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침식파는 공포의 대명사지.”
대충 가공도 못할 저순도 이터니움 실드에 막혀 위상이 많이 추락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장에서 일하는 용병들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전조 없이 일어나는 침식현상에 휩쓸려 침식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을 목격한다면, 침식파에 대한 공포는 커지면 커졌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웬만한 침식증후군은 눈치 채지도 못하는 사이 사람을 절망의 구덩이 끝으로 밀어 넣는다. 워낙 스스로 증상을 알아차리기 힘들어 침식파 검출 지역을 다녀온 이력이 있다면 정기적인 검진이 권고될 정도다.
세간에서 인식하는 침식증후군이란 이러하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 고순도 이터니움을 동반한 치료를 반복해도 결코 나아지지 않는 불치병. 환자는 본인이 원치 않음에도 서서히 침식체와 비슷한 모습이 되어서, 끝내는 차가운 총탄 아래 숨을 거둔다.
“뭐, 결국 침식파에 지속적으로 쬐이다보면 이터니움 실드가 있든 말든 사람은 미치게 되어 있어. 속된 말로 하나가 되는 거지.”
관리국 최상급 기밀로 여겨지는 침식의 비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까발린 채 필터까지 태운 궐련을 뒤꿈치로 짓뭉갠다.
담뱃불이 완전히 꺼지자, 투박하고 굳은살이 박힌 손에 궐련 대신 매끈한 스마트폰이 쥐어졌다. 그는 자신이 일으킨 참상에 대해 검색했다. 작전을 성사시키기 위해선, 세상이 떠들썩하면 떠들썩할수록 좋았다.
“호오? 벌써 중계까지 하고 있나?”
어느 동영상 사이트에서, 금발 청년의 활약상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영상을 찍는 남자는 침식체의 머리가 콘크리트 바닥에 박히자 감탄하고, 살았다며 희망을 부르짖었다.
조만간 저 희망찬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진다는 생각에,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 안에 스마트폰을 던져 넣었다.
“이걸로 가짜 신분하고도 작별이다.”
스마트폰에서 중계되는 목소리가 섬뜩한 기계식 잡음으로 점차 뭉개지며 이내 소리가 끊긴다. 남자는 구부정한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부질없고만. 평범한 사람들은 불확실한 공포에 쉽사리 선동되곤 하지.”
침식을 치료한다는 유사과학과 사이비 종교 등이 여전히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다. 침식증후군을 향한 사회적 공포 분위기는 예나 지금이나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대정화로부터 10년도 더 흘렀으나 그들의 마음속엔 여전히 공포와 불안이 파고들 틈새가 가득하다.
“우리는 그 마음의 틈새를 이용한다.”
“바로 이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말입니다.”
잠자코 남자의 연설을 듣던 떡대가 히죽 웃으며 커다란 케이스를 팡팡 내리쳤다. 안에는 관리국도 까무러칠 진귀한 아티팩트가 담겨 있었다.
“좋아. 그럼 슬슬 작전을 진행하지. 폭탄 준비는 끝났나?”
“진작 끝냈습니다요. 한 번 확인해보실래요, 대장?”
줄곧 구석에서 자신의 차례만 오길 고대하던 사내가 허리 높이까지 닿는 상자를 질질 끌고 왔다. 뚜껑을 열자 안에는 이터니움 실드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이게 전분가?”
“네, 대장. 놀이공원 녀석들, 진짜 더럽게도 많이 비축하고 있더라고요.”
예전에 리플레이서의 테러에 큰 피해를 입은 적 있는 어드민 랜드는 손님들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자 예비용 이터니움 실드를 잔뜩 비축해두었다. 눈앞의 사내는 이를 하나도 남김없이 아주 싸그리 털어왔다.
“아마 놀이공원 직원 녀석들, 지금쯤 텅 빈 창고를 보며 자지러지고 있을 걸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순도가 낮아도 이 정도 양이면 침식체가 꼬여들긴 하겠지.”
주변의 시선을 끌어들일 제물의 소환 준비가 끝나자 대장이라 불린 남자가 자신 몫의 무기를 챙겨들었다.
“터지는 시간은?”
“정확히 10분 후에 터지도록 방금 맞춰놨습니다요.”
모든 준비는 끝마쳤다. 남은 건 신의 뜻에 달렸다.
대장이 거대한 문 앞에 선다.
“지금 바깥은 무척 혼란스러울 거다.”
그리고 혼란은 곧 무법자들에게 기회로 다가온다.
침식체를 처리해서 이터니움을 채취한다는 그런 순진한 발상은 아니다. 세상은 용병들에게 그리 녹록치 않았다. 블랙 네트워크에서 살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손을 대어야 했고, 마침 그들과 같은 밑바닥 인생에게도 흔쾌히 손을 내밀어주는 존재가 있었다.
‘역시 더 깊게 연관되기 전에 손절했어야 하는 건데….’
아니면, 처음부터 그 손을 잡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알아선 안 될 것까지 알아차린 후였다.
대장의 시선이 왼쪽 손목을 향했다. 불가사의한 힘을 주는 카운터 워치가 아닌, 평범한 손목시계. 그가 씁쓸히 웃으며 장전손잡이를 당겼다.
“빨리 움직이자.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한시적이야.”
“여긴 그라운드 원이니까요.”
떡대가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여긴 관리국 인증을 받은 태스크포스가 우글거리는 동네다.
