀를 아래로 잡아당긴 것처럼 중력을 이용해 정교한 움직임으로 원하는 물건을 끌어당겨서 엘리자베스의 총구 앞으로 투척한다.
“이거나 먹어라 홍차 폭탄!”
“물벼룩?”
붉은 번쩍임이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잡아끈다.
이미 당겨진 방아쇠는, 푸른빛을 비스트에게 쏘아냈다.
하지만 총구 앞까지 날아온 물건에서 사방팔방으로 쏟아지는 붉은빛은 총구에서 뿜어진 푸른빛의 탄도를 왜곡시켜, 약점에서 빗나가게 만들었다.
동시에 푸른빛은 붉은빛을 여기저기 튕겨내, 엘리자베스의 가슴골에 닿았다.
삐이이이이익!
[시합 끝! 승자, 레드팀!]
“어?”
먼지와 녹슨 금속 냄새를 물씬 풍기던 폐공장의 모습이 어딘가 요상한 장치와 녹색 크로마키가 덕지덕지 붙은 정육각형 방으로 바뀌고, 땅을 뒤흔들던 비스트의 괴성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뭔데 이거!?”
체육관보다 조금 더 넓은 실내 공간에서, 영문을 모르는 로이의 황당함 섞인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틀딱 갬성이라 사실 클래식한 럭키스케베 좋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