잔챙이밖에 나오지 않는 저레벨 CSE 현상은 눈 깜짝할 사이 정리될 게 뻔하다.
“작전은 기억하고 있겠지? 철저하게 직원들이 사용하는 길로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인다. 민간인을 마주치면 침식체 소탕을 위해 파견된 용병이라고 둘러대. 여기서 일이 더 커지는 건 원치 않으니까.”
가뜩이나 아티팩트의 힘을 살짝 흘려 침식체를 끌어들인 것도 위험한 도박이었는데. 굳이 여기서 더 무모한 짓을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뭐,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관리국에 걸리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아티팩트와 부하들을 전부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생포되는 것만큼은 피하자고 다짐하며 대장이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대장도 많이 변하셨군요. 한동안 쉬긴 했어도 모두 베테랑입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훗, 그러냐?”
정면을 바라보며, 부하들에게 보이지 않는 얼굴로 대장이 남몰래 이를 갈았다.
베테랑? 그가 내심 코웃음 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하들이 오늘따라 우습고, 또 짐덩어리처럼 귀찮게 느껴졌다.
“모두 정신 바짝 차려! 성공하면 평생 놀고먹어도 모자라지 않은 부가 주어지지만, 실패하면 닥치고 수용소행이다. 알겠나?”
네!
우렁찬 대답에 대장의 입가에 가식적인 미소가 걸린다.
“그래! 여기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밝은 미래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육중한 철문이 열리자 뇌까지 울리는 커다란 피난 경보가 고막을 두드린다.
적절한 소음이었다.
대장과 일행은 신속한 움직임으로 인적 드문 직원용 길을 달려갔다. 건너편에선 급박한 얼굴로 도망치는 사람들과, 그 정신없는 행렬을 뒤쫓는 침식체들로 가득했다.
“난리구만.”
“저기, 우리 진짜 괜찮은 거 맞나요, 대장?”
여태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은 소심하게 생긴 부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인제 와서 두렵나?”
“그야 겁나죠! 그리고 저 케이스도 믿을 수가 있어야죠!”
부하의 시선이 정중히 봉인된 케이스를 향했다.
“믿고 자시고 간에 저건 관리국의 정품 인증을 받은 아티팩트 보관함이다.”
“하지만 그 아티팩트를 억누르지 못해서 지금 사태가 일어났잖아요! 저희 이터니움 실드도 잔여량이 절반 이상이나 깎여나갔다구요!”
고심도 다이브를 할 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며 소심한 부하가 목소릴 높였다. 불안감이 주변에 전파될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이들 중에는 부하의 말에 흔들리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뭐. 네 다리나 팔이 침식체처럼 변하기라도 했나?”
“그, 그건….”
소심한 부하가 조심스레 제 이터니움 실드를 세게 움켜쥐었다.
“봐라, 우리 모두 사지 멀쩡하잖나. 오히려 저 케이스 성능이 확실하단 것만 알게 되었지. 지금 네 이터니움 실드를 봐라. 수치가 떨어지고 있냐?”
“그, 그렇진 않습니다만….”
부하는 납득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은연중 불만스런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예기치 못한 사태였으니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시간을 끄는 사소한 불만조차 대장에겐 거슬림으로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즉결 처분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직 부하들은 쓸모가 많았다. 여차하면 총알받이로 쓸 수도 있었으니까. 때문에 그는 총구를 향하는 대신 부하들을 윽박질렀다.
“푸념할 시간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여! 지정된 장소까지만 이동하면 관할 태스크포스의 함선 틈새에 끼어든 우리 탈출 함선이 있을 테니까!”
“우리 거래대상의 함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탈출을 돕는 걸로 모자라 선금까지 보내주더군. 보통 큰손이 아니야.”
“함정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우리가 뭘 선택할 처지냐?”
“….”
떡대는 입을 다물었다.
이미 아티팩트의 힘을 흘려 침식체를 불러들인 순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대대적인 CSE 경보 발령이 울린 이상, 도시관리국에서 원인 조사를 나올 게 뻔했다. 아티팩트 하나 추적 못할 무능한 녀석들도 아니고, 도망치지 못하면 어차피 그라운드 원 수용소에 갇힐 신세다.
“뭐가 어찌되었든 우리에게 이제 퇴로는 없어. 그저, 이번 거래를 무사히 성사시켜 그간 우리가 여기서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수밖에.”
일단 팔아넘기는 데만 성공하면 숨어 지내는 생활과도 이제 작별이다. 그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품에 안은 채 계속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달렸다.
돌연,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어쩐지.”
그들의 경로를 가로막듯 하늘에서 나이프가 비처럼 쏟아졌다.
“후퇴!”
대장이 황급히 부하들을 멈추자 순백의 천사가 사뿐히 나이프 위로 착지했다.
전신에 나이프를 두른 배틀 엔젤이었다.
“무언가 수상하다 싶었어요.”
천사의 녹안이 스산하게 번뜩인다. 듣기 좋게 청아하면서도, 눈앞의 자신들을 철저하게 얕보는 목소리에 대장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잠시 잊고 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들을 버림 말처럼 사용하던 교수란 미치광이가.
‘아니, 분노를 삭여라! 일단은 속여 넘겨야 해!’
대장은 전술형 바이저를 벗고 양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오랜 시간 놀이공원에서 일하면서 익힌 가짜 미소가 능숙하게 가면 위로 그려졌다.
“오늘 커플 이용권으로 방문하신 고객이시군요. 저희한테 무슨 볼일이신가요?”
“가식적인 미소는 집어치우세요. 역겨우니까.”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어림도 없다는 듯 손에 들린 나이프를 언제든 투척할 수 있게끔 손끝에 휘감았다. 하지만 대장은 포기하지 않고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설득했다.
“무슨 소리십니까? 빨리 비켜주십쇼. 저희는 다른 방문객들을 침식체로부터 지키러 가야합니다. 레이디께선 카운터로 보이시는데. 저희와 함께 같이 가시렵니까?”
“제법 재밌는 발언을 하시는군요.”
줄곧 이들의 행적을 위에서 지켜보던 엘리자베스가 코웃음을 쳤다.
“여러분이 달려가는 방향은 인적이 드문 곳 아닌가요?”
“고, 고밀도 침식파가 발현된 곳이 저쪽 방향에 있습니다. 아마 다수의 침식 쐐기도 그곳에 모여 있을 겁니다.”
“어머? 긴급 안내방송으로도 알려지지 않은 침식 쐐기 위치를 발견하셨다는 건가요?”
“그야 저흰 놀이공원에 고용된 베테랑 용병이니까요. 그 정도 탐지 장비야 얼마든지 갖추고 있습니다.”
“그 케이스 안에 든 게 탐지 장비인가요?”
“그렇습니다.”
명백한 거짓말에 엘리자베스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그렇다면 제가 직접 확인 해봐도 될까요? 마침 제 애인이 관리국 공식 넘버링 태스크포스 소속이거든요. 침식 쐐기 위치만 파악해도 사태 수습에 꽤 큰 도움이 될 텐데….”
확인사살을 겸해서, 엘리자베스가 싱긋 웃는 얼굴로 되물었다.
“안 그런가요, 용병 아저씨들?”
“….”
대장이 침묵하고, 뒤에 있던 떡대가 그를 만류했다.
“대장, 이미 다 들킨 듯합니다.”
“젠장!”
모든 총구가 동시에 엘리자베스에게 향한다.
대장이 짜증내며 물었다.
“대체 어떻게 우릴 발견한 거지?”
“높은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죠.”
이젠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엘리자베스 역시 순순히 답해주었다.
“하필 들켜도 카운터인 아가씨한테 들키다니. 우리가 재수가 좀 없나보군.”
“아뇨?”
엘리자베스가 즉각 부정했다.
“이건 우연이 아니랍니다. 저는 처음부터 그쪽을 찾고 있었으니까요.”
“뭐라고?”
마치 침식 사태의 흑막이 자신들이란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발언에 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이지?”
“저희가 오늘 처음 만난 건, 놀이공원 입구에서 마스코트 인형탈을 쓰셨을 때였죠?”
“뭐?”
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말이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자베스는 쉬지 않고 폭로를 계속했다.
“바로 직후 글레입니르 익스프레스의 캐스트로 만났죠? 회전목마에서 저에게 굴욕을 준 캐스트도 저기 계시네요. 확실히, 정신 공격이 목적이었다면 대단히 성공적이었어요.”
엘리자베스와 연달아 눈이 마주친 부하들이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친다. 사실상 그녀의 말이 사실이란 걸 몸으로 인증해버린 셈이었다.
“서바이벌에서 캐스트는 확신 못하겠지만, 바이올렛 가든에서는 확실히 당신과 뒤의 떡대가 있었죠. 안 그런가요, 집사 아저씨?”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대장을 꿰뚫는다.
“큭…!”
“뭐, 그쯤 되자 원하던 목적을 이뤘는지 갑자기 모습을 감췄더군요. 공교롭게도 저희를 감시하던 시선이 사라진 시기와 일치하네요.”
일련의 추리가 전부 들어맞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총을 쥔 손은 힘이 과하게 들어가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만 같았다.
“혹시 제 추측에 틀린 부분이 있었나요? 정체불명의 용병 분들?”
“정말, 이쯤 되니 그간 속인답시고 행동한 게 바보처럼 느껴지는군.”
엘리자베스의 추리 쇼가 끝난 직후, 대장의 주먹이 느슨해졌다.
“… 보통 눈썰미가 아니야. 어떻게 알아차렸지?”
“제가 이래 봬도 당신들과 같은 족속을 꽤 많이 보았고, 또 처리해왔거든요.”
조금만 행동거지를 지켜보면, 그 정체가 빤히 보인다며 엘리자베스가 덧붙였다.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새, 생각났다! 기관! 대장, 기관입니다! 저 여자, 기관의 새로운 기관장이에요!”
부하의 지적에 대장의 눈이 희번득 그녀를 노려봤다.
“그래. 나도 들은 적 있다. 아주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가 프리드웬의 신임 기관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부대원이라곤 죄다 맛이 간 새끼들뿐이라 헛소문으로 치부하고 있었는데, 설마 진짜였을 줄이야.”
애초에 그곳에 있을 땐 프리드웬의 기관장이 바뀌던 말든 우스운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편리한 일회용 짐꾼에 불과했으니까. 운이 좋아서 살아남아도, 그 다음 짐꾼으로 부려먹힐 뿐이었다.
“역시 자신의 이야길 남들의 입을 통해 듣는 건 늘 새롭네요. 제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 피부로 체감돼요. 안 그런가요?”
“역시 극과 극은 통한다더니. 신임 기관장도 보통 또라이는 아닌 모양이야.”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저를 들여다보기 마련이죠.”
참으로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대장이 피식 웃으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대, 대장?”
그리곤 떡대가 쥐고 있던 케이스를 빼앗았다.
“좋아. 우리가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건 아주 잘 깨달았다.”
“어머? 순순히 잡혀주시는 건가요?”
아무리 숙달된 용병이라도 카운터를 상대하기란 요원하다. 카운터는 D급 수준만 되어도 총알 세례를 버텨내는 괴물들이니까. 하물며 상대는 기관장이다. 그 실력은 못해도 B급 이상일 터다.
원래라면 여기서 순순히 포기하겠지만, 대장에겐 비장의 한 수가 아직 남아있었다.
“근데 이를 어쩌나? 아직 우리가 준비한 지옥문은 열리지도 않았는데.”
“네? 그게 무슨 소리…!”
쾅!
저 멀리, 대장과 부하들이 빠져나온 창고에서 성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직후 이면세계에 있는 것처럼 답답한 공기가 엘리자베스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이를 눈치 챈 그녀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진다.
방금 전 폭발 직후, 피부로 체감되는 CSE 레벨이 단숨에 몇 단계나 올라갔다.
“저것도 당신들 짓인가요?”
“아직 놀라긴 일러, 아가씨.”
대장이 케이스의 잠금을 풀어헤쳤다.
“대, 대장!?”
“지금 그걸 풀면…!”
대장은 부하들의 겁먹은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케이스의 봉인을 해제 직전까지 풀어낸 뒤 엘리자베스를 노려봤다.
“여기 안에는 우리가 학회로부터 빼돌린 아주 진귀한 아티팩트가 들어있지.”
“학회로부터, 아티팩트를 빼돌려?”
“우리 귀여운 탐정님께서도 거기까진 맞추지 못하셨나보지?”
단순히 그들이 학회의 명령을 받아 아티팩트를 밀수입하려는 일당인 줄 알았던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당혹스러움으로 일그러졌다.
“침식체를 불러들인 것도 그 아티팩트의 힘인가요?”
“그래. 케이스를 아주 살짝만 개봉해도 침식체가 아주 벌떼처럼 달려들지.”
저들이 말한 ‘아주 살짝’이 과연 어느 정도인진 모르겠지만, 놀이공원에 나타난 침식체의 수를 보면 아티팩트에 잠재된 힘이 얼마나 위험한진 그녀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
“그쪽이 기관장이면 잘 아시겠지만, 학회랑 얽히면 아무래도 수명이 짧아진단 말이지?”
프리드웬 기관과 얽히는 건 예삿일이고, 허구한 날 유물이나 지식의 파편과 얽혀 미쳐버리고 종래엔 단순한 껍데기로 전락하기 일쑤다.
대장은 그러한 장면을 너무나도 많이 봐왔다. 가까스로 미치지 않을 정도로만.
“그래서 배신했지. 학회의 명령으로 직접 발굴하러 간 아티팩트를 빼돌렸어.”
“용케 아직까지 꼬리가 잡히지 않으셨군요?”
학회는 손대중이 없는 걸로 악명 높다. 여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랄함이 더해지니 이를 상대하는 기관도 끊임없이 희생자를 낳았다.
“그야 우리도 보복이 두려워 한동안은 숨어 지냈거든. 이걸 비싸게 처분하고 싶어도 우리 보스가 블랙 네트워크에서 좀 날리시는 분이잖아? 마땅한 거래처를 찾아보기 어려웠지.”
대장이 케이스를 가볍게 퉁퉁 내리쳤다. 그를 제외한 모두가 움찔하자 그는 뭐가 그리 상쾌한지 기분 좋게 웃어댔다.
“그래서 우린 아티팩트의 가치를 높이고자 했다.”
“가치를, 높여요?”
참으로 불길한 소리다. 아티팩트의 가치를 높인다는 건, 그만큼 아티팩트의 위험도가 오른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었으니까.
“그 빌어먹을 노친네가 아니더라도 다른 고객들이 우리 아티팩트를 거래하지 않곤 못 배기게 만드는 거지! 물론, 우여곡절은 좀 있었어. 아티팩트 관련 정보를 죄다 손에 꽉 쥐고 있는 양반이라 우리도 똥줄이 좀 탔거든.”
조금이라도 아티팩트에 관한 정보를 풀거나 관심을 보이면, 노인의 끄나풀이 먼저 접선을 해왔다. 촘촘히 쌓인 포위망에 대장은 도망칠 곳이 없다는 공포에까지 휩싸였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이들은 장고 끝에 아티팩트 거래를 담당하는 장물아비나 감정사 대신 탐험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가씨는 모르겠지만, 탐험가 녀석들도 아티팩트에 대한 식견은 꽤 있는 편이야. 그 중 진짜배기는 관리국조차 알아내지 못한 아티팩트의 감정을 해내곤 하지. 우린 용한 탐험가를 고용해 아티팩트의 효능을 알아냈다.”
명예를 신경 쓰지 않는 탐험가는, 순수하게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동하곤 한다. 그들의 아티팩트 감정을 도운 탐험가도 비슷한 부류였다. 그는 흔쾌히 무상으로 그들의 아티팩트를 감정을 해주었다.
“딱 보아도 정상적인 아티팩트는 아닐 거 같네요.”
“아냐, 녀석은 상당히 특이하긴 해도 비교적 정상적인 아티팩트야. 우리 멋쟁이 감정사 양반이 붙여준 명칭이 ‘애정갑 영구기관’일 정도지.”
“….”
짜게 식은 눈초리가 대장을 향한다.
진지한 분위기를, 싸늘한 바람이 잠재웠다.
“내가 지은 거 아냐! 그 빌어먹을 감정사 새끼가 지은 거라고!”
“그렇다고 치죠. 아티팩트의 힘은 무엇이죠?”
“전혀 안 믿는 눈치잖아! 너희들도 뭐라고 좀 말해봐라!”
“그, 그게 말입니다….”
“저희가 다 반대할 때 대장 혼자 찬성했습니다요.”
부하들이 하나같이 시선을 피하자 대장의 얼굴이 홍시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무튼! 이 아티팩트는 사람의 긍정적인 감정을 빨아들여서, 에너지로 변환하는 힘을 지니고 있지! 즉 남녀 간의 사랑이나 자식을 향한 부모의 애정 등이 모이는 놀이공원이야말로 최고의 에너지 수급원이란 말이다!”
문득,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어떻게 어드민 랜드에 오게 되었는지 떠올렸다.
‘과연, 그렇게 된 거였군요.’
진실을 깨닫자 힘이 빠지고, 눈앞의 남자들이 불쌍히 보이기 시작했다.
“재밌는 이야기네요. 그래서 그 에너지를 모아서 무슨 흉계를 꾸미고 계시죠?”
“말했잖냐! 모두가 거래하지 않곤 배기지 못하는 아티팩트를 만들어낸다고! 요즘 세상에 고에너지란 늘 수요가 있기 마련이지. 하다못해 이걸 그로니아의 유니콘 녀석들에게만 팔아넘겨도 우린 평생을 놀고먹고 지낼 수 있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엘리자베스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하아. 정말 한심한 작자들이네요.”
사람의 긍정적인 감정을 모아서 에너지로 전환하는 아티팩트를 가지고 기껏 떠올린 곳이 분쟁 지역인 그로니아라는 점에서 그들이 얼마나 돈에 맹목적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젊은 기관장님께선 우리가 좀 많이 우스운 모양이신데. 예를 들면, 이걸 여기서 개봉하면 어떻게 될까?”
대장의 양손이, 조심스럽게 케이스의 뚜껑을 들어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심드렁하니 그를 쳐다봤다.
“그랬다간 그쪽도 무사하진 못할 텐데요?”
“어차피 이미 한 차례 에너지가 폭발했었어! 전부 네년 탓이라고!”
엘리자베스가 고갤 갸웃했다.
“갑작스럽네요. 제가 뭘 했다고 그러시죠?”
“원래라면 이렇게 급박하게 일을 진행시킬 생각 없었어! 하지만 네년이랑 그 양아치 새끼랑 자꾸 꽁냥대니까, 아티팩트가 그 에너지를 다 담아내지 못하고 한 번 방출했단 말이야!”
덕분에 침식체가 꼬였고, 그들은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게 되었다.
대장 측에선 꽤 억울할 만한 일이었으나, 그녀는 내심 올라간 입꼬리를 주체 못해 입가를 주먹으로 감추었다.
“뭐, 그럼 됐어요. 이걸로 듣고 싶은 답변은 다 들었네요.”
“뭣?”
순식간에 능력으로 소환된 나이프가 허공에서 비처럼 쏟아지고, 그들의 어깨와 허벅지, 그리고 발바닥 등이 나이프에 꿰뚫린다.
“끄아악!”
“대, 대장!”
“여, 역시 보통 카운터가 아녔어!”
순식간에 무력화된 일당에게, 엘리자베스가 천천히 다갔다.
마치 목숨을 거둬가는 사신처럼, 사뿐히 걸어 대장 코앞까지 다가간 그녀는 천천히 쭈그려 앉아, 대장과 눈을 마주쳤다. 어안이 벙벙해진 대장과 다르게, 엘리자베스는 싱긋 웃었다.
“저는 잘났거든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 무슨 말을…!”
“하지만 그럼에도 확신하지 못하는 게 하나 있었어요.”
근데 당신들이 그걸 해결해줬네요.
“고마워요.”
엘리자베스가 답례를 하겠다며 머리 위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새하얀 입자가 허공에 뒤엉키더니 커다란 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저, 저건…?”
“팬드래건 가문의 가보를 본뜬 검이에요.”
검은 점점 크기를 키우더니 일당을 전부 깔아뭉개고도 남을 크기가 되어서야 간신히 멈추었다.
“파편의 일부분이 되어 영원히 고통 받을 바에는 제가 직접 숨통을 끊어드리죠.”
“자, 잠깐! 지금 그걸 떨어뜨리면 이 아티팩트도!”
“어머?”
늦었다.
이미 엘리자베스의 팔은 기요틴처럼 떨어져, 사실상 사형선고를 내린 후였다.
대검이 일당을 향해 떨어졌다.
“미, 미친년이이이이!”
쾅!
땅이 울릴 정도의 거대한 진동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난다.
“하아. 겁쟁이면서 용케 학회를 배신할 생각을 다 했네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성대하게 흙먼지를 뒤집어쓴 엘리자베스가 툴툴대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손에는 아티팩트를 봉인한 케이스가 아주 멀쩡히 들려 있었다.
“뭐, 저 분들한테선 더 뜯어낼 정보가 있으니 라이언 아저씨한테 연락해두도록 할까요.”
정확히 누구에게도 닿지 않게 애꿎은 땅에 떨어진 검. 하지만 남자들은 전원 입에 거품을 문 채로 기절해 있었다. 그녀는 이를 한심하게 쳐다보다 기관에 짧은 문자를 남긴 뒤, 로이가 기다리고 있을 구역으로 달려갔다.
[…]
엘리자베스가 사라진 자리,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시꺼먼 파편이 부서진 산책로를 타고 흘러나와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성찬의 다가온다….]
빛 한 점 비추지 않는 검은 파편은 꿈틀거리면서 땅을 기어, 의식이 사라진 용병들에게 다가갔다.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가장 먼저 소심한 부하가 그들의 일부가 되었다.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하나는 둘이.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둘은 넷이.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넷은 여섯이.
파편이 서로 증식해, 마지막엔 대장 하나를 둘러싸고 천천히 그를 포위해간다.
“으, 으윽…!”
마침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던 대장은 충격의 범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비교적 일찍 눈을 뜰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후회했다. 차라리 쭉 기절해 있으면 좋았을 텐데.
“너, 너희는…!”
자신을 둘러싼 파편의 모습에 대장이 충격에 빠졌다.
“버, 벌써 여기까지 온 거야? 아니면 설마 처음부터 전부…?”
목소리가 떨린다.
두려움에 짓눌린 그가 누런 오줌까지 지리며 황급히 도망치고자 사지를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어도 엘리자베스가 던진 나이프 탓에 그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한때나마 부하들이었던 이들이 다가온다.
“아, 안 돼! 제발! 잘못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천천히.
처음엔 손, 이어서 발, 그리고 혈관 등 피부 속을 파고들어오는 지식과 파편.
“으아아아아악!”
머릿속 뇌를 헤집어지는 끔찍하고 섬뜩한 감각에 대장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하나가 되어, 성찬의 때를 맞이하자.]
. . .
로이의 위치를 찾아내는 건 금방이었다.
잠깐 동영상 사이트를 뒤져보면 그의 활약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토대로 그의 위치를 추적해냈다.
일부러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인하기라도 한 건지 로이의 위치는 처음 헤어진 곳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외딴 광장에 쓰러져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허릴 숙여, 엉망이 된 로이를 내려다봤다.
“홍차 폭탄?”
“꼴이 엉망이네요, 물벼룩.”
“그런 너는… 괜찮은 거 맞냐?”
로이가 걱정스러운 듯 그녀의 행색을 살폈다.
전투가 벌어져도 드레스에 먼지 한 톨 안 묻히던 그녀답지 않게 여기저기 흙먼지가 묻어 있으니 오해할 만도 하다.
“보다시피 멀쩡해요. 잔챙이만 상대했거든요. 당신은요?”
“나? 그야 낙승이지. 별 것도 아녔어.”
자신만만하게 웃는 로이는 누가 봐도 고전한 모습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잔뜩 헤진 로이의 옷차림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남자의 허세란. 당신의 추태가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된 건 아시나요?”
“뭐? 진짜? 아니, 잠깐 실화야?”
방금 전까지 쓰러져 있었던 주제에 벌떡 일어선 로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휴대폰을 든 채 자신을 촬영하고 있는 남자를 발견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거기! 사람 초상권 좀 지켜!”
“어머? 도망갔네요.”
범인이 헐레벌떡 도망쳤으나 쫓을 여력이 없었던 로이는 한숨과 함께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침에도 그랬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굉장히 피로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코핀에선 제때 지원 왔나요?”
“좀 늦긴 했는데 오긴 왔어. 관할 구역이 아닌데도 용케 금방 왔더라고.”
덕분에 갑자기 튀어나온 침식체도 순식간에 정리됐다며 로이가 덧붙였다.
“지금은 경찰과 함께 부상자 호송을 돕는 중이야.”
“성실하네요.”
평소 제멋대로고, 말 안 듣는 펜릴 소대와 툭하면 배상금이 포상금보다 많이 나가는 알트 소대와 다르게 멀쩡한 플로라 메이드 서비스와 스틸레인 소속 용병들이 파견됐으니 당연하다.
“부사장 그 아줌마, 관리국 측에서 엄청 급박하게 지원 요청을 해서 뭔가 잔뜩 뜯어낼 요량으로 들떴던데.”
“후후. 마음까지 가난하진 않길 빌어야겠네요.”
엘리자베스가 다소곳이 로이 옆에 앉았다.
정신없이 소란스러운 바깥과 달리, 둘이 앉은 공간만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쉬고 있다가, 로이가 넌지시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냐?”
“무엇을요?”
“망했잖아. 네 첫 놀이공원 나들이.”
“그러네요. 날을 봐서 영국에 있는 놀이공원에서 보충할까요?”
“좀 봐줘….”
“농담이랍니다. 놀이공원도 블루로즈 섬처럼 1년에 한 번 경험하면 충분해요.”
저희에겐 그 이상의 여유는 없으니까요. 엘리자베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냐….”
어째선지, 오늘따라 그녀의 모습이 많이 피곤해 보인다고 느낀 로이는 그녀를 어떻게 위로를 할까 고민하다가, 바보처럼 제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였다.
둘만의 공간을 어느 눈치 없는 머신이 끼어들었다.
“거기 흙먼지 뒤집어쓴 청년!”
“응? 나 말하는 거야?”
로이가 자신을 가리키자 익숙한 생김새의 머신이 몸체에 ‘YES’를 띄웠다.
“그래 자네 말하는 걸세. 그대가 오늘 일어난 사고를 발 빠르게 대처해서 피해가 무척 적었다고 들었네만. 나도 인터넷에 생중계되는 걸 봤지. 아주 대활약을 펼쳤어!”
“고, 고맙습니다? 아니, 그보다 당신 사장님이잖아?”
“사, 사장이라니? 난 이 어드민 랜드의 책임자인 파크GAP이라네!”
파티라도 하듯 화려한 모자와 선글라스, 그리고 새하얀 수염까지 달아놔 순간 못 알아볼 뻔한 로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가 봐도 코핀의 머신갑 사장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미 수상하다는 눈빛을 잔뜩 보내고 있었다.
“하여간, 자네들의 활약에 감사하고자 원한다면 오늘 한정이긴 해도 야간 개장을 하려 하는데. 어떻게 하겠나?”
리플레이서 사태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경미한 손해만 입어 복구도 금방이라며 파크GAP이 덧붙였다.
로이가 엘리자베스를 쳐다봤다.
오늘 이곳에 끌려온 것도 어찌 보면 그녀의 결정이었으니 선택권은 오롯이 그녀에게 있었다.
“어쩔래?”
“글쎄요. 아직 즐길 게 남았나요?”
“뭐, 범퍼카도 있고, G익스에 밀려서 그렇지 근본 롤러코스터인 지옥의 108스핀이란 것도 있어. 어트랙션 종류만 따지면 오늘 종일 돌아다녀도 다 못 탈 만큼 많아.”
엘리자베스가 머신갑에게 물었다.
“방금 제안은 저희에게만 하신 건가요?”
“아니! 자네들처럼 용감히 시민들을 지켜준 모든 영웅들께 제안하고 있다네. 발 빠르게 지원을 와준 태스크포스 역시 마찬가지지. 포상으론 딱 좋지 않나?”
즉 코핀도 거기에 포함된다는 뜻이다. 이 빌어먹을 흑막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엘리자베스는 어렴풋이 알 거 같았다.
“좋아요.”
잠깐의 고민 후, 엘리자베스가 입을 열었다.
“대신….”
그녀의 작은 부탁에 파크GAP이 흔쾌히 고갤 끄덕였다.
“허허허! 그 정도 부탁이야 어렵지도 않지!”
. . .
라이언이 보고서를 쥐고 집무실에 들어섰다.
“조사 경과보고 드립니다, 아가씨.”
“저번 안건 관련인가요?”
라이언이 고갤 끄덕이자 조용히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는다. 경청의 자세를 마친 엘리자베스를 보며, 라이언이 사무적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믿기진 않지만, 진짜로 학회를 배신한 이들 같습니다. 그들이 놀이공원에 취직하기 전에, 블랙 네트워크로부터 다수의 용병을 대동해 이면세계로 다이브를 감행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라이언이 조용히 보고서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의뢰는 이터니움 채굴이었던 모양입니다만. 실제로 제출한 항해기록과 이터니움 채굴하기 위해 제출한 좌표 사이에 묘한 간극이 있더군요.”
아마 항법장치를 속였거나, 기록 자체가 가짜일 수도 있다며 라이언이 덧붙였다.
“아쉽네요. 본인들에게 물었으면 보다 확실했을 텐데.”
“아가씨 잘못은 아닙니다.”
뒤늦게 보고를 받아 요원들이 현장에 도달했을 땐, 이미 파편의 일부가 되어 껍질밖에 남지 않은 용병 일행이 그들을 맞이했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살며시 감았다.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고작 그 정도 수준의 배신자 무리가 학회에 치명적인 정보를 지니고 있었을 거 같지도 않으니까 .
“사실, 그들의 말로를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어요. 그래서 곧장 페리어를 부른 건데. 아무래도 늦은 모양이네요.”
“그렇습니까? 아, 잊을 뻔했군요. 아가씨가 따로 부탁하셨던 질문 말입니다.”
드디어, 고대하던 답변의 시간에 엘리자베스가 짐짓 태연한 척 고갤 들었다. 짙은 속눈썹 아래로 옥빛 눈동자가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라이언을 쳐다봤다.
“놀이공원에 이용된 티켓 말입니다. 녀석들은 뿌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놀이공원에서 티켓을 함부로 배포할 수 있는 직책도 아니었고요.”
“역시나.”
엘리자베스는 이제 더는 사용할 수 없게 된 티켓을 손에 쥐곤 조용히 웃었다.
“무언가 알아내셨습니까, 아가씨?”
엘리자베스의 손에서 벗어난 티켓이 팔랑팔랑 테이블 위로 살포시 안착한다.
“레지나 양은 참 솔직하네요.”
“네?”
영문을 모르는 라이언과 달리 모든 전후사정을 파악한 엘리자베스가 양손에 깍지를 끼곤 턱을 괴었다.
“사실, 저도 궁금한 게 있어서 레지나 양에게 직접 물어봤어요. 티켓을 준 자가 누구인지 말이에요.”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 창백한 여성의 모습이 그려진다.
레지나를 구하고자 몸을 던진, 학회장을 자처한 수상쩍은 여자가. 그녀의 정체에 대한 수수께끼가, 조금은 벗겨졌다. 그 겉모습 안에 어떤 괴물이 숨어 있을 진,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아티팩트는 무사히 봉인됐나요?”
“예. 새디어스가 별도의 폐쇄 구역에 봉인해두었다고 합니다. 로이 버넷의 힘이 꽤 도움이 됐다고 하더군요.”
반가운 이름이 들려, 엘리자베스의 귀가 쫑긋했다. 하지만 그녀는 태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반응했다.
“이젠 유물 관리도 익숙해진 모양이네요.”
“여전히 미숙하긴 하나, 조금씩 버넷 형님의 얼굴이 보이더군요.”
“그런가요?”
엘리자베스가 피식 웃으며 라이언에겐 보이지 않는 각도로 세워진 액자를 바라보았다.
“다행이네요.”
“….”
오랜 시간 그녀를 모셔온 노인 앞에선 뻔히 보이는 연기였으나, 그는 신사답게 모르는 척 침묵을 지켰다.
아직 미숙한 물벼룩이 과연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 옆에 설 자격이 충분한가는, 차차 확인할 수 있으니까. 시간은 많았다.
“벌써 사흘이나 흘렀네요.”
눈을 감으면, 그때 있었던 일이 지금도 현실감 넘치게 느껴진다.
밤바다가 훤히 보이는 관람차 안이었다.
요구대로 아무도 관람차에 접근시키지 않는 조건으로, 단 둘이서 관람차를 타게 된 둘은, 묘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 어떠셨나요, 로이 버넷.”
“되게 끔찍했는데.”
“마음이 일치했네요. 정말 끔찍한 하루였어요.”
로이는 조용히 시선을 관람차 바깥으로 향했다.
여기저기서 어트랙션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로이를 비롯해 여러 카운터들이 지켜낸 작은 행복이었다.
“뭐, 그래도 썩 나쁜 경험은 아녔어.”
“전 아직 부족하지만요.”
“그래?”
로이가 고갤 돌리자, 맞은편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엘리자베스가 보였다.
“너 뭐하냐?”
“로이 버넷을 보고 있는데요.”
나를? 저 좋은 경치를 내버려두고 굳이? 로이가 의문을 표했다.
“로이, 오늘 대활약을 하셨는데. 혹시 따로 포상을 바라진 않으시나요?”
“포상? 됐어. 사람 지키는 일인데 포상은 무슨. 나중에 좀 짜증나는 교회 꼬맹이 만나면 자랑할 일이 생긴 걸로 충분해. 아주 코를 납작하게 해줄 생각이거든.”
야간 개장 놀이공원을 즐긴 것만으로도, 그 빌어먹을 꼬맹이가 지을 분한 표정이 눈에 선하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지 로이가 키득거렸다.
“그런가요.”
자신과 다르게 짐짓 아쉬운 그녀의 태도에, 로이가 두 눈을 껌뻑였다.
대체 왜 저러지?
그러나 궁금증을 직접 물어보기도 전, 엘리자베스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무…!”
서로의 숨결이 닿는 거리.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로이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오른다.
이를 눈치 챈 엘리자베스가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작게 속삭인다.
“혹시 기대하셨나요?”
“윽! 야 너 홍차 폭타…ㄴ!”
쪽.
“어?”
살짝 닿았던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로이가 멍하니 그녈 쳐다봤다.
“제 나름의 포상이에요.”
조금은 부끄러운 추억이 담긴 액자를, 엘리자베스는 조용히 책상 위로 덮어버렸다.
양아치와 아가씨 -完-


거진 한 달 가까이 썼고, 퇴고하면서 지운 분량이 쪽수로 약 50페이지.
마지막 최종 단계는 사이트에 올려놓고 퇴고해서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100쪽 살짝 안 되게 쓴 듯?
글자수는 평균 1화당 8000~1만자. 대충 못해도 8만자는 썼음.
대충 라노벨 한 권에 살짝 못 미치는 정도인듯.
처음 올린 상중편 제외하고 이후 파트는 무척 난산이었음.
특히 결말로 이어가는 부분이 머리가 아팠고, 여러모로 더 쓰고 싶은 부분도 있었지만 과감히 생략하거나 자르기도 했음.
사실 쓰면서 이 둘의 행적이 제대로 달달하게 느껴졌는진 아직도 잘 모르겠음.
해당 소설 올리기 전에 올렸던 크레딧 가치 고찰이나, 이런저런 질문 글들은 대개 이 소설 쓰면서 떠오른 소재나 궁금증 해소를 위해 이것저것 뒤지거나 조사하면서 생긴 부가적인 산물.
근데 막상 작품에는 안 쓰임. 특히 식사 파트는 일부러 엘리자베스가 로이를 1ㄷ1 교육하듯 기초적인 테이블 매너부터 시작해 와인 종류, 코스 메뉴와 쓰인 재료 요리 방법까지 이것저것 다 쓰려고 자료 정리해놨었는데. 그냥 다 과감히 생략했음.
해당 작품에서 언급된 어트랙션은 대개 창작이고, 지옥의 108스핀이나 범퍼카는 주시윤이 메인3지에서 언급한 어트랙션.
그 밖에 뒤에 CG배경으로 나온 관람차, 회전목마 등을 넣은 것.
사실, 동방처럼 느슨한 2차 창작이 아니면 갠적으로 자신이 2차 창작에 안 맞다는 걸 이번 시리즈 쓰면서 절실히 깨달음.
머릿속에 잡생각이 너무 많은 거 같음.
하여튼, 그 밖에 참고한 것
침식체 도감 - 카운터사이드 채널 (arca.live)
아카데미 운동회 머신갑 부캐
카사 MMM 공식웹툰
멘지3스
외전 존메이슨
오래된 공포 유튜브
엘리자베스 로이 카케 등
